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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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와다 유타카 (和田豊 / わだ ゆたか)
'''생년월일'''
1962년 9월 2일
'''국적'''
일본
'''출신지'''
치바현 마츠도시
'''학력'''
치바현립 아비코 고등학교 - 니혼대학
'''포지션'''
2루수, 유격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4년 드래프트 3순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85~2001)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2001~2003)
한신 타이거스 2군 종합코치 (2004)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2005~2006)
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07~2008)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2009~2011)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12~2015)
''''''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와다 유타카'''
'''(2012~2015)'''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1. 소개
2. 데뷔 이전
3. 현역 시절
4. 감독 시절
4.1. 2012년
4.2. 2013년
4.3. 2014년
4.4. 2015년
5. 기타


1. 소개


한신 타이거스 감독이자 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 한신의 암흑기였던 1980년대 말 ~ 1990년대의 명선수. 17년간의 선수생활 동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꾸준히 3할 언저리 타율을 기록한 교타자 2루수.

2. 데뷔 이전


치바현 출신으로 아비코 고등학교에 진학, 1학년 때 하계 코시엔에 출장했지만 2회전에서 이시미네 카즈히코[1]가 4번타자로 활약하던 토미시로 고교에 연장 접전 끝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니혼대학으로 진학하여 1학년 때 팀을 대학리그 2부 우승과 함께 1부 승격에 공헌했고 3학년 때는 대학리그 수위타자를 수상했다. 또한 2년 연속 일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금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그 후 1984년 드래프트 3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지명받으며 프로에 데뷔한다.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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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첫 해인 1985년은 39경기 49타석의 기회를 받으며 백업 멤버로 그럭저럭 뛰었는데, 그 해 한신은 '''일본시리즈 우승을 했다.'''
다음 해인 1986년엔 고작 8경기 5타석의 기회를 받는 데 그쳤지만, 3년차인 1987년부터 다시 계속해서 출장기회를 늘려가다가 1988년,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 아래에서 포텐이 터져 테이블 세터로 중용되면서[2] 처음으로 시즌 100안타를 달성. 단숨에 주전 리드오프로 자리잡으면서 이후 한신 타선에서 교타자로 맹활약하며 테이블 세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만 장타력이 꽤나 낮아서[3] 이전의 리드오프였던 마유미 아키노부보다는 종합적으로 후달렸다. 하지만 1~2번 타순에서 안정적으로 단타를 생산하고 번트등 작전수행능력이 뛰어난 전형적인 교타자였다. 여기에 1992~1994년 3년 연속 골든글러브(NPB)를 차지한 안정적인 수비력도 갖춘 선수였다.
1990년대, 특히 1990년대 중반 한신의 주력 선수 중에는 신죠 츠요시히야마 신지로와 같은 공갈포 선수들이 많았기에[4] 와다는 더욱 돋보였다. 1993년엔 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했고[5] 1997년에는 '''개막 이후 24경기 연속 안타'''[6]라는 일본 기록을 달성하였는데, 당시 롯데 자이언츠8888577이나 LG 트윈스6668587667을 연상시키던 암흑기에서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상태이던 한신 팬들은 와다의 타율만이 야구 보는 유일한 낙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해 시즌 도중인 7월,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데드볼을 맞아 중지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2개월 간 출장하지 못하다가 시즌 말에 겨우 복귀하면서 결국 타율은 3할에 도달했지만 96시합 출장에 그쳤는데, 이해를 끝으로 와다는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다. 바로 다음해인 1998년에 다시 풀 출장에 가까운 130시합에 출장했지만 타율이 .272로 전년도보다 떨어졌고, 이듬해인 1999년 노무라 카츠야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부턴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 출장기회가 급감했다.
2001년 은퇴시즌에는 선수 겸 타격코치를 맡았지만 두 가지를 다 하려다 보니 성적이 많이 떨어졌고, 결국 2001 시즌 종료 직전에 은퇴를 발표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식 때 같은 치바 현 출신이자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축하해주기도 했다.
이후 2003년까지 1군 타격코치, 2004년엔 2군 종합코치, 2005년~2006년엔 다시 1군 타격코치, 2007년~2008년엔 1군 수비주루코치, 2009년부터 또다시 1군 타격코치를 맡는 등 여러 보직을 오가며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1985~2001 17시즌간 통산 성적은 아래와 같다.
1713경기 6805타석 5972타수 1739안타 타율 0.291 29홈런 94도루 720득점 407타점 600사사구 544삼진.

