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진

 




'''박석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5'''

'''올림픽 야구종목 메달'''
'''2000'''

'''KBO 포스트시즌'''
'''1999 플레이오프 MVP'''


'''2001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9번'''


'''박석진
(1995~1997)
'''

최부락
(1998)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9번'''
김종훈
(1994~1997.6.26.)

'''박석진
(1997.6.27.~2004.7.11.)
'''

노장진
(2004.7.12.~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노장진
(2000~2004.7.11.)

'''박석진
(2004.7.12.~2004)
'''

김진웅
(200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9번'''
김덕윤
(2003~2004)

'''박석진
(2005~2006)
'''

강현성
(2007)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9번'''
이왕기
(2005~2006)

'''박석진
(2007)
'''

이정동
(2009)
''''''LG 트윈스''' 등번호 20번'''
여승현
(2007)

'''박석진
(2007.7.29.~2007)
'''

서성종
(2008~2009)
''''''LG 트윈스''' 등번호 39번'''
추승우
(2006~2007)

'''박석진
(2008)
'''

김수형
(2009)
''''''LG 트윈스''' 등번호 89번'''
박정훈
(2009~2011)

'''박석진
(2012~2018)
'''

유동훈
(2019~)
''''''NC 다이노스''' 등번호 89번'''
김영중
(2017~2018)

'''박석진
(2019~)
'''

현역


<colbgcolor=#315288><colcolor=#fff> '''NC 다이노스 No.89'''
'''박석진
朴石鎭 / Park Suk-Jin
'''
'''생년월일'''
1972년 7월 19일 (52세)
'''출신지'''
[image] 부산광역시 수영구
'''신체'''
179cm, 80kg
'''학력'''
수영초 - 대천중 - [image] 경남고 - [image] 단국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사우타
'''프로입단'''
1995년 신고선수 입단 (삼성)
'''소속팀'''
[image] 삼성 라이온즈 (1995~1997)
[image] [image] '''롯데 자이언츠 (1997~2004)'''
[image] '''삼성 라이온즈 (2004~2006)'''
[image] 롯데 자이언츠 (2007)
[image] LG 트윈스 (2007~2008)
'''지도자'''
[image]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투수코치 (2010~2011)
[image]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12~2013)
[image] LG 트윈스 1군 불펜코치 (2014~2015)
[image] [image]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15~2018)
[image] NC 다이노스 2군 투수코치 (2019~)
'''프런트'''
[image]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11)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2005)
플레이오프 MVP (1999)
평균자책점 1위 (2001)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경력
3.1. LG 트윈스 투수코치
3.2. NC 다이노스 투수코치
4. 기타
5. 연도별 성적

[clearfix]

1. 소개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 소속의 사이드암 투수. 現 NC 다이노스의 투수코치. 현역 시절 등번호는 59번(삼성) - 39번(롯데) - 18번(삼성) - 39번(삼성) - 39번(롯데) - 20번(LG) - 39번(LG)다.

2. 선수 시절


[image]
(출처 : 포토로)
초기에 입단했던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경남고등학교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성 라이온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연습생이었지만 입단 첫 해인 1995년 6월 1군에 등록되어 활약했을 정도로 유망주였다. 그러다가 1997년 6월 이동수와 함께 김종훈, 박동희를 상대로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었다.[1][2] 이후 롯데에서 전천후 불펜투수로 활약하며 1999년 11승으로 최전성기를 누릴 정도였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6차전의 선발 등판이 발군이었는데, 7회 1사까지 퍼펙트게임을 이어 나가다가 김종훈에게 볼넷 하나를 내주고 교체되었다.[3]
[image]
(출처 : 포토로)
고향 팀으로 돌아온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1999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벼랑끝에 몰려있던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8이닝 무실점 역투를 포함하여 5경기에 등판하는 등 노예역할에 충실하며 맹활약,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국제전(특히 미국, 중남미전) 비밀병기나 다름없는 사이드암 투수 계보의 시작이 되었다.[4] 대한민국의 '''올림픽 남자 구기종목 두번째 메달'''을[5] 획득한 대표팀에서도 공헌도가 가장 높았던 선수들 중 한 명으로 프로선수가 참가한 1998년 대표팀 이후 처음으로 단일 대회 5경기를 등판한 투수이자, 15⅔을 던지며 가장 많은 이닝[6]을 소화한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미국과의 4강전에서 덕 민케비츠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이 유일한 옥의 티.

