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주
1. 소개
前 롯데 자이언츠,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의 야구선수다. 별명으로는 학창시절에는 독고탁[2] 이 있었으며 현역 시절엔 항상 머리를 모두 밀고 나와서 붙여진 별명인 '명주대사', 그리고 두산에 있던 시절 잦은 등판으로 인해 언제나 불펜에서 대기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차대기' 등이 있다. 등번호는 07번(입단 당시) - 70번 - 7번 - 17번(두산)이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경남상고[3] -한양대 시절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과 함께 '고교야구 4대 천왕'이라 불리우는 에이스급 좌완투수였다. 좌완으로서 평균구속 140km이상의 묵직한 공에 예리한 슬라이더로 프로에서도 당장 10승이 가능한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 명성은 과장이 아니었던 게 한양대 4학년 때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60만 달러의 러브콜을 비롯해 당시 최강팀 중 하나였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도 관심을 가졌고, 몇몇 일본프로야구팀도 관심을 가졌을 정도였다. 결국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1차지명을 받은 연고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아버지가 "쪼매난 막둥이"인 그를 아껴, 키도 작은데 미국 가 봤자 더 고생한다고 적극 만류했다고 한다.
2.2. 프로 시절
2.2.1. 롯데 자이언츠 시절
이 명성은 돈 안쓰기로 소문난 롯데 자이언츠가 그를 1차지명하고 5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계약금[4][5] 을 지르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입단테스트를 준비하던 그를 붙잡은 데서 잘 드러났다.
이 때 차명주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롯데는 기존의 베테랑 투수들 대신 신인에 불과한 차명주에게 무려 마무리 투수 보직을 맡겼다. 좌완이면서도 빠른 공을 던지고 베짱까지 두둑한 탓에 마무리로서 필요한 조건은 최상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입단 과정부터 순탄치 못했는데 졸업반 시절 절정으로 올라간 가치 탓에, 롯데와의 첫 협상 때는 해외 진출 동기생들인 박찬호나 조성민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며 계약금으로 무려 '''10억'''을 요구했다. 정말 10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기보단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대우를 해 달라는 뜻. 계약 협상이 지지부진해 이미 8개구단의 해외 전지훈련이 막바지로 치달을 2월 중순까지도 계약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계약금인 5억으로 합의하고 입단[6]
입단을 확정짓고도 순탄치 못했던 게 등번호 문제. 차명주는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7번만을 달았기에 7번을 받지 못하면 입단을 철회하겠다고까지 말하면서 집요하게 7번을 요구했다. 문제는 이 번호가 이미 베테랑 외야수 이종운이 달고 있는 번호였다는 점. 이종운 또한 역시나 한 고집하던 성격이었는지라 '7번을 뺏으려면 차라리 날 은퇴시켜라'고 버텼고 결국 구단에서 장고 끝에 '07'번을 부여해 줬다. 그러나 영 애매한 번호였던지라 개막하기 전 '70번'으로 변경했다.[7]
위의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자존심이나 강한 고집 등 투수로서는 좋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이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 불거진 바람에 동계 훈련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데뷔 시즌인 1996 시즌을 그르치게 된다. 개막 후 세 게임 연속 세이브를 따내며 아마시절의 활약을 고스란히 이어가는가 했으나, 이후 두 게임 연속으로 블론세이브를 저지른 후 기세가 확 꺾인다. 이후 구원승과 몇 개의 세이브를 더 추가하긴 했지만 내용이 영 좋지 않아 선발투수로 전환. 그러나 승을 따내지 못하고 패전만 쌓아가면서 후반기 즈음에는 사실상 주요 전력에서 배제되었다. 데뷔시즌 성적은 기대치에 한참 못미치는 정도를 넘어 먹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2승 5패 8세이브 7.4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7시즌엔 전 시즌의 실패를 거울삼아 아예 보직을 선발투수로 고정하고 충실한 동계훈련으로 시즌 초반 연승행진을 달리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발투수로 뛰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는데, 선천적으로 공을 오래 던지지 못하는 점이였다. 다한증과 일종의 '습진'이 겹친 난치병으로, 손에 굳은살과 물집이 매우 잘 잡혔고, 습기찬 날에는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공을 오래 던지면 공을 던지는데 가장 중요한 중지가 해지는 증상을 보였다.[8][9] 이 탓에 시즌 초반의 기세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등판 간격도 들쭉날쭉해지며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다가 결국 7승 9패 4.6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다소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다만 이 시즌 롯데의 성적 자체가 48승 1무 77패에 그치며 압도적인 꼴찌를 한 시즌임을 감안하면 꽤 분전한 셈이다.
