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영어
The Archives of the KBS Special Live Broadcast "Finding Dispersed Families"
불어
Les archives du programme spécial KBS “Retrouver les familles dispersées”
국가·위치
대한민국
소장·관리
한국방송공사(KBS)
국가기록원
한국갤럽조사연구소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15년
제작시기
1983년
[image]
''' 방송사 '''

''' 채널 '''

''' 기획·제작 '''

''' 방송 기간 '''
1983년 6월 30일 ~ 1983년 11월 14일
'''(138일, 총 453시간 45분)'''
''' 홈페이지 '''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배경: 남한 내에서의 이산가족은 왜 생겼는가
3. 프로그램 기획
4. 생방송
4.1. 6월 30일: 생방송 개시
4.2. 7월 1일~7월 10일: 긴급편성 릴레이 생방송
4.3. 7월 15일 ~ 11월 14일: 상시편성 생방송
5. 출연자들의 사연
5.1. 만세를 부른 남매
5.2. 넌 김씨가 아니야! 허씨란 말이야!
5.3. 그 외 각종 사연들
6. 방송진행자
7. 방송기술
8. 방송 외적인 사항들
8.1. 여의도 만남의 광장
8.2. 삽입곡
8.3. 해외 반응
8.4. 아이디어 제공자, 이원홍 사장
8.5. 대북 심리전?
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10. 그 외

[clearfix]

1. 개요


[image]
1950년 영등포역에서 피난 기차를 타다가 헤어진 곽만영, 곽탐실 남매가 33년 만에 재회하여 부모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를 외치며 기뻐 우는 모습. 사진이 실렸던 기사 원문 (이중현 기자[1] 촬영.영상에 나온 모습)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공식 홈페이지'''
'''그 당시의 영상이 있는 KBS 공식 유튜브 채널'''[2]
'''재외국민을 위해 영자막과 함께 업로드되는 채널'''[3]
'''30주년 특별 다큐멘터리'''
'''30주년 특별 생방송 중 상봉 영상(유철종 박사의 나레이션)'''
#1.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정수가아아-- 목놓아 울어 버린다.
#2. 부산 스튜디오의 그 40대 여자는 카메라 앞에서 까무라쳐 버렸다.
#3. 서울 스튜디오의 그 40대 남자는, 마치 미아가 된 열살짜리 아이가 길바닥에서 울듯, 이젠 얼굴을 들고 입을 벌린 채 엉엉 운다. 정숙이를 부르며.
#4. 아나운서가 그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그의 全身에는 지금 어마어마한 海溢이, 거대한 경련이 지나가고 있다.
#5. 각자 피케트를 들고 방영 차례를 기다리던 방청석의 이산가족들이 피케트를 놓고 박수를 쳐 준다.
#6. 카메라는 다시, 가슴 앞에 피케트를 내밀고 일렬횡대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맞춰지고--- 만오천이백삼번, 만오천이백사번...황해도 연백군, 함경북도 청진...형님, 누님, 여동생, 삼춘, 아버지, 어머니...
(하략)
황지우,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KBS1에서 1983년 6월 30일부터 동년 11월 14일까지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했던 프로그램. 단일 생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을 갖고 있다. 이 당시 KBS 내부 인력(아나운서, PD, 조연출, 음향, 조명 스태프 등)과 전화를 받는 대학생 아르바이트까지 합하면 이 기간 동안 동원된 인력만 1천 명에 육박한다.
'''KBS 방송 역사상 제대로 수신료 값을 한 사례를 꼽자면 반드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특히 당대 KBS는 말로는 공영방송이라고 하지만 수신료를 강제로 거두고 광고도 받으면서도 땡전뉴스로 매일같이 정권 찬양 보도를 하고, 프로그램 상당수도 미국이나 일본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배끼는 그야말로 돈이 아까운 방송사로 악명이 자자했는데,[4] 당시에는 KBS1에 광고 편성을 하던 시절이었음에도[5] 따로 광고를 편성하지 않았으며[6], 후술하는 내용에서 보듯 5일간의 특집 연속 생방송 및 이후 방송 중 각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들은 필사적으로 자기 지역에 출연한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방송에 내보내려고 했기 때문에 광고는 커녕 겨우 3분짜리 노래 한 곡 걸어놓고 아나운서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설운도는 KBS 공식 노예(...)가 되었으며, 노래가 나가는 중에도 메인 카메라는 계속해서 사람 찾는 벽보들을 한 장이라도 더 내보내기 위해 공개 홀 객석 여기저기를 훑고 다녔고 사람들은 카메라 앞으로 몰려들었다.
요즘은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남북으로 갈라진 가족들만을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헷갈리기 쉬운데, 이 프로그램은 남한 국내의, 그리고 남한과 해외의 이산가족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7][8]

2. 배경: 남한 내에서의 이산가족은 왜 생겼는가


과거 20세기 중후반의 대한민국에서는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경찰 당국이 추산한 이들 '이산가족'의 수는 약 1050만 명에 달했다. 1980년대 초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약 4천만 명이었으니 네 명 중 한명 꼴로 이산가족이 있었던 셈.
여기 소개된 이산가족들은 주로 해방 직후 해외에 나가 있던 동포들이 귀국길에 오르고, 전쟁 중 대대적으로 월남을 하는 과정에서 헤어졌거나 6.25 전쟁을 겪으며 난리 통에 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서 강제적인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온갖 종류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피난을 떠나며 사람 무리에 휩쓸리거나 공습이나[9] 포격을 피해 각자 달아나거나 하는 갖가지 사연으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전쟁 통에는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고 이것은 전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한반도에선 신문, TV, 라디오, 전화 등 '''대중매체'''라고 할 만한 것이 미약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번 헤어져버리면 서로 만날 길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인터넷만 빼면 있을 건 다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전화와 TV는 1970년대까지도 일부 계층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가의 사치품[10]이었고, 라디오는 TV에 비하면 비교적 저가라서 보급이 어느 정도 되긴 했지만 방송채널이 제한적이라 이산가족 찾기에는 그다지 많이 활용되지 못했다. 신문은 상대적으로 접하기는 쉬우나, 할애할 수 있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고, 무엇보다 당시까지만 해도 문맹인이 매우 많았기[11] 때문에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생활고로 인해 헤어졌다가 소식이 그대로 두절되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식모살이를 가거나 도회지 공장에 나간 사람들인데 심지어는 명절에 집을 찾아갔더니 가족들이 그새 이사를 가 버렸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해 그대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활성화 되지 않아 사글세를 못 내 방을 빼고 쫓겨나거나 보증금까지 까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충분히 가능했던 일들이다.
또한 당시에는 이나 누이가 시집을 가면서 출가외인개념으로 친정과 연락이 끊어지거나, 입을 덜고자 친척이나 남의 집에 양자/식모를 보내거나 아예 고아원에 보내는 일이 많았고 이 와중에 전란, 생활고, 아동학대 등으로 오갈 데가 없어져 찾고 싶어도 못 찾게 되버리는 경우도 흔했다. 실제 방송에서도 그런 이유로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례가 흔히 나온다.
이처럼 온갖 사연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당시 한국에는 넘쳐나고 있었지만, 1980년대 초의 한국은 지금과 같이 인터넷은 커녕[12] 전화보급망조차도 1권의 전화번호부로 1개 도를 아우를 정도로 정보가 원활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1983년 이전에도 이산가족들은 그나마 가장 널리 알릴 수 있는 미디어 수단인 신문을 활용하여 서로를 찾고자 했다. 구인광고란에 직접 광고를 내거나, 혹은 주요 일간지에서 가끔 추진하는 '사람 찾기' 기획을 통해 서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해 왔던 것. 그러나 신문의 경우 당시는 발행하던 지면도 적고, 사진을 지면에 넣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라 잃어버린 가족과 자신에 대한 자세한 소개 자체가 어려웠고 문맹률이 높던 시절이라 생각만큼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간혹가다 '정부에서 주민등록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행정기관이나 경찰을 통해서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에는 이게 불가능했다. 일단 주민등록 제도 자체는 일제가 전시 총동원령을 선포한 1942년에 도입해서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주민등록자료가 전부 확보돼있었다. 하지만 해방과 전쟁의 혼란통속에서 관공서가 여럿 소실되어 호적을 포함한 행정문서가 사라진 경우도 많았고, 게다가 전후 복구에도 허덕이던 당시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에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관공서를 통해서 뭘 해본다는건 힘들었다. 참고로 전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해서 정부에게 관리하기 시작한게 1968년부터이며, 주민등록증1970년에 처음 발급되었다. 게다가 주민번호가 도입된 이후에도 자료가 전산화가 안 된 상태로, 각 읍/면/동사무소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찾고자 하면 직접 자신이 발품을 팔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했다.[13]
이랬던게 1980년대 초 경찰이 보유 중인 각종 주민등록 자료들이 전산화되면서 빠른 검색이 가능해졌고, 1982년부터 치안본부에서 이산가족 희망자에 대해 이름으로 검색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은 성씨 다양성이 매우 낮아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서[14] 어지간한 희귀 성씨가 아닌 이상은 이것만으로 찾기가 어려웠다. 이 프로그램이 기획된게 1983년이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 되자마자 바로 한 것'''에 가깝다. 그만큼 가족끼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애절함이 간절했다는 뜻.

3. 프로그램 기획


휴전 30주년인 1983년 6.25 특집주간에 공영 미디어인 TV의 파급력을 이용하여 남한 안에서만이라도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을 찾아보자는 의도의 프로그램이 기획된다. KBS는 그 이전부터도 당시 냉전하에서 미수교지역이라 교류할 수 없었던 소련사할린, 중공[15] 북간도 등의 동포들과도 이산가족 라디오 방송을 알음알음 주선해 오고 있었는데, 이것을 6.25 휴전 3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에서도 추진해보자는 기획이었던 것.
그리하여 라디오를 통해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라는 기획이 6.25 주간 중에 방송되었는데 청취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TV방송을 통해서도 한 번 추진해 보자는 기획이 나왔고, '스튜디오 830'[16]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진행해서 아홉 가족을 방송에 초대했으나, 여기서는 단 한 명의 상봉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이에 자극받은 담당 PD가 이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따로 특집방송으로 편성하자는 기획안을 내놓았고, 그 결과 6월 30일이라는 애매한 날짜에 편성된 것이다. 즉 원래 이 프로그램은 단발성 6.25 전쟁 33주년(휴전 3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지금도 이런 아픔이'라는 특집방송 중 제2부에 해당되는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코너로, 1시간 30분 정도 진행한 후 마감뉴스를 내보내고 0시 30분경 그날의 방송을 종료할 예정이었다.

