낙랑공주(고려)
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로 3비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소생이다.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혼인 후에 낙랑공주(樂浪公主)라고 고쳤고 또한 신란공주(신란궁부인)라고도 부른다.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고려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과는 동복 남매가 된다.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이어서 12월 20일 낙랑공주와 혼인하였다. 이후 경순왕은 고려 태조와 성무부인 박씨[1] 소생의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와도 혼인을 하였다. 둘은 이복 자매지간이다.
그녀들은 신라가 멸망 한 후 경순왕과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비가 될 수 없지만 경순왕의 후처이기 때문인지 신라의 왕비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신라경순왕전비'[2] 는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낙랑공주를 후비(後妃)[3] 라 적었다.
자명고 전설 중 호동왕자의 낙랑공주와는 훨씬 후대의 별개 인물이다.
2. 가족 관계
3. 자녀 등장
이 문서에선 경순왕의 자녀 중 낙랑공주 왕씨와 관련된 것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만 서술했다.
3.1. 《김은열 묘지명》
1784년 성북(城北) 십리(十里) 밖 어느 종암(鍾巖) 아래 오룡산(五龍山)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김노규가 근기(謹記)하였는데,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슬하에 8남을 더 두었다고 한다. 이들의 이름은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한다. 또 2자 '굉'(鍠)과 4자 '은열'(殷說)는 국구(國舅. 고려 현종의 장인)의 아들(즉 낙랑공주 소생)로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 일(鎰)
- 굉(鍠) -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명(鳴)
- 은열(殷說) -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중석(重錫)
- 건(鍵)
- 선(鐥)
- 종(鐘)
3.2.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1785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鐘)으로 개명하고, 4자 김은열(金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였다. 또 2자 '황'(湟)과 4자' 은열'(殷說)을 국생(國甥. 고려 태조의 사위)의 아들(낙랑공주 소생)이라 변경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및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 일(鎰)
- 굉(鍠) - 황(湟)으로 개명 -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명(鳴) -명종(鳴鍾)으로 개명
- 은열(殷說) - 보국대안군,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중석(重錫)
- 건(鍵)
- 선(鐥)
- 종(鐘)
3.3. 《묘지명》 진위 여부
《김은열 묘지명》은 그 형태에 있어 누가 기록하였는지 찬(撰)한 자도 없고, 배위(配位)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다.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했을 뿐 상세하진 않다. 자녀들 이름 또한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자녀 이름을 개명(改名)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내용을 변조(變造)하고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이러한 묘지명은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3.4. 《신라경순왕전비》
1784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1814년 후손 강릉김씨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 죽방부인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라 하며, 딸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 후비 낙랑공주의 소생으로 4남 2녀를 두었는데, 4남은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차녀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 이금서(李金書), 차녀는 장수 황씨(長水 黃氏)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1자 '일'(鎰), 2자 '굉'(鍠)(또는 황(湟)), 3자 '명'(鳴)(또는 명종(鳴鍾))을 모두 배척하고, 3자로 '영분공'(永芬公)을 추가하고, 4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또 첫째딸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를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고 기록했다는 것. 역사학계에서는 헌숙왕후 김씨도 낙랑공주 소생이라는 게 정설에 가깝지만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역사에는 경순왕이 항복 후 헌숙왕후를 경종에게 출가시키자 경종은 이를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인 상보(尙父)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고 하였다. 딸 2명을 추가하였다.[5]
- 전비 박씨 소생 (3남 1녀)
- 후비 왕씨 소생 (4남 2녀)
- 은열(殷說)
- 중석(重錫) - 석(錫)으로 개명
- 건(鍵)
- 선(鐥)
- 종(鐘) - 추(錘)로 개명
- 차녀 : 경주이씨 이금서에게 출가
- 차녀 : 장수황씨 황경에게 출가
4. 기타
작가 정비석이 금강산과 마의태자묘를 답사하면서 뜬금없이 낙랑공주와 마의태자 사이에 로맨스가 있었다는 내용을 담은 수필을 썼으며, 실제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본다.
[1] 호족 박지윤(朴智胤)의 딸[2] 1814년(조선 순조 14년)에 경주 김씨 가문에서 세운 비석이다.[3] 왕의 둘째 정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차비 문서 참고.[4]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는데, 역사학계에선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까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5]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에 또 다른 딸인 덕주공주가 나오지만 경순왕의 후손과 관련된 기록에선 나오지 않기 때문에 진짜 경순왕의 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6]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에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