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은군(1562)

 


'''도정궁의 역대 주인'''
2대 하원군 이정

'''3대 당은군 이인령'''

4대 응천군 이돈

'''조선 중종의 증손 | 도정궁 2대 사손'''
'''당은군
唐恩君'''

'''작호'''
당은정(唐恩正) → 당은도정(唐恩都正) → 당은군(唐恩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인령(引齡)
''''''
자장(子長)
'''생부'''
하원군
'''생모'''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부인'''
밀양군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풍양군부인 풍양 조씨(豊壤 趙氏)
'''자녀'''
9남 6녀
'''생몰
기간
'''
'''음력'''
1562년 9월 24일 ~ 1615년 9월 27일
'''양력'''
1562년 10월 21일 ~ 1615년 11월 17일
1. 개요
2. 생애
3. 사망과 이후
4. 여담
5. 가족과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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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덕흥대원군의 적장손이자 하원군의 적장남이며 도정궁 제2대 사손이자 제3대 주인이다.

2. 생애


작은할아버지 명종[2] 치세이던 1562년(명종 17년) 9월 24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하원군 사저에서 하원군과 남양군부인 홍씨 사이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6세 되던 1567년(선조 즉위년) 작은삼촌 하성군이 조선 제14대 왕 선조로 즉위했다.
처음에는 당은정(唐恩正)에 봉해졌다가 1591년(선조 24년) 당은도정(唐恩都正)이 되었다. 그해 무려 200년 간 왕실의 숙원이던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광국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난갈 때 아버지 하원군과 함께 모셨다. 1597년(선조 30년) 하원군이 사망한 후 덕흥대원군제사를 받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6년(선조 39년) 1월에 선조의 명으로 품계가 올라가면서 당은군(唐恩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후 1615년(광해군 7년)에 소덕대부(昭德大夫)로 다시 급이 올라갔다.

3. 사망과 이후


1615년(광해군 7년) 10월 7일 향년 54세로 별세했다.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증직되었고 경기도 양주군 수락산 건좌, 덕흥대원군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4. 여담


  • 1608년(선조 41년) 사간원 헌납 성시헌과 마찰이 있었다. 당은군이 직접 말썽을 피운 것은 아니고 그의 하인과 엮인 일이다. 조선의 예법 상 길을 가다가 왕족을 마주치면 의례 고개를 숙이고 길가로 피해야 했는데[3] 당은군을 마주친 성시헌이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러자 당은군의 하인이 눈을 부릅뜨고 삿대짓을 하며 격하게 성시헌을 꾸짖었다고.(...) 이에 성시헌은 자신이 잘못한 것은 맞으나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하니 못버티겠다면서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처음에는 반려했으나 사간원에서 파직시키라 간언하자 할 수 없이 파직을 허락했다.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9월 14일 정유 5번째 기사.

5. 가족과 자손


정실 부인이 2명 있었다. 첫 부인 밀양군부인 박씨 사이에서 3남을, 사별하고 재혼한 부인 풍양군부인 조씨 사이에서 1남 2녀를 얻었다. 그리고 소실 예란에게서 1남 2녀를, 또 다른 소실 은금에게서 1남 1녀를 두어 총 6남 5녀를 두었다. 그의 사후 도정궁의 가계는 적장남 응천군 이돈이 이었다. 이후의 가계는 응천군(1579) 참조.

[1] 작호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던 남양군(南陽郡)의 옛 지명 당은군(唐恩郡)에서 따왔다. 당은군 지명은 삼국시대당항성에서 따온 듯 하다.[2] 할아버지 뻘이라지만 나이 차이는 28살. 참고로 친할아버지 덕흥대원군과는 32살 차이이다. 조선시대의 조혼 풍습을 생각하면 으레 있는 일이다.[3] 피마(避馬)라고 한다. 종로의 피맛골이 여기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