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혁
1. 개요
前 롯데 자이언츠 소속 야구 선수. 심재원-한문연-김선일-강성우-'''임수혁'''-최기문-강민호로 이어지는 롯데 자이언츠의 비운의 명포수.
2. 선수 경력
1969년 6월 17일 서울 출신으로, 서울방배초등학교, 강남중학교, 서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1988학번)를 졸업하여 1992년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을 거절하고[4]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한 후, 1994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1순위 지명을 다시 받아 프로로 데뷔하였다.
공격형 포수였던 그는 당시 롯데 주전 포수였던 강성우에 비해 수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입단 첫 해인 1994년에는 지명타자와 대타로 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995년부터는 롯데의 고질적인 거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주전 포수로 나서게 되고, 15홈런을 기록하며 1995년 입단한 마해영과 33개의 홈런을 합작하여 1982년 김용철-김용희의 용용포에 이은 '''마림포'''[5] 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김선일, 강성우라는 수비력은 정상급이지만 장타에선 아쉬웠던 포수진과 박정태, 김응국, 김민호(1961)로 대표되던 단타 라인업의 롯데타선에서 그의 부드러운 장거리포는 무척이나 반가운 옵션이었다. 1995년 홈런 1위 기록은 OB 베어스의 김상호가 기록한 25개인 것과, 프로야구 원년부터 1995년까지 30홈런 이상을 친 홈런왕이 단 3회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임수혁이 어느 정도의 거포였는지 알 수 있다. 40홈런 이상 뻥뻥 날리는 홈런왕 경쟁이 벌어지는 지금이라면 홈런왕까지는 아니어도 30홈런 이상은 날리는 거포인 셈.
1996년에도 113경기에 출장하며 11홈런을 기록하여 롯데의 안방마님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무릎 부상을 안고 출전해 온 탓에 1997년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부상의 여파로 1997년에는 49경기에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1996년 이후 단 한번도 타율 2할 6푼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롯데의 주전 포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클러치 히팅 능력 때문이다.
그는 큰 경기에 강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선수였다. 1995년 OB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10회초 희생플라이로 결승타점을 기록한 것이나,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9회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려내는 등(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참고)의 중요한 경기에서의 결정적인 활약으로 인해, 그는 롯데팬이 열광하는 선수가 되었다. 큰 경기에서 기대감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의 활약들을 보자. 임수혁 최고의 순간 top10
3. 돌아오지 못한 2루 주자
3.1. 경기 도중 쓰러지다
1999년 플레이오프의 감동이 이어진 2000년 4월 18일, 롯데는 잠실에서 LG 트윈스와의 경기를 가진다. 2회초 타석에 들어선 임수혁은 유격수 류지현의 실책으로 1루에 안착했고, 이어진 테드 우드의 우전 안타로 2루에 진루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음 타자였던 조성환이 타석에 들어선 그 때, 갑자기 2루에 있던 임수혁이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채 다리를 떨며 쓰러진 그의 모습을 본 구단 트레이너가 달려 나왔으나, 대처법을 몰랐던[6] 트레이너와 선수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들것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들것을 통해 덕아웃으로 옮겨진 그는 잠시 후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실려 수십분 후 강남시립병원(현 서울의료원 강남분원)으로 옮겨졌고, 간신히 맥박과 호흡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말았다.
원인은 그가 프로 입단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지병인 부정맥이었다. 2루에 진루한 후, 그의 심장이 갑자기 느리게 뛰면서 뇌로 올라가야 할 혈액이 부족해져서 쓰러졌던 것. 심폐소생술이 급박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간호사를 비롯한 선수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숨을 쉴 수 있게 유니폼 단추를 풀고 물을 가져다 몸을 적시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만약 그 당시에 주변에서 심폐소생술을 바로 해줬더라면 살 수도 있었다.
3.2. 같이 뛰자, 임수혁
KBO는 임수혁이 심장 부정맥으로 쓰러진 뒤, 약 2달 만인 2000년 6월 2일에 임수혁 돕기 행사를 열어 잠실에 방문하는 팬 1인당 500원을 적립하여 임수혁의 치료비로 전달하였다. 이날 벌어진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는 '같이 뛰자 임수혁'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성금과 임수혁의 쾌유를 비는 팬들의 메시지를 임수혁의 가족에게 전달했다.
