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슬로 쿠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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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前 축구선수로 1950년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FC 바르셀로나를 이끌었고,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한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가 있었던 라리가에서 무려 4차례의 우승을 주도했다. 포워드로 완성된 기량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으며 헝가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평가된다.[1] 클럽 창단 100주년인 1999년에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선정한 클럽 역대 최고의 선수에 요한 크루이프를 제치고 뽑힌 바 있다.
2. 선수 시절
2.1. 바르사 이전
쿠발라는 1927년 6월 10일에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구김살 없이 자랐다. 당시 페렌츠바로시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에 정착한 슬라브 출신 이민자였으며 일용직 미장이로 일했고, 어머니인 안네도 마분지 공장에서 일을 하며 공장에서 쓰다 남은 마분지와 넝마, 종이 등을 이용해 아기인 쿠발라에게 공을 안겨주었다. 그는 키가 아직 두 뼘도 안될 적에 이미 공을 차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후 라슬로는 자라면서 부모보다 공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온종일 종이 공을 차는 라슬로는 어느새 거리의 명물이 되었다. '공 차는 소년'이란 별명이 붙은 쿠발라는 항상 공으로 곡예를 펼치며 거리를 누볐고, 1939년에는 11살의 어린 나이로 헝가리의 하부 리그 팀인 간츠 TE에 입단하면서 15살 이하 선수들에게 둘러싸이면서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써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체구가 작았지만 실력은 오히려 월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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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렌츠바로시 시절의 모습. 왼쪽 세번째 분이 쿠벌러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공차기를 멈추지 않았던 쿠발라는 1944년에 간츠 TE의 1군 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여 18세가 된 1945년에는 아버지가 뛰었던 페렌츠바로시로 이적하여 49경기에 나서 27골을 기록하여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무시무시한 포스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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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국대 시절의 모습[2]
페렌츠바로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쿠벌러는 1946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명문팀 슬로반 브라티슬라발로 이적하여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페르디난드 다우치크 감독이다. 다우치크 감독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며 활약을 이어간 그는 19살의 나이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대에 선출되기도 했으며, 다우치크 감독의 여동생 안나 비올라 다우치코바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다우치크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쿠발라는 1948년에 바사스 SC로 이적하면서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왔는데, 축구 스타가 된 그가 먼저 한 일은 바로 거리의 사람들에게 옷을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그런고로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만큼이나 그라운드 밖에서도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는 성자였다. 왜냐면 쿠벌러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어린 나이에 프로 선수로 뛰면서 엄청난 거액을 번 쿠발라에게 돈보다 중요한 가치에 대해 철저히 교육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쿠벌러는 평생 자신이 번 돈으로 혼자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 부모와 친지들을 도와 준 것은 물론 훗날 바르사 활동 시에 바르셀로나로 온 헝가리 이민자들을 비롯해 자신보다 더 돈을 원하는 불쌍한 이웃들에게 돈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 치하의 헝가리는 쿠발라가 자유로이 축구를 즐길 환경으로써 충족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1949년에 4명의 동료 선수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떠나면서 쿠발라 자신은 인스부르크에 있는 프로 파트리아와 계약했으나 헝가리 축구 협회 측이 이적동의서를 내주지 않아 FIFA에서의 이적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인즉슨, 그가 헝가리 공산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국가를 떠났으며 병역 의무와 징집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고로 그는 결국 프로 파트리아에서 친선경기만 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떤 공식 경기도 뛰지 못한 쿠벌러는 당시 AS 로마의 감독으로 일하던 매형 다우치크와 다시 만나 1950년 1월에 헝가리에서 온 망명자들을 모아서 '헝가리아'를 만들었고, 쿠발라도 여기에 합세했다. 그리고 1950년 여름에 열린 스페인 마드리드 투어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되는데...
2.2. 블라우그라나 군단의 일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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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헝가리 망명자 출신 선수인 산도르 코츠시스, 졸탄 치보르와 함께.
