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칸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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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국적의 前 축구선수.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수.
발롱도르 3위,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 프리미어리그 도움왕 2회를 차지할 정도로 당대 EPL을 대표하는 선수이자 맨유 7번의 계승자였다.
당시까지 서로 으르렁대던 사이였던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서[2] ,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불세출의 플레이어.[3] 맨유 팬들은 그를 일컬어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라고까지 한다.[4] 그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5]
2. 선수 경력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사르데냐, 이탈리아, 스페인 카탈루냐 혈통이다.[6]
2.1. AJ 오세르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이 17세에 AJ 오세르[7] 의 주전 멤버로 선발되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팬들은 17세의 소년이 필드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플레이에 열광했고 또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지금도 "칸토나"하면 떠오르는 다혈질 성격은 이 때 부터, 이미 파릇파릇했다. 당시 팀의 주장이 정말 사소한 부탁으로 라커룸에 놓고 온 자신의 가방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하자, 어린 칸토나는 "니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라며 주먹을 날렸다.
2.2. 올랭피크 마르세유
오세르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이적 시장에 나온 탈유망주급 선수를 잡기 위해 프랑스 굴지의 클럽 올랭피크 마르세유가 나섰고 마침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데 성공하지만... 베르나르 타피 당시 마르세유 회장은 훗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후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며 땅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실력이야 두 말할 나위 없으나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성깔머리가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와 주셨기에 그야말로 골치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 성질머리로 인해 당시 자신을 호출하지 않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서슴없이 육두문자를 날려주는 바람에 1년 대표팀 경기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는다거나, 경기 중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유니폼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 '''3일간 행방불명'''되는 등 지금의 어느 애송이도 깝치지 못할 정도의 망나니짓을 일상다반사로 해댔으니... 누구도 그를 겉잡을 수 없었기에 팀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임대나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결국 쫓겨나듯이 팔려간 님 올림피크 에서도 판정에 빡친 나머지 '''심판에게 장렬한 축구공 어택'''(…)을 날려버린 사건으로 프랑스 축협은 거의 그를 매장시킬 분위기까지 치달았고, 칸토나 역시 '''축구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라며 은퇴를 결심한다.[8]
2.3. 리즈 유나이티드 FC
그 탁월한 재능이 불같은 성격 때문에 피지도 못할 것이 안타까워 미셸 플라티니가 직접 나서서 에릭 칸토나에게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에 진출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준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던 것인지 칸토나는 선뜻 잉글랜드 행 비행기에 올랐고, 축구 종가에서의 그의 첫 도착지는 리즈 유나이티드였다. 그래도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도 칸토나는 A급 이상의 활약을 선보여서 팀의 1부 리그 우승에 큰 도움을 주었고, 리버풀과의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해트트릭을 질러주는 등 그 재능을 잉글랜드에 알렸다. 그리고 리즈 유나이티드는 진짜로 리즈 시절을 맞이했다. 칸토나의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1991-92 시즌 리즈 유나이티드는 1부 리그에서 우승을 했던 것.[9]
허나 또 그 놈의 성미가 문제가 되어 하워드 윌킨슨 당시 감독과 대판 싸우게 되었고, "이 놈을 어떻게 제거하나?" 하고 골치를 썩이던 하워드 윌킨슨 감독은 알렉스 퍼거슨과의 전화 통화로 칸토나를 "120만 파운드"라는 헐값에 팔아넘긴다. 이때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은 뛰어난 선수였던 칸토나를 파는 것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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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리즈에게 리그 1위를 넘겨준 맨유는 칸토나의 합류와 동시에 리그 1위 자리를 빼앗았고, 그다음 시즌에는 FA컵까지 동시에 재패하는 시즌 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칸토나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해 주었다. 그러한 활약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1994년 PFA 올해의 선수 수상은 당연히 칸토나의 몫이었다. 신기하게도 당시까지 별다른 기행은 없었고, 이는 지금도 확연히 드러나는 퍼거슨 감독의 선수 장악력이 아주 제대로 먹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거기에 1993년에는 발롱도르 3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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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주 없던 건 아니고... 가끔 이런 짓도 했다. 사실, 저렇게 백태클을 걸어대면 칸토나가 아니어도 누구든지 빡치는 것이 당연하니 대놓고 복수한 것이지만...[10][11]
'''하지만, 이후 칸토나는 그 동안의 폭력 사건을 잊게 할 정도의 초대형 사고를 터뜨린다.'''
