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순성왕태후

 

'''고려의 역대 왕후'''
세조
위숙왕후

'''태조비'''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태후'''
신정왕태후
신성왕태후
정덕왕후

혜종
의화왕후
'''정종, 광종의 어머니
神明順成王太后
신명순성왕태후
'''
'''시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본관'''
충주 유씨
'''왕자'''
왕태, 왕요, 왕소, 왕정, 증통국사
'''왕녀'''
낙랑공주, 흥방공주
'''아버지'''
유긍달(劉兢達)
'''생몰연도'''
900? ~ 947?(추정)
1. 개요
2. 두 군주의 어머니
3. 창작물


1. 개요


神明順成王后
고려 태조의 제3비.
유씨, 본관충주. 후삼국시대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이며, 왕건의 호족 결혼동맹 정책에 의해 정략결혼했다. 왕건과의 혼인했던 시기는 만약 신명순성왕태후가 900년생이면 왕건의 즉위 이후가 유력하며 그 이전이라면 왕건의 즉위 전에 결혼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명왕후(神明王后)'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사정이 복잡한데, 그녀는 광종 때 '신명순성왕태후'로 추존되었다. 왕후로서의 시호는 일단 기록에 없어 원래 시호의 '왕태후'를 '왕후'로 바꿔 부르는 왕후 중 한 명으로 보이는데, 고려사에서는 간혹 '신명왕태후'로 기록된 경우(고려사 열전 종실)가 발견된다. 시호가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건데[1] 이에 대한 기록은 없고 대부분의 역사서에선 그녀를 신명순성왕태후라고 적고 있기에 처음 받은 시호가 신명왕태후였는지 확신하기엔 자료가 부족하다. 이 때문인지 2000년 이후로는 '신명왕후'보다 '신명순성왕후'로 표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2. 두 군주의 어머니


왕자 5명과 공주 2명을 낳았는데 왕건의 29명의 부인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본 사례이다. 아마도 그녀는 왕건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던 듯하며, 집안 역시 같은 호족 출신이라 해도 2대 혜종에 비해 가문의 위세가 훨씬 강했던 충주 유씨 집안이었다. 그리고 이 집안에서 다른 집안간의 혼인 결합이 엄청나게 이루어졌다.
장남인 태자 왕태(919~944 이전 추정) 별 기록이 없어 요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혼인은 했으므로 적어도 15세는 넘겨서 사망했을 것이다.
태조 왕건과 그녀 사이에서 난 차남 왕요가 고려 제3대 왕 정종이며, 특히 3남 왕소는 고려 제4대 왕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확립한 광종이다.
2대인 혜종의 재위 기간이 채 3년도 안된 탓에, 태조에 이어 국가를 정비할 역할이 그녀의 소생들한테 넘어갔고, 실제로 두 아들 모두 국가 쇄신에 진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종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반면에 광종은 초기 고려의 체제를 확립한 명군으로 평가받는 것이 차이일 뿐.
4남 왕정은 경종의 장인이 되고 사후 문원대왕으로 추존됐다.
5남은 출가승려가 되어 증통국사(證通國師)로 불렸다.
장녀 낙랑공주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에게 시집 갔다.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갔던 시기가 935~936년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낙랑공주가 왕요나 왕소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다만 요절한 왕태보다 나이가 많았는 지는 불명.
차녀 흥방공주(興芳公主)는 정덕왕후 류씨의 아들이자 이복오빠인 원장태자와 결혼하였다.

