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가족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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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와 같은 폭탄이 떨어지던 날
굉음 속에 엄마 잃고
누이의 고사리손 우습게 놓쳐 버렸다
술에 절은 아버지는 누이를 만난다며
봄볕 좋은 날 서둘러 가시고
홀로 억지로 붙인 이 목숨
이제사 너를 만난다니
구차히 살아온 보람이 아니겠느냐
예닐곱 먹던 젖떼기와 헤어지기 전날
비석치기하다 자빠트린 것이
팔십 평생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
보자마자 이마에 흉터부터 보자 했다
고사리 같던 손은 고목나무가 되고
포동포동하던 젖살은 그 옛날에 빠지고 없어
여기 폭삭 늙어 뵈는 할머니가 내 누이라 하네
유독 매서운 겨울을 지나
애달픈 아리랑 고개를 넘어
이제야 왔구나 이제야 만나는구나
기가 차서 두 손만 썩썩 비빈다
이북은 여그보다 춥담서
오래전에 사둔 장갑 손에 찌워주고
어떻게 핏줄은 낳고 살았는가
낯선 조카들을 보니 주책없이 눈물이 흐른다
헤어지지 맙시다 다신 헤어지지 맙시다
다 늙은 것이 애마냥 옷고름을 적신다
죽지 말고 기다리라고
내년 지 생일날 꼭 다시 보잠서
살아만 있으라고
소감이요?
심정이요?
그걸 말로 할 수 있갔소?
이보시오,
처자식 남겨두고 내려온 세월이
육십이 년이요 육십이년.
새파랄 때 내려와
팔십일곱 되었소
소감이요?
심정이요?
말로 못 하지
표현 못 하지
이별한 그 세월은
가슴에
여기 가슴에
울어도 못 풀지
죽어도 못 풀지
당신 같으면
말로 할 수 있갔소?
-제페토, <소회>(출전: 그 쇳물 쓰지 마라)
1. 개요
1945년의 남북분단과 1950년의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따로 떨어져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있던 가족 및 친지들이 서로 만나고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1985년부터 2018년까지 총 21차례 대면상봉과 7차례 화상 상봉을 통해 각각 2만 761명과 3,748명의 이산가족이 만났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이 2019년 현재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다보니 이산가족이 현재진행형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한국 전쟁 당시 생긴 실향민들의 사망으로 이산가족의 평균 수명도 낮아지고 있다.
2. 역사
2.1. 휴전협정 ~ 1970년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대한민국과 북한은 어떠한 교류나 방문도 없이 대치해왔으며 이후 북한은 테러를 시도하고 무장공비를 보내는 등 대남도발을 자행했고, 대한민국에서도 반공 성향이나 감정이 깊어져 제대로 된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1964 도쿄 올림픽에서 북한 육상국가 대표 신금단과 남하에 거주하던 아버지 신문준이 7분 남짓 만나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긴 했지만 정식합의나 교류에 의한 건 아닌, 비공식적인 접촉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그러던 와중 대한적십자사가 1971년 6.25 전쟁과 남북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실태를 확인하고자 '천만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제창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의 본회담을 개최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73년 6.23선언을 하였으나 북한과의 교류 단절 상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2.2. 1985년 첫 상봉
1984년의 남한 수해에 대해 북한에서 구호물자 제공 제의 이후 급물살을 타면서, 1985년에 가서야 서울과 평양 간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 행사가 이루어졌다. 이 고향방문단은 남북 합쳐 100명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한 행사로 이 중에서 65명이 상봉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남북관계가 또다시 얼어붙으면서 2차 행사는 제대로 논의도 못 해보고 종료되었다.
이때의 상봉은 추천을 받은 사회 유력인사들로 장기려 박사도 처음엔 포함되었다. 그러나 워낙에 대쪽같은 성격이었던 장기려 박사가 "다른 사람들과 모두 평등하게 만나는 만남이 아니라 유명인사라는 이유로 특권처럼 만나는 것이라면 만나지 않겠다"면서 북한의 납북 주장이 세계적인 신빙성을 얻을 것을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을 억지로 보내려 하자 보내면 안 돌아오겠다고 위협해서 결국 빠지게 되었다.
1996년과 1998년에 일어난 무장공비 침투사건 및 잠수함 침투사건과 1999년 1차 연평해전 등으로 남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어 긴장상태에 있었다. 다만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서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는데 출입국이 심히 까다롭기는 해도 어쨌거나 일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출, 입국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남-북한과는 달리 북한-중국과의 인적교류가 제법 있었기 때문.
