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신라인설

 

1. 개요
2. 반박
2.1. 애신각라 신라 사랑설
2.2. 금사의 구절이 진실인가?
2.2.1. 부정론
2.2.2. 긍정론
2.2.3. 종합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및 기타


1. 개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인 소위 마의태자 혹은 그 후손이 신라 부흥을 위해 만주로 가서 여진족 세력들을 규합하였으며 그의 5대(?) 후손인 완안아골타금나라를 세웠다는 가설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후금/청나라 같은 왕조들은 사실은 신라인의 혈통이라는 주장.[1]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여진족이 자신들의 국가 이름을 금(金)나라라고 한 것은 금태조신라에서 온 완안함보의 후손이라고 하는 《금사(金史)》의 기록을 근거로 자신이 신라의 후예 김(金)씨라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후금(청나라)을 세운 만주족의 추장 누르하치가 자신의 성으로 삼은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 신라사랑설은 논할 가치도 없는 수준이고, 금사 함보 관련설은 '''의외로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금나라의 사서인 금사(金史)에 신라 혹은 고려에서 이주한 (말갈계로 추정되는) 완안함보가 금나라의 시조였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고려 교체기 시기 한반도에 있던 함보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려를 떠나 여진족 중 한 무리로 들어간 이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먼훗날 그의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라는 설은 학계에서도 거론되고 있지만, 문젠 이게 여진족이 신라인이라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는 것.
한편, 청태조 누르하치도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습니다"라고 제안을 한 바 있었다.[2] 그러다보니 여기서 더 나아가 여진족 자체가 중국의 한족과는 정체성이 다르고 만주원류고 등에서 자신들의 시조 중 '''일부'''가 신라에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 역시 한민족 아니냐는 좀 황당한 주장도 있는데, 한국 사학계에서는 여진족을 한민족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애초 일부의 주장일 뿐더러 설령 인정한다 치더라도, 예를 들어 현 스웨덴 왕가의 시조인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프랑스인이라고 해서 현대 스웨덴의 역사가 프랑스의 역사라고 부르긴 힘들듯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에 말도 안통하고, 한반도 국가와 동질 의식도 딱히 없었다.

2. 반박



2.1. 애신각라 신라 사랑설


'애신각라설 = 신라 사랑설'은 너무 쉽게 논파된다. 애신각라는 음역 표기일 뿐, 단어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동네에서 쓰는 '각라'는 '부족' 혹은 '겨레'라는 뜻으로 만주어로 '기오로'(Gioro)라고 읽는다. 즉, '애신각라'는 만주어로 읽으면 '아이신기오로'가 된다.
게다가 이 동네에서는 아이신기오로 외에도 이르건기오로(伊爾根覺羅, 이이근각라), 수수기오로(舒舒覺羅, 서서각라), 퉁얀기오로(通顏覺羅, 통안각라), 자무후기오로(嘉穆瑚覺羅, 가목호각라), 실린기오로(西林覺羅, 서림각라) 등의 성씨가 존재했다. 이 '각라'는 '각락(覺洛)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기도 하여, '신라'를 생각했을 가능성이 더욱 낮다.
한편 만주어 '아이신(=애신)'은 '쇠(金)'라는 뜻으로, 이는 금나라를 뜻할 가능성이 있다. 아이신기오로의 유래는 만주 시조 신화에 잘 나와있다. 금나라의 이름은 쇠가 산출되는 강이 있어서 그 강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는 기술이 있다. 링크 참고. '''즉 '애신'은 현지에서 산출되던 말 그대로의 '쇠'를 가리키고, '각라'는 '부족'을 가리킨다. 결국 의미는 '강철 씨족'이라는 뜻이며, '신라'와 관련된 뜻은 어디에도 없다.'''

2.2. 금사의 구절이 진실인가?



