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 지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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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선수. 1980~90년대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환상적인 개인기와 드리블을 선보이면서 "프랑스의 마술사"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을 정도로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994 미국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지역예선에서 탈락하자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으면서 쓸쓸히 레 블뢰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영국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다시금 위대한 선수로 추앙받았다. 은퇴 후에는 배우로서도 성공하여 제2의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프랑스의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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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롱 시절 지놀라
지놀라는 1967년 1월 25일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가생에서 이탈리아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3년 자택에서 가까운 클럽인 생트 막심(Sainte-maxime)의 유소년 클럽에서 지도를 받고 1985년 18살의 나이로 스포르팅 툴롱 바르에 입단함으로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1985-86 시즌에 14경기에 출장했고 1986년부터 팀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툴롱에서 4시즌 동안 87경기 5골을 기록한 지놀라는 1987년 프랑스 U-21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당시 프랑스 U-21 대표팀은 툴롱컵에 참가했는데 이때 지놀라는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결승전에서 잉글랜드를 4:3으로 격파하여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기여를 하여 툴롱컵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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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싱 클럽 드 프랑스 시절 지놀라
1988년, 지놀라는 그의 활약을 매의 눈으로 지켜봣던 라싱 클럽 드 프랑스로 이적했다. 이 클럽은 1980년대 프랑스의 재벌 장 루크 라가데르가 인수해 유망주를 끌어모으면서 프랑스 리그 1에서 훌륭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지놀라도 이 유망주들 중 하나였고 그 중에서 가장 성공했다. 지놀라는 레프트 윙어로 활동하며 2시즌 동안 61경기 8골을 기록했다. 그는 우아하고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인 데다 잘생겼기 때문에 수많은 팬들을 양산했다. 화려한 드리블, 환상적인 볼 컨트롤, 그리고 강력한 슈팅을 보유한 지놀라에 필적할 유망주는 당시 프랑스에선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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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 시절 지놀라
지놀라는 1990년 브레스트로 이적했다. 브레스트는 1990-91 시즌에 강등되었지만 그는 혼자 빛났다. 1991년, 지놀라는 파리 생제르맹과의 경기에서 MOM 급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를 지켜본 앙리 미셸 대표팀 감독은 그를 국가대표로 발탁하여 알바니아와의 친선경기에 내보냈다. 이후 지놀라는 프랑스 리그 2에서도 브레스트에 남았고 2시즌 동안 50경기 14골을 기록하며 팀의 당당한 핵심 멤버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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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챔피언스리그에서 지놀라의 활악상을 담은 동영상.
1992년 1월, 지놀라는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다. 그는 첫 시즌엔 그다지 좋은 활약을 하진 못했지만 이후 1992-93 시즌부터 제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 동안 115경기에 출장하여 33골을 기록했고 1993-94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1993년과 1995년에 프랑스 컵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93년에 유로파컵 4강에 진출하는데 큰 기여를 하면서 프랑스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다.
이 시기, 지놀라는 제라르 울리에 프랑스 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4 미국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했고 17경기에 출장하여 3골을 기록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환상적인 개인기와 드리블을 선보이며 프랑스 최고의 인기남이 되었고 TV에 여러차례 출연하여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했지만 1993년 11월 17일, 그의 운명을 뒤바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2.2. '''프랑스의 역적으로 지탄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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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예선 경기 불가리아전에서 충격적인 역전골을 내주면서 머리를 감싸쥐는 에릭 칸토나.'''
때는 1993년 11월 17일,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들은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불가리아를 상대로 패배한다면 월드컵 진출은 탈락될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초반에 에릭 칸토나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경기 중반 불가리아가 코너킥 찬스에서 동점골을 만들어내며 승부는 1:1이 되었다. 이후 경기는 막판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었고 이대로 무승부를 거둔다면 프랑스는 월드컵 진출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경기 종료 1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지놀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지놀라는 상대 문전 앞에서 프리킥 찬스를 맞이했는데, 동료에게 패스를 받은 뒤 공을 몰고 가다가 골 에어리어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이 크로스가 부정확한데다 너무 엉성하게 올라갔기 때문에 불가리아의 미드필더 에밀 크라멘리에프가 가로채면서 역습으로 전개했고 불가리아의 스트라이커 에밀 콘스타디노프가 결승골로 연결했다.