4. 생방송



4.1. 6월 30일: 생방송 개시


  • 방송 시각: 22:15 ~ 익일 02:43 / 방송 보기 #1 #2 #3 #4

처음에 이런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이 잘 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과연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스튜디오 830>의 확대 방식으로 120분짜리 프로그램이 나가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KBS 중앙홀에 설치된 접수대에는 상봉 신청이 쇄도했고 밤 11시쯤에는 벌써 중앙홀이 거의 꽉 찼다. 12시 15분에 끝내야 할 방송을 끝낼 수가 없어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일단 새벽 2시 30분까지 하고 이튿날 다시 하기로 했다. 이 첫날 4시간 동안에만 몰려든 신청자가 2천여 명에 달했다.

당시 KBS 기획제작 1부장 안국정의 증언. 원 출처: <한국언론 100대 특종> -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석 달 동안 전국민을 울리고 감동시킨 특종 기획, 특종 드라마'. 나남출판. 2000. p232~233.

9시 뉴스와 정규 프로그램이 끝난 10시 15분, 부조정실의 큐 사인과 함께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초기 방송포맷은 사전에 신청 받은 이산가족 중 150여 명을 공개홀에 모셔 놓고 유철종 박사와 이지연 아나운서 두 사람이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자세히 소개하는 형태였다. 또한 각 지역 국을 연결하여 지방 소재 이산가족의 사연도 소개하고, 양측 방송국에 있는 사연을 대조하여 맞을 경우 전화통화 및 지역 국 간 이원중계를 해 보는 방식이었다. 또한 그전부터 이미 이산가족찾기 사업을 벌이고 있던 적십자사[17]KBS 제1라디오, 치안본부(현 경찰청) 전자계산소를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사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의 본래 목적은 이 쪽에 가까웠다.
시청자 반응은 뜨거웠다. 메인 무대에 모신 150여 명 외에도 사전접수 단계에서 이미 800명 넘게 몰려들어 방청석까지 이산가족이 꽉 채워졌고, 이들도 소개하기 위해 손석기 아나운서를 비롯한 서브 진행자 3~4명이 투입되었다. 스튜디오에 설치해 놓은 10대의 확인 전화는 생방송을 진행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문자 그대로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방송에 고지된 10개의 회선 외에도 KBS 사무국(현 시청자본부 총무국), 나아가 781~784국으로 시작하는 KBS의 모든 전화회선이 온라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서울과 지방대도시 전화국[18]전자교환기(DDD)가 설치된 이래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방송을 보던 이산가족들은 밤 11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까지 사전 출연약속 없이 무작정 여의도 KBS 스튜디오로 몰려왔다. 유철종 MC가 '빨리 KBS로 달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에''' 언제든 나오실 수 있어요'라는 멘트를 여러 차례 했던 것도 이런 반응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산가족들은 그저 방송에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의지한 채 무작정 여의도로, 여의도로 찾아왔던 것. 정보의 소통이 부족하던 시절, 미디어의 위력은 이산가족들에게는 단비와도 같던 소식이었다.
KBS는 원래 약 1시간 30분[19] 정도로 계획되어 있던 생방송을 다음 날 새벽 2시 29분경까지 긴급 연장해서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했고, 이어서 보도본부24시[20]를 방영하며 이날 방송을 종료했다. 이 5시간 동안 한 자매의 첫 상봉을 시작으로 총 29가족이 서로 만났다. 심지어 방송을 마무리하며 총 스물여덟 가족..이라고 하는 찰나에 또 한 가족이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방송은 사전 신청자의 극히 일부만 소개할 수 있을 뿐이었고, 유철종을 비롯한 진행자들은 "정말로 사과의 말씀을 올려야 할 것 같다. 방송국 측에서도 다음 주 중으로 꼭 여기 나오신 분들을 마저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겠다"는 멘트를 하며 방송을 마쳤고, 현장 화면은 그로부터 3분간 더 이산가족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를 비춰주었다. 다음에 언제 또 방송이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21] 미처 소개를 못한 출연자들과 이산가족들이 전부 방청석에서 무대로 내려와 기를 쓰고 플래카드를 카메라 앞으로 들이미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은 5일간 밤낮으로 이어졌다. 이 5일간의 릴레이 생방송 동안 '''시청률은 78%'''를 찍었고[22] 500여 명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4.2. 7월 1일~7월 10일: 긴급편성 릴레이 생방송


'''그러나''' 날이 채 밝기도 전... 새벽 시간부터 1만여 명의 이산가족들은 KBS 본관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전날 미처 방송되지 못한 이산가족들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송국으로 달려온 이산가족들로 방송국에 등록하고자 여의도를 찾았다. 이에 본관 공개홀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프로그램 출연 및 이산가족 문의전화로 방송국의 전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KBS의 편성책임자는 다음 날인 금요일 밤에도 기존 정규편성을 취소하고 연속생방송을 하루 더 연장했다. 전날보다 회선을 5대 더 늘려 총 15대의 전화를 놓았으나 물론 이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진행자로는 전날 밤 철야를 해 가며 방송했던 유철종, 이지연, 손석기, 황인우 중계조가 이날 밤에도 계속해서 투입되었다. 당시 유철종 박사는 '''옷도 못 갈아입었다.''' 또한 KBS 뉴스파노라마와 사랑방 중계(1983~1993)를 진행하던 원종배 아나운서가 긴급 투입되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공개홀이 비좁아지자 KBS 본관 한 가운데에 있는 중앙홀[23]에 좌석을 마련하고 여의도 내에서도 이원중계를 시작했다.
특히 이날 밤에 방송을 보면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직장에 지각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고 한다.[24]
흥행대박을 직감한 KBS가 간판 에이스 아나운서들을 모두 투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철종 MC, 이지연 아나운서가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며 토요일 아침까지 방송을 하고 나자, 현실적으로 더 이상 진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40분간 뉴스 및 다른 프로그램이 잠시 나간 후 교대 진행자가 투입되었다. 그리고 이날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종일편성[25]이 가능했는데, KBS는 '''10분짜리 정오뉴스를 제외한 모든 정규프로 편성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생방송을 계속해 나갔다. 지금처럼 주5일제는 아니었으나 토요일은 '반(半) 공일(空日)'이라고 하여 오전 근무 및 오전 수업[26]만 했기 때문에 이날 시청률은 문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프로그램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한 특종인 것이었다. 당시 방송기록을 쭉 보면 큐시트가 있는 TV쇼 포맷은 이미 방송 1일차에 그 의미를 잃어버렸고 사실상 방송사고의 연속중계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혹시나 자기 혈육이 나올까봐 TV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이산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방송을 보고 있으면 예측하지 못하는 때에 갑자기 여기서 박수소리가 터지고 저기서 얼싸안고 우는 감동의 드라마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었던 것. 33년이나 묵은 한 맺힌 인간드라마에는 최소한의 큐시트도 필요 없었다. 실제로 이날 방송은 전체 방송기간을 통틀어 가장 혼란스러웠다. 당시 방송을 보면 PD들의 고성과 온갖 현장잡음이 오디오에 섞여드는데 혼돈 그 자체(...).
7월 2일과 3일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평일에 비해 많은 시청자들이 TV 앞을 지켜봤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의 방송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식사도 잠도 거른 채 KBS 앞에서 노숙하다시피 했고 진행자와 제작진들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김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방송을 진행했다. 2, 3일차는 중간 뉴스시간 총합 1시간 정도만 제외하면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저녁 7시 30분까지, 거의 21시간을 연속 방송한 셈. 이 때문에 방송국으로 나와서 이틀 밤낮을 지새운 이산가족들이 힘들어하자 부산에서는 어느 시민 한 분이 음료수 500병을 사다 돌리기도 했다.
이 문서 맨 위에 걸려 있는 만세 부르는 오누이도 이날 오후에 출연했다. 하단 항목 참조.
아래 외교부 공개 문서에서도 보듯,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이 호재를 당연히(?) 활용하고자 했는데 당대 국풍81이 억지흥행은 했지만 워낙에 평판을 말아 잡수신 탓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으니 이거만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소재거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첫 날 방송과 다르게 이날부터 오프닝과 엔딩 멘트에 다분히 북한을 압박하는 지금 보면 상당히 아스트랄함을 느낄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간다.[27] 재미있는 사실은 이날부터 오프닝과 엔딩 멘트를 진행자들이 반드시 원고 종이를 손에 들고서 읽으면서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방송작가가 써 주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28] 사실 이전에도 흥분한 출연자들 중 일부가 "김일성이 이 XXX야, 니가 민족의 아픔을 아느냐?", "저 나쁜 공산당 놈들 때문에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하며 욕설을 하는 장면이 생방송을 탄 적이 몇 번 있지만, 아무래도 이건 울분에 찬 이산가족들의 넋두리에 가까운지라...
또한 이날부터는 직업군인 출연자도 두어 명씩 등장하는데, 국방부를 통해 군부대에도 출연자를 찾으라는 협조공문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방방송국으로 달려온 부사관이 두세 명 출연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전라남도가 위수지역인 모 사단 상사이고 다른 사람은 전방에서 달려온 부사관이다. 깡통모자 전투모에 칼 각이 잡혀있고 가족들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와중에도 반드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와 기회를 준 연대장사단장에게 감사하다고 경례까지 하면서 언급하는 것은 덤... 역시 군대다.
방송이 본 궤도에 오른 7월 4일 오전 9시,[29] 방송의 오프닝+멘트+초반부 1시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 오프닝은 4일차까지 상봉했던 가족들 중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장면들만 모아놓았다.[30] 오프닝 타이틀곡은 유명 재즈가수 패티김의 노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상시편성 이후에는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으로 교체된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하는 삽입곡 항목 참조.
  • 이날 방송은 방송 직후의 아수라장[31]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KBS 본사와 각 지역방송국 간의 합이 맞춰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이전보다는 진행이 매끄러워졌다. 전날인 일요일 낮방송은 시청률 78%(!!!)를 찍은 상태였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부터 시작해서 전국의 모든 이목이 KBS1로 쏟아진 것.
  • 3~4일 정도 방송을 진행하고 나자 어느 정도 가락이 붙은(?) 지방방송국 아나운서와 제작진들이 자기 지역 국 공개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내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지역 국의 몇 번 출연자가 우리 지역의 ○○○ 씨를 찾는다고 했는데, 준비해 주시는 동안 몇 분이라도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식. 그리고 이날부터 서울 부조에 있는 PD가 사정없이 잘라버린다.
미처 소개하지 못한 8000번대(서울)부터 전날에 이어 계속 방송했다. 심지어 방송을 종료하기 위한 멘트를 하다가 말고 지역 방송국을 연결해 한 가족이 더 만나기도 했다. 이날 클로징부터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삽입곡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산가족들의 빗발친 요구로 그간 녹화된 테이프를 KBS 여의도 본사 중앙홀과 각 지역방송국 로비에서 재방영했다고 한다. '''인터넷 VOD 재방송은커녕 지역 공청 채널도 없던 시절이다.''' 또한 KBS 제1라디오(HLKA)는 TV와 별도로 이산가족 방송을 진행해서 70여 가족이 더 상봉할 수 있었다.
  • 7일자: 22:00 ~ 익일 06:15, 10:00~17:00 #1 #2 #3 #4 #5 #6
이후로 메인MC 유철종-이지연, 교대MC 김동건-신은경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날부터는 KBS 제1TV와 제1라디오에서 동시 생방송을 시작했다. '''"단파라디오를 통해 중공에서도, 쏘련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라는 깨알 같은 멘트가 인상적.[32]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타이틀과 삽입곡으로 들어오고, 방송 앞뒤로 80년대식 지금 보면 손발이 좀 오그라드는 내레이션이 붙기 시작했다...
7일차 이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33]라든가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이라든가 하는 높으신 분들이 출연하기도 했고, 이 방송에 대해 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체제선전이 대폭 강화되었다.
또한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되는 스테레오타입의 상봉(6.25 때 헤어져서 갖은 고생 끝에 혈육의 정을 나누는 상봉)은 '''생방송 화면 위에 오버레이로 전쟁 기록영화 장면을 씌우고 슬픈 BGM을 깔아주는 등''' 적극적으로 띄우려고 노력했고, 같은 이산가족이라도 전쟁 후의 생활고로 헤어졌다든가 단순 가출 사례 등은 상봉 장면이라도 대충 사실여부 및 전화번호를 묻는 식의 구색만 맞추고 냉정하게 잘랐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한 명이라도 더 내보내라고 난리치는 판국'''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사례일수도 있을 것이다, 방송이 안정화되면서는 눈물바다 대신 되레 왜 안 찾았냐고 역정부터 내거나, 서로 가는귀가 먹어 본의 아니게 만담을 하는 출연자들도 있고, 이를 보고서 방청객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장면도 간간이 나온다. 진정한 의미의 휴먼 드라마.
  • 10일~11일차: 22:00 ~ 익일 08:30, 09:00~12:00, 13:00~19:00
유철종, 이지연 MC가 밤 시간 중계를 진행하고 뉴스와 드라마가 나간 후 익일 9시부터 김동건, 신은경 조가 다음 날 낮 시간대를 진행했다.[34] 특히 이날은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KBS 본사를 위성으로 연결[35]해서 상봉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이날 위성중계를 통해서도 세 가족이 만났다. 한국에 있는 딸이 미국에 있는 엄마를 모니터 화면으로 보면서 "엄마 얼굴 한 번만 만져보자."하며 통곡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방송분. 상봉 장면은 48분 16초부터 또한 방송 말미에 윤덕수 정치부 기자가 한 번 더 등장하는데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이날 오후 예고 없이 KBS를 방문했기 때문. 전두환이 방송에 나와서 한마디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시간에 이산가족 찾는 데 방송을 1분이라도 더 할애하도록 지시했다는 식으로 업적(...)을 강조하는데 그거 리포팅 할 시간에 몇 가족 더 소개하겠다는 썩은 미소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실제 방영분 보면 리포트가 정말 길다.