4.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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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신 타이거스는 마유미 아키노부와 2년 계약 연장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문제는 마유미 아키노부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경기 운영이었다. 잦은 야수 교체[7], 접전에서의 약한 모습 등이 지적을 받았다. 급기야 6월에 한신은 리그 꼴지까지 추락했고, 그 시기 한신 전기철도 주주총회에서는 마유미가 까이고[8] 있었다.
그래도 한신 프런트는 계약 기간은 지켜 주려고 별 삽질을 다 벌였고 팀도 3~4위권에서 외줄타기 경쟁을 벌였지만, 팬심은 이미 마유미에게 등돌린 지 오래였다. 9월엔 메가폰이 관중석에서 날아들 정도였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권 경쟁에서도 밀리면서 마유미는 결국 10월 중에 해임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메우는 사람이 바로 이 와다 유타카.

4.1.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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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에서 그 유명한 스파이스(...)를 말하는 장면.
'''지금 전력에서 약간의 양념[9]만 더 있으면 우승 도전 가능하다''' 라고 설레발을 쳤으나, 그에게 돌아온 건 같은 해의 KIA 타이거즈를 연상케 하는 최악의 타격부진 과 '''5위'''라는 최종 성적표였다. 이 타격 부진으로 제일 크게 고생한 선수가 한신의 에이스 노우미 아츠시. 저반발 통일구의 버프를 받아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도 '''10승 10패'''에 머물렀다! 여기에 노우미와 맷 머튼의 트러블 설이 퍼지는 등 팀 케미스트리도 와해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시즌 전 말한 '양념'(스파이스)이 이런 거였냐!는 비아냥만 남게 되었으며 '스파이스'는 와다 감독의 야구를 비판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4.2. 2013년


2013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입성에 실패했던 니시오카 츠요시, 후쿠도메 고스케 등을 데려왔고, 신인 후지나미 신타로 등이 가세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뒤를 이어 시즌 2위를 넉넉히 수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에서 원정팀[10]이자 3위였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2경기동안 15점이나 내주며 '''1승도 못하고 2패로 완벽히 틀어막히며 광탈하고 말았다.''' 히야마 신지로가 시리즈이자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2점짜리 홈런을 날린 것이 그나마 훈훈한 위안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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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시즌 중 예능인 호시 나나와의 불륜 문자가 발견되는 스캔들이 나기도 했다.
한편, 한신은 그간 우승을 못 하는 이유가 후지카와 큐지의 부재로 인한 빈약한 뒷문이라 생각하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오승환을 영입하였다.

4.3. 2014년


그럭저럭 팀이 3위에 안착하긴 했지만 중계 투수진들이 너무 부실하다는 점이 문제로 거론되는 중. 오승환이라는 확실한 마무리까지 가면 되는데 이게 안 되는 상황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5월 13일 현재 세리그 3위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긴 했지만 실상은 역전패를 너무 많이 당했다는 것이 문제다. 역전패만 아니었어도 리그 1위까지 노려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
결국은 겨우 리그 2위에 안착시켰고 1년 재계약이 확정되었다. 그러고 오승환을 또 갈면서 리그우승팀 요미우리를 개발살 내버리며 2014년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니시오카 츠요시의 삽질 플레이 끝에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4.4. 2015년


4월 23일 현재 팀은 9승 13패 리그 5위로 쳐져 있다. 이에 대해 와다 감독의 안일한 경기 운영과 부진한 타자의 '뚝심' 기용이 쿤 문제로 지적되는 중.
'''그런데 5월과 교류전에서 승을 좀 벌어놓으며 순식간에 거인을 끌어 내리고 선두 자리를 먹었다!''' 더 희한한 건 '''팀타율 팀방어율 팀득점 팀실점 전부 최악이거나 그 일보 직전인데 1위라는 거'''.
7월 5일 경기에서는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기 위해 덕아웃에서 2루까지 전력질주를 하기도 했다. [11]
8월 들어 가끔 가다 이상하게 말아먹는 거만 빼면 세리그 1위를 어케든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리그 1위 주제에 승패마진이 +한 자릿수란 게 함정...
그렇게 9월까지 1위자리를 지켜왔지만 9월 들어와서 팀 전체가 부진에 빠지면서 3위까지 추락했다. 그리고 10경기를 채 남겨놓지 않은 9월 25일 현재 선두 야쿠르트와는 4게임차로 벌어져서 구단 창단 80주년을 기념해서 목표로 설정한 리그 우승은 절망적인 상황. 지난 해에도 지도력에 의문을 표하는 의견이 구단 내외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신 역사상 처음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돌파한 일본시리즈 준우승 감독을 내칠 수 없어서 계약을 1년 연장했고[12] 암암리에 재계약의 조건이 '''기본이 리그 우승이고 최소한 2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해서 일본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것'''[13] 이라는 소문이 오사카 지역의 미디어를 통해서 전해지는 가운데,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오사카 지역 미디어는 전부 올시즌을 끝으로 재계약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해임될 것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결국 추석 연휴 중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후임으로는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취임했다.
퇴임 후엔 한신 구단에서 시니어 어드바이저 직을 수행하는 중.

