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나르트 스코글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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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인테르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적인 레프트윙.
렌나르트 스코글룬드는 192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뿐만 아니라 아이스하키, 농구 등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과 축구하고 노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테니스공으로 드리블을 하며 드리블 능력을 키웠다.
스코글룬드는 1943년 IK 스차르난[1] 의 유스팀에서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유스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1944년에는 함마르비 IF로 옮겼다. 2년간의 유스 수업 끝에 1군에 데뷔하였고, 여기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나카[2] 가 붙여졌다.
그의 데뷔 시즌은 1946-47이었는데, 당시 소속팀 함마르비의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다. 2부 리그의 동부 지구에서 꼴찌로 처진 팀은 리그 재조정으로 인해 4부 리그로 추락했고 스코글룬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기 기사로 일을 하며 투잡을 뛰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 하나는 대단했고 곧 함마르비의 아이콘이었다. 몇 년을 노력한 끝에 결국 1부 리그로 팀을 끌어올리는데에는 성공했고, 이로 인해 더 큰 클럽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함마르비는 재정 문제 때문에 AIK로 그를 팔 수밖에 없었다. 당시 AIK는 헨리 칼손의 이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었고, 그를 대체자로 낙점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 시즌 동안 단 다섯 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계약상의 문제로 그에게 너무 비싼 돈이 들어간 것.
그러던 중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한 그는 칼-예리크 팔미에르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스웨덴의 결승 리그 진출을 이끌었다. 결승 리그에서도 김빠진 마지막 스페인전을 제외한 앞선 2경기에 모두 출전하였고, 그의 활약에 꽂힌 브라질의 상파울루 FC가 만 달러로 이적 제의를 했다. 하지만, AIK는 더 많은 돈을 갖고 오기를 원했고, 이 제안에 혹한 팀이 바로 이탈리아의 인터 밀란이었다. 인터 밀란은 상파울루가 제의한 금액의 5배인 5만 달러의 이적료를 제의하였고, AIK는 그에 응했다.
이탈리아에 진출한 첫 시즌. 21살짜리 풋내기 윙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그는 12골(29경기 출전)로 답을 했다. 비록 우승에는 한 지붕 두 가족 라이벌인 AC 밀란에게 단 1점차이로 아깝게 실패했지만 그의 데뷔 시즌 임팩트는 대단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기어코 스쿠데토를 차지했고, 다음 해에도 우승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스코글룬드는 두 번의 챔피언 확정 시합에서 모두 골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
이렇게 나름 대단한 기록을 남겼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술이었다. 스코글룬드는 술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알코올 의존증 수준까지 이르렀고, 훈련장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밀라노의 바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는 점점 인터 밀란 보드진들의 어그로를 쌓았고, 출장수도 반 이하로 줄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58-59 시즌을 끝으로 삼프도리아로 이적하게 되었다. 새로운 팀에서는 잠깐 정신을 차리는 듯 했지만, 그는 술 때문에 결국 이혼당하고 술에 취한 채로 경기를 하는 등 막장으로 치달아갔다. 삼프도리아도 견디다 못하고 그를 팔아치웠고, 그의 또 다른 행선지는 팔레르모였다. 이미 이때의 그는 이탈리아에서 뛸만한 실력은 사라졌고, 팀에서는 야간 통금까지 해가며 그를 단속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 여기서도 1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방출당하고 말았다.
스웨덴의 친정팀 함마르비로 돌아온 그는 커리어 사상 최고의 골을 넣기도 했지만, 팀은 강등과 승격을 오르내렸고, 커리어의 마지막은 그의 형이 감독으로 있던 쉐르토르프에서 보냈다.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 출전 수가 상당히 부족한데, 이탈리아에서 뛰는 원인도 있었지만 그의 술 사랑도 큰 문제였다. 1950년 월드컵 이후로 A매치 출전이 없던 그를 결국 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부르기는 했고, 여기에서 모든 경기를 뜀으로서 조국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스티그 안데르손은 그를 위해 Vi hänger me(We hang me)라는 노래를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의 월드컵이 그의 A매치 출장의 전부였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스코글룬드의 인생은 완벽히 망가졌다. 중독에 빠진 몸 상태는 날로 나빠졌으며, 스톡홀름에서 홀로 살며 이탈리아에 남은 아이들을 그리워했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와 함께 잡지사를 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그는 1975년 7월 8일에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볼 기술이 대단했고 빠른 윙어였다. 또한 정확한 킥을 가지고 있어서 코너킥을 직접 골로 넣은 적도 있다고 한다.
1. 개요
1950년대 인테르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적인 레프트윙.
2. 생애
2.1. 어린 시절
렌나르트 스코글룬드는 192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뿐만 아니라 아이스하키, 농구 등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과 축구하고 노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테니스공으로 드리블을 하며 드리블 능력을 키웠다.
스코글룬드는 1943년 IK 스차르난[1] 의 유스팀에서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유스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1944년에는 함마르비 IF로 옮겼다. 2년간의 유스 수업 끝에 1군에 데뷔하였고, 여기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나카[2] 가 붙여졌다.
