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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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살이 발생한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19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미군이 '''수 미상'''의 피난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U.S. soldiers killed or injured '''an unconfirmed number''' of Korean refugees in the last week of July 1950 during...(후략)

한.미 공동발표문에서 발췌

1. 개요
2. 사건 전개
3. 쟁점
3.1. 사격명령 여부
3.2. 공중폭격 여부
4. 조사결과 발표 후
5. 이후
6. 문화에서


1. 개요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학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1950년 7월 29일까지 4일간 이어졌으나 당시에는 조명되지 않다가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한-미 양국에 공론화되었다. 이후, 2000년 미국한국 두 나라는 별개의 조사단을 편성하여 실태 파악에 나섰다. 2001년 1월 12일 한, 미 양국은 조사 결과를 동시에 발표하였고 조사단 공식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결론지었다. 생존자들은 사망, 부상 또는 실종 인원을 총 248명이라 신고하였으나 조사단은 이보다는 적은 숫자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 우발적 사고인지 명령에 의한 사건인지를 놓고 미국과 피해자 간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2. 사건 전개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1]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폭격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

3. 쟁점



3.1. 사격명령 여부


사건 당시 남측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 중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 육군 병력이 숨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피난민 통제에 고심하던 미 육군 제8군은 사건 전날인 25일 저녁 주한 미대사관과 한국 정부와 함께 피난민 통제 대책회의를 실시한다. 이 회의에서 관계자들은 피난민을 "구호의 대상이 아닌 군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무초 당시 주한미대사는 회의 결과에 대하여 "차후 미국 내 논란이 걱정된다."는 서한을 작성, 보고하였다. 다음날인 26일 오전 10시, 미 육군 제8군사령부는 전 부대에 피난민이 미군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을 명령한다.[2] 사령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예하 사단장들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예하부대에 명령을 하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4][5][6] 그러나 노근리 피해자들에게 공격을 가한 미 육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7] 2대대의 전투관련 문서 중에서는 이러한 명령이 포함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아, 미 조사단은 해당부대에는 피난민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적이 없고, 그러므로 미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대신 미 조사단은 공동발표문을 통해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나이가 어리고, 훈련 및 장비가 부족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3.2. 공중폭격 여부


26일 철로로 이동중이던 피난민들에게 가해진 공중폭격에 대해, 한.미 조사단은 당시 노근리 주변에 몇 차례의 공군 작전이 수행된 사실은 있으나 피난민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는지는 해당 작전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피해자 측은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간 후, 또 다른 비행기가 나타나 폭격을 가했다."[8], '미군이 소지품 검사 이후 무전을 날렸고 이후 폭격이 시작됐다."[9]고 일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4. 조사결과 발표 후


2004년 2월 9일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같은 해 3월 5일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공포된다. 이후 피해자 가족들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현재까지 계속 중이다. 한편 공식조사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용사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 고 밝혔고 이후 AP통신을 통해 증언을 했던 참전용사들은 증언내용을 번복했다. 이후 증언자들의 사망과 연락두절, 증언거부 등으로 미군측 증언은 더 이상 나오고 있지 않다.

5. 이후


아직도 노근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서송원천 위로는 경부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영동역황간역[10] 사이에 위치한 사건 현장인 개근철교(쌍굴)에는 여전히 총탄자국 수백 개가 남아 있다(○, △표시). 철교 건너편에는 노근리 역사공원과 노근리 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방문을 원한다면 영동역에서 영동 - 황간간 농어촌버스를 타면 된다. 생각보다 자주 다니니 시간표를 확인하고 맞춰서 타면 된다.
1999년 이 사건을 조명한 AP 취재팀(최상훈, 찰스 J. 헨리, 마사 멘도자)은 2000년 탐사 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6. 문화에서


윤선애 - 노근리 하늘
노근리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투자자들과 영화사의 외면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끝내 촬영을 끝마치고 2010년 개봉하였다. 쟁쟁한 배우들이 무보수로 열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설로 유족 정은용의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사 만화가 박건웅이 <노근리 이야기>라는 만화로 그렸다. 또 다른 소설로는 이현수의 <나흘>과 김정희의 <노근리, 그 해 여름>이 있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메시아에서 알 마사히가 미국 대통령에게 심문받을때 언급한다. 이외에 미라이 학살같은 미군들이 저질렀던 대표적인 전쟁 범죄들을 언급한다.
노근리사건70주년 추모시 공모전에는 강은아의 시 <노근리의 봄>이 최우수로 당선되었다.
[1] (전략)"...인솔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미 육군 참전장병들은 마을에서 주민들을 호송했던 것은 기억하지만 지명과 날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 공동 발표문 중[2] "No repeat no refugees will be permitted to cross battle lines at any times." 청주문화방송 특집다큐멘터리. '노근리는 살아있다' 1부 내용 중[3] "All civilians seen in this area are to be considered as enemy and action taken accordingly." 1950년 7월 27일 미 육군 제25보병사단장의 명령. 출처 전동[4] "Now anyone seen is considered enemy" 1950년 7월 29일 미 육군 제1기병사단 61포병대대 전투일지. 출처 전동[5] "Any refugees approching our defense position will be considered to be En and will be disperwde(?) by all available fires including Art. 1950년 8월 17일 제25보병사단 제35보병연대 전투일지. 출처 전동[6] "No refugees to crosr the front line. Fire everyone trying to cross lines. Use discretion in case of women and children. 1950년 7월 24일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전쟁일지. 출처 전동[7] 영화 위워솔저스가 배경으로 했던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됐던 그 부대다. 리틀 빅혼 전투 당시 전멸했고, 이후 운디드니 학살을 저지른 부대이기도 하다. 그때의 전멸 때문인지 중간에 재창설된 전적이 있다.[8] 생존자 양해숙, 금초자의 증언[9] 생존자 금초자, 박선용의 증언. 이상 증언은 nogunri.net 에서 인용[10] 특히 황간역 스탬프 도안은 노근리 쌍굴 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