3년차인 1998시즌은 이종운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한 탓에 염원하던 '7번'을 달고 뛰었다. 그러나 2년 연속으로 꼴지를 기록한 팀 성적과 더불어 차명주 본인으로서도 정말 의아하리만치 승운이 절망적으로 안 따라준 시즌이었다.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33게임에 등판했지만 이 시즌 차명주가 기록한 성적은 '''"0승"''' 7패 0세이브 4.99의 평균자책점. WHIP는 입단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음에도 단 1승조차 올리지 못했다.
결국 롯데에서의 3년동안 9승 21패 8세이브라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하고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된다.
2.2.2. 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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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시절.
전술했듯이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되었으며 트레이드 상대는 포수왕국 두산에서 좀처럼 자리를 못 잡던 최기문이었다. 트레이드에 대한 떡밥은 이미 던져져 있었는데 당시 롯데의 감독대행에서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김명성이 팬들과의 간담회에서 전력 보강에 대한 질문을 받자 '투수를 내 주고 포수를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구상 중이다'고 답변했던 것. 결국 이 구상중인 트레이드가 그대로 성사된 셈. 그리고 이 트레이드 이후 차명주와 최기문 모두 전성기를 맞이하며 윈-윈 트레이드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두산 베어스에서는 중간계투로 자리잡아 첫 해부터 무려 83경기에 출전하며 중용되었다. 2000년부터 신설된 홀드 부문에서 3년 연속 홀드 1위(2001년 ~ 2003년)[10] 를 기록하며 비로소 꽃을 피운다. 그 시절, 생소하던 너클커브를 던지던 몇 안 되는 투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이 영광 뒤에는 혹사라는 그늘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산의 김인식 감독은 그가 살인적인 혹사 때문에 연투가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위의 이유 참조) "매일 2이닝씩 먹어줄 수도 있는 투수"라고 칭찬하며 좌타자가 나오면 2경기에 1번 꼴로 차명주를 등판시켰고, 1999년에는 83경기, 2001년에는 84경기에 등판하는 등 엔간한 대타 전문 요원보다도 자주 TV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때 '차대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의미는 짐작하는 대로 언제나 불펜에서 '''항상 대기'''한다고 해서 '차대기'였다.
2.2.3.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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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시절.
김인식 감독이 물러난 후 김경문 감독과의 불화로 2004년 시즌 중 임재철+5000만원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한화 이적 후에는 주로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나왔다. 하지만 한화에서는 두산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고, 말년쯤엔 '''분식회계사'''라는 별명으로 까였다. 한 점 차 박빙인 상황에서 등장해 동점주자를 홈인시킨 뒤 그 다음에 잘 막아서 구원승을 무려 7번이나 기록했다. 더구나 소화하는 이닝도 해마다 줄어들어서 한화 이글스 팬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0⅓이닝의 신화였다. 매일같이 등판하지만 올라올 때마다 한 타자만 잡고 내려가서 생긴 별명이다. 그 예로 2005년에는 1군에서 77경기에나 마운드에 올라왔지만 소화한 이닝은 33이닝에 불과했다.
그나마 유승안 시기에는 관리를 받기라도 했지 2005년에는 핀필 김인식이 감독으로 오면서 등판경기수가 많아졌고 은퇴하던 해에도 50경기 이상을 등판했다.
