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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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ai Massacre (영어)
thảm sát Mỹ Lai (베트남어 慘殺美萊 참살미래)
1. 개요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8년 3월 16일에 베트남 공화국 미라이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으로, 347명[2] 에서 504명[3] 가량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모두 비무장 상태였으며 상당수가 여성, 어린이, 그리고 아기 등 비전투원이었다. 일부 여성 희생자들의 경우 집단 성폭행 및 성고문을 당했으며 가장 어린 피해자는 12세였다.[4] 22명의 미군이 해당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윌리엄 켈리 중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종신형 판결을 받았으나 1971년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으며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명목상 군사 작전 중 민간인이 희생된 것조차 아닌, 말 그대로 민간인들을 향한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학살이었다는 점에 있어 미라이 학살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불러왔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내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은 더욱 급격해졌다.
2. 배경
당시는 구정 공세 직후, 미군의 반격 작전 중이었다. 격렬했던 구정 공세를 격퇴하면서 분노한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으로 잃어버린 지역들을 빠르게 수복하며 각지에서 베트콩을 격파, 섬멸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해본 적이 없는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며 미군 역시 인명피해가 큰 상황이었다.
문제의 학살을 저지른 미합중국 육군 제23보병사단(아메리칼 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는 전선에 투입된지 불과 4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구정 공세 이후 반격작전에서만 중대원 5명이 전사한 상태였다고 한다.
한편, 이와 별개로 사단 사령부는 구정 공세로 빼앗겼던 지역에 대한 수복작전을 준비했다. 피점령지구를 되찾는 것은 군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수복대상에는 손미 마을에 포함된 미라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은 작전당시 미라이 마을을 핑크빌(Pinkville)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렀는데, 베트콩 동조자들로 의심되는 마을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퍼져있지만 23사단 참전용사 출신 작가 팀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단순히 미군 군사 지도에 시가지를 의미하는 밝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월 15일, 반격 명령을 받은 20보병연대 1대대는 작전회의를 통해 A, B 두 중대가 미라이 마을을 포위하고 C 중대가 마을로 진입하기로 했다. 베트콩 및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사살 및 체포하라는 지시가 함께 내려졌다.
3. 학살
3월 16일, C 중대가 미라이 마을로 진입했으나 이미 베트콩 및 그 동조자는 다 도망간 상태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경우 상식적으로 보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강제 소개한 다음 조사에 들어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미 육군 장병들은 가옥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남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다. 그 다음 묻지마 '''학살'''이 시작되었다."나는 미라이 지역이 썩 기분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도 '붉은 동네'라는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아서 썰렁했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어서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지뢰가 터져 사람들이 죽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미라이라는 동네 터 외에는 아무것도 공격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민이나 베트콩도 없는 상태에서 그곳은 썰렁한 마을, 벼만 촘촘히 심어 놓은 논, 폭격으로 생긴 분화구, 구제 불능의 가난만 남아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어서 부서진 가옥들을 불태우고 동굴들을 폭파시켜 버렸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9~490에서 병사 팀 오브라이언의 증언을 발췌
이 학살로 약 1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되었으며, 이중에는 도망치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추격해서 사살한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5]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도망치는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을 '''도망치는 적군 사살'''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게릴라 중엔 여성도 많았으니 그렇다 쳐도, 학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은 아이들마저 게릴라로 치부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물론 어린아이가 게릴라의 일원인 경우가 실제 있기는 했다. 철 들지도 않았을 어린 나이임에도, 주변 분위기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으로 동조하게 되어 적극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도의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상충하여 복잡한 사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학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학살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어서, 작전완료 보고 직후 도착한 증원부대가 인접한 미케 마을에서 '''또''' 학살을 저질렀다. 두 마을을 합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약 347에서 504명 사이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있는 선미 학살 박물관에는 총 504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에 있는 비석에는 504명의 이름이 다 적혀있다.
당시 미 육군 항공대의 OH-23 정찰 헬리콥터를 조종하며 상공을 비행하던 항공준사관 휴 톰슨 주니어(Hugh Thompson, Jr.)와 승무원인 상병 로렌스 콜번(기관총 사수) 및 상병 글렌 안도레타 세 명이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해서 생존한 민간인 구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C 중대와 통신으로 치고받고 싸운 톰슨 준위는 열받아서 콜번 상병에게 캘리 소대원들이 방해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고, 총기로 대치하면서 민간인 구출을 강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아이 중심으로 서너 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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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H-23은 정찰 용도의 소형 헬기였기 때문에 서너 명을 구조하는 것이 한계였다.
3.1. 폭로와 처벌
당시 23사단에 있었으며 켈리 소위의 명령을 받고 미라이 학살에 가담한 육군 병사 폴 메들로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방송에 나와 남겼다.
