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듀크

 

'''네빌 듀크 (Neville Frederick Duke : 1922년 1월 11일~2007년 4월 7일)'''
1. 요약
2. 출생과 공군 입대
3. 테스트 파일럿 생활
4. 노년


1. 요약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공군에서 전투조종사로 복무하면서 에이스 파일럿이 된 군인이며, 종전 후에는 테스트 파일럿으로 수많은 시제기와 실험기를 조종했다. 그의 대표적인 비행기록은 1953년호커 헌터 전투기를 몰고 1,171 km/h의 속도 세계신기록을 수립했을 때였다.

2. 출생과 공군 입대


1922년 1월 11일에 영국 켄트주의 톤브릿지(Tonbridge)에 태어난 네빌 듀크는 쥬드 기숙사학교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소년 듀크는 18세가 되던 1940년해군 항공대에 지원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군에서 퇴짜를 맞은 그는 공군에 지원했고 서유럽을 전부 집어삼킨 나치 독일이 영국 본토를 넘보게 되자 입대 연령 제한이 낮아지면서 공군사관학교의 생도가 될수 있었다. 그랭스마우스(Grangemouth)에서 1941년 2월에 단좌기 조종 훈련 과정을 모두 수료한 그는 비긴힐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92스쿼드론에 착임했다. 그곳에서 수퍼마린 스핏파이어 Mk V를 몰게 된 네빌 소위는 하루라도 빨리 독일 공군과 싸우고 싶었지만, 연일 도버 해협을 뜨겁게 달구던 영국 본토 항공전은 이미 반년 전에 끝난 후여서 좀처럼 진짜 공중전을 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92스쿼드론의 지휘관은 해협 전투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에이스였던 아돌프 말란(Adolph Gysbert Malan : 1910~1963) 소령으로, 그 자신이 뛰어난 조종사였던 말란은 곧 새파랗게 어린 네빌 듀크가 조종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더욱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해 8월까지 간헐적으로 출격하며 2대의 Bf 109를 격추시킨 네빌 소위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있던 제112스쿼드론으로 파견을 가게 된다. 네빌 소위는 열사의 사막에 세워진 야전 비행장에 모래먼지가 풀풀 날리는 초라한 텐트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미국제 전투기인 커티스 P-40B 토마호크를 타고 비행 임무를 계속하게 된다. 600 km/h를 넘기는 눈부신 속도에 물찬 제비와도 같던 스핏파이어를 몰다가 바꿔 탄 P-40은 네빌 소위의 주특기인 고기동 전투를 펼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기종이어서, 기체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당시 영국 사막 공군이 건네받은 커티스 전투기는 무장도 빈약하고 속도도 메서슈밋보다 느렸지만 무엇보다 상승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뒤처지고 있어 같은 고도에서 교전이 벌어지더라도 독일 조종사들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 추격하는 것이 곤란했다. P-40B가 Bf 109F에 비해 앞선 부분은 익면하중이 약간 낮아서 수평 선회반경이 더 작다는 것과, 기체 구조가 튼튼하고 방탄 설비가 조금 낫다는 것 뿐이었다.
네빌 듀크는 1941년 11월 30일에 루프트바페의 정예 전투기부대인 JG 27의 뛰어난 에이스 오토 슐츠(Otto Schulz) 중위와 호각지세의 격투전을 벌이다가 격추되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며칠 후인 12월 5일에는 적기 1대를 격추시킨 후에 또다시 JG 27의 숙련된 에이스에게 피탄 당해 불시착을 했지만, 부상은 입지 않았다. 이후 112스쿼드론은 성능이 얼마간 개선되고 무장도 중기관총 6정으로 강화된 커티스 P-40D 키티호크로 운용 기종을 바꾸게 되었고, 네빌 듀크 또한 미국제 전투기에 적응이 되어 1942년 2월까지 8대를 격추하는 공을 세우고 3​​월에는 우수비행십자장(DFC)을 수훈받았다. 북아프리카에서 네빌 듀크가 마지막으로 잡은 적기는 추축국 이탈리아 공군의 피아트 CR.42 전투기와 JG 27의 Bf 109였다.
네빌 듀크는 중위로 승진한 후 전환 근무제도로 후방으로 빠져 6개월 정도 수에즈 운하 지역에서 새로운 기종인 열대 사양의 스핏파이어 V를 지급받고 훈련을 했다. 1942년 11월에 제92스쿼드론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전선으로 복귀해 1943년 2월에 비행대장이 되었고 6월까지 14대로 자신의 스코어를 늘렸다. 영국이 이집트에 새로 건설한 이집트의 아부 수에르(Abu Suweir)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73훈련비행대에서 수석 교관을 지낸 그는 1944년 3월에 이탈리아 전역에 부임하여 스핏파이어 Mk VIII로 갈아타고 참전해 5월에만 5대를 더 격추시켰다.
6월 7일에 세 번째로 적기에게 피격된 그는 브라치아노(Bracciano) 호수에 추락했지만, 미군에 의해 구출되었다. 9월 7일에 마지막 출격을 기록한 그는 전쟁 동안 486소티를 출동하면서 27대의 단독 격추와 2대의 공동 격추, 불확실 격추 1대라는 무공을 기록하고 지중해 전역에서 활동한 연합군 조종사 중에서 최다 격추를 기록한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3. 테스트 파일럿 생활