2006 시즌 후 FA를 선언했으나 소속팀 우선협상 기간에 한화 이글스가 '''재계약을 거부했고''' 이후에도 불러 주는 팀도 없자 자신도 현역 생활에 대한 욕심이 더 이상 없어서, 선수 생활을 더 이어나갈 수 있었음에도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3. 은퇴 후
야구계를 떠나 재활 트레이너로 전업하였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아버지와 형이 운영하고 있는 횟집 바로 옆 건물에 Gem Fitness라는 유소년 전문 회원제 재활 트레이닝 센터를 개장,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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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MBC ESPN에서 방영한 '날려라 홈런왕'이라는 리틀야구 프로그램에서 투수코치로 오랜만에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
2021년 현재는 자신이 설립한 SSL 연구소라는 과학적 및 데이터 분석 위주로 교육을 진행하는 일종의 야구 연구소의 원장 및 국민대학교 생체역학실 연구원이자 차의과학대학교 스포츠의학대학원 겸임 교수로 지내고 있다. 겸임 교수 신분으로 제 1기 KBO 코치 아카데미에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4. 여담
- 아버지가 부산 송정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어선도 여러 척 가지고 있는 토호였다. 청소년 대표 시절 친해진 친구이자 한양대학교 동기인 박찬호의 자서전을 보면,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가 끝난 뒤 차명주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차명주가 혼자 방을 썼고 방 안에는 침대와 VTR, 24인치 텔레비전[13] 이 있었다고 한다.
- 프로 데뷔때부터 탈모의 조짐과 더불어 상당한 노안이었다. 신인 시절의 사진을 보면 20대 초중반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액면가를 자랑했다. 바로 위 날아라 홈런왕 사진도 2009년 사진으로 당시 나이는 만 35세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이 기록은 이후 2013년 강영식에 의해 갱신되었다.[2] 작은 키로 거대한 강타자들을 사정없이 돌려세운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3] 3학년이었던 1991년 대통령배, 청룡기 우승에 기여했고, 특히 청룡기에서는 대회 MVP도 차지했다. 다만 경남상고 때는 키가 160cm밖에 되질 않아, 생각보다 출장이 적었다. 먹을 건 다 먹어보고 철봉에 매달리고, 선배들은 사지를 쭉쭉 잡아 당겨주고 키크는 약이란 약은 다 먹는 눈물나는 노력 끝에 대학시절까지 13cm가 컸다.(173cm)[4] 당시 국민소득이 1만 달러도 안 되던 시절이니 오늘날 물가로는 7~8억원 정도를 호가하는 거다. 게다가 롯데는 연봉협상 때마다 상습적으로 짠돌이짓을 벌인 구단이었으니.[5] 역시 같은 구단에 1년 후 입단한 손민한과 문동환 에게도 나란히 계약금 5억 원씩을 안겨줬으니, 당시 차명주에게 롯데 구단이 건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6] 롯데가 1993년말에 주형광에게 준 금액이 9200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려 5배나 넘는 돈을안겨준 것이다. 그 짠돌이 롯데가. 롯데는 이듬해에 입단하는 문동환(95년에 입단했어야 하나 현대 피닉스 때문에 2년 늦어짐)과 손민한에게도 5억을 안긴다.[7]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에디슨 러셀이 있었으나, 러셀은 원래 5번을 달고 싶어 했는데 정현민이 달고 있어 고사하고 05번을 선택했으나 바로 다음 날 05번은 사용 불가라고 50번으로 바꿨다. 단, 차이점을 꼽자면 정현민은 원래 러셀에 5번을 넘겨주려 했으나 러셀이 거절한 것이다.[8] 이를 고치기 위해 199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직 검사도 받았고, 주사를 수도 없이 맞아봤으며, 온갖 약을 가리지 않고 썼으나, 난치병이라 소용이 별로 없었다.[9] 비슷한 문제로 크게 고생했던 선수가 바로 2016년도 신인왕 신재영. 신재영 역시 16시즌 풀타임 선발로 15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는 듯 했으나, 17-18년 2년동안 차명주와 비슷하게 다한증+물집+굳은살이 떨어지는 증상으로 인해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진을 거듭했다. 결국 18시즌이 끝난 이후 오른팔의 묶는 다한증 수술을 받고 나서야 19년에 다시 임시선발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10] 2014년까지 3년 연속 홀드 1위를 기록한 선수는 차명주뿐이다.[11] 차명주 외에는 진필중, 마일영 등이 있었다.[12] 이는 이후 2013년 8월 15일 강영식에 의해 갱신되었다.[13] 당시는 집에 냉장고와 텔레비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