2000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는 여러 선수들이 임수혁의 쾌유를 바라면서 올스타전 1차전을 시작하기 전, 모임을 가지고 승리팀 감독에게 전해지는 상금과 감독 홈런레이스 입상자 상금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보태기로 했다. 이에, 선수들도 성금 모금에 동참하여 선수들이 승리팀 수당 1000만원씩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보태기로 해, 임수혁 치료비 성금이 2,550만원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축구선수 김병지도 2000년 8월 16일 임수혁에게, MVP 및 캐넌슈터왕으로 얻은 상금 중 300만 원을 임수혁의 치료비에 보탰고, 임수혁을 위한 인터넷 경매까지 열렸다.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도 임수혁을 위해 성금 1000만원을 전달했다.[7]
특히 현대 유니콘스의 경우 1회성 성금 전달로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매월 선수단이 자체적으로 모으는 상조회비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 치료비에 보태도록 롯데 자이언츠 상조회 쪽으로 송금해 주는 일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었다.[8] 게다가 현대가 해체되었으나, 이후 창단된 히어로즈가 현대의 뜻을 이어받아 구단전체가 선수단의 뜻에 동참하여 매년 롯데와 벌이는 첫번째 목동 3연전은 팀 이름답게 remember the hero라는 이름으로 모금 행사, 가족 시구 등 임수혁을 기억하는 행사를 벌여왔고 이 행사는 임수혁의 사망 이후인 2011년까지 매년 지속되었다.
그러나 2000 시즌 후 임수혁은 롯데 구단으로부터 자유계약 공시되었다.
2001년이 되자 1년이나 지난 임수혁 사건은 서서히 묻히기 시작하였으나,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롯데 자이언츠는 4월 18일을 임수혁의 날로 정하고 4월 18일날 열리는 경기의 수익금의 전액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전하고, 임수혁의 아들이 시구를 하게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와 같은 연고지를 쓰는 부산 아이콘스는 임수혁의 날을 맞아 임수혁을 위해 치료비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2002년 롯데는 '생활비 지원에 대한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했고, 병원비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지급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임수혁의 가족에게 전달하는 추태를 저지르고 만다. 당연히도 이는 이상구 단장의 경력에서 최악의 흑역사이다. 이후 정말로 롯데는 임수혁과 관련한 행사를 구단 차원에서 벌이는 일은 없었으며, 롯데 선수단에서 사비를 털어 일일호프 등을 통해 성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사실 프로구단은 김광현같은 최상급 선수는 연봉 30억이라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팀의 성적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한테는 연봉 1억도 아까워하는게 실상인지라 현실적으로 프로구단 성적에 당장 도움이 안 되는 임수혁에게 주는 생활비는 당연히 아깝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명백히 구단의 책임이 있는 부분이고 그걸 TV 생중계로 전국의 야구팬들이 목격했는데, 이렇게 생활비 지급을 중단하는 것은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롯데 자이언츠가 생활비 지원과 치료비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가족들이 엄청난 생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해야 되는 상황. 결국 선수협이 임수혁 돕기 자선 경매를 열게 된다, 선수협이 총 6차례의 경매에서 얻은 임수혁 돕기 성금은 총 2천 9백만 원이었고, 이 성금은 전액 임수혁의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구대성도 한화 이글스를 통해서 성금 2000만원을 전달했다.