2.4.1. 쿵푸 킥 사건
1995년 1월,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상대선수에게 주먹감자를 날리며 레드카드를 받았다. 그리하여 벤치로 향하던 중, 자신을 대놓고 야유하는 상대팀 서포터 매슈 시먼스(당시 20세)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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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날아차기 한 방을 먹였다.'''
이것이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쿵푸 킥''' 사건이었다. 칸토나는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었다. 이 사건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갈매기가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황당한 개드립을 쳐서 기자들도 당황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다는 요지 혹은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기자들에 대한 조롱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런 멘트를 저런 자리에서 말했다는 것이 칸토나 답다고 볼 수 있다.
너무나도 심각한 사건이었기에 여론은 "9개월로는 부족하다. 아예 축구를 못하게 막아버려라"라는 지경까지 치닫았는데, 알렉스 퍼거슨이 직접 나서서 칸토나를 두둔해주었다. 사실 이 때는 퍼거슨도 칸토나를 포기하려고 했으나, 아내 캐시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어 그를 남기기로 했던 것이다. 멘탈이 글러먹었거나,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를 가차없이 내치는 퍼거슨 감독이 직접 총대를 메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은퇴를 시사하던 칸토나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9개월의 공백기 동안 인터 밀란이 적극적으로 칸토나를 영입하려 애썼으나 이 때 칸토나는 그 유명한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라는 한 마디만을 남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정말로 맨유에서 은퇴를 했다.
칸토나에게 쿵푸 킥을 맞은 시먼스도 문제가 있는데, 2007년 포포투 지가 축구사 유명한 사건의 중심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그를 취재했을 때 그도 평생 축구 경기장 출입 금지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왜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냐 하면, 칸토나에게 "Fu*k off back to France, you French motherfu*ker" 라고 욕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다른 면에서도 문제가 좀 많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12년이 지난 당시에도 칸토나에 대해 안 좋게 평하기도 했다.
칸토나는 그 후 인터뷰에서 쿵푸 킥 사건은 나의 커리어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자평하면서 축구장에 있어서는 안 될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걷어찬 것이라고 밝히며 여전한 멘탈을 자랑했다... 하지만 기자가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런식으로 행동하라고 추천하겠냐고 물어봤을때는 손사래를 쳤다.#
시먼스는 이 당시에 자신을 걷어찬 칸토나에게 맞대응을 하려다 되려 칸토나에게 주먹질로 추가 폭행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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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촬영된 시먼스.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는지 자신의 아들이 뛰는 축구팀의 감독에게 아들을 기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입해서 고래고래 쌍욕을 하다 연행까지 당했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그래서 그 건으로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속사정과는 별개로 쿵푸 킥이라는 대응이 최악 중 최악이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심지어 퍼거슨은 십년이 더 넘은 뒤에도, 정확히는 감독 은퇴 뒤에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 일이 언급되자 한숨을 푹 쉬고 등을 뒤로 젖혔다. 강철 같은 퍼거슨의 멘탈을 으깨버리다 못해 트라우마를 주는 위업을 달성한 셈이다.[12]
2.4.2. 이후의 경력
칸토나가 빠진 94-95 시즌의 9개월동안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을 블랙번 로버스에게 빼앗기고, FA컵 우승은 에버튼에게 빼앗기는 등 한끗발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칸토나가 복귀하자마자 다시금 시즌 더블을 기록한다.[13] FA컵 결승전에서의 결승골을 기록했다.
1996-97시즌에는 팀의 주장이 되었는데, 비영국인으로서 맨유에서 처음 주장이 되었다. 이 시즌에도 칸토나와 맨유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5. 은퇴
그런데 1997년 5월 11일. 칸토나는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 결코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퇴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정상에서 멈추고 싶다'''라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거창한 기자회견이나 은퇴식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구단 홈페이지에 깨작 글귀만을 남겨놨을 뿐이었다. 결코 깎아내릴 수 없었던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 무대에서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트로피야 들어올릴 만큼은 들어봤으니 별 미련도 없었던 듯하다.[14]'''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랫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 봐 두려웠다.'''
