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냉전 시기 영토분쟁의 일부
[image]
방글라데시 여성 의용군

[image]
다카로 향하는 인도군 T-55 전차

[image]
백기를 든 채 수용소로 이송되는 파키스탄군 포로

[image]
사격 중인 파키스탄군 포병

[image]
파키스탄군에 부역한 벵골인 시체를 묻는 방글라데시인들
'''날짜'''
1971년 3월 26일 ~ 1971년 12월 16일
'''장소'''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벵골만
서파키스탄(현재의 파키스탄)
아라비아 해
인도 북부 일부
'''교전국'''
<^|1>[image] 방글라데시
[image] 인도(12.3~)
<^|1>[image] 파키스탄
'''지휘관'''
<^|1> [image]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image] 지아우르 라만
[image] 타주딘 아흐마드(초대 총리)
[image] 무하마드 아타울 가니 오스마니(총사령관)
[image] 카지 모하마드 샤피울라(육군참모총장)
[image] 칼리드 모샤레프(벵골 4연대장)
[image] 샘 마넥쇼(육군참모총장)
[image] 자그지트 싱 오로라(동부사령관)
[image]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동부사령부 참모장)
<^|1> [image]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총사령관)
[image] 라오 팔만 알리(군사고문)
[image] 모하마드 샤리프(해군사령관)
[image] 패트릭 데스먼드 캘러헌(공군사령관)
[image] 티카 칸(2군단장)[1][2]
'''결과'''
방글라데시-인도 연합군의 승리
'''영향'''
'''방글라데시의 탄생'''
'''병력'''
[image] 방글라데시군 17만 5천 명
[image] 인도군 50만 명
36만 5천 명
'''피해규모'''
[image] 방글라데시군
- 약 최소 30만명 최대 3백만 명 사망[3]
[image] 인도군
- 사망 1,426명
- 부상 3,611명
- 육군 5만 5천여 명 사망
- 해군 1,381명 사망
- 공군 833명 사망
- 준군사조직(경찰 포함) 2만 2천 명 사망
- 민간인 1만 2천 명 사망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사진 모음[4]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한 방글라데시 영화
1. 개요
2. 배경
3. 발단
4. 진행
5. 편제
5.1. 방글라데시-인도 연합군
5.2. 파키스탄군
6. 절정
7. 결말
8. 영향
9. 참고 자료


1. 개요


영어 : '''Bangladesh Liberation War'''
벵골어 : মুক্তিযুদ্ধ (Muktijuddho)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5] 1971년 방글라데시(동파키스탄)의 독립 문제를 놓고,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군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을 주창하는 묵티바히니 독립군, 이들을 지원하는 인도군 사이의 전쟁. 이 전쟁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했다.

2. 배경


1611년 동인도회사가 마술리파트남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대륙에 발을 들인 영국7년 전쟁의 승리로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세포이 항쟁 직후인 1858년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그러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 본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물러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와 해외 영토들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총리가 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독립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눌려 있었던 힌두교-시크교의 비무슬림 세력과 이슬람의 무슬림 세력간의 종교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무슬림 세력이 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하자 비무슬림 세력이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 급기야는 인도 대륙 전역에서 비무슬림과 무슬림간의 충돌과 보복 학살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죽는 등 인도는 종교 집단 간 내란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인도 내부의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 갈등과 유혈 분쟁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결국 인도 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인정하여 1947년 8월 14일에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하였다. 이런 종교 갈등 속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통일 인도와 종교간의 화합을 외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인도의 분열을 막는 데 실패했고 간디는 1948년 극렬 힌두교 신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한판 붙으면서 대놓고 철천지 원수 관계로 적대하였다.
한편 종교적인 문제로 인도와 갈라서게 된 파키스탄은 점차 인더스강 유역의 서파키스탄과 갠지스강 삼각주 일대의 동파키스탄과의 지역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사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만 같은 이슬람을 믿었지 문화, 인종, 언어, 역사 등 모든 것이 '''공유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지리적으로도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를 거대한 인도가 가로막고 있었다.[6]
더욱이 파키스탄의 주요 정치와 군사권력들도 역시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해서 동파키스탄의 영향력이 약할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 정부는 세금도 차별을 하여 동파키스탄으로부터 , 소고기, 생선 등 모든 식량자원들을 수탈하는데다가 그런 주제에 동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은 서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선에 불과해 동파키스탄은 사실상 서파키스탄의 경제적 식민지나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인구 자체는 '''동파키스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7] 그래서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3. 발단