4.3. 7월 15일 ~ 11월 14일: 상시편성 생방송


정부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새마을 운동과 같은 범국민적 운동으로 추진키로 하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통과됨에 따라, 기존의 KBS에 접수했던 사람들은 모두 새로 접수를 해야 했다. 접수는 각 행정단위(시, 군, 구청) 민원실과 경찰서, 여의도 KBS 본사에서 받았으며, 이들 신규접수 명단은 모두 책으로 인쇄되어 시, 군, 구청 민원실과 KBS 옆 만남의 광장[36]에서 본인과 관계자가 열람할 수 있었다.
이후 KBS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상시편성으로 전환했는데, 주로 금요일 밤부터 방송하여 주말 종일방송 릴레이를 하는 식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라디오 등을 통해서도 상시편성을 진행했다. TV의 경우 특정한 시간대를 두고 편성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며 그냥 편성 비는 시간대에는 다 집어넣었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주로 아침방송 종료 후 저녁방송을 시작하기까지, 혹은 오후 10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의 정파 시간대에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8월 15일 광복절 전후와 추석을 앞두고는 특별생방송을 사나흘간 편성하기도 했다.
모든 방송분은 비디오로 녹화되어 KBS 공개홀에서 시청할 수 있었으며 유철종 박사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릴레이 방송은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 동안 단일주제 연속 생방송'''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기네스북에 등재된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37]

5. 출연자들의 사연


생방송 과정에서 눈물겨운 에피소드가 워낙 많아서 별별 사건이 많이 일어났으며, 출연자들이 혼절해버리거나 아나운서들조차 눈물을 참지 못하는 장면도 여러 번 있었다.

5.1. 만세를 부른 남매


이 항목 맨 상단부에 있는 사진의 주인공들. 7월 3일 방송. 곽만영씨 사연 소개 장면 실제 상봉 장면
이 가족은 황해도 서흥군 신막읍에서 살았으나, 1947~1948년경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며 재산을 몰수당하고 누이 곽탐실씨가 먼저 월남해서 용산구에서 살다가 6.25가 터진 후 모든 가족이 월남했다고 한다. 그러다 1.4후퇴 당시 한강 부교를 건너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탈 때[38] 헤어진 후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39]
이 장면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논할 때 상징적 장면으로 꼭 언급된다. 당시 이 남매 중 남동생 곽만영씨는 오열하며 "어머니 아버지 다 살아 계셔! 고맙습니다, '''KBS 만세!'''"[40]를 정신없이 외쳤는데 그 와중에 "대한민국 만세!"라고도 했고, 다음날 아침 본방송의 타이틀에 나왔다. 어쨌든 KBS 찬양을 열심히 하고 있는 데다가 다른 출연자와 달리 비교적 말도 조리있게 하는 편이다.[41]
이 장면은 1983년 당시를 상징하는, 그러니까 혈연의 끈끈함, 드라마틱한 상봉, 거기에 부모님이 살아 있다는 기쁜 소식, 북한 정권의 압제와 대한민국을 찬양하는 요소 등 압축적으로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5공 시절에는 체제 선전용으로 저 장면을 많이 써먹었다. 그리고 독재정권이 무너진 1987년 이후(제6공화국)로는 좀 다른 의미로 많이 써먹었다. 어쨌든 KBS 측으로서는 자신들에게 만세를 불러주는 그림이 나오니 홍보는 톡톡히 된다.
이후 곽만영씨는 2013년에 유철종 박사, 이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30주년을 기념하는 방송에 출연해서 당시를 회고했다.

5.2. 넌 김씨가 아니야! 허씨란 말이야!


"어렸을때 있잖아요, 이발소 집에 맡겨놓고 갔었어요."/ "네 맞아요."

"날씨가 흐리구요."/ "맞아요."

"(울부짖으며)'''오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오빠!!!'''" [42]

'이산가족을 찾습니다'하면 떠오르는 명장면으로 7월 5일 오전 11시경 허현철, 허현옥씨 남매의 상봉 장면. #지역국 연결 확인장면 #인터뷰 장면과 직접 상봉 장면 두 번째는 PD가 약을 거하게 빨았다.
허씨 남매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였으며 여동생이 중간에 입양이 되었는데, 나중에 오빠가 그 집으로 찾아가보니 어딘가로 이사가버린 뒤였고 그 후로 소식이 끊긴 채 몇십년간 헤어져 살았다고 한다. 허현옥 씨는 입양 가정에서 어린 나이에 개명[43] 되면서 본명을 잊어버려 자기 이름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오빠 허현철 씨가 "넌 김씨가 아니야, 허씨란 말이야! 알아야지 이름은! 개도 자기 이름은 아는데,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살았어..." 하며 오열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44] 특히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모두들 알아야 한다고!"'''라고 하는 장면은 지금도 이산가족 찾기 홍보 방송에서 심심하면 써먹는다.
이 상봉은 제주와 대전의 지역국을 연결하여 만난 사례였는데, 방송 첫 날 허현옥(당시 출연 이름은 김정애) 씨가 화면에 소개된 것을 보고 허현철 씨가 지역방송국으로 달려온 것이었다.제주방송 첫 연결 및 허현옥 소개 장면 이튿날 허현옥 사연 소개 장면 나흘이 지난 후 가까스로 지역국을 다시 연결시켜 대조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잠깐 상봉이 이루어진 후 시간관계상 제주 쪽 출연자들 사연 소개로 마이크가 넘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KBS 서울 본사의 부조정실에서 사연소개를 뎅겅 자르고, 다시 제주와 대전을 연결하여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런데 이 방송을 담당하는 PD가 '''생방송 중에''' 전쟁 기록영상과 구슬픈 BGM을 삽입했고, 결과는 위에 쓴 대로 눈물바다. PD 입장에서는 이거 사연 팔이(...)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인터뷰를 다시 붙였던 것 같으나, 실제 연출의도 이상으로 너무나 기막힌 사연이었던 탓에 대박(?)을 친 것. 게다가 당시 방송을 진행하던 (자신도 역시 오빠를 이북에 두고 온 이산가족이었던) 이지연 아나운서가 끝내 울음을 못 참고 생방송 도중에 무대 뒤로 빠져서 울음을 터뜨렸을 정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면이자, 혈육의 정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남매는 제주도에 사는 동생이 다음날 바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택시로 대전으로 이동하여[45] 오후 5시 40분 KBS 대전방송국 사옥[46]앞에서 직접 상봉한다. 시민들의 박수갈채 속에 오빠는 동생이 탄 차가 미처 다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히고 동생은 뛰쳐나오면서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었는데, 오빠가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게. 이 기쁜 소식을 누구한테 전하면 좋으냐, 부모가 있어야 전하지!"라고 오열하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고...
허씨 남매는 이후로도 우애 좋게 잘 살면서 2013년에 유철종 박사, 이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30주년을 기념하는 방송에 출연해서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당 에피소드를 녹화한 여유만만 녹화장이 바로 30년 전 방송을 진행한 그 공개홀이라고 한다. 2019년 근황, 2020년 근황