2.6. 비치사커
축구에서 은퇴한 1997년 이후에는 비치사커에 입문하여 프랑스 대표팀의 감독 겸 주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선수로는 2005년까지 플레이하여 FIFA 비치사커 월드컵 첫 대회에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이후에도 2011년까지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3. 은퇴 이후
은퇴한 후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칸토나는 맨유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주장 반열에 들고 있으며, 그 짧지 않은 커리어 속에서도 빛을 발한 건 맨유에서의 5년 남짓한 시간이었음에도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로 손꼽히고 있다. 2006년 당시 감독으로도, 코치로도 아닌 '''"선수"로서 복귀를 바라는''' 클럽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는 투표(유나이티드 매거진 실시)에서 보란듯이 1위에 뽑히는 기염을 토하는 것을 보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에릭 칸토나라는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2011년 유나이티드 매거진에 게재된 역대 최고 선수 투표에서도 라이언 긱스에 이은 2위에 올랐다.[15]
게다가 단순히 실력과 성깔(…)만 있는게 아니고 나름의 축구관이 확고한 선수였으며 그만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때문에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칸토나가 자기 식으로 훈련하면서 행동하는 것을 어느 정도 묵인해주었고 둘이서 축구에 관해 토론을 할 정도였다. 어쨌든 둘은 서로를 아주 높이 평가해서 서로를 높이 띄워주는 인터뷰를 많이 한다. 칸토나 왈, "퍼거슨은 일종의 천재."[16]
한편, 에릭 칸토나는 현역 은퇴 이후 여러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더 이상 축구계에서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미국 NASL 뉴욕 코스모스의 단장직에 취임하여 2012년까지 축구행정가로 활동하였고, 지금은 다시 축구계에서 손을 떼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척 보기에 둔중한 몸집과 떡대로 인해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칸토나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고 그 플레이스타일은 오히려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탯이 182경기 82골 66어시였음을 생각해보면 득점은 물론이고 어시스트까지 완벽했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최전방 공격수와 플레이메이커 포지션에서의 플레이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물론 명성에 비해, 또 비슷한 클래스(라 여겨지는)의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스탯[17] 임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롱도르 3위를 할 정도였던 이유는 그의 해결사 능력 덕분이다.
리즈 유나이티드 첫 시즌에 리즈를 17년 만에 리그 우승시킨 것과[18] 맨유에서의 5시즌 중 4시즌을 우승시킨 것이 그 증거. 그 중 두번이 더블이요, '''챔피언스리그 4강'''도 올려보냈다. 챔스 4강 한번이 왜 중요한 것이냐면 당시 EPL은 헤이젤 참사로 받은 징계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출범해서 모든 EPL 팀들의 유럽대항전 성적이 낮았다. 그런 맨유가, 즉 EPL이 챔스에서 재기하는데의 큰 역할을 한 것. 당시 긱스를 제외한 퍼기의 아이들이 모두 불완전한 상태인 걸 감안하면 더욱 대단하다. 경기력에서도 해결사 기질이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복귀전인 리버풀전 득점과 FA컵 리버풀전 득점 등 더비나 빅매치에서의 중요한 골을 넣었다. 당시 맨유팬들은 결승골이나 역전골이 터지면 누군지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칸토나일 테니까."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의 웨인 루니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EPL 출범과 동시에 호흡을 맞춘 라이언 긱스와 이때부터 완벽한 짝짜꿍을 선보였으며, 긱스가 왼쪽을 초토화시킨 후 칸토나에게 어떻게든 공을 넘겨주면 칸토나는 다시 최전방을 초토화시키고 골을 때려넣었다.
그 외의 능력으론 패싱력도 뛰어났고 그만큼 패스도 즐겼다.[19] 칩슛을 장난아니게 잘 찼다. 그의 인생골이자 EPL 역대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사각지대로 빨려들어가는 유명한 칩샷골이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1991)
-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2)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21] : 1991-92
- 채리티 실드: 1992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2~1997)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U-21 챔피언십: 1988
- 프랑스 비치사커 국가대표팀
- 유로 비치사커 리그: 2004
- FIFA 비치사커 월드컵: 2005[22]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3위: 1993
- 디비지옹 1 올해의 신인: 1987
- PFA 올해의 선수: 1993-94
- PFA 올해의 팀: 1993-94
- FWA 올해의 선수: 1995-96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6년 3월
-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 1992-93, 1996-97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 (1992~2002)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최우수 외국인 선수 (1992~2002)
- PFA 세기의 팀 (1907~2007)
- BBC 이달의 골: 1994년 2월, 1996년 12월
- 맷 버스비 올해의 선수: 1993-94, 1995-96
- 옹즈도르: 1996
- 옹즈 드 옹즈: 1996
- ESM 올해의 팀: 1995-96
- FIFA 100: 2004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 골든풋: 2012
- UEFA 회장상: 2019
6. 기타
- 골을 넣은 뒤, 기뻐서 방방 뛰는 여타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칸토나의 골 세레모니는 그야말로 특별했다. 옷깃을 칼같이 잡아 세운 뒤 무표정한 얼굴로 관중들을 한번 슥 훓어보는데[23] 칸토나의 그 작렬하는 카리스마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켜 '칸토나=옷깃'이라는 공식마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 세레머니에 감명을 받은 박건하선수도 골을 넣은 후에는 옷깃 세레머니를 했다.