3. 창작물


  • 태조 왕건 - 전미선 : 충주 호족들의 대표격으로 나온 유긍달의 딸로 극중 이름은 '수인'이다. 왕건이 조령과 죽령에서 후백제군과 전쟁을 치를 때 유긍달의 도움을 받으며 인연을 맺었고, 난세에 가문과 세력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유긍달이 혼담을 넣으며 결국 왕건의 셋째 부인이 되었다. 유긍달은 이를 위해 철원의 궁예와 왕건의 첫째 장인인 유천궁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원을 구하기도 했다. 물론 기존에 있던 정주와 나주 부인인 장화왕후 오도영(작중 이름. 실제 이름은 아닐 수 있다)의 반응은... 극중에서는 왕건의 여러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다는 점을 통해 왕건의 총애를 많이 받은 것 같다는 설명을 하기도 했고, 이 때문에 왕건과 혼인할 때 왕건이 옛 정인인 강비를 염두에 두고 유수인이 그녀를 닮았다는 말을 했다. 이는 이후 왕건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사실.
혼인 뒤에는 철원으로 올라왔는데 유순한 캐릭터로 그려진 정주의 유씨 부인과 달리 오도영과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이때는 셋째 부인이라는 처지에서 함부로 하지 못했지만, 궁에 들어가고 또 신혜왕후가 피접을 명분으로 리타이어한 이후에는 '서로 대등한 부인의 반열에 있고, 모두 왕자를 생산했다'고 말하며 스스로 도영에게 눌릴 까닭이 없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한다.[2] 이에 자신이 낳은 아들 왕태와 도영의 아들 왕무를 놓고 장래의 왕위계승권을 다퉈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태가 요절하고 무가 정윤에 봉해지며, 도영이 왕후가 됨에 따라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둘이 화해하는 장면이 그려진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극히 우애가 좋은 장면만 보여졌다.
소설판에서는 도영이 무를 위한 기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인 태가 죽었다는 생각 때문에 화해하지 못하고 계속 갈등하게 된다. 드라마에서도 140화에서 왕태가 요절한 후 슬퍼하는 수인에게 측근인 상궁이 의심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를 믿고 수인이 왕건에게 왕무가 정윤으로 책봉된 소식에 더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후 도영이 오해를 풀려고 먼저 사과하면서 드라마에선 봉합된다. 이후 드라마에서 정쟁에서 물러난 후 새로 태어난 자식들을 몸소 돌보면서 '욕심을 버리니 이렇게 편하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이 훗날 연속으로 고려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장면.
  • 제국의 아침 - 정영숙[3] : 전작인 태조 왕건과는 극의 포커스가 달라지며 인물 역시 다르게 그려졌다. 서열상 왕후이자 혜종 즉위 이후에는 태후가 되는 장화왕후에게 대놓고 맞서지는 않지만, 전국 각지의 많은 호족들과 사돈 관계를 맺어 인맥을 구축, 이를 동원하여 세를 과시하며 나름대로 아들들의 차기 대권을 지원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딸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의 후비가 되었기에 극중에서는 경순왕(정승공)에게 '장모님'이라 불리고 있다. 정종이 즉위한 뒤에는 태후가 되었지만 조금씩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이 그려지며, 또한 정종과 광종 형제의 갈등이나 집정 왕식렴에 대한 불만 등으로 아들을 꾸중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병석에서도 정종에게 동생을 잘 대해주라고 당부했다.
  •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 박지영 : '충주원 왕후'라는 칭호로 불린다. 앞서 언급된 드라마들을 통틀어서 가장 정치적 야심이 큰 캐릭터로 그려졌다. 또한 주인공인 왕소의 인생을 불우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첫째 아들 태가 요절했는데도 인명은 재천이란 이유로 슬퍼하는 기색 없이 또다른 정략 결혼을 추진하는 왕건을 막아서려고 어린 왕소에게 칼을 들이대며 왕건에게 협박을 하다가 그만 왕소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버린 것이다. 명백한 본인 잘못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씻을 수 없는 자기 인생의 오점으로 여겨 왕소를 마치 짐짝 치우듯이 정신조차 온전치 못했던 신주원부인 강씨에게 볼모로 넘겨버렸고 그 때문에 왕소는 신주에서도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둘째 아들이자 왕소의 형인 왕요를 극진히 챙기며 그가 왕건의 뒤를 잇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왕무의 목숨을 위협하고 왕소조차도 눈엣가시처럼 취급하다가 왕소가 주관을 맡은 기우제가 성공하면서 왕소의 입지가 커지자 이를 탐탁치 않아 한다. 가족 식사에 왕소를 데리고 오며 처음으로 모성을 보여주려나 싶지만 알고보니 왕무 제거 계획에 동참시키고자 회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결국 기어이 왕요가 왕무를 제거하고 고려의 세 번째 군주가 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보았던 왕요도 사실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 때문에 왕요도 결국 오래 살지 못한다. 죽어가는 왕요를 붙들고 막내 아들인 왕정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쓰라 닦달하는 모습에 왕요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어머니를 비난하며 어머니의 뜻에 따르지 않은 채 숨을 거뒀고 그로 인하여 왕소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소가 재위에 있을 때 병으로 숨을 거두게 되는데 왕소는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후대 사람들이 자신을 어머니에게서 극진한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겠다고 말한다.

[1] 순성(順成)과 발음이 같은 순성(順聖)으로 표기된 사례도 발견되는데(고려사 세가 정종(3대), 고려사 열전 신명순성왕태후) 이는 황제의 정실부인에게 내려지던 호칭으로 쓰였다. 정종(3대) 1비 문공왕후, 경종 1비 헌숙왕후, 성종 1비 문덕왕후, 안종 1비로서의 헌정왕후, 그리고 현종 3비지만 왕태자를 낳은 원성태후가 이에 해당한다. 당나라에는 태종후 문덕황후 장손씨, 예종후 숙명황후/소성황후, 그리고 고종후 '''측천무후'''가 이 시호를 사용한다. 이외에도 조선의 태조 1비 신의왕후와 원세조 1후인 소예황후도 이 시호를 포함하지만 시기적으로 뒤의 일.[2] 거기에 아버지인 유긍달이 권력욕을 가지고 비록 가장 서열은 낮지만 기회가 없는 건 아니라며 그녀를 계속 부추기기도 했다.[3] 이후 작가의 후속작인 야인시대에는 김두한의 친할머니로 출연했다. 또 작가의 1989년 작품인 무풍지대에서는 이기붕의 부인인 박마리아 역할로 나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