당시 쿠벌러가 뛰던 헝가리아는 마드리드 선발팀과 스페인 선발팀, 그리고 RCD 에스파뇰과 차례로 친선경기를 치렀다, 이때 쿠벌러의 플레이가 압도적이었는데, 특히 6월 5일에 열린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혼자 4골을 몰아치며 선보인 경기력은 당시 경기를 지켜본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사 관계자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현장에 있었던 아구스티 몬탈 갈로바르트 회장과 스카우트 담당 이사인 주젭 사미티에르는 쿠발라를 영입하고자 적극 추진했고, 이때 레알 마드리드가 쿠벌러를 영입하고자 먼저 제시했으나 사미티에르의 끈질긴 설득으로 당월 15일에 매형이자 은사인 다우치크 감독과 함께 바르사로 입단을 결정했다. 게다가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로도 활약했던 사미티에르는 두 팀 사이의 정치적 문제도 해결해냈다. 그러나 여전히 FIFA의 이적 승인이 없었다는 게 걸림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쿠발라는 바르사에서조차 1년동안 친선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이를 해결해내기 위해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단장이었던 라이문도 사포르타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국적을 얻게 되었다.
1951년 6월 1일에 쿠발라는 스페인 국적을 얻어 스페인 축구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었다. 공식 데뷔 전인 1951 코파 델 레이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준결승에서 6골을 기록해 기대를 모은 그는 1951/52 시즌에 19경기를 뛰며 26골을 넣었다. 이 시즌 당시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쿠벌러가 뛰지 못한 바르사는 1-5 참패를 당했는데, 그가 뛴 엘 클라시코에서는 4-2 승리로 멋지게 설욕했다. 특히 1952년 2월 10일 9-0으로 이긴 스포르팅 히혼전에서 쿠벌러는 7골을 넣었는데, 이는 라리가 역사상 한 경기 최다골 기록으로 평가된다. 이 쿠벌러의 활약으로 바르사는 리그 통산 5회 우승을 이루고 그해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도 발렌시아 CF를 맞아 득점에 성공해 우승컵을 가져갔다. 이후 우승 행진은 계속 이어져 1952년 라틴컵 우승과 코파 에바 두아르테 우승도 전부 바르사의 것이었다. 한 시즌에 총 5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그 순간은 바르사 역사상 최고의 해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호사다마랄까, 쿠벌러는 1952/53 시즌에 폐결핵 진단을 받아 많은 경기를 결장하고 말았다. 현역 선수 생활은 이대로 끝나는가 싶더니만 그는 리그 막판에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라리가 11경기에서 7골을 기록해 팀의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코파 델 레이에서까지 7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한 뒤 또 아틀레틱 클루브와 결승에 올라가 대회 3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단, 이 시즌에 엘 클라시코와도 인연이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그가 병석에 누워서 못 나왔고, 바르사 안방 리턴매치에선 레알 마드리드의 올리바와 다투는 바람에 강제 퇴장당한 것이다.