1996년 나이키의 CF 중 하나인 Good vs. Evil 에서는 슛을 차기 전 옷깃을 세운 후 불꽃슛을 날리는데, 당시 해외축구 방송이 드물어 잘 모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저 CF로 그의 폭풍간지만큼은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 소싯적은 물론이요 나이를 먹고서도 여전한 다혈질적인 성격이, 맨유에서는 팀 전체를 규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PL 출범 때 이미 데뷔하여 EPL 짬밥은 칸토나와 동급이었던 긱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갓 유스에서 올라왔던 "퍼기의 아이들"이 함부로 기어오르지 못한 것은 그야말로 칸토나의 카리스마가 지대했다는 분석이다.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등이 멋모르고 나대지 못하도록 했다고. 또다른 개차반으로 유명한 로이 킨도 칸토나에겐 찍소리 못했다 하니.[24]
- 불같은 성질로 유명한 칸토나지만 팬들에게는 매우 친절했다. 솔샤르가 말하길 후배들한테 팬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조언을 한 게 칸토나였다고 한다. 요약하면 "팬들과 직접 만날 기회가 있다면 이걸 명심해라. 대부분의 팬들은 앞으로 평생 너희와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마주 볼 일은 없을거다. 아마 본다고 해봐야 30초 정도가 고작이겠지. 그 30초동안 너희가 그 사람들에게 평생 남을 인상을 심어주는거다. 매번 우리를 응원해주러 와주는 그 고마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냥 우리가 가볍게 웃으며 싸인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잊지못할 추억이 될 수 있다. 그게 싫다고 그냥 평생 개새끼로 남고 싶으면 그 판단은 네 몫이다." 라는 말인데 솔샤르는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 은퇴 후에도 계속 축구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각종 미디어의 인터뷰는 물론이요 각종 광고, 축구 영화에도 출연했다.
- 배우로써 경력도 은근 있는 편이다. 1995년 프랑스 영화 Happiness Is in the Field로 데뷔해 작은 역들을 맡다가 2009년 좌파 영화로 유명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에릭을 찾아서>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 영화는 그 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상당히 괜찮은 코메디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덕택에 에릭 칸토나는 그 힘들다는 칸 영화제 레드 카펫도 밟았다. 이후로도 프랑스 영화나 영국 영화에 소소하게 출연하고 있는 중. 2015년 하반기에는 디즈니-픽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굿 다이노의 프랑스어 더빙판에서 포레스트 우드부시 역의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이외 얀 곤잘레스의 유 앤 더 나잇에도 출연하는등 프랑스 영화 출연 비율이 높은 편. 리암 갤러거 의 once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에 주연 배우로 등장하였다.
- 상기한 바와 같이 2010년 재창설한 뉴욕 코스모스에서 초기 단장직을 맡았다.[25] 2011년 프리시즌 기간에 폴 스콜스의 은퇴 기념을 위해 마련된 맨유 vs 뉴욕 코스모스 간의 친선전 때 10여 년 만에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했다. 참고로 스콜스 은퇴 경기에 칸토나가 초청된 것은 원래 스콜스가 칸토나를 잘 따랐던 것도 있지만, 남에게 주목받기 싫어하는 스콜스가 '칸토나가 오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될 테니 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겠지.'라는 노림수를 편 것이었다고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다.
- 2012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한다는 기사가 떴다.
