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1999년

 


'''롯데 자이언츠 시즌별 성적'''
롯데 자이언츠/1998년

'''롯데 자이언츠/1999년'''

롯데 자이언츠/2000년
[image]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한국시리즈 진출 확정 순간.
1. 개요
2. 시즌
3. 플레이오프
4. 한국시리즈
5. 기타


1. 개요


비록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쳤지만, 롯데팬들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시즌으로 남아있기에 이례적으로 본 항목이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양대리그제로 치러진 해당 시즌에서 롯데는 두산 베어스, 현대 유니콘스,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드림리그로 편성되었다. 시즌 전 예상은 다소 암울했던 편. 이미 2년 연속으로 꼴찌를 한 데다 뚜렷한 전력 강화 요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난 시즌 도중 롯데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김용희 감독을 경질할 정도였으며, 투수코치였던 김명성이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잘 추스린 덕택에 정식 감독으로 승격된 상황. 기대에 못미친 투수 차명주를 내주고 포수 최기문을 영입해 온 것과, 전년도 꼴찌를 한 탓에 펠릭스 호세라는 용병을 뽑아온것과 공익근무에서 소집해제된 박현승 외에는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1]
이 시즌 롯데의 주장은 박정태로 선임되었다.

2. 시즌


그러나 웬걸. 정작 시즌에 돌입하자마자 롯데는 개막전부터 6연승을 질주하며 승승장구했고, 리그 1위는 물론 8개구단 전체승률 1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2년 연속 꼴찌에서 용병 하나 추가된 것 말고는 딱히 전력강화의 요인이 없었음에도 엄청난 성적이 난 것은 전력의 불안요소들이 모조리 상수로 터져준 탓. 우선 지난 시즌부터 발동이 걸린 문동환이 확고부동한 1선발로 17승 4패를 올리며 승률왕에 등극한 것을 시작으로, 주형광이 13승을 보태며 선발진의 두 축을 이뤘다. 게다가 삼성에서 영입한 이후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해주지 못했던 박석진이 이 시즌 각성하여 11승 3패 2세이브로 맹활약했다.[2] 이 밖에도 중진급 투수로 올라선 염종석이 선발진에서 힘을 보탰고, 후반기부터는 입단후 늘 유망주에만 머물렀던 포크볼러 박보현이 팀의 5선발로 맹활약했다.[3]
중간계투에선 대졸신인 정원욱이 전반기에 엄청난 활약을 해줬다. 처음 추격조로 몇 차례 등판을 하다가 공이 좋아 승리조로 뛰기 시작했는데 롯데가 이기는 경기마다 등판해서 좋은 공을 던져주며 위력을 뽐냈다. 시즌 초반 포스는 가히 신인왕감이었으나 당시 김명성 감독이 이례적일 정도로 정원욱을 마구잡이로 굴려대는 바람에, 당시 PC통신 야구동호회의 롯데팬들은 정원욱 그만좀 갈아넣으라고 김명성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4] 다만 박동희 이후 수 년간 무주공산이었던 마무리 투수에 대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는데, 당초 마무리 투수감으로 뽑아온 용병 마이클 길포일이 제구력이 형편없다는 게 드러난 후 시즌 초반 일찌감치 퇴출된 탓. 그 탓에 시즌 초반엔 고정된 마무리가 없었으나 시즌 중반부터 근래 2년간 선발로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던 강상수에게 맡겼고, 강상수는 19세이브에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길포일이 퇴출되고 대체 용병으로 데려온 에밀리아노 기론이 터져줬다. 호세의 말동무로 데려왔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올 정도로 구단으로서도 팬들로서도 기대하지 않은 영입이었으나, 기론은 당시로선 생소했던 서클 체인지업이라는 구질을 바탕으로 선발과 중간계투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줬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선 롯데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5]
타선은 1번부터 9번까지 그야말로 쉬어갈 데가 없는 막강 화력을 자랑했고, 이는 롯데가 선두를 질주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우선 지난 2년간 부진한 성적으로 한물 갔다는 평을 듣던 김응국을 지명타자로만 기용하며 1번 타순을 맡겼는데 이게 제대로 적중했다. 수비 부담에서 해방되어 타격에만 집중했던 김응국은 .294의 타율과 141개의 안타로 공격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박정태, 펠릭스 호세, 마해영으로 이어진 3-4-5 클린업트리오는 가히 8개구단 최강의 화력을 자랑했다. 영원한 3할타자로 불렸던 박정태는 늘 그랬듯이 제 몫을 해줬고, 호세는 KBO 역사상 최고의 용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록적인 시즌을 보냈으며, 그간 공갈포의 이미지가 강했던 마해영 또한 .372의 타율로 컨택에서 각성을 하며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활약을 보여줬다. 롯데 역사상 이와 비견될 수 있는 클린업트리오는 2010년의 홍성흔, 이대호, 카림 가르시아 정도밖에 없다.
주전급들이 지칠 무렵인 후반기부터는 오랜 재활을 끝내고 복귀한 손민한과, 신인 임재철이 1군에 등록되어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둘 모두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 정도로 나름 소금같은 역할을 해 줬다.