이후에도 쿠발라는 바르사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정작 엘 클라시코에선 그리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하지만 라이벌 팀 에이스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라이벌을 이루며 엘 클라시코 흥행과 재미를 주도했다. 그는 1958년에 같은 헝가리 망명자 출신 동료 산도르 코츠시스와 졸탄 치보르의 영입을 성사시키는 데 도와주었고, 게다가 갈라시아 출신의 어린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와 브라질 공격수 에바리스투와 막강 공격진을 이룬 쿠발라는 당시 유럽 무대를 씹어먹던 레알 마드리드에 대적할 만한 전력의 핵으로 작용했다. 1959년 라리가-코파 델 레이 더블, 1960년 라리가-인터-시티 페어스컵 더블 획득을 도운 것도 쿠발라였다. 그러나 1960년에는 당시 감독인 엘레니오 에레라와의 갈등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러피안컵 준결승에서 처음으로 열린 유로클라시코에서 팀이 탈락하는 걸 지켜보아야만 했으나 이듬해 유러피안컵 8강전에서 유로클라시코가 펼쳐지자 비로소 출전하여 그의 활약으로 바르사가 이겼다. 그러나 바르사는 결승에서 SL 벤피카에게 2-3으로 지면서 결국 우승의 꿈을 뒤로 미루었고, 쿠벌러는 이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후술할 바르사 감독직 이후 1963년에 지역 라이벌인 RCD 에스파뇰의 플레잉감독으로 복귀하여 선수 생활을 다시 시작하여 라리가에서 7골을 넣었으나 팀은 13위로 떨어져 상강 플레이오프를 치뤄서 승리한 뒤 간당간당하게 잔류했고, 이후 스위스와 캐나다를 거치며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다 1967년에 토론토 팰컨스를 끝으로 축구화를 완전히 벗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쿠발라는 아이돌이라는 별명에 맞게 사람들에 눈을 즐겁게하는 스타성이 있었다. 당시로써는 최고였던 발재간능력은 디 스테파노도 따라 올 수 없었다. 기본적인 기본기가 있으니 테크닉적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기량을 잘 뽑아냈던것이다. 그리고 처진 공격수 자리에서 활약했던 선수답게 기회 창출능력 역시 좋았다.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패스로 게임을 만들어갔다. 힐 패스나 드래그백 후 패스같은 고난도 기술도 서슴없이 구사했다. 골 결정력 역시 최고 수준이어서 득점기록 역시 좋았는데, 2경기에서 1골넣는 스코어링을 보여줬다. 슛팅 기술까지 뛰어났기 때문이다. 골대 앞에서의 결정력 뿐만아니라 그의 슛팅 기술은 중거리슛에도 능했다. 특히 프리킥에서는 당시로서는 유일무이한 휘는 슛팅을 구사했다고 한다.
4. 지도자 시절~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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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바르사에서 현역 생활을 끝낸 이후 동 팀에서 유스팀 감독으로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루이스 미로 감독이 쫓겨나자 1군 감독으로 승격했다. 이후 1962/63 시즌에 풀시즌으로 뛰었으나 감독 생활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결국 쿠발라는 그해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에게 져서 무관에 그치자 결국 사임했다.
이후 RCD 에스파뇰-FC취리히-토론토 팰컨스-코르도바를 거쳐 1969년부터 스페인 국대 감독으로 11년간 재직하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유로 1980에 각각 본선 진출시켰고, 이후 1980년에 바르사에 돌아왔으나 한 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 경질되었다. 이후 알 힐랄, 레알 무르시아, CD 말라가 등을 거치다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스페인에 금메달을 선사해 주었고, 1995년 파라과이 국대 감독직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 외에도 1990년부터 9년간 바르사 전직 선수조합 회장도 지냈다.
쿠벌러는 2002년 5월 17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5. 출처
- 엘 클라시코의 모든 것(한준 저.) - 브레인스토어. 2013.
[1]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스페인 3개의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으나 보통 출생국인 헝가리 국적으로 분류한다. 언젠가 쿠발라가 어느나라 사람인지 질문을 받은적이 있는데 "나는 세계 시민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2] 하지만 가슴에 달려 있는 로고는 헝가리의 국장 (성 이슈트반 왕관) 이다.
분류
- 1927년 출생
- 부다페스트 출신 인물
- 2002년 사망
- 헝가리의 축구선수
- 체코의 축구선수
- 스페인의 축구선수
- 헝가리의 축구감독
- 체코의 축구감독
- 스페인의 축구감독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S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은퇴, 이적
- 페렌츠바로시 TC/은퇴, 이적
- MTK 부다페스트 FC/은퇴, 이적
- FC 바르셀로나/은퇴, 이적
- RCD 에스파뇰/은퇴, 이적
- FC 취리히/은퇴, 이적
- FC 바르셀로나/역대 감독
- RCD 에스파뇰/역대 감독
- FC 취리히/역대 감독
- 코르도바 CF/역대 감독
- 알 힐랄 FC/역대 감독
- 엘체 CF/역대 감독
-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참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