2.2. 클럽
그의 데뷔 시즌은 1946-47이었는데, 당시 소속팀 함마르비의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다. 2부 리그의 동부 지구에서 꼴찌로 처진 팀은 리그 재조정으로 인해 4부 리그로 추락했고 스코글룬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기 기사로 일을 하며 투잡을 뛰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 하나는 대단했고 곧 함마르비의 아이콘이었다. 몇 년을 노력한 끝에 결국 1부 리그로 팀을 끌어올리는데에는 성공했고, 이로 인해 더 큰 클럽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함마르비는 재정 문제 때문에 AIK로 그를 팔 수밖에 없었다. 당시 AIK는 헨리 칼손의 이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었고, 그를 대체자로 낙점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 시즌 동안 단 다섯 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계약상의 문제로 그에게 너무 비싼 돈이 들어간 것.
그러던 중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한 그는 칼-예리크 팔미에르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스웨덴의 결승 리그 진출을 이끌었다. 결승 리그에서도 김빠진 마지막 스페인전을 제외한 앞선 2경기에 모두 출전하였고, 그의 활약에 꽂힌 브라질의 상파울루 FC가 만 달러로 이적 제의를 했다. 하지만, AIK는 더 많은 돈을 갖고 오기를 원했고, 이 제안에 혹한 팀이 바로 이탈리아의 인터 밀란이었다. 인터 밀란은 상파울루가 제의한 금액의 5배인 5만 달러의 이적료를 제의하였고, AIK는 그에 응했다.
이탈리아에 진출한 첫 시즌. 21살짜리 풋내기 윙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그는 12골(29경기 출전)로 답을 했다. 비록 우승에는 한 지붕 두 가족 라이벌인 AC 밀란에게 단 1점차이로 아깝게 실패했지만 그의 데뷔 시즌 임팩트는 대단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기어코 스쿠데토를 차지했고, 다음 해에도 우승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스코글룬드는 두 번의 챔피언 확정 시합에서 모두 골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
이렇게 나름 대단한 기록을 남겼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술이었다. 스코글룬드는 술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알코올 의존증 수준까지 이르렀고, 훈련장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밀라노의 바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는 점점 인터 밀란 보드진들의 어그로를 쌓았고, 출장수도 반 이하로 줄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58-59 시즌을 끝으로 삼프도리아로 이적하게 되었다. 새로운 팀에서는 잠깐 정신을 차리는 듯 했지만, 그는 술 때문에 결국 이혼당하고 술에 취한 채로 경기를 하는 등 막장으로 치달아갔다. 삼프도리아도 견디다 못하고 그를 팔아치웠고, 그의 또 다른 행선지는 팔레르모였다. 이미 이때의 그는 이탈리아에서 뛸만한 실력은 사라졌고, 팀에서는 야간 통금까지 해가며 그를 단속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 여기서도 1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방출당하고 말았다.
스웨덴의 친정팀 함마르비로 돌아온 그는 커리어 사상 최고의 골을 넣기도 했지만, 팀은 강등과 승격을 오르내렸고, 커리어의 마지막은 그의 형이 감독으로 있던 쉐르토르프에서 보냈다.
2.3. 국가대표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 출전 수가 상당히 부족한데, 이탈리아에서 뛰는 원인도 있었지만 그의 술 사랑도 큰 문제였다. 1950년 월드컵 이후로 A매치 출전이 없던 그를 결국 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부르기는 했고, 여기에서 모든 경기를 뜀으로서 조국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스티그 안데르손은 그를 위해 Vi hänger me(We hang me)라는 노래를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의 월드컵이 그의 A매치 출장의 전부였다.
2.4. 은퇴 이후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스코글룬드의 인생은 완벽히 망가졌다. 중독에 빠진 몸 상태는 날로 나빠졌으며, 스톡홀름에서 홀로 살며 이탈리아에 남은 아이들을 그리워했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와 함께 잡지사를 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그는 1975년 7월 8일에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평가
볼 기술이 대단했고 빠른 윙어였다. 또한 정확한 킥을 가지고 있어서 코너킥을 직접 골로 넣은 적도 있다고 한다.
나카는 박수를 받으며 살기를 원했고, 코미디언처럼 남들을 웃기며 살기를 원했다. 나카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면 코미디언은 죽는다. 환호가 잦아들자 나카는 죽었다. - 스웨덴의 한 저널리스트
4. 뒷 이야기
- 이탈리아에서 뛸 당시 스코글룬드는 시즌이 끝나고 휴식기에는 스웨덴으로 가서 사람들과 지내며 묘기를 보여주는 것을 즐겼는데 이것이 그의 인기 비결 중 하나였다.
5. 수상
5.1. 클럽
- 스웨디시 컵 우승 1회: 1949-50(AIK)
- 세리에 A 우승 2회: 1952–53, 1953–54
5.2. 국가대표
[1] BK Stjärnan. 한국어로 별이라는 뜻[2] Nacka. 그와 관련된 여러 차례의 이적 제의를 보냈던 축구팀의 이름이자 그의 형이 뛰었던 축구팀이었다는 설도 있고, 사실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