미라이 학살 사건은 군부의 엄격한 통제로 1년간 철저히 은폐되었다. 국방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찍은 학살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되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미라이 학살이 세상에 폭로된 1969년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지상군을 단계적으로 철수를 실행하는 시점이자, 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이 사망하는 해이기도 하다.방송 진행자: 어떤 사람들이었죠? 양민, 여자, 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캘리 소위가 와서 그랬어요. '''저들을 어째야 하는지 알지?''' 그래서 전 '예' 라고 했죠. 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소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 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 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 전 자동화기를 쐈는데, 그냥 마구 갈겼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 양민, 여자, 아이들을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내가 왜 그랬냐고요? 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전우를 잃었거든요. 정말, 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 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 어린이, 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 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 모르겠습니다.
PBS 다큐 베트남 전쟁 8화
미군은 즉시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상급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 확 쓸어버리라는 명령 등이 나왔다는 게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것은 사건 당시 현장지휘자였던 소대장 윌리엄 로우 캘리 주니어(William Laws Calley Jr; 1943. 6. 8. ~ ) 육군 보병소위 단 한 명뿐이었다. 상급부대의 명령은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은 점을 들어 관용어구 내지 오해로 넘어갔다. 부대원 증언 중에서는 학살 전 날에 이미 학살명령이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부대원과 상급 장교간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데, 실제 상급부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언급했을 가능성보다는, 부대원이 죄를 공유하기 위해 거짓증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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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정복 차림의 캘리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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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캘리.
캘리 소위는 지휘력이나 지적으로 장교로서 부적합한 인물로서, 전문대학(community college)조차 낙제한 학습 지진아였다. 이후 사회 밑바닥에서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육군에 자원입대했는데, 훈련병 시절 성적이 우수[6] 해 바로 사관후보생(Officer's Candidate)에 지원할 수 있었고 소위 계급을 달았다. 이렇듯이 개인적 자질이 의심되었고, 소대장으로서 독도법같은 기초적인 것도 잘 몰랐다고 한다. 그나마 사람이라도 좋으면 부하들이 아무 소리 안하고 잘 따르겠지만[7] 인간성도 시궁창이고 소대 내에서의 리더십이나 평판도 형편없어서 몇몇 소대원들은 캘리 소위에 대한 프래깅을 모의할 정도였다. 이런 사고뭉치 초짜 소위가 결국 초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빠질 인간은 허위진단서를 이용한 병역기피 등으로 다 빠지고 돈 없고 뒷배경 없는 청년들만 베트남전에 끌려가던 소위 빈민개병제 시절이라,[8] 그런 자가 장교 과정에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 만큼 당시 미군도 형편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장 베트남 전쟁 당시에 전사한 미국 흑인의 수가 22%인데 정작 인구 비중은 12%에 불과했다. 특히 타군 대비 인력 수요가 느는 데다 소모율도 높고 다들 지원도 기피하는 육군 보병 장교의 질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로 인해 캘리 소위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71년 리처드 닉슨 미합중국 대통령이 가택연금으로 감형시키더니,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때문에 미국이 진짜 민주주의와 자유의 나라냐며 대차게 까이는 원인이 되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캘리 자신을 희생양으로 보는 경향이 많은데, 캘리 소위 자신 역시 장교로서는 대단히 부적절한 성격의 소유자[9] 였고 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한 책임은 분명히 있었다. 단순히 높으신 분의 명령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위는 분명히 책임이 있었고 '''윗선에서 덮어줄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실지로 非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캘리가 벌인 짓 때문에 미군 장교 선발 기준이 강화되었다. 원래 미군 장교 중 Green to Gold(간부사관) 제도는 사병 시절 훈련성적을 보고 우수하면 그냥 뽑아줬으나 이게 오직 윌리엄 캘리 한 사람으로 인해 3년의 유예기간이 생겨버렸고 그 기간동안의 고과성적으로 사관후보생 지원자를 뽑도록 Green to Gold(간부사관)의 인사규정이 변경되었다. 그러니까 훈련 성적이 아니라 3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는 사병에게 사관후보생 지원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윌리엄 캘리는 Green to Gold 최악의 아웃풋이다.
4. 이후
이 사건으로 미국의 여론은 들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심화되던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북베트남은 반미선전에 적극 활용했다. 미국도 잘못한 게 명백해서 적극 반박은 못 하고, 그나마 미국 정부는 민간인 학살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단지 개별 소부대의 만행이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해명하는 정도였다.
이 사건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결국 68운동의 뒤를 이은 미라이 학살로 여론은 극단적으로 악화되어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손을 떼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10]
학살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윌리엄 캘리는 뒤늦게 참회한다고 했다. 전후 미라이 학살 20주년으로 제작된 미국 다큐멘터리에서 불명예 전역후 사업가로 변신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캘리의 모습이 나와서 파문이 일어났다.