2.3. 2000 남북정상회담~2010년
2000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산가족 상봉은 김대중 정부시절에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까지 순조롭게 이어져 그 당시까지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첫 이산가족 상봉 때는 추첨에서 떨어진 숱한 실향민이 운집하여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고개를 뺐다. 이땐 그야말로 전국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외신기자들까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다만 아사히 신문 등에선 겨우 100여 명 단위의 상봉은 너무 불안정하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표시했다. 또 이날 납북자 가족들의 시위도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 때 북한의 핵 개발 재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금강산에서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때부터 끊어지게 되었다가 2009년 추석 때 어렵게 이루어졌으나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은 이후로 상봉 논의나 실행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상봉논의가 있었지만 북한이 천안함 피격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계속 미루어졌다. 2010년 10월 어렵게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어 일부 이산가족들이 가족과 재회하였으나 11월 연평도 포격 사태가 발발하면서 결국 이산가족 상봉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였다. 2012년 8월에 남한이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으나 북한이 경제제재 해제와 금강산 관광재개 그리고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을 문제 삼아 이산가족 상봉을 거부함으로써 그 후 오랫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부터는 화면을 통한 상봉도 이루어졌으나 2007년 11월을 끝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4. 2014년 이후
2010년 10월 이후 3년 4개월 넘게 이루어지지 않던 이산가족상봉이 2014년 2월 20일 이루어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이루어지는 상봉이라 당첨된 이산가족들은 휠체어와 이동침대에 의지해서라도 상봉을 하겠다며 몰려들었다. 정말 이제 못 보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지라 각자 이북의 가족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고, 10년 전 돌아가신 선친의 유언장을 들고 온 사람과 부모의 장지와 기일을 적어오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명은 건강 악화로 정말 어쩔 수 없이 불참하게 되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여담으로 14년 2월에 열린 상봉행사장에 북측가족 여성복의 경우 얇디얇은 여름용 한복 같은 것을 입고 나왔다.
서부전선 포격 사건의 남북협상(8.25 합의)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약속했고 그 결과, 2015년 10월 20일부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20일 상봉은 3시 30분부터 5시 30분(북한시간 5시)까지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상봉 행사에는 남측 상봉단 96가족 389명과 북측 96가족 141명이 참가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산가족의 연령이 대부분 80대나 90대 최대는 100세 이상 최고령의 노인들이라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여서 이들이 생전에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불명이다.[1]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해도 최고령인 1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됨에 따라 이제는 2세대나 3세대들을 통해서나 만나야 하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이산가족의 존재조차 아는 이들도 없거나 드문 편이기도 하다. 특히 1세대의 자녀나 손자녀 세대인 2세대, 3세대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 겪었던 1세대들과는 달리 전쟁 경험도 없고 헤어진 가족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세대들에 비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고 해도 서로 모르거나 어색해하는 경우도 있다.
2017년 현재 북한에서는 2016년 집단 탈북한 중국의 북한식당 종업원 12명과 북송을 주장하는 탈북자 김련희의 송환을 요구하면서 이들의 송환 없이는 더 이상의 이산가족 상봉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5. 2018년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 서명된 판문점 선언에서 이번 8월 15일을 기념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자고 하였으며, 2018년 6월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광복절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로 했다. 2018년 8월 20일~26일 이산가족 상봉이 나흘동안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진행된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의 평양선언에서 명시되어 있듯이 남북은 빠른 시일 내에 금강산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남북한관계가 순풍을 타고 있는 가운데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더욱 활성화되고 규모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근본적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이다.[2] 또한 10월에 남북 적십자회담이 개최될 예정이다.
그러나 다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이산가족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3. 북한의 이산가족
북한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대상들에게 상봉 몇 달 전부터 좋은 음식을 먹이고 건강 검진을 하여 양호한 상태로 유지한다는 말이 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센 북한 입장에선 초췌한 꼴을 보이기 싫은 건 당연지사일지도. 또한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에 지명되는 대상자들은 상봉 전에 사상훈련을 받게 되며, 이는 실제로 수십 년 만에 겨우 만난 북측 가족이 하라는 가족 얘기는 안 하고 북한 체제의 우수성 등을 설파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남측 가족의 증언에서 나타난다. 또한 상봉 시에 남측에서 받은 물건 같은 것도 전부 수거해간다는 모양. 게다가 상봉 후에도 얼마 동안은 감시를 받는다고 한다는 말도 있다.
북한에서 남한의 이산가족을 찾아 상봉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북한 내에서 당 간부나 행정관료 등과 같은 권력층들이다. 애초에 북한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정보 유통이 제한적이고, 복잡한 행정 절차를 따라야 하기에 특권층 이외에는 남측의 이산가족을 상봉할 생각조차 못한다고 한다.
4. 남북 이산가족 교류 추이
연도별 남북 이산가족 교류 추이
5. 관련 문서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 햇볕정책
- 남북정상회담
- 도서 이문열'변경', 고호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 이호철 '남녘사람 북녘사람' 등
[1] 2015년 9월 기준 지난 15년 동안 이산가족이 하루 평균 12명꼴로 사망했다는 통계까지 나온 상황[2] 전면생사 확인, 서신 교환, 상설면회소, 화상 상봉 및 고향 방문까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