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카이족
- 몽골어: Урианхай (Uriankhai)
- 영어: Uriankhai
- 러시아어: Урянхайцы
- 중국어: 乌梁海 Wūliánghǎi (옛: 兀良哈 Wùliánghā)
- 일본어: ウリャンカイ
- 한국어: 우량카이 (옛날에는 오랑카이라고 발음했으며, 이것이 오랑캐가 되었다.)
1. 개요
우량카이는 우리말 '''오랑캐'''의 어원이 된 몽골계 부족.
보통 한국인들은 오랑캐를 건주여진과 같은 부족으로 알고 있지만 뿌리부터가 전혀 다른 부족이다. 바이두 백과에 따르면 고비 사막 북방의 지방(주로 몽골을 가리킴)의 동부에 할거하는 몽골계 부족 이름이라고 한다. 자세한 정보는 오랑캐 문서 참고.
2. 우량카이의 역사
우량카이족의 영토 변천사
2.1. 몽골 제국 시대
"집사(集史)"의 우량카트 부족지에서는 우량카이를 북쪽의 숲에 사는 "수렵민 우량카이족"과 몽골화된 초원 지역에 진출한 "유목민 우량카이족"으로 양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량카트 부족지에서는 원래 "수렵민 우량카이족"은 염소도 소도 야크의 종류도 모르고 목초지도 (펠트)천막의 주거도 모르고 가죽 덮개를 하고 살아왔지만 우연히 자신들의 거주지를 헤매다 양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양이나 소의 생육 장소를 물색 중에 삼림 지대에서 초원에 진출했다는 "유목민 우량카이족"의 근원 설화를 전했다. "집사(集史)" 에서는 삼림 지대에 거주하는 전자의 "수렵민 우량카이족"을 "숲의 우량카트라고 부른다. 또 이 "숲의 우량카트"는 코리, 토마트, 키르키즈족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몽골 제국 시대에 활약한 우량카이 부족 출신자로서는 이른바 사준사구의 젤메, 수부타이 두 사람이 있다.
2.2. 북원 시대
1368년 대도의 함락부터 청나라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우량카이"로 칭하는 복수의 집단이 존재했다. 그 중 한 집단은 다얀 칸이 분열된 몽골족을 간만에 통합시킨 후 성립한 6부 중 좌현에 속하는 3부족 중 하나로 연맹에 참여하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북원 문서 참고.
2.3. 우량카이·투멘
"집사集史"에 의하면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이 묻힌 헨티 산맥의 금전지를 수호하는 자는 우량카이부의 아미르였는데, 이 역할은 대대로 계승되어 북원 시대에는 "주(칭기스 칸)의 황금의 관을 지키고, 또 큰 운명의 칸국인"으로서 우량카이 투멘을 구성했다. 북원 시대의 "투멘 "은 오이라트 제국의 통일과 와해와 같은 혼란을 겪어 새롭게 형성된 것으로 전 시대의 부족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게 많지만 적어도 우량카이 투멘은 전대의 우량카이부와 직접 관계가 있다고 본다.
에센 타이시가 전 몽골을 통일할 때에는 우량카이부의 수령에 차부단(탄)이란 사람이 있었고 그 딸인 아르타 걸진이 타이슨 칸(톡토아 브하)의 비로서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타이슨 칸이 에센과의 싸움에 져서 차부단의 영지에 진입할 때, 차부단은 딸이 막는 것도 듣지 않고 타이슨 칸을 죽이고 말았다고 한다. 아르타 걸진이 낳은 타이슨 칸의 아들은 나중에 모런 칸이 되었다. 또 여러 기록에 따르면 우량카이부가 자주 비를 배출하는 유력 부족 중 하나였음을 알려준다.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있던 몽골은 다얀 칸의 등장으로 다시 통일되고 다얀 칸은 휘하의 여러 집단을 여섯 투멘(6만호)으로 재편성했다. 여기서 우량카이 투멘은 차하르, 할하와 함께 좌익의 3만호를 구성하며, 우익의 오르도스와 대칭했다. 상술한 것처럼 다얀 칸은 그 어머니와 왕세자비가 우량카이부 출신의 인물로 우량카이와 칸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다얀 칸의 뒤를 이은 보디 알락 칸은 우량카이와 관계가 없어 우량카이부의 입장은 변화하게 되었고 마침내 우량카이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량카이는 마침내 보디 알락 칸, 알탄 칸들에게 토멸된다.
2.4. 타안위(朶顔衛) 올량합(兀良哈)
1389년 옷치긴 왕가의 군주 아자스리에게 인솔되어 항복한 집단은 명나라에 의해 타안위, 태녕위, 복여위의 3위로 편제되어 우량카이 3위(올량합 삼위)라고 총칭되었다. 그러나 3위 전체를 "우량카이"라고 칭하는 것은 명나라 측의 오해로 실제로 우량카이인으로 구성되는 것은 타안위 뿐이었다.
우량카이 삼위는 북원을 견제하려는 명나라에 협조해 관직과 물자를 제공받는다. 우량카이 삼위는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면서 명나라의 통제 밖에 있었다. 삼위는 북원 세력과 혼인 동맹을 맺으며 이중적 외교 노선을 취했고, 삼위의 수령 임명과 작위의 계승 또한 스스로 결정하고 추후 명나라에 통보하는 식이었다.
타안위는 삼위 중 유일하게 멸망을 모면하고 존속하면서 청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2.5. 조선에서의 오랑캐(兀良哈)
조선에서는 북방에 거주하는 이민족의 일부를 명나라의 "우량카이"와 같은 한자로 표기하고,"兀良哈(올량합, 오랑카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몽골의 우량카이부와 무관한 여진의 한 분파로 명나라에서는 야인여진이며 청조에서 동해 3부라고 불리었던 집단의 하나로 왈개부에 해당하는 집단이다. 거주지는 주로 두만강 유역으로 명나라에서는 모린위로 불렸다.
2.6. 탄누·우량카이
현대의 투바 공화국에 해당하는 지역도 烏梁海(우량카이)라고 불리며 청조 시대에는 탄누·우량카이에 조직되고 있었다.
3. 현대
몽골 헹티 산맥 부근에 우량카이의 후예들이 아직도 살고 있으며, 그 인구는 2010년 기준 26,654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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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깥고리
바이두 백과 兀良哈(오랑카이족) 항목에서 자세히 설명되어있으니 참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