2.2.1. 부정론


금사》에 금 왕실의 선조가 고려인 함보(완안함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금사》 이전대의 사서인 《송막기문》과 《금지》를 보면 금 왕실의 선조가 신라인이었다는 기술도 있어 고려 기원설과 맞지 않는다. 또한 금태조인 완안아골타의 할아버지 대 위의 족보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았다. 즉, 당시까지 제대로 국가를 세워본 적이 없었던 여진 세력이 정통성의 확보를 위해서 근처에 있던 국가에서 뇌피셜로 명분을 찾아왔고, 이로 인해 작금의 혼란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반론.
마의태자 관련 설도 애초에 민간에서나 퍼진 이야기일 뿐, 정작 금나라에서 전한 이야기는 '신라에 살던 민간인 한 명이 넘어왔는데 그 양반이 우리 선조래' 하는 수준이고, 한반도쪽 정사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게다가 금사는 신라인 김일(마의태자의 이름)이 아니라 고려인 함보라고 기재하고 있다. 때문에 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에 유명했던 신라인 중 한명이 그였기 때문에 거론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건국 시조가 머나먼 땅의 왕족 후예다, 신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건 고금동서를 통틀어 흔히 볼 수 있는 주장이다. 그 동네 출신이라고 하면 사학 연구를 통해 사실 별 볼일 없는 놈이었다고 밝혀져 정통성에 타격을 입을 수 있으니까, 검증하기 어려운 머나먼 땅 고귀한 신분이라고 해서 위신을 세우는 전형적인 이야기다.

2.2.2. 긍정론


부정론에선 사서간의 차이점을 들며 사실일 가능성을 부정하지만, 《송막기문》과《금사》를 교차검증했을 때 큰 틀에서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바로 금 황실이 자기 조상이 지금의 한반도 어디쯤에서 왔다고 하는 점인데, 신라나 고려나 똑같은 한반도에서 세워진 국가였고, 전자는 신라인이라고 하고 후자는 고려에서 넘어왔다는 것은 금 황실 시조가 나말여초 시점에서 만주로 왔다고 하면 모순이 아니다.
더욱이 금은 만주 및 화북 지방을 지배했고, 한족 문물을 받아들인 어엿한 중국 왕조였기 때문에 대다수 피지배층이었던 한족에게 어필하기 위해선 자기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하는 것이 자기네들 입장에선 더 이득인데[3] 굳이 중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인 고려에서 넘어왔다고 밝힌다. 금서에서 자신들의 시조가 고려 또는 신라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원래부터 여진족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중국의 한족과는 이질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4]
또 금사는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제국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중국의 역사편찬방식에 대해서 알아야 될 것은 역대 왕조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건국된 후 이 새로운 왕조에서 과거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중국의 기본적인 정통역사서 저술방식이다. 즉,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제국이 단순히 정통성이 없는 여진족의 정통성을 만들어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실로 봤기 때문에 금사에 포함되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5] 실제 금 황실의 시조격인 완안함보가 신라나 고려에서 왔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쪽은 송나라(송막기문), 고려(고려실록), 몽골제국(금사), 그리고 금나라 스스로다. 이 중 두개는 금나라의 적대국가가 조사해서 기록한 사항일 정도로 나름 교차검증에 철저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도 금 황실 시조가 고려에서 왔다는 구절이 있다.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이 달에 생여진(生女眞) 완안부(完顔部)의 아골타(阿骨打)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旻)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그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었고 백성들은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또 문자가 없어서 입말과 결승[6]

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그 지역에는 돼지·양·소·말 등의 가축이 풍부했으며 준마가 많아 그 중에는 하루에 1천 리를 달리는 것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납고 용맹하여 아이 때부터 활로 새나 쥐 등을 쏘다가 커서는 활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서 전투기술을 익혀 강한 병사가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부락이 저마다 그 중에서 으뜸 간다고 다투는 통에 부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땅은 서쪽으로는 거란, 남쪽으로는 우리 영토와 접해 있었기 때문에, 옛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겨 왔다. 입조해올 때마다 사금(砂金)·담비 가죽·좋은 말 따위를 예물로 가져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해마다 은화를 후하게 주곤 했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혹자는, "옛날 우리 평주[7]