팀 분위기에 있어서도 주장 박정태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어갔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본인이 자진해서 유니폼의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리는 농군패션을 시작하면서 전 선수단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지시했던 것. 그래서 이 당시 롯데 하이라이트를 찾아보면 용병과 일부 투수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죄다 농군패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팀에는 박정태보다 선배인 선수들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박정태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정도로 박정태의 팀내 위상과 카리스마는 후덜덜한 수준이었다. 박정태 본인으로서도 당시 신기록이자 현재도 단일시즌 기준으로는 최다인 31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특히 20경기 초반대에서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끝이 날 위기에 놓였을때도 후배들이 '정태형에게 한 타석 더 기회를 만들어주자'고 결의하고 타석에서 더욱 집중력을 발휘, 결국 9회에 박정태가 다시 한 번 타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여기서 기어이 박정태가 안타를 쳐내 기록 연장을 할 수 있게끔 해 주는 등, 계속 1위를 질주하는 성적과 함께 좋은 팀 분위기임을 보여줬다.[6]
급기야 전반기 마지막 경기였던 당시 드림리그 2위 두산과의 더블헤더에서 2승을 싹슬이하며 두산과의 게임차를 6.5게임차로 벌렸고, 급기야 두산의 김인식 감독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1위 롯데의 추격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만큼 당시 롯데의 전력이 강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반증.
좋은 팀 성적 탓에 다수의 선수가 올스타전에 선발되었으며, 박정태가 MVP를 차지해 2년 연속으로 미스터 올스타가 되었다. 현재도 2년 연속 수상은 박정태가 유일 무이.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롯데가 후반기에 삐긋하기 시작하는데, 후반기 시작 후 얼마 뒤 사직 LG전 4연패를 시작으로 9연패의 수렁에 빠진다. 이 기간에 삼성전에서 이승엽의 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전술했듯이 중간계투의 핵이었던 정원욱이 뻗어버렸고 투수진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한 탓. 이 와중에 이승엽에게로부터 당시 한국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기록인 43호 홈런[7]을 얻어맞기도 했다. 9연패를 당했음에도 굳건하게 1위를 사수할 정도로 워낙 전반기에 많은 승수를 벌어놓긴 했지만, 후반기부터 힘을 낸 두산 베어스에 야금야금 따라잡히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약체 쌍방울전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1위자리를 내놓기도 했다. 그나마 박석진과 기론이 후반기에 유독 분전하며 버텨준 덕택에 다시 1위를 탈환하며 최종전 전까지 1위를 지켜나갔다. 그와 별개로 두산의 후반기 상승세가 굉장하기도 했다.
10월 7일 131경기인 잠실 LG전에서 포스트시즌 실패가 확정된 LG에 4:5로 역전패하며 드림리그 1위 확정에 실패해 결국 시즌 마지막 경기인 132경기째를 10월 8일 두산 베어스와 잠실에서 드림리그 1위 겸 전체승률 1위 자리를 놓고 단두대매치를 벌인다. 131경기까지 치른 두 팀의 전적은 75승 51패 5무승부로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특히 롯데로서는 승리가 간절했는데 창단 이후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정규리그 1위 자리도 그렇지만, 1위를 해야만 플레이오프에서 상대전적이 열세였던 삼성 라이온즈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8] 그러나 3:3으로 맞선 9회말 강혁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 결국 한 끗 차로 드림리그 2위의 성적을 받아들고 썩 내키지 않은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드림리그 팀간의 경기는 승패마진 23 중 19를 벌 정도로 상당히 강했다. 두산에 12승1무7패, 현대에 15승5패, 해태에 12승8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매직리그 팀에겐 꽤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화에 10승1무7패, 쌍방울에 12승2무4패를 기록했지만 삼성에 6승1무11패, LG에 8승10패에 그쳤다. 특히 LG는 중요한 상황마다 롯데의 발목을 잡았는데 개막 6연승이 끊어진 것도 LG전, 5월초 마산에서 9회 연속 뒤집기로 역전패한 것도 LG전, 후반기 9연패의 시작도 사직 LG전, 드림리그 1위 확정을 무산시킨 것도 LG전이었다. 반면 두산은 드림리그 팀들을 상대로 승패마진 1에 그쳤으나 매직리그의 LG를 13승5패, 쌍방울을 16승1무1패로 학살하며 승패마진을 벌었다. 잠실 이웃 두산에 무기력했던 LG는 두산 2중대라도 되듯 고비마다 롯데의 발목을 잡으니 더 얄미울수밖에...