이렇게 양자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에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8]이 모든 게 우월한 아리아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언어인 우르두어만을 강요하는 방향의 언어 말살 정책을 펼쳤다.[9][10]
이렇게 지독한 수준의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수천 년 간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자며 벵골어 국어 운동을 벌였고 파키스탄 정부의 우르두어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군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사태의 원흉인 진나 총독은 곧 사망하면서 일은 크게 키워두고 자리를 뜬 격이 되었다. 이게 더 병맛인 게 이 연설이 진나가 파키스탄의 총독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해서 한 연설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연설의 전체 문맥은 통합을 강조하며 "한 나라가 되었으니 한 개의 언어를 쓰자"였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유혈 충돌은 파키스탄에서 벵골어가 공용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이러한 유혈사태로 서파키스탄의 벵골인 차별 의식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무지부르 라만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는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지만 1958년 아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헌정을 뒤엎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해나가는 바람에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격차도 더더욱 커지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기 아유브 칸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태풍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서파키스탄 정부가 구호에 굉장히 무성의하게 일관하는 것이 드러났다. 태풍 상륙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야 경계를 내려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만 동원할 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핑계가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인도 정부는 아니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었다.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물러난 아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아히야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고 이듬해인 1970년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0석, 과반의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이대로라면 단독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출신의 아히야 칸 대통령은 아와미 연맹의 총선 압승 결과를 무효 처리했고[11] 이에 반발한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아히야 칸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동파키스탄 내에서의 소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 아히야 칸 대통령은 1971년 초 동파키스탄으로 가 무지부르 라만 아와미 연맹 당수와 회담을 벌였지만 선거 결과에 문제가 있어 무효화할수 밖에 없다는 아히야 칸 대통령과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고 새 정부를 당장 출범시키라는 라만 당수간 의견의 불일치로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이제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져 회복되기 힘든 것처럼 보였고, 긴장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4. 진행


결국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1971년 3월 7일 라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 다카에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동파키스탄을 벵골인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방글라데시'를 국호로 삼아 '''방글라데시의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1971년 3월 26일 아침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서 전면 파업과 함께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동, 서지역의 대립은 결국 내전이 되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라만 당수의 독립 선언 행동에 깜짝 놀란 파키스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라만 당수를 체포해 서파키스탄의 감옥으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라만 당수의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과 그의 체포는 서파키스탄의 지배와 차별에 쌓이고 쌓였던 동파키스탄인들의 감정에 불을 질렀고 이에 수많은 동파키스탄 사람들이 지지하며 총을 들고 '''묵티 바히니'''[12]라는 독립군을 결성하여 묵티 바히니와 함께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서파키스탄 관리들과 군인, 경찰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게 되자 놀란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 정부는 즉시 군대를 동파키스탄에 파견해 진압에 나섰고 사태는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군 간 전쟁으로 벌어졌다.

5. 편제



5.1. 방글라데시-인도 연합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연합군 편제 문서 참조.

5.2. 파키스탄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파키스탄군 편제 문서 참조.

6. 절정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데다 파키스탄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하여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군에게 저항했다. 파키스탄군은 전차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거리에 얼씬거리는 동파키스탄인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사살되고[13]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쑥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농민들을 죽였다. 서파키스탄군은 학살, 강간 등을 수시로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약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만명의 벵골인들이 헬게이트가 열린 동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도망쳤다.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헬게이트를 열어 약 600만명의 벵골인이 인도로 피난오자 인도 입장에서도 이 파키스탄 내전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14]
한편 이러한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 저항에 당황한 파키스탄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고자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분노한 인도의 직접적인 무력 개입을 초래했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도 기죽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이전까지는 앙숙 파키스탄을 골탕먹이기 위해 간접적으로 묵티바히니에게 비밀리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였지만 인도 국경이 폭격당하자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인도는 입장을 '''적극 개입'''으로 급선회했다.[15]

7. 결말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 지원을 천명하면서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전쟁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16] 파키스탄군 간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였고 동부와 서부에서 인도와 약 2주일간 전쟁을 벌인 끝에 대패한 서파키스탄은 항복했다.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군 지도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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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 중장.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 중장, 제4군단장 사가트 싱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 소장.[17]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끝난 이유는 보통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너무 컸다. 인도는 파키스탄보다 인구, 경제력[18],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파키스탄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타격을 줄 정도의 수준은 충분하였다.
  • 양면전쟁의 불리함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사이에 거대한 본토가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동파키스탄의 민중과 독립 세력이라는 우군이 존재하고, 앞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국력이 우세하므로 양면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파키스탄의 경우 영토 자체가 수천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상태인데다가 동파키스탄을 서파키스탄이 강제로 재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안그래도 없는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 전략적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동파키스탄은 파키스탄 자체를 멸망시킬 필요가 없이 타격을 주어서 동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하면 그걸로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이건 앞서 말했듯이 그렇게 어려운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의 경우에는 인도에 타격을 줌과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는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을 모으기도 힘든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미션실패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지형상의 이유로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동파키스탄에 있던 서파키스탄의 군대는 현지 주민도 전혀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19] 쉽사리 붕괴되었으며, 동시에 서파키스탄으로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만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아서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국제적으로도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파키스탄은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았기에 여러가지로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자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 리처드 닉슨마오쩌둥의 회담 성립이 이뤄지듯이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결사적으로 반대에 나서지 않았다. 게다가 위에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끼어들려고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니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얻던 것과 달리 대비를 하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터였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선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찾아내 공개 처형을 하면서 분풀이를 하게 된다. 우연히 거리에서 이런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 미셀 로랑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 (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쳐상 사진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된다. 이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인데 이거 말고도 찍은 여러 장 사진에선 묶어둔 4명 친파키스탄 민병대원을 방글라데시군이 마구 구타하고 둘러싼 사람들은 야유와 욕설을 하며 지지했는데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자 방글라데시 측은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0]