비행 그 자체의 매력에 빠진 그는 전후에 호커 사의 테스트 파일럿이 되었다. 1946년에 그는 테디 도널드슨(Edward Mortlock Donaldson : 1919~1992 / 11킬) 중령이 이끄는 영국 공군의 고속 비행대(High Speed Flight unit)에 편입되었다. 1948년 8월에 공군에서 소령 계급장을 달고 퇴역한 그는 예비역으로 돌려지는 것과 동시에 호커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임명되었고, 1951년에는 후퇴익이 달린 시제 전투기 호커 P.1081을 시험비행하던 선배 윔피 웨이드(Trevor Sidney "Wimpy" Wade : 1920~1951)가 사고로 순직하면서 수석 테스트 파일럿이 되었다. 네빌 듀크는 차세대 제트전투기인 호커 헌터의 개발에 종사하게 되었고, 1951년 7월에 원형기인 호커 P.1067의 첫 비행을 도맡았다. 1953년 9월 7일, 새빨갛게 칠해진 호커 헌터 F.3 WB188호기에 탑승한 네빌 듀크 소령은 지정된 순환코스를 돌면서 1시간 평균속도 1,171 km/h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1955년 8월에 헌터의 가벼운 기재 고장으로 인해 불시착을 시도하다가 척추를 다친 그는 병원 신세를 졌지만, 회복하고 다시 1956년 5월에 비행을 나섰다. 그러나 오랜만의 비행을 마치고 착륙하다가 충격으로 허리 부상이 악화된 그는 다시 입원해 재활 치료를 받은 후 10월에 테스트 파일럿에서 물러났다. 네빌 듀크는 1960년까지 호커 사에 남아 항공 컨설턴트를 지내다가 은퇴 후에 듀크 항공을 설립했고, 발명가이자 사업가 조지 도우티 경(George Herbert Dowty : 1901~1975)의 개인 파일럿을 맡는가 하면, 에즐리 항공기(Edgley Aircraft )와 브룩랜즈 항공기(Brooklands)의 테스트 파일럿을 겸임하기도 했다.

4. 노년


뼛속까지 조종사 기질이 스며든 네빌 듀크는 현역은 떠났더라도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며 꾸준히 경비행기를 몰면서 여러 권의 항공 관련 저술도 펴냈는데, 그 책들은 항공업계에 입문하는 이에게는 필히 읽어야만 할 도서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Test Pilot"(1953), "Sound Barrier"(1953), "Crowded Sky"(1959), 그리고 말년에 펴낸 "War Diaries of Neville Duke"(1995)가 유명하고, 음속 장벽 같은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53년에 그는 영국 항공클럽 금상을 수상하고 1993년에는 왕립 항공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2001년에는 Jeffrey Quill Medal을 수상하고 Guild of Air Pilots & Navigators 명예상도 수여받았다. 오늘날 탱미어 공군기지에는 그가 속도기록을 수립할 때 몰았던 호커 헌터가 게이트 가드로 전시되어 있다.
노후를 즐기던 그는 85살이 된 2007년에 아내 그웬돌린(Gwendoline Duke)을 자가용 경비행기에 태우고 비행하던 중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긴급 착륙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정맥류 쇼크로 인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쓰러지고 말았다. 왕년의 격추왕이었던 네빌 듀크는 곧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져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그날 밤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둔채 영원의 비행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