3. 플레이오프




4. 한국시리즈




5. 기타


마해영이 타격 1위, 문동환이 승률왕을 차지하였고, 골든글러브는 박정태가 2루수부문, 호세가 외야수 부문을 수상했다. 덤으로 호세가 이 시즌 한국 프로야구 통산 1만호 홈런을 날렸다.
[image]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시즌 가운데선 롯데팬들에게 가장 좋은 시즌[9]으로 남아있는 탓인지, 2013년 6월 26일 '응답하라 1999!'라는 테마로 당시 멤버들을 초청한 챔피언스 데이 행사를 가졌다.[10] 호세가 오랜만에 입국해서 시구를 해 많은 환호를 받았다. 이 시즌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과 화끈한 팀컬러의 실종으로 단 한 차례로 매진되지 않았던[11] 사직 야구장이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진을 기록했다.
다만 IMF의 직격탄을 맞은 직후의 시즌이어서 그런지, 롯데구단 역사상 시즌 내내 1위를 질주했던 유일한 시즌이자 박정태의 연속경기안타 기록의 호재에도 불구하고 사직구장의 흥행은 기대에 못 미쳤다. 총 관중 77만명 수준으로 경기당 11,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 심지어 플레이오프 3차전의 경우 무려 4년만의 가을야구 첫 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1만명이 넘는 관중들이 들어왔을 정도. 다만 플레이오프의 명승부 덕택인지 한국시리즈 1차전은 오랜만에 매진되었으며 2차전도 매진에 준하는수준인 2만 8천명 수준이 들어왔다.[12]

[1] 되려 팀의 선발진의 한 축이었던 박지철마저 부상으로 이 시즌 출장이 불가능한 상태였다.[2] 특히 박석진은 저 유명한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MVP에 등극했을 정도로 포스트시즌에서도 맹활약을 해 줬다.[3] 박보현의 경우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 등판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4] 정원욱은 우려대로 결국 전반기를 마감할 시점에 허리 부상을 당하고 되고 그 이후 다시는 좋은 공을 던지지 못하고 몇년 후 은퇴하고 말았다. 짧은 감독경력이지만 덕장으로 소문난 김명성 감독의 유일한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선수.[5]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를 거치며 위기상황에서 롱릴리프로 등판해 8경기 29.1이닝 평균자책점 0.92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 롯데 팬들은 기론의 고군분투에 눈물이 난다거나, 시리즈 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재계약해서 큰 돈을 안겨주자는 여론이 대세였다.[6] 다만 박정태 본인은 이당시 자신의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팀에 피해를 끼칠까봐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팀이 계속 1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계속 이겨야 하는데 그보다 자신의 기록으로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었기 때문. 심지어 김명성 감독마저 이당시 기록에 좀 더 신경쓰라는 얘기를 해 줬다고 했을 정도.[7] 그 당시 최다홈런 기록은 1998년 OB 베어스의 타이론 우즈가 세운 42개[8] 당시 플레이오프는 리그 1위팀이 상대리그 2위팀, 리그 1위팀은 반대로 상대리그 1위팀을 7전 4선승제로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매직리그 1위인 삼성을 피하기 위해선 롯데가 드림리그 1위가 되어야 했다.[9] 사실 구단 역사상 가장 좋은 시즌이라 봐도 무방하다. 구단 역사상 유일하게 피타고리안 승률, 팀 WAR 총합이 1위였던 시즌이고 이 해 기록한 승률 0.591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10]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는 애석하게도 초청되지 못했다.[11] 개막전에 만원 관중을 채우지 못했으며 어린이날 홈경기도 매진되지 않았다.[12] 당시 사직구장의 좌석수는 지금보다 더 많은 30,000석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