2003년 초순, 결국 임수혁의 가족들이 응급 구호조치 등 안전의무를 소홀히 한 당시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와 홈구단이었던 LG 트윈스를 상대로 8억원의 보상금 지급을 골자로 한 민사조정을 신청했다. 롯데 측은 '법률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도의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보상을 할 의사는 있으나, 3년간 총 2억원 상당을 이미 지원했으며 소송을 제기한 이상 임수혁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라는 입장을 밝힌다. 그런데 그들의 말과는 달리 실제는 앞서 2002년에 이미 지원은 끊겨 있었다. 속담에서 '울고 싶은데 뺨 맞는 것' 에서처럼 공식적으로 지원을 끊는다는 발표를 위한 방안을 찾고 있던 중에 소송이라는 이유를 가져다 붙인 격이다. 법원은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으나, 이에 불복한 LG 트윈스에 의해 이의 신청이 진행되어 2004년에 롯데, LG에서 각각 2억 2천만원과 1억 천만원의 보상금안을 임수혁 가족이 수용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
4. 디시인사이드 해외축구 갤러리 임수혁 악플 사건
2008년,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이하 야갤)와 해외축구 갤러리(이하 해충갤)간의 갤러리 전쟁이 활발했을 무렵, 야갤의 한 유저가 얼마전 축구 그라운드에서 심장병으로 숨진 푸에르타 선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해충갤에 올리기 시작했고 해충갤 유저들은 야갤에 대한 맞대응으로 임수혁 선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하며 야갤러들의 분노를 받게 되었다.
갤러리간의 공격의 선이 도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야갤러들은 증거자료를 모아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먼저 선수를 친다. 얼마 후, 일련의 사건들이 모 스포츠기자에 의해 기사화되면서, 디시인사이드 내에서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큰 이슈가 된다. 급기야 임수혁의 가족들이 해충갤러들을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해충갤러들은 데꿀멍하며 사과문을 남기고 선처를 빌었고, '''악플러의 대부분이 예비 고등학생'''[9] 이라는 것을 안 임수혁 선수의 가족들은 고소를 취하하였다. 다만, 시작은 야갤이 먼저 했으므로 야갤러들도 이 사건의 비판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 뒤 2010년 초, 모 축구사이트에서 한 회원이 자신의 신상이 유출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조사해보니 뻔뻔하게도 바로 그 악플러였다. 당연하지만 오히려 더 털렸다.(...) 그야말로 '''인간말종들'''. 그런데 당시 고소 당하고 취하 되고서도 계속해서 야갤에 어그로를 끌던 모 해충갤러는 닉네임 세탁을 하고 야갤에 정착해 야갤질을 하다 걸리고는 야갤러들에게 가루가 되게 까이고 있다.(...) 더불어 동일 인물임은 인정 하지만 야갤은 계속 하겠다고 한다.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뻔뻔하게 갤질을 하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야구계 팬덤에서 이런 드립은 금기시되어 있다. 심지어 2010년경까지는 막장화된 야갤에서조차 금기시되던 드립이었다. 지역드립이나 정치 떡밥은 야갤에서는 그냥 씹을 거리나 웃고 즐길 수있는 떡밥으로 치부하지만 '''임수혁 사건은 말 그대로 한국 야구의 어두운 부분이 드러난 안타까운 비극'''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1년 리그 전반기 LG 트윈스가 선전 할 때 LG 트윈스 갤러리 유저들이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 유저들을 상대로 이 드립을 쳤다.[10] 아무리 꼴갤에서 패드립을 쳐서 그렇다느니 먼저 시비 건거라느니 말이 많았지만... 이것은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곤 하지만, LG 트윈스 갤러리 항목을 보면 거의 기정사실. 병마와 싸우고 있던 조인성의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건드렸다고. 그러나 제대로 된 LG팬이라면 아무리 선시비가 걸렸어도 저런걸로 드립을 쳐서는 안 되었다. 임수혁의 사망에는 잠실 홈경기에서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했어야할 LG측의 책임도 있기에 더더욱.