한편, C 중대와 마찰을 빚어가며 민간인 구출에 나섰던 톰슨 준위와 두 승무원들은 1998년에 비전투 분야에서 용감한 행위를 한 육군 장병에게 수여되는 군인훈장(Soldier's Medal)을 받아 그 공로를 치하받았고, 톰슨 준위는 준사관에서 장교로 신분전환하여 육군 항공소령까지 진급 후 전역했다. 군인훈장은 명예훈장보다는 급이 몇 단계 아래인 훈장으로, 어디까지나 군인이 전투 공로가 아닌 인명구조 등의 공로로 수상할 수 있는 훈장 중 최고 명예이다. 이들 중 안도레타 상병은 미라이 학살 며칠 후 출동 중 타고 있던 헬기가 피격되어 전사한 지 오래라, 사후 추서되었다.
사건을 정리하면서 톰슨 소령에게 육해공의 항공근무자들이 모두 받을 수 있는 비행무공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또한 수여되었다, 그런데 톰슨 소령이 받은 이 훈장의 증서에 써진 내용이 가관인데, '''미군과 베트콩의 교전에 휘말려 부상당한 베트남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구출하여 미월(美越)관계에 기여하였다'''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톰슨 소령은 화가 나서 집어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후 톰슨 소령은 계속 정찰 헬리콥터 조종사로 복무하다 몇 번씩이나 격추되고 마지막 격추에서는 척추를 다쳐서 재활을 하는 도중 미 국회의원들로부터 전우들을 팔아넘긴 배신자 소리를 듣고 괴한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고생을 하다가 연금 수혜기간을 겨우 채우고 예편했다.
5. 기타
'''부사관이 소대장을 해야 하는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소대장 보직을 장교에게 맡기는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부적절한 인물을 소대장으로 임관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렇게 무능하고 악랄한 장교라는 점이다. 실제로 군대에는 소대장이 엄청나게 많다. 1개 대대만 해도 15명에 달하고[11] , 1개 연대에 100명[12] , 1개 사단에 500명에 달한다.[13] 부사관을 소대장으로 쓰고 있는 독일 연방군의 사례[14] 를 본받아야 한다며 소대장은 무조건 부사관으로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같은 소대장이라도 장교 소대장과 부사관 소대장은 임명 루트가 아예 다르다. 장교 소대장은 사관후보생 내지는 사관생도 훈련만 받고 바로 소대장으로 들어오는 반면 부사관 소대장은 일반 사병에서부터 쭉 올라오고 하다못해 병과 부사관의 신분이 분리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군조차 분대장부터 시작해 올라온다. 그렇기 때문에 부사관 소대장은 장교 소대장과는 달리 '''이미 분대장 유경험자'''라는 얘기다. 리더쉽에 있어서는 당연히 부사관 소대장이 더 잘할 수밖에 없다. 대대 이후의 부대부터는 참모들의 보좌를 받기 때문에 서로 협동하는 리더쉽이 발동되며 그래서 독일 연방군에서는 소대장 경험이 없는 대대장이 부임해도 임무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다만, 저런 사건을 겪었음에도 미군은 여전히 육군과 해병대의 전투부대 소대장은 중위 혹은 소위에게 맡기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군은 저 사건 이후로 검증된 사병에게만 장교 지원자격을 부여하므로 3년의 복무기간 이외에도 Coporal로 진급에 성공해야 Green to Gold의 자격이 주어지지 아무리 오래 복무했어도 계급이 Private이면 Green to Gold의 지원자격이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부사관을 하다가 30대 후반에 Green to Gold를 지원해 장교가 되는 인원들도 많으므로 미군 장교를 대한민국 국군 장교처험 무조건 20대 나이에 사관후보생으로서의 교육만 받은 장교밖에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한국 육군은 조선인민군 육군 병력과 휴전선에서 대치중인 관계로 소대급 병력들이 GP, GOP 등에 상급 중대들과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장교의 지휘를 현장에서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에 소대장으로 장교를 보직시킬 필요가 있다.
저학력자를 검증 없이 소대장 자리에 올려놓은 게 문제였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 한국군에서처럼 적성검사를 이용해 몇 배수 정도로만 걸러놓았어도 캘리 소위는 당연히 장교로 임관할 수 없었다.
광복 직후 한국군도 빨치산들을 가차없이 처벌했지만 역효과를 낳자 한국군은 빨리 깨닫고 빨치산들을 회유하였다. 전향한 빨치산은 더더욱 빨치산을 잡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빨치산들은 6.25 전쟁전에 모조리 토벌되었다. 다만 정통성은 북한이 아닌 남한이 가지고 있었고 김일성이 종북들을 토사구팽 했기에 가능했지만. 이쪽은 호치민 중심으로 북베트남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베트콩과 짝맞춰서 하기 때문에 미군이 아무리 회유해도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