5.3. 그 외 각종 사연들


  • 7월 3일 낮방송 중에는 급기야 #스튜디오에서 만나 얼싸안은 가족이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피난 와중에 부모의 손을 놓쳐 천애 고아가 된 뒤 식모살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온, 이제는 중년 여자가 된 딸이 가족을 찾은 뒤 "왜 나만 버렸느냐"며 울부짖자 칠순이 넘은 고령의 모친이 충격에 못 이겨 공개 홀에서 실신한 것이다.[47] 김동건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쥔 채 응급처치를 하고 의무실에서 사람을 부르고, 타 지역국 연결 중에 잠시 흘렸던 눈물을 미처 닦지 못한 광경(김동건 아나운서 자신도 이북이 고향인 실향민이다.) 등이 그대로 TV전파를 타고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또 전국이 울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 날 다른 상봉가족에게 아나운서들이 "지금 어머님께서 혈압이 있어요! 흥분을 일단 가라앉히시고..."하며 출연자들을 애써 진정시키는 장면이 나온다.[48]
  • #해당 영상 8월 27일 서울 방송국에서 출연한 김 아무개씨(인천 거주)는 부산에 사는 형과 중계로 연결되어 만났는데 이 분은 원래 자기 이름도 모르고 원래는 양부모를 찾으러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즉 이 분은 부산에서 살다가 전쟁통에 영등포의 철도 차장 집에 양자로 보내졌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양부모와도 그만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던 기구한 케이스. 이 날 방송에서는 자기 성과 이름을 되찾아 친형과 방송으로 해후했다. 즉 김씨는 본인 성부터가 김씨가 아닌 임씨였던 것이다. 위성 연결이 되고 두 형제의 얼굴이 매우 비슷한 것이 드러나자 장내가 웅성이고 친형이 "맞아. 닮았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압권이다. 헤어진 정황과 형이 기억한 동생 옆구리의 화상자국을 통해 서로가 형제임을 확인하고, 동생의 아내와 아들(형에게 조카)까지 보여주고 인사를 나눈다. 마지막에 동생이 오랜만에 만난 형에게 괜시리 부담을 안길까봐 "형님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누구한테 손 안벌리고 제 힘으로 삽니다."고 말하자 형이 "사는 건 걱정하지 말아라."면서 안심시키는 대목에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 10월 1일 방송에서는 부산에 살던 이 아무개 씨의 부인과 6살 아들이 장모의 생일 때문에 여의도로 올라갔다가[49] 아들이 여의도 광장에서 우연히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형제를 찾아낸 행운의 사례도 있었다.#2
  • 위의 주석에서 언급된 토요신문 기사에서는 세 살 난 딸을 버리고 30년을 수절하다 늦게 재혼한 부인이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찾았으나, 남편은 전쟁의 비정함만을 곱씹으며 발길을 돌린 사연도 있었다. 이 사건은 "헤어진 혈연은 다시 결합할 수 있으나, 헤어진 부부는 이미 남남이다."란 정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 박 아무개 자매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전쟁 이후 생활고로 각각 다른 집에 양녀로 보내져 헤어진 케이스인데, 이들 자매 중 한 명을 입양한 가정이 바로 시인 노천명의 집이라고 한다. [50] 이 자매는 7월 9일 방송에서 만나게 되었다.
  • 접수를 하러 왔다가 공개홀이나 여의도광장에서 딱 마주쳐 바로 만나게 된 가족도 여럿이었다. 개중 몇몇은 공개홀로 초대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이 계속 벽보를 떼 가서 아니 당신, 뭔데 자꾸 남의 걸 뗍니까 하고 보니까, 나랑 똑같은 이름들을 써놓은 플래카드를 갖고 있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만났습니다."라는 출연자도 있었다. 또 동생을 찾는 형이 벽에 벽보를 붙이고 갔는데, 20분 뒤(!)에 동생이 바로 그 아래에 형을 찾는 벽보를 붙이려다가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기절초풍하면서 상봉한 경우도 있다. 벽보가 수천 장이 넘는데 형제가 바로 위아래에 붙이게 된 것도 참 운명인 듯...
  • 사연 소개 당시 옆자리에 앉았다가 서로의 팻말이 내용이 묘하게 비슷한 것을 보고 확인 끝에 상봉하게 된 오누이도 있다.
  • 너무나 어릴 적에 헤어져 이름밖에 기억을 못 하거나 혹은 가족과 자신의 이름조차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마을에 큰 나무가 있었고, 외삼촌댁이 ○○리에 있었고"식의 추억을 기억해내는 것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고, 몸에 있는 사마귀나 종기 자국, 화상 등의 신체적 특징, 전쟁 때 입은 각종 흉터 등[51]을 서로 지역국 간 TV카메라에 보여주며 확인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얼굴만 보고도 서로 알아보는 케이스도 있다. 위의 허현철 허현옥 남매의 경우도 허현옥 씨가 오빠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빠다!'하고 중얼거리며 가슴 벅차했고(두 사람이 확실히 많이 닮기도 했다), 자신의 본명을 몰랐기 때문에 '흐린 날 이발소 집으로 입양되었다'는 사실로 서로 확신하였다. 사람의 기억력이나 나이에 따른 외모 변화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라 일어나는 일.
  • 6.25 외에도 일본이나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 직후 귀국하면서, 혹은 38선 분단 이후 월남하면서 헤어진 케이스도 상당히 있다. 특히 경기, 강원도 북쪽과 일부 황해도 쪽에 살던 가족들 중 이런 사례가 많다. 고향이 만주국 길림성이나 사할린, 화태, 또는 가라후또라고 쓰여있는 사람들을 보면 현재 시점에서는 굉장히 생경하게 느껴진다. 또한 한국지리나 국사 교과서에서 무심히 배우고 넘어가는 '시대별 인구 이동' 항목이 정확히 어떠한 비극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중에서 중국에 이산가족을 두고온 사람들은 1988년도부터 중국관광이 가능해지면서 만날수있게 되었기는 했다.
  • 아주 어릴 때 헤어진 사람들의 경우는 한국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희미하게 기억나는 일본식 이름으로 찾는 사례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데, 당연히 창씨개명의 영향이다.
  • 소개된 사연들 중에 국민방위군[52]징집된 이후 사라진 사람을 찾는다는 사연도 제법 있다. 당시 국민방위군이 겪었던 참상 수준의 실태를 생각해볼 때, 이들은 전쟁 당시에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53]
  • 여러 번 확인의 기회를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3번이나 동명이인으로 확인되어 결국 찾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 김일성에게 욕설을 퍼붓거나[54] 스튜디오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전쟁을 온몸으로 직접 겪은 세대들이라 당연히 김일성이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개중에는 김일성에게 복수하겠다고 군대에 말뚝을 박아서 상사 말년차인 출연자도 있었다.
  • 1.4 후퇴 후 서울에서 신문배달을 하다 실종된 14세 아들 이대식을 찾는 할머니가 #출연했었는데, 2015년 3월 28일자 그것이 알고싶다 '소년북파공작원 - 우리는 총알받이였다' 방송에서 밝혀낸 바로는 소년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북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종 60년 만에야 국가에선 1952년 사망한 것으로 통보했다. #기사 링크
  • 설운도가 기억하는 케이스 중에는, 방송 출연자 중 상복을 입고 온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사연인즉 출연자의 어머니께서 이산가족이라 매일같이 KBS 공개홀로 나오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는데,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혹여나 어머니가 찾으시던 가족이 나올지 몰라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것이라고.
  • 이 방송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서울 동작구에 거주 중이였던 한 노인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노인의 아들에 따르면, 노인은 1.4 후퇴 때 부인과 3남매를 북에 남겨둔 채 동생과 함께 월남하였는데, 이 방송을 지켜보며 눈물로 지내다 7월 2일 오후 5시 반쯤 말없이 밖에 나가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사연이 실렸던 기사 원문
  • 또다른 슬픈 이야기로는 링크가 있다. 삼남매의 상봉인데, 여동생이 전쟁통에 당시 기갑부대의 육군 중령(대대장인지는 확실치 않음)이던 외삼촌 집에 맡겨졌다가 배우자인 외숙모의 학대를 견디질 못해 가출, 그 길로 이산가족이 된 사례가 있다. 여동생은(등록 이름은 허신자)는 자신의 본명이 기억나지 않아 일본식 이름[55]인 '노부'로 기억하고[56] 그를 찾던 큰오빠 허씨도 '노부'라 부르는게 익숙할 정도로 어릴 적에 헤어졌다. 여동생 허씨는 졸지에 이산가족 신세로 만든 그 외숙모에 대한 울분이 30년이 지난 시점에도 가시질 않는지, 오빠에게 외숙모의 생존여부를 물은 뒤 바로 '그 개같은 년, 잡아 먹을 년' 이라며 욕을 퍼붓는 모습이 인상적이다[57]. 운좋게 피가 섞인 친척들과 있었어도 이산가족이 되어버리는 기가 막힌 상황. 이윽고 여동생 허씨가 회고하는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더욱 더 기가 막히다. 당시 부모가 일본 사람(이북사람이라 들리기도 하지만 정황상 일본)이라 쫓겨다니면서 굴(!)에서도 살다가, 오빠가 머슴으로 간 집에 같이 정착했으나 하필이면 여동생이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앓던 나머지 외숙모집에 맡겨졌던 것. 오빠의 말에 따르면 정작 외숙모가 본인이 외롭다고 수양딸로 거두고선 그렇게 때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허씨 남매 모두 그런 생고생을 딛고 대성해 자식도 갖고 가정도 꾸려 잘 살고 있다는 점 정도.
  • 일본인이 직접 스튜디오를 찾거나 서신을 보내 가족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일본 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조선, 만주국 등에서 현지 통치기관에 근무하거나 파견을 와 생활하다가 패전을 맞아 히키아게샤가 되어 귀국길에 오르는 길에서 헤어지거나 가족중 일부가 허신자 씨 남매처럼 일본계 한국인이 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경우였다.[58]