하지만 2011년 이후 야갤의 막장성이 더 심해지면서 롯데팬이 조금만 나대는 성향만 보여도 '파릇파릇' '야채드립'같은 리플이 달릴 정도로 보편화되고 말았다. 이는 통구이 드립도 마찬가지. 더 아이러닉한 것은 임수혁 관련 드립을 처음 당하여 고소를 먹이려던 갤은 바로 '''야갤''', 그 야갤이었다는 것이다. 2009년에 시작된 막장화로 인해 갤러리의 성격이 크게 변하게 되어 나타난 아이러니.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프로야구 게임에는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등록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5. 임수혁이 남긴 것
그가 쓰러진 2000년 이후 3년이 지난 2003년이 되어서야 KBO는 '''선수협의 요청으로''' 경기장 내 의료진 배치를 의무화하였다.[11] 그러나 구장에 엠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다고는 하나, 구장 내의 적재물로 인해 진입이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는 등, 아직도 해외야구에 비해서 안전 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다. 딱딱한 펜스로 인한 펜스플레이 시의 부상이나, 베이스의 노화, 인조잔디 문제 등으로 인한 부상 또한 여전하다. 봉중근이 "한국 야구장은 싱글A 수준" 이라고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은 제 2, 제 3의 임수혁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기에, 앞으로 한국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12]
비단 야구문제로만 치부될것은 아닌게, 2011년 K리그의 신영록 선수가 경기 도중 부정맥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도 임수혁 선수 사건 이후 다른 프로스포츠 연맹에서도 도입된 구급요원의 빠른 조치와 앰블러스의 신속한 후송 등으로 다행히 생명을 건졌다.
그러나 롯데 의료진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는지 2015년 7월 1일 김민하 골절상에 대처를 제대로 안 했다. 거기에 7월 3일 짐 아두치에게도... 그나마 아두치는 큰 부상이 아닌 걸로 판정됐지만 김민하는 결국 손목 골절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결국 그걸로 선수생활이 제대로 꼬여 2017년 방출당했다. 다행히도 김민하는 이듬해 한화에 입단, 2019년 준주전급 외야수로 출전했다.
6. 세상을 떠나다
언젠가 임수혁이 2루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라던 팬들의 바람도 소용 없이, 결국 2010년 2월 7일에 병세가 나빠져서 숨지고 말았다. 이때가 향년 40세. 그가 사망한 후 최훈은 2009년 결산 만화 롯데편에서 롯데 팬들의 심금을 울리는 한 컷을 집어넣었다.[13] 장례는 유족들의 뜻을 따라서 가족장으로 치뤘으며, 롯데 자이언츠 동료 선수들이 직접 관을 운구하였다. 화장 후 하남시의 가족납골당에 안치하였다.
7. 임수혁 돕기 자선행사
그리고 임수혁이 쓰러진 2000년부터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이 모인 롯데 자이언츠 상조회의 주관으로 매년마다 임수혁 돕기 자선행사를 하고 있다. 행사 장소는 고성범 연탄구이[14] 에서 주로 이루어지는데 주인장인 고성범도 같은 롯데 자이언츠 출신 선수이다. 다만 선수시절 활약은 미미한 편이라서 많은 롯데팬들도 고성범을 그냥 고깃집 주인으로만 보고 있다고...
선수들도 이 행사에 직접 참가하는데 주문도 받고 고기도 구워주고 팬서비스까지 해준다. 매년 11월 말 즈음에 개최하고 행사 수익은 임수혁 가족 뿐만이 아니라 지역의 소년소녀 가장에게도 수익이 돌아가는 행사이기에 국내 프로야구 자선행사의 좋은 사례로써 손꼽히고 있다.
2014년 조성환이 은퇴를 선언하며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중 이 행사가 2013년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원래 임수혁의 부인과 둘째 대학 갈 때 까지만 행사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다만 임수혁 돕기 행사만이 끝이 났을 뿐, 불우이웃을 위한 연말 자선 행사인 일명 꼴깃집 행사는 매년 계속되고 있다.
8. 여담
- 마구마구에서는 임조혁[15] ,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에서는 임숭민,슬러거에서는 임석훈,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신민수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여담이지만 사망 전[16] 까지 프로야구매니저에 선수카드로 등록되어 있었다.우월한 2성포수[* 2성인데 장타력 80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2성에선 저런 능력치가 안나와야 정상인데 저러니 우월하다는 소리를 듣는거라지만, 사실 베타 기간에는 능력치를 좀 퍼주는 경향은 있었기 때문에 판단은 알아서. 나중에 나온 것이지만 이 능력치는 출전 경기수에 따른 능력치 보정 전의 능력치 배정이다. 보정 전 01 이종범능력치는 교타,장타가 80이 넘는다는 얘기도 있으니 뭐(...)][17] 논외로 삼진왕의 업데이트 소개 다음팟 방송에서 누군가가 임수혁선수의 레전드 카드는 안나오냐고 묻자 개발진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는 있으나 언제 될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 컴투스프로야구 매니저에 최고등급인 96임수혁 몬스터카드가 있다. 오버롤은 74. 근데 그냥 컴투스프로야구에는 없다.