- 박지성과 함께 퍼거슨의 헤어드라이어를 맞지 않은 유이한 선수였다.[26] 칸토나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으며, 그 철학에서 어긋나는 순간 바로 그 성질머리가 튀어나오는 사람이라, 퍼거슨이 헤어드라이어를 시전했다면 칸토나는 점점 비뚤어져 둘의 관계는 나빠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 맨시티가 44년 만의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에 칸토나의 쿵푸 킥이 그의 거실에 있던 커피 테이블에 작렬했고, 아들은 그걸 보며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
- 전성기를 EPL 에서 보내서 그런지는 몰라도 EPL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축구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유로 2016 때는 공공연하게 "유로에서 나는 잉글랜드를 응원한다. 축구인으로서는 나에게 잉글랜드의 피가 흐른다." 고 인터뷰에서 얘기했으며 # 잉글랜드가 아이슬랜드에게 패배했을때는 완전 빡돌아서 내가 감독하면 저딴 일은 절대 없을거다 라고 하며 자기 잉글랜드 국대 감독 시켜달라는 비디오를 올리기도 했다. #
- 은퇴 이후에도 종종 맨유 지지 발언을 하며 맨유 라이벌들을 조롱하는 발언을 하는데 루이스 엔리케가 휴식을 위해 바르셀로나 코치직에서 나간다고 하자 "쉬고 싶으면 아스날 코치 하면 되는거 아니냐? 거긴 딱 쉬긴 좋다" 라는 발언으로 거너 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
- 취미가 시 쓰기와 읽기라고 한다. 실제로 축구황제 펠레에 대한 평가를 '어두운 방을 밝게 밝힐 수 있는 예술가. 1970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로부터 카를로스 알베르토에게로 이어진 패스는 랭보의 시와 같았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보는 이들에게 영원함을 느끼게 한다.'로 했을 정도로 시적인 표현을 즐긴다.
- 맨체스터 테러가 났을 때 유명인사 중 제일 먼저 영상 메시지를 보낸 사람 중 하나이다. 진심으로 슬퍼하며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평소에 불같은 성격인 칸토나의 부드러운 면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상.#
- 진보적 성향이 강하다. 금융 문제와 관련해서 빈부격차와 불공정을 비판한 것도 있고 좌파영화 감독인 켄 로치의 영화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 똥군기로 인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기가 끝날 때마다 담배를 물고 라이언 긱스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며, 라커룸에서도 후배 선수들에게 군기를 과시했다는 증언도 많이 나왔다. 똥군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은 2000년대 후반에서야 생겨났고, 칸토나에 수시로 당했었던 라이언 긱스는 자신이 고참 선수가 되면서 권력이 생기자 라커룸에서의 똥군기를 없애 놓았다.
- 2018-2019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에서 맨유가 PSG를 상대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하자 알렉스 퍼거슨과 올레 군나르 솔샤르와 함께 7일 승리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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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2019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에서 맨유가 PSG를 꺾은 후 8강에 진출한 이후 네이마르가 경기장으로 내려가 주심을 비난하는 등 화를 참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자 맨유 라커룸으로 가던 칸토나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비판했다. 칸토나의 행동을 본 네이마르의 아버지는 화가 났고, 양 측은 한동안 신경전을 벌였다. 그는 경기 후 자신의 SNS에 네이마르의 사진을 게재한 뒤 “바비큐처럼, 너는 햇빛이 내리비치는 봄이 와야 나오지”라고 조롱했다. 이는 네이마르가 겨울에 자주 부상을 당하고 봄에 돌아오는 것을 바비큐 파티가 많은 봄에 빗대어 비꼰 것이다.