6. 방송진행자


  • 메인 진행: 유철종, 이지연, 김동건, 신은경
    • 유철종 박사: 1932년생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출신으로, 원래 기업HRD 교육 전문 강사지 KBS 아나운서가 아니다. 이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상단에 언급된 아침방송 '스튜디오 830'을 진행하던 MC였기 때문에 발탁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이 전문 진행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산가족 방송 진행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담당PD가 "평소대로 허허 웃고만 있어도 됩니다."라고 설득, 진행자로 나서게 되었던 것. 때문에 당시 아나운서들이 추구했던 '반듯함'보다는 현재의 'MC'에 가까운 푸근한 진행이 가능했고, 이 덕에 실제로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 출연진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인터뷰를 수월케 했다. 거기에 시청자들과 같이 울고 웃는 공감효과는 덤. 전문 진행자가 아니라서 가슴 아픈 장면이나 돌발 상황이 터지면 말을 잇지 못하고 '허허...'라든가 '아이구...' 같은 감탄사만 연발하는데 이것이 의외로 시청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 이지연 아나운서: 1947년생 전북 익산시 갈산동 출신으로 KBS 성우 김태연 씨의 아내이기도 하며, KBS에서 주로 활동하긴 했지만 KBS 소속 아나운서는 아니다. 1969년 이리기독교방송국(現 전북CBS)에 입사하여 1969년부터 1979년까지 기독교방송(CBS)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였으며, 언론 통폐합 때 프리랜서를 선언하였다.[59] 따라서 1983년 당시엔 프리랜서 아나운서로서 스튜디오 830을 진행하고 있었다. 현역 KBS 아나운서로 있는 이지연 아나운서와는 동명이인으로 애초에 연배부터가 현 이지연 아나운서의 아버지인 방송인 이상벽 씨와 동년배. 또한 이지연 아나운서 자신도 전쟁 중 오빠를 잃은 실제 이산가족이기도 하다. 전쟁 통에 헤어진 오빠는 이북에서 인민배우가 되었고,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서울에서 만났다고 한다.[60] 이산가족 찾기 방송 진행 덕택에 국민포장에도 여러 번 서훈되었으며, KBS 열린음악회 초기 MC를 비롯하여 이후 여러 방송에서 MC를 맡았다. 현재는 주로 노인대상 프로그램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베테랑 MC이며, KBS 제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과 NS홈쇼핑 '이지연의 명품보감'에서 MC를 맡고 있다. 더불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자 프리랜서 아나운서 중에서 최고 연장자이다.
    • 김동건 아나운서: 1939년생으로, 본인부터가 고향이 황해도 사리원인 실향민이다. 그래서 황해도가 고향인 이산가족이 말을 못 이으면 엄청 자세하게 물어본다. 해방 후 월남하여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동아방송(DBS)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1968년 동양방송(TBC)으로 이적했다. 그 후 1973년 KBS로 이적했으며[61]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명실 공히 KBS의 간판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주요 프로그램은 '11시에 만납시다'로 거의 10년 가까이 진행된 장수 프로그램이며, KBS 가요무대는 중간에 7년 공백을 제외하면 1985년부터 무려 30여 년간 진행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2003년에 가요무대 MC직을 후배 전인석에게 넘겼으나, 2010년부터 다시 KBS 가요무대를 진행 중. 그리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31년 동안 진행했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 신은경 아나운서: 1958년생으로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입사, 당시로서는 서구적인 마스크로 주목받아 일찌감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최동호 기자와 함께 KBS 9시 뉴스 평일앵커를 맡던 중이었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진행으로 화려한 커리어를 시작하여 MBC의 백지연과 함께 80년대 방송가의 여성 아나운서 지분을 양분하던 후덜덜한 경력의 소유자. 이후 1986년에 김광일과 박성범을 거치며 9시 뉴스를 진행했다가, 1987년부터 윤금자에게 평일앵커직을 넘기고 1992년까지 주말앵커에 전념했다. 1993년 유학길에 올랐다가 1995년 박성범과 결혼하여 기업인,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 서브 진행: 손석기, 황인우, 박용호, 원종배, 정미홍, 유애리, 김상준, 강성희. 황인용, 송지헌. KBS 및 TBC, DBS 등 알려진 중견급 진행자는 거의 다 투입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손석기 아나운서: 1952년생. 충북 영동 출신으로 1976년 동아방송(DBS)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언론 통폐합으로 KBS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연영과 출신 아나운서이다.(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출신) 이후 1991년 SBS 개국 당시 SBS 개국 멤버로 합류, SBS에서 스포츠 뉴스와 모닝와이드 등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1998년에는 SBS 아나운서 팀 팀장과 2000년 SBS 아나운서 팀 부국장을 역임했다.
    • 황인우 아나운서: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입사. 신은경 아나운서와는 동기. 현재도 성신여대와 SBS 방송아카데미 교수직을 맡고 있어서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비교적 익숙한 얼굴일 것이다. 그 이쁘장한 아줌마 맞다. 손석기 황인우 두 사람의 얼굴은 이날 이후로 보기 힘들어지고 목소리만 나왔다. 이산가족방송 통틀어 제일 뺑이쳤다.
    • 박용호 아나운서: KBS 박태원 아나운서의 아버지. 1990년대 KBS 제1라디오 저녁종합뉴스와 KBS1 7시 뉴스네트워크, 6시 내고향 등을 진행했고, 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인천 지역에서 당선, 정치판에도 잠시 몸담았다.
    • 원종배 아나운서: 동양방송 출신 아나운서로 언론통폐합 이후 손석기 아나운서와 마찬가지로 KBS에서 활동했다. 1970년대생까진 '사랑방중계' 진행자로 잘 알려져 있고, 1980~90년대 초반생들에게는 장학퀴즈 진행자로 기억되는 얼굴이다. 장학퀴즈가 MBC에서 EBS로 넘어갈 즈음인데, 사실 그 이전에 KBS 2TV '중학생 퀴즈'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 유애리 아나운서
    • 정미홍 아나운서: 2010년대 이후 친박/극우 활동으로 유명세를 날린 그 양반 맞다. 이 방송으로 커리어를 쌓은 후 이창호 아나운서와 함께 KBS 2TV 1988 서울 올림픽 개막식 중계를 꿰찰 정도로 성장했었다.
    • 김상준 아나운서
    • 강성희 아나운서
    • 황인용 아나운서: 과거 동양방송의 간판 아나운서였으며[62],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잠시 활동했다. 해당 방송이 방영됐을 시기에도 KBS에서 활동했다. '안녕하세요 황인용·강부자/김미화입니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프리랜서로 전환하면서 주로 MBC에서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파주 헤이리에 음악감상실을 운영하며 내레이터로 간간이 활동하고 있다.
    • 배우 강부자: 황인용 아나운서와 함께 아침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어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도 같이 진행했다. (상기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진행)
    • 송지헌 아나운서: 동아방송 출신으로, KBS 통폐합 후 아침 정보 프로그램 "생방송 전국은 지금" 등을 진행했고 이후에는 주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7. 방송기술


당시 방송시설과 장비는 일본 등 외국에서 수입하긴 했지만, 현재와 비교했을 때 매우 조악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다중 방송은커녕 지역국 간 2원 방송으로 연결하면 KBS 서울 여의도 본사 스튜디오나 다른 지역국들은 오디오만 믹싱해서 들어가고 비디오를 화면으로 띄울 수 없어 화면에서 빠져야 했다. 미국이 같은 시기 뉴스쇼에서 3곳을 동시에 연결하여 화면을 띄우고 다원방송을 할 때, 한국은 송출 중인 1개 화면 위에 반쯤 와이프 아웃[63]을 한 뒤 그 위에 다른 지역 국 송출 화면을 스크린 오버레이(screen-overlay)로 입혀 겨우 2원 방송 '흉내'나 내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서울KBS는 본관의 여의도 스튜디오[64]와 별관[65]이라는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장비의 운용 노하우는 미국과 일본에게 여전히 뒤처지던 상황이었다. 또한 방송자막은 '수파'[66]라 불리던 아날로그 텔레시네 작업이었기 때문에, 현재처럼 컴퓨터 키보드로 두들겨 금방 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단에 있는 타이틀 캡쳐에서 보듯 캘리그래피(손글씨)로 일일이 써서 스캔하거나 혹은 활자로 자막작업을 거쳐 화면에 띄워야 했다. 그래서 방송 초반 3일간은 화면에 지역 국 표시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서울과 지역국 간 수파 디자인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 폰트나 자막위치가 왔다갔다한다.

방송 초기 영상들을 보면 서울 송출화면과 지역국 송출화면 간의 화질차이가 굉장히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장비는 일본 못지않은[67] 것이었으나 지방방송국은 카메라 2~3대에 조명도 조악했기 때문에 화이트밸런스도 심도도 엉망이고, 대전 같은 곳은 대도시 지역총국인데도 불구하고 연결할 때마다 오디오 하울링이 쩔고 지방 출연자들은 이어폰을 끼고 있다.[68] 부산방송총국은 이후 본사와 같은 신식 장비로 바꾸어,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9월경부터 화질이 개선되고 이어폰 없이 출연자들을 연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 KBS 본관뿐만 아니라 각 지역방송총국을 SNG로 연결해서 생방송하는 기법도 이때 활성화되었다. 현재와 비교해볼 때 조악한 방송기술이지만, 이 당시의 난장판에 가까운 실황과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 굵직한 이벤트를 거치며 한국의 방송중계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다.

