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27
1. 개요
1940년 전후 일본군 육군의 주력전투기. 약칭은 97전, 97식전 등. 연합국 코드명은 '네이트(Nate)'. 개발은 나카지마 비행기(이하 나카지마), 생산은 나카지마 외에 타치카와 비행기와 만슈 비행기도 행했다.[2] 나카지마제 육군전투기의 대명사로 알려진 테이퍼 날개를 처음 채용한 기체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전장에서 어느 정도 활약했으며, 이후 이 기체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일본 육군은 Ki-43과 Ki-44를 개발하게 한다.
2. 제원
Ki-27 을형(Ki-27b) 기준[3]
3. 파생형
- 키27(キ27) - Ki-27: 시제기. 하1갑(Ha-1a)을 장착한 시제기와 하1을(Ha-1b)를 장착한 시제기 등이 있다.
- 2식 고등연습기[키-79](二式高等練習機[キ79]) - Ki-79: 만슈 비행기에서 만든 훈련기, 510마력의 하13갑(Ha-13a)을 장착했다.
- 2식 고등연습기 갑[키-79](二式高等練習機甲[キ79 甲]) - Ki-79a: 하13갑 1형(Ha-13a-I)을 장착한 단좌 훈련기.
- 2식 고등연습기 을[키-79](二式高等練習機乙[キ79 乙]) - Ki-79b: 하13갑 1형(Ha-13a-I)을 장착한 복좌 훈련기.
- 2식 고등연습기 병[키-79](二式高等練習機丙[キ79 丙]) - Ki-79c: 하13갑 3형(Ha-13a-III)을 장착하기로 계획된 단좌 훈련기.
- 2식 고등연습기 정[키-79](二式高等練習機丁[キ79 丁]) - Ki-79d: 하13갑 3형(Ha-13a-III)을 장착하기로 계획된 복좌 훈련기.
4. 개발
1935년, 해군의 9시 단좌전투기(후의 96식 함상전투기)의 성공에 자극받은 육군은 해군의 양해를 얻어 9시 단전을 육군용으로 개조한 미쓰비시 Ki-18을 가와사키 95식 전투기를 채용하던 때의 시작심사에 도중 참가시켰다. 하지만 엔진의 신뢰성 부족과 성능 불충분을 이유로 채용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가와사키 Ki-10을 95식 전투기로 채용했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복엽기였던 95식은 차기 주력 전투기로서는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할 전투기로서 1936년 4월, 저익 단엽전투기의 경쟁 시작을 나카지마, 미쓰비시, 가와사키 3사에 지시했다.
이리하여 나카지마의 Ki-27, 가와사키의 Ki-28, 미쓰비시의 Ki-33의 경쟁이 되었는데, 이전에 Ki-18이 채용되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았던 미쓰비시는 시작기 제출은 했지만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1937년 2월부터 시작된 심사는 수냉식으로 엔진에 불안이 있었던 Ki-28을 누르고 이 기체가 선정되었다. 그동안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심사를 서둘러 9월에 종료, 1937년 97식 전투기로서 정식 채용되었다.
결론적으로 미쓰비시는 이 기체의 기술적 성숙을 위한 떡밥으로 쓰였으며, 이후 해군의 전투기는 미쓰비시, 육군의 전투기는 나카지마가 주체가 되는 형태가 되었다. 중일전쟁 후 중국 한커우 기지에서 가끔 행해진 육군과 해군의 모의 공중전에서는 A5M보다 Ki-27이 속도, 상승력, 격투전 성능 등 모든 면에서 우세, 해군 조종사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Bf109,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호커 허리케인 등이 97식 전투기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되었고, 경량형 전투기에 한계를 느낀 일본은 중형 전투기[11] 개발쪽으로 나가게 된다.[12] 이후 Ki-43이 양산되자 2선급으로 물러났다가 1942년 초중반부터는 연습기나 특공기로 사용된다.
5. 실전
1938년부터 중일전쟁에 투입돼 구식 기종을 몰던 중화민국 공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보였다. 하지만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I-15bis와 I-153, 그리고 I-16을 상대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차기 전투기에선 방탄판과 방루 탱크를 설치하는 교훈이 됐다.[13]
2선급으로 물러난 후 왕립 태국 공군에 공여됐다. 1944년 11월엔 Ki-27 5대가 P-51D 9대, P-38 7대 총 16대 편대에 맞서 싸워, Ki-27 5대가 모두 격추됐지만 P-51D 2대에 불을 붙히고 P-38 1대를 격추하는 엄청난 전과를 보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편성된 인도네시아 임시 공군에서 운용한 버려진 일본 기체 중 하나이기도 하다.
6. 평가
내장식 기어가 주류가 되어가던 시대에 시대를 거스른 듯한 고정식 랜딩 기어를 채용했음에도 높은 기동성을 자랑했고 특히 선회능력이 뛰어나 격투전에 강한 기체였다. 하지만 방어력이 약하고 속도[14] 가 부족해 플라잉 타이거즈의 붐앤줌, 헤드온 등에는 약한 면을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독일이나 영국의 전투기(Bf109,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등)에 비해 투입된 기간은 짧았지만 육군 항공대에 방탄판과 방루 탱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고 후속기인 Ki-43과 Ki-44 개발에도 큰 영향을 줘 여러모로 제 역할은 한 기체다.
7. 대중매체
7.1. 게임
7.2.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8. 둘러보기
[1] 중국, 인도차이나, 버마, 인도 전역 등에서 미식별 항공기에게 붙힌 코드명이다. 그 당시에는 A5M의 존재하지도 않은 후속기(일명 해군 97식 함상전투기)로 봤다.[2] 만슈비행기에서 만든 훈련기는 "2식 고등연습기 Ki-79"라는 제식명과 기호를 따로 받았다.[3] 출처: Japanese Aircraft of the Pacific War, 저자: Francillon, Ph.D., René J[4] 쇼와 12년, 황기 2597년[5] 코토부키 엔진이라고도 불린다.[6] 이륙 시 710마력, 2,900 m에서 780마력[7] 특공용으로 250 kg 폭탄 1개를 장착한 적이 있으나 지나치게 무거워 기체의 정상적인 이착륙이 어려운 수준이었다.[8] 갑형 565대, 을형, 1492대, Ki-79 1,329대[9] a 대신 甲을 그대로 읽어서 Ki-27 Ko라고도 한다. 이하 을(Otsu), 병(Hei), 정(Tei)도 같다.[10] 패스트백형이라도고 한다.[11] 쌍발 중전투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경량형 전투기보다 더 무거운 전투기를 이른다.[12] 이렇게 만들어진게 Ki-44와 Ki-61 등이다. 그러나 여전히 경량 전투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Ki-43 또한 개발하게 된다.[13] 반면에 해군 항공대쪽은 여전히 승무원 보호를 경시하는 것을 보였고, 2차 대전 중반에서야 겨우 장비하게 된다.[14] P-40의 기종마다 다르지만 약 100 km/h 이상 차이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