8. 영향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이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아히야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그 결과 줄피카르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싶었으나 지아 울 하크 장군 주도의 군사 쿠데타로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더욱이 1979년 소련이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침공하고 이어서 아프가니스탄이 내전 지옥의 수렁에 빠지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뻗고, 지아 올 하크 장군은 이를 막기는 커녕 오히려 이들을 후원하였고 이게 들통나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경제제재를 받게되자 경제가 추락해 파키스탄은 아예 이슬람권 최악의 국가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이 전쟁은 인도가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게 된 이유이다. 이 당시 인도는 항모로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원래 마제스틱급 항모(허큘리스함)로 '''2차 대전 때 건조된 항모'''였다는 사실... 1971년이면 항모 자체도 엄청난 구형인 데다가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초계기로 시대에 뒤쳐져도 한참 뒤쳐졌다.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무지 불안했다고 한다. 항공기들이 대공포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적의 항공기가 뜨는 상황을 "전혀 예상도 못한 상황"으로 대공미사일은커녕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결국 동파키스탄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허를 찔렸다. 48시간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했다. 전쟁기간 동안 격추당한 항공기 0기에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으니 그야말로 대박. 이전까지는 돈만 엄청 먹고 이거 써먹을 수 있겠냐고 회의적이었던 인도군은 이 전쟁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했다.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급이 이래서 가능했던 것.

9. 참고 자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한 방글라데시 영화


[1] 계엄사령관이기도 했으며, 방글라데시에서 벌인 잔혹한 학살 때문에 '''발루치스탄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있는 인간말종이다. 방글라데시 초토화 작전 서치라이트 작전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최종 계급은 대장.[2] 추가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기사를 참조하기 바람.[3] 민간인 학살 포함.[4] 처형된 시체 등 혐짤도 많이 있으니 주의할 것.[5]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관한 간략한 내용은 여기 참조.[6] 위 사진을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인도 뿐 아니라 네팔과 부탄도 그 사이에 껴 있다.[7] 서파키스탄은 6500만이고 동파키스탄은 7500만이었다.[8] 총독이라는 직함을 쓴 이유는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자치령은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실 뿐이지 내정에서의 자치권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져서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9] 더 웃긴 건 정작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아리아인이 맞다는 것..... 그런데 이는 사실 공식적으로는 아리아인이 어쩌구 하기는 했지만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의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의 명도(明度) 따위에 맞춰져있음은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인정하고 있다. 괜히 그 나치 독일이 아리아인 운운하는 와중에도 인도유럽어족이란 의미는 애즈녘에 갖다버리고 금발 벽안 드립이나 치고 있던 게 아니다.[10] 또다른 웃긴 게 있다면 서파키스탄 주민들 대다수가 사용하던 언어는 우르두어가 아니라 펀자브어였다는 것......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진 건, 현지인들의 모어를 무시하고 인도 본토에서 온 무슬림 힌두인이 쓰던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갈라진 거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현재의 파키스탄은 우르두어가 국어인 것과 별개로 펀자브어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는다.[11] 이렇게 한 이유는 인도와 가깝고 교류도 있던 동파키스탄이 자치권을 얻을 경우 친인도 지역이 될것을 우려해서였다.[12] মুক্তি বাহিনী 자유군이라는 뜻.[13] 특히 다카대학교에서 벌인 학살이 유명하다.[14]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600만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종전시키는 비용이 싸게 먹힌다고 할 지경이었다.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좋지도 않던 인도 사정에 동파키스탄 피난민들은 큰 부담이었다.[15] 특히 국경 폭격이 명백한 무력 도발이라서 인도 입장에서는 좌시할 수가 없었다.[16] 이를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라고 한다. 뜻은 연합군.[17] 양군 사령관은 모두 샌드허스트 출신 동문으로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18] 물론 당시에 파키스탄이 인도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서 평균적으로야 잘살았기는 했지만(172달러 vs 112달러) 인구격차를 뒤엎을 정도로 경제적 격차를 벌리지 못했다.[19] 특히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전쟁범죄에 현지 주민들이 분노한 상황이라서 당연히 협조할리가 없었다.[20]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만다.[21] 다른 밀리터리 정보도 같이 있어 참조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