사실, 이 패배는 따지고 보면 수비수들이 에밀 콘스타디노프의 슛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도 있었고 프랑스 팀 전체적으로 득점력이 부진한 상황이었다. 물론, 지놀라의 엉성한 크로스로 인해서 불가리아에게 공격을 넘겨준 것이 결정적인 역전패의 원인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놀라는 장 피에르 파팽과 교체 멤버로 후반 68분부터 투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지놀라 한 명에게만 역전패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게다가, 에밀 콘스타디노프의 슛이 골키퍼의 키를 훌쩍 넘겨서 점프를 해도 쉽게 막아내기 어려운 사각지대의 방향이였던데다 절묘하게 골대를 맞고 들어갔다. 이 쯤 되면, 그냥 운이 너무 안 좋았다고 봐도 될 정도다. 결정적으로,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불가리아를 상대로 미리 골을 많이 넣지 못해 유리하게 앞서가지 못했던 레 블뢰 멤버들의 책임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기는 2:1 불가리아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스는 굴욕적인 역전패를 당하면서 프랑스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불가리아는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뤄냈다.
이처럼 미셸 플라티니의 1세대 황금세대 이후 당대의 슈퍼스타였고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장 피에르 파팽과, 에릭 칸토나, 다비드 지놀라, 폴 르갱을 비롯한 2세대 황금세대가 FIFA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1990년, 1994년의 레 블뢰를 '''"프랑스 축구의 저주받은 세대"'''라고 부른다.
경기가 끝난 후 지놀라를 비난하고 있는 제라드 울리에 감독.
제라르 울리에 감독은 경기가 끝난 직후 지놀라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지놀라의 크로스를 "프랑스의 희망을 앗아간 엑조세 미사일"로 묘사하고 지놀라를 "팀의 살인자"라고 매도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수많은 이들이 들고 일어나 지놀라를 비난했다. 프랑스 팬들은 지놀라가 경기에 나올 때마다 "프랑스 축구의 암살자"라고 적힌 배너를 펼치면서 지놀라를 서슴없이 도발하기도 했다. 제라드 울리에가 물러난 뒤 후임으로 들어온 에메 자케는 지놀라를 다시 기용하려고 했지만 여론에 밀려서 후보로 둘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다비드 지놀라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이 무시무시한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1995년에 프랑스를 떠났고 잉글랜드의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반쯤 도망치듯이 이적했다. 이후 지놀라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제라드 울리에를 고소하였고, 두 사람 간의 법정 공방은 2012년 4월이 되어서야 합의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2.3. 뉴캐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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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지놀라는 2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케빈 키건 감독의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이 당시 뉴캐슬은 레스 퍼디난드, 샤카 히슬롭, 워렌 바튼, 파우스티노 아스프리야, 데이비드 배티 같은 선수들을 영입하여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꿈꾸고 있었다. 뉴캐슬 최초의 프랑스 국적 선수였던 지놀라는 야심에 가득 찬 이 팀에서 핵심 멤버로 자리잡았다. 그는 짧은 터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아한 플레이로 뉴캐슬 팬들에게 마술사로 불렸다. 지놀라의 활약을 앞세운 뉴캐슬은 1995-96 시즌 중후반까지 2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2점 차이로 따돌리고 선두를 질주했으나 결국 뒷심 부족을 드러냄과 동시에 알렉스 퍼거슨의 언론 플레이에 휘말려 맨유에게 따라잡혀 2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지놀라는 PFA 올해의 팀 레프트 윙어에 선정되었다.
1996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의 바비 롭슨 감독이 지놀라를 영입하려 했다. 지놀라는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뉴캐슬이 이적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해서 결국 이적은 무산되었다. 훗날 지놀라는 자신이 '빅 클럽' 중 한 곳인 바르셀로나에 가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래도 지놀라는 1996-97 시즌에서도 대활약했다. 그는 이 시기 세계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우며 뉴캐슬에 온 앨런 시어러와 함께 탁월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UEFA컵 8강에 진출했으며 1996년 10월 20일 뉴캐슬의 홈구장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맨유를 상대로 5-0 대승을 거두는 데 한 몫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뉴캐슬은 이번에도 맨유에게 뒤져 리그 2위에 그쳤다. 이후 1997년 7월, 지놀라는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지놀라의 활약은 이후 뉴캐슬에서 뛰게 될 수많은 프랑스 선수들의 활약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후 '미친 왼발' 로랑 로베르와 '악마의 재능' 아템 벤 아르파 등이 지놀라의 뉴캐슬 프렌치 테크니션의 계보를 이어간다.