5. 기타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 중 하나. 선수-지도자 커리어 내내 한신 타이거스 외의 다른 팀 유니폼에 손 댄 적 자체가 없다. 그야말로 한신의 성골. 이 때문에 와다가 현역 시절에 썼던 등번호 6번은 타이거스의 교타자를 상징하는 번호이기도 했다. 와다 이전에는 70~80년대 타이거스의 교타자였던 후지타 타이라의 번호였고, 와다 이후에는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사용하다 가네모토 은퇴 후 준영구결번으로 둔 상태다. 일단은 2014년 일본시리즈에 나가봤으니 요시다 요시오, 오카다 아키노부 등 감독으로서 나름 성공한 몇 안 되는 OB이기도 하다.
다만 전체적으로 베테랑이나 타 팀 출신 선수의 기용에 많이 의존하는 경향[14]이 있다고 한다. [15]
[1] kt wiz의 코치를 맡았던 그 분 맞다. 이시미네는 고교 졸업 후 와다보다 먼저 프로 입단을 결정해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강타자로 활약하다가 훗날 FA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해 와다와 함께 팀메이트로 뛰기도 했다. [2] 오노 히사시, 나카노 사토루와 함께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 그룹에 빗대 소년대라 불렸다.[3] 커리어 17년 간 장타율이 3할 대에 머물렀다. 4할을 넘긴건 1986년과 1990년이 전부이다. 그것도 1986년엔 장타율이 무려(?) .667이긴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8경기 5타석밖에 출장하지 않아서(...)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1990년은 개인 최다인 8홈런을 치긴 했지만 장타율이 .401로, 4할에 간신히 턱걸이했다.[4] 90년대 중후반엔 이런 현상이 극에 달했다. 결국 1997 시즌 한신은 큰 맘 먹고 전직 메이저리거 거포를 영입했지만 그 결과는...[5] 다만 타이틀 제정이 이듬해인 1994년(...)에 이루어져서 상은 못 받았다..[6] 이전 기록은 1953년 한큐 브레이브스래리 레인즈가 세운 '''20경기 연속 안타'''였다.[7] 심할 땐 투수대주자로 기용한 경우도 많았다고. 물론 임창용삼성 시절에 대주자로도 뛰어 봤고, 멀리 갈 거 없이 임정우2013년 6월 2일 경기에서 대주자 기용이 된 적 있었다.[8] 야구와는 백만년 떨어져 있는 순전히 경영 관련 회의에서까지 언급될 정도면 말 다했다. [9] 원문에서는 '스파이스'(スパイス)[10] 클라이맥스 시리즈 규정 상, 순위가 높은 팀의 홈에서 모든 경기가 치뤄진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조.[11] 참고로 일본은 웬만하면 비디오 판독 자체가 '''없다!'''. 그나마 제한적으로 하는 비디오 판독도 '''홈런/파울 판독'''에만 쓴다고.[12] 일본시리즈 준우승 감독에게 고작 1년 연장 밖에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팀에서 이 사람의 지도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13] 3위면 안된다. 왜냐하면 3위일 경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해도 전부 원정경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포스트 시즌의 입장수입을 하나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 운 좋게 일본시리즈에 갔다고 해도 홀수 해엔 퍼시픽 리그 팀이 홈 어드밴티지를 얻기 때문에 사상 초유의 9차전까지 일본시리즈가 계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잘해봐야 3경기밖에 홈경기를 개최하지 못한다.[14] 일본어 위키 참고[15] 2018년부터 서울 LG 감독으로 부임하며 진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