8. 방송 외적인 사항들



8.1. 여의도 만남의 광장


'''생방송 하루 만에''' KBS 본관 앞은 물론이고 여의도광장[69]은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image]
7월 1일 KBS 중앙 홀에서 밤을 새기 시작한 이산가족들은 폭주하는 신청으로 인해 KBS에서 더 이상 접수를 받지 않게 되자 스스로 벽보를 써서 KBS 본관 건물 벽과 기둥에 붙이기 시작했다. 참고로 제일 먼저 벽보를 붙인 사람은 다름아닌 위에 나온 남매 만세 상봉의 주인공 곽만영 씨.
벽보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본관의 손닿는 부분까지 모두 도배되어버렸고, 심지어 KBS 기둥의 위에서 7번째까지 붙었다. KBS 건물에 창문과 환기구가 싹 사라질 정도(...) 그러면서 벽보공간은 점차 여의도광장 앞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벽보를 붙이다 말고 상봉한 운 좋은 케이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맛비를 맞아가며 바닥과 입간판에 벽보를 붙여놓거나, 혹은 직접 벽보를 앞뒤로 매달고 다니며 애타게 가족들을 찾고 있었다. 넘쳐나는 벽보들 속에 자신의 사연이 묻힐까봐 어떻게든 눈에 잘 띄기 위해 기상천외한 것들에 이름들을 써놓은 사례도 있었는데, 사연의 내용을 광고판으로 제작해 샌드위치맨 형식으로 달고 다니거나, 자신이 입은 옷에 가족들의 이름을 도배해 놓거나, 마네킹이나 허수아비를 세우거나, 쌀통을 가져오거나, 을 만들어서 날리거나, 현수막을 걸거나 심지어는 조악하게나마 직접 만든 애드벌룬을 띄운 사례[70]도 있었다 #
[image]
7월 9일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범정부 차원의 국민운동으로 전환되자 현재의 한국산업은행 부지에 '만남의 광장'을 조성하여 8월 5일 개장하였다. 만남의 광장에는 급수대와 의무시설, 이동 공중전화[71], 체신부와 철도청 출장소, 미아보호소, 지역별[72]로 섹션과 천막을 설치하고 이산가족 찾기 명부[73]를 갖다놓았다. 그외에도 변호사등 법조인들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상주하며 개명, 상속, 호적 정리 등 상봉 이후 해야 할 법적인 조치를 위한 상담 업무를 해 주었다. KBS는 11월에 방송이 종료된 후에도 이 '만남의 광장'을 다음 해 여름까지 꼭 1년간 유지했으며, 그동안 사무국의 이산가족 담당 업무도 계속했다고 한다.
방송인 이상벽과 만남의 광장을 찍은 사진작가 조인환 등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벽과 바닥에 수없이 붙어 있는 종이가 어느 한 장 남이 붙인 것 위에 자기 것을 덧붙이는 사람이 없었다며, 그 당시 사람들이 자기가 애타게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배려하는 마음씨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8.2. 삽입곡



대표적인 노래라면 이 두 곡이 있는데, 위 영상은 KBS 계정에서 직접 올렸다.
  • 1일차 방송에는 중간 중간에 가수들이 출연해서 가요무대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부분이 있었다. 첫 날은 현인김연자가 출연해서 애수 띤 노래를 불렀고, 아나운서들은 이 사이에 잠깐 쉬면서 PD의 지시를 전달받거나 하는 일종의 브릿지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 의도는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제작진들은 곧 알 수 있었는데, 사연들이 소개되면서 방청객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던 것.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 또한 이산가족이니... 게다가 2일차로 넘어가면서 공개홀이 이산가족과 방송 제작진들, 그리고 신문기자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탓에, 김연자는 2일차에는 16시간 동안 대기하면서 노래 딱 한 곡 불렀을 뿐이었다. 이후에는 BGM만 걸어놓고 카메라워크로 방청객의 벽보를 훑는 연출만 하다가, 상시편성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다시 가수가 등장해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설운도는 이때부터 공개홀 붙박이가 되었다(...)
  • 초기 타이틀인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이 방송 이전까지는 그렇게까지 유명한 노래는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곽순옥이란 가수의 노래로, 1964년에 방영된 라디오 드라마 '남과 북'(극본: 한운사)의 주제곡이었다. 1983년 방송을 계획했던 당시에, 이 타이틀곡을 원곡가수인 곽순옥에게 맡기고자 하였으나 당시 곽순옥이 홍콩에 거주하고 있었던 관계로 그녀와 가깝게 지내던 패티김이 대신 불렀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위 영상과 같이 곽순옥 본인이 직접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여기서는 '남과 북'이라는 원래 이름으로 나온다.) 드라마 '남과 북'은 신영균, 엄앵란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신일룡, 원미경이 주연한 리메이크도 나왔다. 이후 MBC에서 90년대 초반에 박상원, 이미숙, 길용우 주연으로 리메이크되었을 때에는 원래 제목인 '남과 북' 대신 이 노래의 제목이 타이틀을 차지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뜻밖에 20년 후인 2000년대에 들어서 예능에서 뭔가 안습한 상황이 발생할 때 효과음으로 쓰이게 되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같이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 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부드러운 정열에 화사한 이
한 번 마음주면 변함이 없어
꿈 따라 임 따라 가겠노라고
내 품에 안기어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가사 전문||
  • 상시편성 이후에는 타이틀이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으로 교체된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내일일까 모레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년 세월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잃어버린 30년> 가사 전문.||
당시 26세였던 설운도는 KBS의 '신인 탄생'이란 방송을 통해 1981년 데뷔했으나 2년 가까이 무명에 가까운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설운도의 소속 회사에서 TV에서 이 방송을 보고, '이거다!' 싶어서 '아버지'라는 곡을 하루 만에 개사해서 녹음한 후에 방송국에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스케줄 표는 폭발하였고 이를 보고 가족들이 모여 울었다고 회상한다. 왜 설운도였냐고 하니 회사 측에서 하는 말이 '그때 스케줄 비어있는 가수가 설운도밖에 없었다.'고(...). 방송 초기에는 가사도 다 못 외워서 매니저가 앞에서 가사를 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설운도 본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루 종일 공개홀에서 아나운서들과 함께 기다리다가 PD가 찾으면 즉시 무대로 올라가서 큐 사인이 떨어지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 방송기간 동안 '잃어버린 30년'을 무려 천 번 정도 불렀는데, 객석에 서 있으면서 이런저런 사연도 그 자리에서 보고 듣고 같이 울고 하다 보니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도 안 나고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고...
  • 이외에도 이때다 싶었는지 대세를 편승한 많은 노래들이 발표되었다. #이 노래 이름은 제목부터 아예 '이산가족'이다.(...)[74]
이중 조영남[75]부른 우리의 소원은 정부가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추진키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당시 상시 방영되었던 프로그램의 엔딩 타이틀로 삽입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내 나라 찾는길''' 통일
이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조영남이 부른 <우리의 소원> 가사 전문. 볼드체 표시한 가사가 원곡과 다르다. ||
  • 후일 KBS에서는 '잃어버린 30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을 포함하여 각종 가수들이 부른 삽입곡들을 레코드로 발매했다. 앨범 제목부터가 잃어버린 30년. 설운도는 이 앨범을 아직도 집에 모셔놓고 있다고.
[image]

8.3. 해외 반응


방송의 반응이 워낙 뜨거웠던 데다가 냉전 시대에 갖는 역사적 의미도 다분했기 때문에 미국, 일본 등 제1세계 매체에서 주요 토픽으로 다루었다. #영상보기 유네스코 출품작인 이 영상에서는 AP의 텔레타이프 타전과 미국 ABC의 7월 3일 보도, 그 외 일본 TBS 테레비의 보도가 들어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이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북한의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 장면도 들어 있다.
#이 홍보 영상에도 13분부터 ABC 뉴스 나이트라인, NHK 토요리포트 보도 장면이 들어있다. 그런데 NHK 토요리포트에서 당시 KBS 뉴스 9 오프닝을 내보내는데 '''하필 그건 NHK 뉴스센터 9시 타이틀 수파 디자인을 표절한 거였다. (...)''' NHK 관계자들이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생각해보면 안 봐도 비디오다.[76]
여파가 어찌 됐든 간에 이 방송은 1983년 9월 6일부터 사흘 간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열린 제6차 세계언론인회의에서 '1983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고, 1984년 2월 17일 가봉에서 열린 제24차 골드 머큐리 세계평화협력회의에서 방송기관으로써는 처음으로 '골드 머큐리애드 호너램 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영국 그리니치 대학교에서까지 방송용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로버트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beieve it or not)에서도 이 방송을 다루었다.

8.4. 아이디어 제공자, 이원홍 사장


해당 프로그램을 기획한 안국정 씨가 조선일보 1999년 9월 15일자 연재기획 <아듀... 20세기> -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편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해당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당시 사장인 이원홍에게서 나왔다고 증언하였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원홍 사장은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던 생존자들의 재회를 다룬 6.25 전쟁 특집 생방송 <낙동강 1300리>를 잘 만들었다고 한참 칭찬했다가, 이 사장은 그에게 "남북 이산가족[77]도 그런 방식으로 TV를 통해 만나게 하면 어떨까?"라고 뜻밖의 주문을 내어 탄생된 것이다.

8.5. 대북 심리전?


인터넷 매체 '통일뉴스'의 #외교문서 공개내용 보도에 따르면,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태생적으로 심리전용 기획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실제 방송내용을 복기하여 보면 이 문서는 릴레이방송이 개시된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14년 3월 26일에 비밀 해제된 외교부가 1983년도에 작성한 문서에는 본 프로그램을 대북 심리전과 안보 교육용으로 활용할 것을 각국 재외 공관에 지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 특별생방송을 기획, 진행한 KBS와 정부는 인도적 문제로 접근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외교문서 공개와 실제 방송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방송이 철저히 심리전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나, 흥행으로 인해 각 외교공관에 이산가족 찾기 컨텐츠를 체제선전 및 대외심리전용으로 활용하라는 문서가 하달된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즉 기획한 것은 아니되, 군사정권이 어떻게든 선전용으로 써먹으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방송이 궤도에 오른 뒤에는 높으신 분들과 전두환 본인이 등장할 정도였으니.
[image]
우선 연속생방송 날짜가 틀려 있다. 종일특집편성 생방송은 7월 4일까지 지속되었고, 7월 5일부터 상시편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초반 3일간은 땡전뉴스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대북심리전 뉘앙스를 풍기는 멘트를 찾아볼 수 없다.[78] 실제 멘트에서 체제선전과 심리전용으로 보이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3일차 중반부 김동건 아나운서의 진행부터인데, 1, 2일차 방송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1일차에는 언제 방송하겠다는 내용도 없이 '다음에 다시 한 번 이런 기회를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3일차까지는 '원래 이렇게 길게 방송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는 진행멘트가 여러 차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편성기획 상의 종일생방송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10일에는 아예 범국민적 운동(새마을운동 같은)으로 대한적십자사가 주관이 되어 추진하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러한 대외적 압박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1984년 한강 대홍수 당시 북측 적십자는 남측에 구호물자와 쌀을 전달하였고, 1985년에는 적십자를 통한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고향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이 성사된다. 참고로 이 당시 메인MC가 바로 김동건 아나운서.