- 피파 21 트레일러에 등장하며 신규 아이콘 출시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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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공격수들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 세컨드 스트라이커[2]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그러느냐고 물어보실 위키러들을 위해 대답해보자면 영국인 왈; "프랑스란 환상적인 땅이 아쉬운점은 그 땅에 프랑스인이 산다는 것"이라고 하는 농담이 나올 정도.[3] 이는 후에 다비드 지놀라, 티에리 앙리가 계승한다. 감독도 있다.[4] 이후 올드 트래포드의 왕 칭호를 얻은 선수는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웨인 루니로 이어진다.[5] 에릭 칸토나 역시 현재까지 맨유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끊임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영국에서 주로 활약해서 그런 듯.[6] 정확히는 부모님이 카탈루냐계 사르데냐인으로서 마르세유로 이민을 간 경우에 해당한다. 심지어 부모님은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편이었다고.[7] 정조국이 뛰었었던 팀.[8] 이 과정을 보면 더 쩌는 게, 축협 측에서 먼저 "1개월 출장정지"를 먹이자 칸토나는 "'''X나 고맙습니다. 얼간이들아.'''"라는 감사인사(…)로 응수했고, 축협은 다시 "3개월 출장정지"라는 거의 캐삭빵 수준의 어택을 날려준 것이다.[9] 플라티니는 최초 리버풀 FC에 칸토나를 받아달라 요청했으나 리버풀 측에서는 폭탄 끌어안기 싫다며 거절, 또다른 팀인 셰필드 웬즈데이는 "땡기면 오라"라는 입장이었으나 "입단테스트 후 결정"이라는 조건을 내밀었기에 겨우 웬즈데이 정도의 팀이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거부했다고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리버풀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만하다.[10] 걸려 넘어진 선수는 당시 노리치의 헤니 슐츠[11] 참조하자면 지금의 룰 대로라면 백태클을 건 선수는 최소 옐로카드~공격상황의 치명적 정도에 따라 레드카드를 받지만, '보복행위'에 해당하는 칸토나의 발차기는 다이렉트 레드에 향후 징계까지도 가능한 수위다.[12] 물론, 그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좋게 하는 칸토나도 다른 선수들에게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도 이 일에 대해서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13] 공교롭게도, 에릭 칸토나가 부재했던 이 시즌이 블랙번 로버스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당시 블랙번의 핵심 선수는 그 유명한 앨런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이었다.[14] 다만, 2년만 더 뛰었으면 그 유명한 트레블의 일원이 되어 빅 이어도 들어봤을 것이라는게 팬들이 아쉬워하는 점. 근데 재밌게도 캄 노우의 기적에서 챔스 우승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선수가 테디 셰링엄으로 교체선수로 들어와 동점골을 넣음과 역전골까지 어시스트했는데 칸토나의 대체자로 영입된게 셰링엄이었다.[15] 일반적으로 맨유의 역사를 대표하는 선수로 인식되는 바비 찰튼(동 투표에서 4위)이나 라이언 긱스가 맨유에 평생을 바친 플레이어임을 고려하면 그와 함께 거론되는 칸토나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짧지만 얼마나 강한 임팩트를 남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호날두는 팀의 리더도, 본인의 전성기도 아니었다.) 한편 맨유 역대 최고의 주장은 최장기간 재임한 브라이언 롭슨 쪽을 좀 더 쳐주는 듯.[16] 퍼거슨이 아팠던 당시 인터뷰에서는 "지금은 퍼기 타임, 언젠가 꼭 일어나실 거라 믿는다."라며 쾌유를 빌기도 하였다.[17]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기준으로는 더더욱 괴수같은 스탯 임은 사실이다.[18] EPL까지 통틀어 마지막 리그 우승[19] 때문에 상술된 기록처럼 어시스트가 어마어마하다.[20] 리그 1 출범 이전 명칭[21]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전 명칭[22] 둘 다 선수 겸 감독으로 이루었다.[23] 네번째 항목에 기술된 두번째 동영상 마지막 장면 참조. 매번 그랬던 건 아니고 FA 컵 결승골을 리버풀 상대로 성공시켰을 때나 중요한 경기에서 극적인 골을 성공시켰을 때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기뻐날뛰는 세레모니를 했다.[24] 다만, 로이 킨의 자서전에 쓰인 스티브 브루스의 15,000 파운드짜리 수표와 관련 된 일화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 지 모른 채 내기에 참여한 스콜스와 니키 버트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리고 본인이 내기에서 승리해 받은 12,000파운드 짜리 수표를 집에서 두 장으로 나눠 스콜스와 버트의 이름을 적고 그 둘에게 준 것으로 보아 강한 성격만큼이나 선수들에게 감동을 주는 법 또한 잘 알고 있던 선수였던 걸로 보인다. 한 팬이 기억하기로는 칸토나와 로이 킨 모두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하지만 로이 킨은 단순하게 다혈질스러운 성격이었다면 칸토나는 다혈질 적이지만 사람의 심리 상태또한 잘 파악하고 잘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25] 참고로 이 팀의 명예 회장은 구 코스모스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펠레. 구단 관계자들을 축구계의 전설들로 하나하나 채워가며 팀 리빌딩을 시도했으나, 칸토나에게도 실질적인 권한은 주어지지 않아 코스모스가 첫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클럽을 떠났다. [26] https://soccerline.kr/board/15702251?searchWindow=&searchType=0&searchText=&categoryDepth01=1&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