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족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나라의 선조."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애초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는,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했다. 고을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고, 활라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슬기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했고,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인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

- 예종 10년(1115) 을미년, 고려사 권14 사 세가

역사학계에선 출처가 다른 기록들에서 큰 줄기가 같은 동일한 이야기가 나오면 진실성이 높다고 보는데, 이러한 점을 보면 《금사》의 구절은 일단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금사에 기록된 고려인 시조설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출처는 모두 단국대학교에서 번역한 금사에서 발췌하였음.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이다. 고려에서 처음 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 세에 이르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신봉했으며, 고려에 남아 따라오지 않았다. 아고내는 말하기를 “후세 자손이 유능하다면 반드시 서로 만날 것이다. 나는 떠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오직 아우 보활리(保活里)만이 시조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 시조는 완안부의 복간수 물가에 거주했고, 보활리는 야라에 거주했다. 그 뒤 호십문이 갈소관을 태조에게 바치며 귀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조상 세 분 형제가 서로 헤어져 떠나갔는데,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 금사 본기 제1 세기/ 국역 금사 1권 31~33쪽

호십문(胡十門)은 갈소관 사람으로 아버지 달불야는 요나라를 섬겨 태위가 되었다. (중략) 호십문은 족인들을 불러 모아 모의하여 말했다.

“우리의 먼 조상의 형제 세 사람이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의 대성황제(大聖皇帝)의 할아버지는 여진으로 들어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남았다가 고려에서 요나라로 귀부하였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시조의 형 아고내(阿古迺)가 고려에 머물렀는데, 호십문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다.

- 열전 4 시조 이하 여러 아들, 종실/ 국역 금사 3권 83쪽

4년(1216년) 2월에 당시 상서성이 보고하였다.

“요동선무부사 완안해노가 말하기를, 참의관 왕회(王澮)는 일찍이 본조(本朝 금나라)가 고신(高辛 중국 한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후손인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을 계승하였으니 황제(黃帝 중국 한족의 전설적인 시조이자 신)의 후예라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서를 내려 유관부서에 물었고 장행신(張行信)은 보고하여 말하였다.

“시조실록(始祖實錄)을 살피건대 단지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일컬었을 뿐이고 고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왕회가 말한 것을 돌아보건대 다만 광망(매우 잘못된)한 언어일 뿐입니다.”

황제(금나라 선종宣宗)는 그(장행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 열전 제 45 장행신/ 국역 금사 4권 214~215쪽


2.2.3. 종합


그러나 금사 구절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여진족을 신라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시조가 설령 신라계라 치더라도 금의 역사가 한국사라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국왕 한 명 내지는 국왕 주변의 소수 친위세력들만으로 여진족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신라인으로 바뀌었을리도 없고[8][9], 추존 황제일 뿐인 함보와 실질적인 창업 군주였던 금태조는 6대(?)나 차이가 난다.
유전학적 계산으로도 신라인의 아들이 가진 신라인의 혈통은 1/2, 손자는 1/4, 증손은 1/8, 고손은 1/16으로 줄어드는 마당에 문화와 언어도 다른 상황이면 고려 사이에 어떤 혈통적인 동질감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게다가 고려는 통일신라의 후신이기는 하나 고구려의 계승을 천명하고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등 신라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다고 보긴 어려운 국가였으며, 활동 지역마저 만주한반도 중남부로 갈려 사실상 남남이었다.
실제로도 여진족이나 금나라는 당대 고려와 상당히 대립하였다. 고려도 종종 북방에 쳐들어가 예방전쟁을 수행했고, 여진도 세력이 강성해졌을 땐 되레 고려에 칭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여진족의 후신 중 하나인 만주족은 작금의 한국인이나 조선족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봐도 중국은 중화민족이라는 신종 프로파간다를 창시해서나마[10] 어쨌든 이들을 자국의 소수민족 중 일부로서 인정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이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면, 위만조선의 경우 중국에서 건너온 인물이 왕이 되어 통치했으나[11] 이를 두고 중국사의 일부로 분류하지는 않으며,[12] 남월이나 아유타야 왕국 사람들 역시 자신을 중국 민족으로 여기지는 않았다.[13] 유럽은 아예 왕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선출해 오든가, 다른 나라 왕을 공동의 왕으로 삼았던 경우도 허다했다.[14] 괜히 주류 학계에서 여진족을 한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게 아니다.해당 속설에 대해 정리한 글#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및 기타


