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방글라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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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대의 영동대로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쪽은 길은 넓다.
[image] 방글라데시의 도시
ঢাকা

다카 | Dhaka


국가
<colcolor=#000000> [image] 방글라데시
지역
다카 주
면적
306km²
인구
8,906,000명(2011)
광역인구
18,950,000명
인구밀도
29,104명/km²
1. 개요
2. 역사
3. 인구밀도와 교통난
4. 관광 / 식문화


1. 개요


방글라데시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 인구는 2016년 기준 1613만명이다. 이 지역에서 숭배하는 힌두교 풍요의 신 다카슈얼으로부터 유래된 지명이다. 15세기 이후 이슬람이 지배적인 도시로 변모하였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으나 결국 옛 이름으로 돌아갔다. 시가지의 면적은 1,463.6 km2이다.
영어론 과거에 Dacca라고 썼으나 지금은 벵골어 원어 발음에 가까운 Dhaka로 바뀌었으며 다카 시민은 Dhakaiya나 Dhakite라고 한다. 중국어로는 達卡/达卡(다카)라고 쓴다.
일단 세계 10대 도시에 들어가는 매우 큰 도시이다. 그럴만한 게 갠지스 강 연안에 위치해 물을 얻기 쉬우며 부지도 꽤 넓은지라 도시를 확장시키는 게 쉬웠다.

2. 역사


다카의 고대사는 알 수 없다. 다만 도시에서 가장 유서깊은 장소인 다케쉬와리 사원은 12세기 세나 왕조에 의해 세워졌다. 세나 왕국이 델리술탄왕조에 멸망한 후 다카는 이슬람 세력인 튀르크-아프간 지배층이 집권하였고 벵갈 술탄국에 이르러 1454년 현존하는 첫 이슬람 사원인 비나트 비비 모스크가 세워졌다. 유럽인들에게 다카는 1550년 무렵 포르투갈인 항해사 주앙 디 바로스가 지도에 표기하며 처음 알려졌다. 1575년 투카로이 전투에서 악바르 대제가 벵골군을 격파[1] 한 후 무굴 제국의 지배를 받게된 도시는 군사기지라는 의미의 '타나'로 불렸는데, 바라 뷔얀 군벌 세력의 반란을 겪은 후 1608년부터 무굴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2년 후부터 무굴령 벵골의 주도가 된 도시는 상업으로 번영하였고 황제 자한기르의 이름을 따서 자한기르나가르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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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바그 성채
무굴 제국 동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다카에는 황자들이 총독 (수바다르)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들 중에는 아우랑제브의 아들이자 후에 아잠샤로 즉위하는 쿠투브 앗 딘 무함마드도 있었는데, 15개월에 불과한 임기에도 불구하고 그에 의해 건설이 시작된 랄바그 성채는 통치의 중심이 되었으며 지금도 다카의 주요 공원이자 관광지이다. 성채는 샤이스타 칸의 시대에 확장,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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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트 모스크
아잠 샤의 다음으로 수바다르가 된 장군 샤이스타 칸은 무려 25년간 벵골을 다스리며 근대 벵골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대규모 해군을 건조한 그는 1665년 포르투갈과 연합해 해적 소굴이던 아라칸을 원정, 치타공을 정복하고 이슬라마바드로 명명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를 경계한 그는 회사에 대한 세금을 높혔고, 이에 1686년 영국이 인도 해안을 공격하였으나 결국 무굴 제국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세계 최고의 생산량과 품질을 자랑하던 벵골의 직물을 구매하기 위해 유라시아 전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세계 경제의 12%를 차지하던 벵골 (무굴 제국이 세계 경제의 25%, 벵골은 그 절반)의 중심지 다카의 인구는 100만을 구가하였으며 동방의 베니스로 불렸다. 직물 장인만 해도 8만이 넘었다고 하며 직물공업 외에도 조선업이 흥성하였다. 지금도 방글라데시인들은 쌀값이 저렴한 호시절을 샤예스타 칸르 아몰, 즉 샤이스타 칸의 재임기라고 일컫는다.
18세기 들어 무굴 제국의 쇠퇴와 함께 벵골은 나와브, 즉 지방 총독들의 차지가 되었다. 독립한 무르쉬드 쿨리 칸은 서벵골의 무르쉬다바드를 건설해 수도로 삼았고 다카는 동벵골의 치소로서 나이브 나짐이 다스렸다.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나와브 가문은 왕좌를 잃었지만 제후이던 무르쉬드 쿨리 칸의 가문은 영국 지배기 내내 권좌를 유지하였다. 영국산 면직물이 들어오자 이 도시의 직물 산업이 쇠퇴해 도시 역시 쇠락하였다. 그럼에도 벵골의 대표적인 도시로 남았고, 벵골 분할령 이후 동벵골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이슬람교가 주류인 파키스탄을 떼어내며 동파키스탄의 수도가 되었으나 (1962년에는 파키스탄의 입법수도) 서파키스탄과는 여러모로 이질적이고 거리도 먼 나라라 결국 인도-파키스탄 전쟁 끝에 인도의 도움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1971년 방글라데시의 수도가 되었다.