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당국과 KBS는 프로그램 관련 기록물 전반을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키로 하였으며, 마침내 2015년 10월 9일(현지시각) 유네스코에서는 한국의 유교책판과 함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 녹화 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녹화원본 테이프들 463개뿐 아니라 그에 딸린 담당 PD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직접 작성한 신청서, 일일 방송 진행표, 큐시트, 기념 음반, 사진 등이 포함된다. 그 총 수는 2만 522건.
이로 인해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기록유산은 총 13개 항목이 되었으며 (2019년 기준 16개로 늘어남), 이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것이다. KBS는 깨알같이 이 뉴스를 다음날 아침 뉴스광장 탑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453시간 45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연속 생방송 기록이라는 특징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고발하고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낸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방송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 관련 방송기록과 필리핀 민중혁명 라디오 방송 녹음 기록물 이후로 세 번째이다.[79][80]

10. 그 외


  • 방송기간 동안 5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여의도를 찾았고, 방송에서는 100,952건이 접수되었으며 그중 53,536건이 방송되고 결과적으로는 10,187명의 사람들이 서로 만났다.
  • 이산가족이 생긴 지 30년(휴전 기준)이 지나다 보니 헤어질 때 어린이였던 사람들도 대체로 각자 가정을 이뤘는데,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보니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가족들 주변에서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 연예인 가운데에도 이산가족이 많았고, 이들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서 가족을 찾으려는 모습이 화면에 나오기도 했다. 배우 김해숙의 어머니가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김해숙과 나란히 인터뷰하기도 했다. 배우 김인문이 전화로 가족을 확인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개그맨 엄용수(현재는 KBS 희극인 협회장)는 30주년 기념 특별 방송에 출연해서 당시에 누나를 찾고 있었는데, 혹시 자기가 집에 갔을 때 누나가 방송국을 찾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식구들이 돌아가며 24시간 방송국을 지켰다고 회고했다.
  • 정부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새마을 운동과 같은 범국민적 운동으로 추진키로 하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통과됨에 따라, 당시 정부 기관이었던 철도청에서도 출장소를 설치해 가족을 찾았거나 가족을 찾고자 서울로 향하는 이산가족들을 상대로 무상 승차권 발급과 탑승 수속 등을 지원했다.
  • 의외로 만난 후에 오히려 또다시 갈라서는 경우도 많았다. 생활수준이나 사는 환경이 비슷한 이산가족끼리 만나는 경우는 그런대로 관계가 유지되지만, 가족 중 한쪽이 재혼을 했거나 극빈층으로 떨어진 경우는 오히려 집안 문제가 커져서 외려 연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전쟁의 비극.
  • 지금 기준으로 보면 놀라운 장면들이 있는데, 전두환 찬양도 그렇지만 서로 거리낌 없이 주소나 전화번호를 방송에서 공개하는 모습이 보인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없던 시절이고 인터넷이 없어서 어차피 신상털이도 못 하던 시절이긴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보기엔 저래도 되나 싶은 장면들. 또한 지금 세대들이 보면 알아듣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군 ㅇㅇ면 000번"이라고 지역이름+번호를 대는 것인데, 이 당시는 서울과 직할시(현 광역시), 일부 대도시급에만 전자교환기(DDD)가 설치되어 있었고 현재처럼 국번+전화번호 체계(ex: 02-782-4000)였으며 중소도시나 읍면지구에는 여전히 사람이 손으로 교환하는 수동교환기 방식이었다.[81]
  • 생방송이 11월 중순까지 편성된 후에도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이 몰려들어, 여의도광장에 설치되었던 '만남의 광장'은 다음해인 1984년 여름까지 유지될 정도였다고 한다.
  • 국제시장에서는 방청객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가 죄다 커다란 흰색 도화지인데, 실제로는 베이지색 혹은 연두색 마분지에 매직으로 쓴 손 글씨다. 이 실물 플래카드는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매직으로 쓴 글씨는 상당히 바래 있다. 방송기록을 본 후 실물을 보면 생각보다 종이가 작다고 느끼게 되는데, 스케치북 크기 수준밖에 안 되기 때문. 이는 가난해서 제대로 못 먹고 자란(...) 1983년 당시 한국인들과 경제발전 이후 풍족해진 21세기의 한국인 간에 명백한 신체 사이즈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방송을 보면 노인들의 경우 이 작은 마분지로도 어깨가 다 가려질 정도. 현재 남아있는 피켓들을 보면 하나같이 글씨체가 비슷비슷 하거나 행정구역이나 이름에서 오탈자가 많고 이를 고친 흔적 역시 발견되는데, 이산가족들이 제보해 주는 내용을 담당자들이 요약해서 써 주었기 때문이다.
  • 삽입곡 부분에서 서술한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은 바로 히트송 반열에 올라, 발표 후 최단기간 히트곡으로 기네스 북에 오르기도 했다.
  • 방송 한달째인 1983년 7월 30일 이산가족 3000 가족 상봉 돌파 기념 <100분쇼> 특집으로 이산가족 상봉가족과 비상봉가족을 초청하여 장충체육관에서 '잃어버린 30년 되찾은 30년'을 진행했다. 김수희, 김연자, 이은하, 조용필 등 인기가수가 출연하였으며 원로가수 현인이 출연 트로트 곡을 선곡해서 불렀다. 그 시절의 시대상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와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를 부를 때 중간에 이산가족으로 보이는 관객이 오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대 중간에 이지연 아나운서와 황인우 아나운서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허현철, 허현옥 남매를 비롯한 이산가족 상봉가족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1부, 2부
  • 후속작으로 1990년 1월에 방송됐던 <사할린의 가족을 찾습니다>가 있는데, KBS 9시 뉴스 특집으로 진행했으며, 박성범 앵커가 진행하였다. 당시 소련 사할린방송국-KBS 서울본사-대구총국 3원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 KBS에서는 추석이나 설날 때마다 이때를 회고하는 프로그램 등을 내놓는다. 2013년 5월 1일 KBS 2TV '여유만만'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3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메인 진행자였던 유철종, 이지연 MC와 출연자 중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분들 중 하나인 허현철, 허현옥 남매를 초청해 특집방송을 꾸렸다. 흥미롭게도 현재 여유만만 녹화 장으로 쓰이는 공개스튜디오는 30년 전 이산가족 찾기가 생방송으로 진행된 바로 그 장소인 KBS 본관 스튜디오 공개홀이다. 가장 최근에 방송된 프로그램은 KBS1에서 2015년 9월 25일 오전 "추석특집 만남의 강은 흐른다"이다. 이산가족 찾기 당시 대자보들을 복원해 붙여놓은 KBS 광장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실제 당시에 상봉한 가족들과 함께 출연은 했지만 상봉하지 못한 분들도 함께 출연했다. 연령대는 대부분 80~90 사이.