  • 무인시대에서 아주 짤막하게 등장한다. 신라 부흥을 꿈꾸는 두두을과 그가 데리고 온, 신라 왕족의 후예인 부용이 황룡의 대업을 거론하면서 여진족 신라인 설을 언급했다. 훗날 두두을의 언급에 의하면 이의민을 새로운 황제로 내세우고 신라의 후예인 금나라의 협력을 받고자 했다는 것. 진짜로 금나라 시조가 신라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고려시대에 '그런 전승'이 존재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므로 이 정도 언급이나 발상은 고증에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다. 다만 작중 금나라는 작중 갈등요소와 사건전개를 만드는 장치로만 등장할 뿐이며, 그외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아 여진족 신라인설이 크게 비중이 큰 드라마는 아니다. 이는 두두을이 이의민을 부추기기만 했을 뿐 어떻게 대업을 이루고 또한 앞으로 올 난세를 어찌 극복할 것인지에 이의민에게 가르침을 준 적이 별로 없었기에 그런 것. 때문에 극중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두두을의 사망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다.
  • 정작 조선을 증오하는 환빠들은 이성계여진족이라고 깐다. 일명 이성계 여진족설인데 이것도 그다지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항목 참조. 다만 이 설을 차용할 경우 묘하게도 이는 다수 환빠들이 신봉하는 여진족 신라인 설에 의해 결국 이성계는 신라인으로 다시 환원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게 된다.
  • 천추태후에서 마의태자 이야기와, 천추태후김치양의 아들 이야기를 섞어서 각색했다. 신라인 문제와 고려인 문제의 언급을 각각 고려해서 나온 장면으로 보인다. 다만 해당 장면에서의 천추태후의 아들은 자신의 혈통은 고려지만 여진족과 함께 나고 자란 여진인이라고 말하기는 한다. 사실 이렇게 혈통과 정체성을 별개로 보는 것이 더 고증에 맞다.
  • 비슷하게 요나라 왕족들의 성씨인 야율씨가 고구려의 고씨였다는 유사역사학적인 이야기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유사역사학에 가까운 이야기일 뿐이다.[15] 또한 자신이 요동을 점유하던 고조선의 옛 땅에서 발흥했으며 고조선의 법 체계를 계승하고 있다는 듯이 주장하기도 했는데 아래의 만주족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부족한 역사성을 과장하기 위한 선전으로 보인다.
  • 만주원류고에서는 해당 속설을 통해 신라는 만주족의 역사일 수 있다며 자신들의 역사성을 과장하고 왜곡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만주족은 금나라가 생기기 전 "국가"라고 불릴만한 정치체계를 가지지 못해서 한족들에게 역사 콤플렉스가 존재했다는 의견이 있다.
  • 일본에서도 일본황실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가설이 존재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선동조론에 악용되었다. 다만 황실이 아니라 하타 씨 등 신라계 도래인 가문은 고대 일본에 실제로 있었다.[16] 사실 신라와 왜(일본)사이가 나쁜것과는 별개로 서로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인적, 물적교류는 많았다. 또한 호공이나 석탈해 등이 일본 열도 출신이라는 기록에 근자감(...)을 보이기도 한다.
일본천황가가 정립되기 전단계인 기원후 7~8세기 무렵에는 신라계와 백제계가 천황가를 이어갔다는 기록들이 일본서기에 두루 실려 있다. 그러나 이후 백제계가 천황가를 이루면서 잠시 진정되는 듯 하였으나 남북조 시대, 전국시대의 토요토미가와 토쿠가와가의 대립이 백제계와 신라계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가 존재하며 명치유신후 백제계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연합으로 다시금 백제계가 천황가로서 확싷라게 옹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1] 하지만 처음부터 핀트가 안맞는게, 후금/청나라는 말로만 금나라 후예를 자처했을 뿐 실상은 금나라 황실 계보와는 전혀 다른 족보다. 