3. 인구밀도와 교통난


방글라데시라는 나라 자체가 인구 밀도가 매우 높지만 그중에서도 다카는 더한 수준이다. 다카 시로만 보면 면적이 360km2에 인구가 800만 규모[2]이고 다카 지구로보면 면적이 1400km2에 인구가 1900만명이고 다카 주(구)로보면 면적이 20000km2에 인구가 4800만명에 달한다. 또한 다카 지구와 다카 지구에 접해있는 지구들을 합산하면 면적이 6350km2에 인구가 2800만명정도 된다.
참고로 행정구역상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도 다카 내에 있는데 랄바 타나라는 구역으로 2.2㎢에 380,933명이 살고있다
인구가 많은 만큼 끔찍한 교통체증으로도 악명높은데, 도로도 좁기 그지 없고 광역전철이나 지하철도 아직 개통되지 않은 상태라 당연히 교통체증이 극심하다. 그래도 2010년대 중반에 착공을 시작하여 2019년에 개통 완료 예정이라고 하니 2020년대에 어느 정도 교통난이 해소될 전망(...)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결국 도시철도는 들어오지 못했으며 대중교통을 버스와 디젤기관차 견인 통근열차에 의지한다.
그렇지만 다른 방면에서도 문제가 많은데 명절 때만 되면 기차역에서 사람들이 하도 몰려들어서 기차가 만원, 초만원을 넘어서 아예 지붕 위에도 사람이 타는 풍경이 연출되며, 방글라데시의 주 교통수단인 버스도 여러가지로 운행체계가 엉망이어서 운전면허증 발급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많아서 과속운행이 횡행한다. 세 번째 사진만 봐도 마경이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4. 관광 / 식문화


이거다 하고 내세울 만한 명소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다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랄비그 성채를 중심으로 무굴 제국기에 세워진 여러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다만 성채나 일부 사원들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가 조악한 편이다. 그외에 현대 건축에서 자랑할 만한 랜드마크로는 거장 루이스 칸의 유작인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과 까우란 시장이 있다. 특히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매우 유명한 건물이며 뭔가 압도적으로 보인다.
인도 요리의 일종으로 볶음밥인 비리야니가 유명하다. 비리야니는 14세기 페르시아에서 유래했고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에 전파되며 다양한 맛이 생겼다. 에 각종 향신료를 넣고 양고기닭고기를 넣어 볶는 음식이며 많은 양을 만들 수 있어 축제나 결혼식 등 사람이 많은 곳의 음식으로 적당하다

[1] 다만 이는 힘든 승리였고 벵골 정복의 결정적인 승리는 이듬해 라즈마할 전투에서 술탄을 사로잡은 것이었다[2] 이정도면 세계 주요도시들 중에서 단연 인구밀도로 세계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