- 이사만루2019에서 롯데 추억의 선수 카드로 등장한다. 뛰어나진 않지만, 무난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며, 롯데의 유이한 포수 추선이다. 다만, 스탯이 더 뛰어난 96년 스페셜 에디션이나 베스트포지션 카드도 있어서, 이사만루에서 임수혁을 쓰고 싶다면 스에나 베포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 민방위 훈련이나 각종 소방교육 등에서 심폐소생술을 교육할때 빠른 응급처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 당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살아났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것이라고 한다.
- 2018년 4월 18일, 네이버 뉴스에서 추모 영상을 업데이트하였다.
- 임수혁을 지칭할 땐 '돌아오지 못한 2루 주자'로도 표현되고 하는데, 모티브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인 듯. 김은식 작가가 이 제목으로 임수혁을 추모하는 칼럼을 쓴 바가 있다. 이 후 이 칼럼과 동명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임수혁만을 추모하는 책은 아니고 전작 야구의 추억 처럼 여러 칼럼의 모음집 쯤 되겠다.
9. 역대 성적
[1] 경영학과(1988학번)(1992년 졸업)[2] 지명 거부 후 상무 입단.[3] 2000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 공시.[4] 만약 임수혁이 자신을 지명한 LG에 그대로 입단했다면 그의 중-고-대학교 1년 후배로서 훗날 야생마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어느 좌완투수를 이듬해인 1993년에 LG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LG는 포수왕국이되었을지도 모른다.[5] 정확히 말하면 마임포라고 해야 맞다. 任씨는 두음법칙과는 관계 없이 '임'으로 발음한다.[6] 심폐소생술이 보편화된 요즘은 체육인이라는 사람들 수십명 중 아무도 심폐소생술을 할 줄 몰랐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심폐소생술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7] 이 때 2000년 4월에 은퇴식을 치렀던 염경엽 당시 현대 유니콘스 2군 매니저도 자체적으로 야구용품을 팔아서 만든 돈 500만원을 보탰다.[8] 임수혁의 사망 이후에는 유가족의 학비 지원 명목으로 바꿔 계속해서 보내준다고 한다.[9] 해충갤 92라인이라고 불리던 소년들이었다.[10] 패드립 으로 극에 달한 쥐갤러들인지라 드립 자체는 꽤나 웃겼고 야갤러들 다함께 강건너 불구경. 야갤의 막장성은 이미 2009년 KIA 우승부터 지역드립으로 시작해서 일베의 베이스가 되는 드립이 당시에 이미 성립이 되었다.[11] 거기에 '''절대 KBO의 자체적 판단'''이 아니다. 선수협에서 여러 번 요청한 끝에야 이루어졌다.[12] 그나마 다행인건 2010년 들어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같은 신축 구장과 문학야구장,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수원 kt 위즈 파크등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한 구장들이 속속들이 나오며 이전보다는 나아진 환경에서 야구를 할수있게 되었다.[13] 아무래도 구름의 위치를 봐서 임수혁이 달리는 곳이 2루, 가고있는 곳이 3루, 저 멀리 있는 구름이 홈 인것 같다.[14] 본점을 비롯해 부산경남에 프렌차이즈화되어서 지점이 자리잡고 있다.[15] 단, 마구마구 2015에는 임수형으로 등장한다.[16] 1차 CBT 당시에는 아직 사망 전이었기 때문에 카드등록이 되어있었다.[17] 2011/08/25일 패치로 이상훈과 함께 실명이 아닌 신민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물론 추측일뿐인데 거의 맞는것 같다. 이상훈으로 추정되는 비 실명선수는 신철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18] 이 부분은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입단 동기였지만 1년만에 방출당한 친구의 몫까지 뛰겠다는 의미로 그 친구가 쓴 번호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도 존재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