2.4. 토트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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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지놀라는 2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면서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했다. 이때 그는 입단식에서 상의 탈의를 한 채 유니폼을 흔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놀라는 토트넘에서도 제몫을 톡톡히 했다. 특히 1998-99 시즌 리그컵에서 그의 활약은 빛났다. 그는 맨유와의 경기 때 환상적인 바이시클 킥으로 결승골을 넣음으로서 팀을 4강에 진출시켰고 이후 결승전에서 레스터 시티를 1:0으로 이기는 데 기여하며 토트넘이 26년만에 리그 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토트넘에서 지속적으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고 1999년 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팬들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도 뽑혔다. 당시 맨유는 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를 모조리 제패한 반면에 토트넘은 리그 컵 하나만 우승했는데도 그 팀의 소속된 선수인 지놀라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 이후 지놀라는 토트넘에서 3시즌 동안 100경기 13골을 기록한 후 2000년에 아스톤 빌라로 이적했다.
2.5. 말년
2000년 7월, 지놀라는 3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아스톤 빌라에 이적했다. 그때 그는 어느덧 33살의 노장이 되었고 예전만큼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2시즌 동안 32경기 3골을 기록한 후 자유계약 선수로 방출되었다. 이후 지놀라는 에버튼으로 이적했지만 5경기만 출장했고 2002년 마침내 은퇴를 선언했다.
여담으로 은퇴를 하면서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 빼고 모두다 날 증오했다."란 말을 남겼다.
3. 은퇴 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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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놀라는 축구 선수 생활을 정리한 뒤 영국 왕립연극원에 입학하여 연기자 교육을 받았다. 이후 그는 2004년 '살인자 디디에'라는 단편 영화에 데뷔했고 뒤이어 2004년 칸 국제 영화 상영작인 '로스트비프(Rosbeef)'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영국 단편 영화 파이어쿨(Mr.Firecul)에서 주연 파이어쿨을 맡았고 BBC, CNN, BT 등 여러 방송사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으며 프랑스 내 EPL 독점 중계권을 가진 카날의 리뷰 프로그램 'Match of Ze Day'의 진행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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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블랫에 출연한 지놀라
2005년, 지놀라는 장편 영화 '에너미 블랫'에서 독일인 저격수 막스 상병 역을 맡았고 이 영화는 대흥행하여 2005년 칸 국제 영화제 상영작에 선정되었다. 또한 그는 2006년 채널 4의 'Coach Trip' 22화에 출연해 자신이 한때 유소년 선수 생활을 햇던 생트 막심 클럽을 홍보했다. 이후 그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카메오로 출연하여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줬다. 한편 그는 와인 제조에도 관심을 두어 2008년 그가 소유한 포도 농장에서 재배한 포도를 이용한 와인을 상품화했고 세계 와인 챌린지에 출품하여 은메달을 차지했다.
2015년 1월, 지놀라는 FIFA 회장 선거에 도전할 뜻이 있다고 밝혔지만 축구 협회의 추천을 받지 못하자 철회했다. 그러다가 2015년 6월, 지놀라는 다시 한번 FIFA 회장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회장에 당선시 러시아-카타르 월드컵을 재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들 알고 있듯이 새로운 FIFA 회장에는 미셸 플라티니의 측근인 잔니 인판티노가 당선되었다.
2016년 5월 19일 남부 프랑스에서 자선 축구 경기를 하던 중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쓰러졌지만, 천만다행으로 일행 중 CPR을 아는 이가 있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의식을 회복한 지놀라는 트위터로 무사함을 알렸고, 관상동맥 우회술(quadruple heart bypass)을 받았다.
4. 수상
4.1. 클럽
- 파리 생제르맹
- 프랑스 리그 1 우승 : 1993-94년
- 프랑스 컵 우승 : 1993년, 1995년
- 토트넘 핫스퍼
- 리그 컵 우승 : 1999년
4.2. 개인
- 툴롱 컵 베스트 플레이어 : 1987년
- 프랑스 올해의 선수 선정 : 1993년
- 프랑스 리그 1 올해의 선수 : 1993-94 시즌
- EPL 이달의 선수 상 : 1995년 8월, 1998년 12월
- FIFA 11인 선정 : 1996년
- PFA 올해의 팀 선정 : 1995-96, 1998-99
- 토트넘 핫스퍼 올해의 선수 : 1998년
- PFA 올해의 선수 : 1998-99
- 월드 사커 올타임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