오히려 청나라의 경우 관우를 추존 황제로 추대했고, 심지어 남송의 장수였던 악비가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항목 참조. https://m.mk.co.kr/news/culture/view-amp/2016/12/893316 사실 네이처 지에는 청나라 황실은 몽골 태생이라는 학설도 있다. [2] 다만 사실 당시 조선이 후금을 믿지 못한 것도 있고(=원군을 핑계로 조선 꿀꺽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 원군 보내줄까 말까 간보던 명나라 눈치도 보여 거절했다.[3] 실제로 당 황실의 조상은 선비족이었음에도 당황실은 자기 조상이 노자였다고 선포했다. 허나 당 황실의 출신이 선비족(혹은 혼혈)이라는 건 공인된 사실이다. 일본의 학설이라는 입장이 있으나 일본의 중국사 연구는 중국 본토에서도 인정할 만큼 체계적이다. 또 고려의 왕씨 왕실도 당숙종이 조상이라고 구라를 친 적이 있었다.(...)[4] 다만 이 부분은 자신들과 관련이 있고, 점거한 영토에 있는 나라의 역사를 흡수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의외로 세계사에서 과거에는 여러 목적을 이유로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일제의 '''일선동조론'''만 봐도 그런 흔적을 엿볼 수 있고, 사실 여진족보다 더 관계없는 몽골계 유목민인 거란도 후술되어있듯 요사 등에서 뜬금없이 요나라 황실이 고씨 후손이었다거나 고조선처럼 기자의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는 유사역사학적인 계승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고조선도 자신들이 기자의 후예라며 중국 영토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고, 고구려도 기자를 숭배했다. 그래서 그런지 고려 역시 기자를 숭배하였으며 의외로 조선 때 기자와 더불어 단군에 대한 숭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5] 단, 과거의 기록들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설들도 있는 편이며, 몽골인들이 작성한 기록들은 좀 어이없는 기록들도 많다. [6] 각종 리그의 최종우승자를 가리는 결승전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한자로는 結繩으로서 새끼를 맺어 그 매듭에 의하여 기억 또는 의사를 소통하던 한 방법. 승(繩)자가 포승줄 할 때 그 '승'자다.[7] 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8] 당연하지만 여진족 내에도 여러 부족이 있다. 그리고 여진족은 한국의 남북국 시대에 발해가 흡수하지 못한 말갈족 중 하나인 흑수말갈에 뿌리를 두고 있다.[9] 백제의 경우 국성을 부여씨, 국호를 남부여로 칭하는 등 중앙정부 차원에서 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었지만 금나라는 황실 차원에서 인정했을 뿐, 중앙정부 차원에서 신라 계승의식을 드러낸 적이 없다.[10] 동북공정도 이 일환에서 나온 것이다.[11] 물론 위만이 중국(연나라) 출신이냐 (고)조선 출신이냐는 지금도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12] 다만 중국의 일부 어용 사학자들은 위만조선이 중화권 왕조의 속국 내지는 지방정권이었다고 보기도 한다.(...)[13] 베트남 같은 경우는 한 번은 있었는데, 중국에서 받아주지 않자 변심했다.[14] 물론 동북아시아의 국왕이란 '천명'을 받들 사람으로 여겨졌던 반면, 중근세 유럽은 국가의식·민족의식보다 혈통과 가문이 훨씬 중요한 사회였으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15] 요나라든 금나라든 이들의 조상들은 고구려의 간접지배나 복속을 받기도 했던만큼 고구려의 영향이 좀 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래서 고구려의 후손이었다며 선전하듯이 주장하기도 했으나 당연히 이는 역사성을 점거하려는 드립에 불과했다.[16] 심지어 진구황후나 오진 덴노, 소가 씨도 신라 출신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