[1] 그는 이 사진을 촬영한 후 '''불과 3개월 뒤에''' 북한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하고 말았다.[2] KBS Archive 채널, 본래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영상만 있다가 2019년 'KBS Archive: 옛날티비'라는 채널로 리뉴얼되어 KBS에 보관된 아카이브 영상과 시청자가 기증한 아카이브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3] 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영상만 올라오는 것은 아니고 한국전쟁, 이산가족 관련 다른 영상들도 함께 업로드되고 있다.[4] 프로그램 표절의 경우 일본 방송 수신이 가능했던 부산이나 울산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나 언론-방송업계 종사자에게나 알려진 수준이기는 했다. 물론 언론에서 일부 기사를 내기는 했다만.[5] 자세한건 블록광고 항목 참고.[6] 1983년 6월 30일 첫 방영분의 경우 광고가 편성되었다.[7] 쉽게 말해서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을 말한다. 그러니까 '헤어진 가족을 찾습니다'로 해석하면 된다.[8] 참고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처음으로 성사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85년의 일이다.[9]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정밀폭격 기술이 없었던 당시에는 피난민도 공습의 표적이 되었다.(사람 무리가 보이면 무작정 공습을 가하던 시절이다.) 더군다나 한국과 유엔군 사이의 문화가 이질적이었고 당시 한국인들의 외국어 교육 수준 또한 낮았기 때문에 유엔군들은 빨치산과 일반 양민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었다. 오죽하면 당시 국군이 미군의 오폭을 받았을때 "We are southkorean army" 내지는 "stop fire"같은 단순한 영단어를 몰라 죽었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10] 1980년대 중반에 KBS에서 인구 센서스 통계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표준 남성을 선정했는데 아내, 두 아이와 함께 살며 '''집에 전화가 없는''' 40대 남성 가장이었다. 이 시기면 국가적으로 그렇게 푸시하던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개최가 다가온 시점임에도, 가정의 전화보급은 이때까지 완비가 요원했던 시기였다.[11] 통계청 기준 1970년 비문해율은 7%였다.# 이후 결과는 1970년이 마지막 조사여서 없다. 2020년대에 와서는 조사가 무의미하기도 하고.[12] 인터넷의 전신인 PC통신은 이 방송 2년 후인 1985년 데이콤에서 '생활정보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선보이지만, 이게 대중화되는 데도 10년이 넘게 걸렸다.[13] 주민등록 자료의 전산화는 2000년대가 되어서야 완성 되었다.[14] 한자 이름으로 동명이인 여부를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지만 당시 전산 체계는 한자를 입/출력할 수 있는 기능이 없었다.[15] 당시에는 중화민국을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합법적 정권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본토를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멸칭이자 약자인 중공(中共)이라는 명칭을 썼다.[16] 아침마당의 전신격인 프로그램으로 1987년 봄 개편 때 '가정저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1년 봄 개편 때 현재의 '아침마당'으로 바뀌었다.[17] 30여 년 동안 적십자를 통해 3천여 가족이 만났다고 한다.[18] 현재의 KT가 한국전기통신공사이던 시절의 명칭.[19] 생방송 진행 과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편성해서 최장 1시까지 연장할 계획은 있었다고 한다.[20] 현재의 KBS 뉴스라인KBS 마감뉴스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자정 종합뉴스[21] KBS 본사 차원에서 연속생방송이 결정된 것은 다음 날 낮이었다.[22] 1981년 언론통폐합 이후 (방송사가 두 개뿐이니까) '못해도 2등'이라는 나태한 의식이 팽배해 있던 80년대 KBS, 그것도 KBS1에서 이런 시청률을 기록한 건 정말 대단한 거다.[23] 현재도 남아 있는 어정쩡한 공간. 원래는 NHK 요요기센터를 건립하고 운영한 노하우를 가진 기술진들이 이를 더욱 발전시킨 설계를 적용하여 입체대도구가 한 번에 이동 가능한 6개의 스튜디오가 리볼버식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의 병크로 인하여 실무자들이 유럽에 견학하러 간 사이에 설계가 변경되어버렸고, 현재도 이곳은 로비도 아니고 홀도 아닌 어정쩡한 높이와 넓이를 지닌 공간이어서 카페 몇 개와 라디오 오픈 스튜디오가 들어와 있다. 어차피 지금은 신관 뒤에 KBS홀이 또 생기면서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24] 2002년 월드컵을 생각하면 된다.[25] 당시는 24시간 방송을 하지 않았고, 평일에는 아침 5시 30분~10시, 저녁 5시 30분~자정 전후까지 방송했고, 토요일에는 아침5시 30분~10시까지 방송한 후 3시간 정도 쉬다가 다시 낮1시부터 시작, 자정 전후까지 방송했다. 아침방송과 저녁방송의 중간에는 정파 시간이라고 하여 TV를 틀면 치직거리는 소음 외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거나, 혹은 컬러바 송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이후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오늘 오후의 방송순서'라는 자막과 함께 오후에 방송할 프로그램과 배경으로 한강 풍경 등이 나오기도 했다.) 종일방송 포맷은 일요일과 공휴일, 그리고 특별 실황중계(재난방송 등) 시에만 사용되었다. 물론 전두환의 해외순방 귀국 환영식 같은 건 짤 없이 전파낭비해가며 중계해줬다(...).[26] 놀토문화가 정착된 건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2005년부터이다.[27] 정확히는 3일차 클로징부터.[28] 진행자의 멘트에서 언급됐듯이, 방송 4~5일차 즈음이 마침 7.4 남북 공동 성명 11주년이 되는 때였다. 때가 때이니 7.4 남북공동성명을 구실삼아 대북 비난 멘트를 날릴 수 있었다.[29] 방송당일은 공교롭게도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된지 11년이 된 날이다.[30] 문서 최상단 사진 속의 오누이 상봉 장면도 나온다.[31] 유철종 MC가 훗날 실제로 이렇게 회고했다.[32] 북한에서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방송내 아나운서들의 멘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간간이 김일성 욕이나 인민군에 납치되었다는 사연 등 북측에 불리한 샤우팅이 튀어나오고, 애초에 북한은 모든 대북방송을 상대로 방해전파를 내보냈기 때문이다.[33] 당시 총재인 유창순 그 자신도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의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높으신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공개홀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34] 일요일 낮 시간대가 비는 것은 전국노래자랑 때문. 어찌 보면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도 잘라버리는 시청률 끝판 왕 국민 예능 전국노래자랑의 위엄. 참고로 이때는 송해가 사회 보기 전이다.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MC를 맡기 시작한 건 1988년부터.[35] 미국 ABC 방송국에서 지원해줬다.[36] 여의도광장이 복잡해지니 현재의 KDB산업은행 부지에 아예 '만남의 광장'을 따로 마련했다.[37] 국회방송에서 생중계한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192시간'''으로 절반도 안된다.[38] 한강 인도교는 6.25 전쟁 발발 3일째에 폭파되어 복구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고, 기차는 한강 이남까지만 운행했다.[39] 나중에 이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형제 자매 중 두 명은 예전에 별세 했다는 언급이 나온다.[40] 한국방송공사라는 정식 명칭을 정확히 불러주었다.[41] '''전두환 대통령 만세'''라고 발언한 출연자도 실제로 있었고, 나중에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출연자도 등장한다.[42] 중간에 오빠 허현철 씨가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묻혀서 잘 들리지 않는다.[43] 김정애.[44] 당시 허현철 씨의 입장에서 "동생의 성과 이름이 원래와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족보를 신경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한 평생 동생의 정보를 찾아다녔는데, 이름이 바뀌는 바람에 동생의 소식을 코빼기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보니 동생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에 한이 맺힐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45] 청주국제공항이 존재했으나 여객용으로 전환한 때는 1997년이다.[46] 당시 중구 목동에 사옥이 있던 때였고 1998년 서구 만년동으로 이전했다. 2020년 방송의 날 특집 다큐멘터리 '우리 함께, 그 기억'에서 허현철 씨가 구 사옥 자리에서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구 사옥자리는 현재 요양병원으로 바뀌었지만 송신탑은 그대로 남아 있다.[47] 다행히 응급실로 이송되어 회복되었다. #[48] 이 사건은 훗날 토요신문 1995년 4월 22일자 25면 기사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오열... 비탄... 연출 없는 '휴먼 드라마'>에서도 언급되었고 2020년 방송의 날 특집 모던코리아에서 김동건의 회고와 함께 소개되었다.[49] 본인은 경제 형편이 좋지 않아서 가지 못했다고 한다.[50] 하지만 본인이 고생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양녀라기보다 식모로 들어간 듯..[51] 어렸을 때 동생 얼굴을 돌로 찍은게 기억나 그걸 서로 이야기하는 가족도 있었다. 또 3살때 잃어버렸던 딸을 머리에 있는 흉터자국으로 찾는 가족도 있었다.[52] 주로 "제2 국민병"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있다.[53] 국민방위군은 역사상 최악의 군수비리로 악명높은 사건이라, 전투에 투입되어 적과 싸우기도 전에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54] 사실 허현철-허현옥 남매의 오빠 허현철씨 역시 감정에 복받쳐서 "여러분! 다 같이 나와 김일성을 쳐부숩시다!!"라고 절규를 한다.[55] 사실 부모가 일본 사람인지라 일본 이름이 당연할 수도 있다.[56] 사실 여동생의 이름 신자가 바로 일본 이름 노부코(信子)를 한국식 발음으로 등록한 것이다.[57] 생방이고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방송이라 작은 방송사고는 넘어갔지만 이번엔 아나운서가 놀라서 마이크를 뺏을 정도.[58] 만주국에 남은 히키아게샤 가족들도 중 일 수교가 이루어지며 상봉을 하고 일본 국적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일본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야쿠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59] 그래서 해당 방송 초기에 전주KBS대구KBS를 호출할 때 대구기독방송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60] 모든 이산가족 상봉이 그렇듯, 이지연 아나운서가 북한 측의 오빠를 상봉했을 때에도 감동적이고도 슬픈 에피소드가 존재했다. MBN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인 아궁이에서 이지연 아나운서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지연 아나운서의 오빠는 외아들로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북한에서 인민배우가 되고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이지연 아나운서를 상봉하게 된다. 상봉 초반에는 북한의 이산가족 상봉자들이 의레 그렇듯, 체제 선전과 찬양을 많이 했다고.. 그러다가 상봉 막바지에 상봉장 위의 스프링클러를 보고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신을 감시하는 감시카메라라고 생각한 듯. 이때 이지연 아나운서가 스프링클러에 대해 설명하자,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면서 부모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외아들인데 행방불명돼서 부모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냐고... 참고로 이지연은 상봉 당시의 오빠의 모습을 보고 마치 죽은 아버지가 살아온 것만 같다고..[61] 1980년 언론통폐합 때 이적한 경우가 아니다.[62] 동양방송이 언론 통폐합으로 폐국 될 때 TV/라디오 통틀어 가장 마지막 방송이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최후의 콜로 유명한 아나운서였다.[63]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장면을 바꿀 때에 한 장면이 화면에서 지워지듯이 사라지는 일.[64] 1976년 준공되어 당시로서는 겨우 7년 된 건물이었다.[65] 1980년 준공된 구 TBC 건물[66] 원래 단어 '슈퍼임포즈(superimpose)'의 줄임말 슈퍼의 일본식 발음(스파인포즈 スーパーインポーズ)이 와전된 것이다.[67] 서울올림픽을 대비해서 전부 최신식 일제 장비로 교체한 상태였다.[68] 이런 기술적 차이의 또 다른 예는 ID영상과 넥스트 영상이다. KBS 본사에서 1984년경부터 1TV와 2TV ID영상으로는 움직이는 영상화면이나 애니메이션을 내보냈는데 KBS 3TV와 지역국은 88올림픽 이후인 1990년대 초반까지 정지영상이나 스틸을 송출했었고, 이는 MBC도 마찬가지였다.[69] 현재의 여의도공원 전체가 아스팔트 광장이었다.[70] 여동생을 찾는 오빠였는데, 동생의 친구가 잡지에 실린 풍선 사진을 보고 동생에게 알려주어 상봉에 성공했다.[71] 차량형으로 전기통신공사협찬.[72] 이북 5도미수복 경기도, 미수복 강원도, 사할린, 중공, 일본 등 당시 조선인이 많이 이주했던 특정 국가가 "기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73] 비매품으로, 만남의 광장 및 각 KBS 지역국과 각 시.도청에 비치됨[74] 이 노래를 부른 전미경은 12년 후 드라마 장녹수에 삽입된 장녹수라는 노래로 유명하다.[75] 조영남황해도 평산군 출신 실향민이다.[76] 지금이야 한국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지만 당시의 한국과 일본은 비교가 힘들 정도로 경제력과 사회 발전의 속도 차이가 컸다.[77] 다만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이 프로그램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아닌 남한 내 이산가족 상봉인데 왜 이렇게 쓰여있는지는 불명. 현실적으로 남북은 북한과의 협의가 필요해 지니 아무리 공영방송이라도 독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니 일단 국내 노선으로 질러본 것일 가능성이 높다.[78] 2일차에 정치부 기자가 출연하여 남북분단 연혁을 잠깐 설명하는 장면은 있지만, 상봉장면이 계속되면서 리포트는 흐지부지된다(...).[79] 다만 이 경우에는 방송 외에도 서류, 증언 등이 함께 등재되었다. 순수하게 방송물이 주축이 되어 등재된 것은 두번째.[80] 최초의 영상물 등재는 2001년에 등재된 메트로폴리스이다. 1927년 작.[81] 그래서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이 프로그램의 송출을 위해 각 중계소에서 수고해 주시는 전기통신공사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멘트가 자막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