이름
대회
출전경기
선발등판
불펜등판
이닝


홀드
세이브
탈삼진
ERA
박석진
2000
시드니 올림픽
5
1 [7]
4
15⅔
2
1
0
0
11K
1.72
정현욱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5
0
5
10⅓
1
0
1
0
13K
1.74
차우찬
2015
WBSC 프리미어 12
5
0
5
10⅓
1
0
0
0
13K
0.87
이영하
2019
WBSC 프리미어 12
5
0
5
8⅓
1
0
0
0
6K
1.08
구대성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5
0
5
8
1
0
0
0
3K
1.18
윤석민
2008
베이징 올림픽
5
0
5
7⅔
2
0
0
1
6K
2.35
2001년 '''구원 투수'''로 방어율왕에 올랐다. '''133이닝''' 44자책 ERA 2.98. 하지만 4승 '''10패''' 14세이브라는, 이 당시 야구를 못 본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탯을 기록했다. 참고로 다승왕은 같은 팀 동료 손민한. 펠릭스 호세가 출루율 0.501로 신기록을 세웠던 해이기도 하다. 방어율왕이 10패를 한 것을 보면 엄청난 물타선 같아보이지만 당시 롯데의 팀타율은 0.280으로 8개구단 중 전체 1위.
전성기 시절 롯데에서 박석진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고, 믿을맨(미들맨)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선발이면 선발, 불펜이면 불펜, 전천후로 투입되었고, 일단 투입 되면 반드시 제 몫을 해내는 투수. 길지 않은 전성기였지만, 그 시기만큼은 롯데팬과 삼성팬이 국내 최고 옆구리 투수로 박석진과 임창용을 각각 내세우며 다투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을 정도.[8]
[image]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온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2001년 혹사의 여파로 인해 부상을 당해 다음 2년 동안 1군에서 2⅔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
그러다 2004년 시즌 도중 김대익과 함께 김승관, 노장진을 상대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어 복귀하였다. 박석진이 트레이드 시장에 나온 것은 당시 롯데 팀 사정이 있었다. 2004년 양상문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 롯데 투수진은 말그대로 처참했는데, 롯데의 좌완 에이스였던 주형광은 2001년부터 팔꿈치 부상에 시달리다가 수술 후 어찌어찌 복귀하였으나, 다시는 선발로 뛰지 못하고 불펜으로 뛰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무려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고, 손민한도 2001년 다승왕에 오른 뒤 2002~2003년은 감독놈과의 불화로 폭망하나 싶었다. 그리고 박석진과 같이 필승조였던 외국인 투수 에밀리아노 기론도 혹사의 여파로 2001년 초 방출되어 롯데를 떠났으며, 강상수가 불상수로 전락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나마 남은 박지철이나 염종석이 선발진을 지켰고, 가득염 ,김영수 같은 불펜 투수들은 방화를 일삼으며 팬들의 눈을 썩게했다. 그 와중에도 2002년 2차 1픽 투수인 좌완 유망주 고효준을 갖다버려 SK에게 조공한 것은 덤이다.
여튼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된 후 주로 2군에 머물던 박석진은 김현욱의 노쇠와 임창용이 부진하자, 1군에 서 권오준과 같이 사이드암 불펜으로 활약하며, 2005년 8승 1세이브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 냈다.
[image]
(출처 : 포토로)
푸대접받고 세 번 다시 오지 못할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이후 2006년에 한 번 더 삼성의 우승에 기여했지만, 시즌 후 삼성에서 방출되고 2007년 롯데에 자유계약선수로 입단했다. 연봉은 1억 5천만원. 하지만 임경완, 나승현 ,이왕기, 배장호 등의 젊은 사이드암 투수들에게 밀려 크게 기회를 잡지 못했고 결국 2007 시즌 중 최길성, 최만호를 상대로 손인호[9]와 함께 LG 트윈스트레이드되었다.[10] 하지만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채 2008년에는 평균자책점 36.00을 찍은 후 웨이버 공시되었다.
[image]
(출처 : 포토로)
LG 트윈스 선수 시절
그렇게 삼성과 롯데를 오가면서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LG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에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함께했던 투수 임창용의 도움을 받아 2008년 말부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고, 연수를 마친 후 2009년 말 야쿠르트의 2군 투수코치로 부임해 활동했다.
야쿠르트에서 활동한 후 귀국하여 2011년 8월 10일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스카우트를 맡았다. #

3.1. LG 트윈스 투수코치


[image]
[11]
2011 시즌 후 현역 마지막 팀인 LG 트윈스의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으며, 2013 시즌 후 기존 1군 불펜코치를 맡던 강상수차명석의 자리를 승계함에 따라 LG의 1군 불펜코치로 보직 이동했다. 2012년 차명석 투수코치가 당시 2군 투수코치였던 박석진을 두고 "선수들을 잘 만들어서 구리(2군)에서 1군으로 올려 주고 있다" 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평이 나쁘지는 않은 듯.
하지만 2015 시즌 LG가 부진하면서 노찬엽, 최태원과 같이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반대급부로 2군에서 경헌호가 올라왔다.
그리고 2016, 2017, 2018 시즌 꾸준하게 부진하면서(...) 2018년 10월 19일 새 단장으로 차명석 해설이 임명됨과 동시에 재계약에 실패했다.

3.2. NC 다이노스 투수코치


이후 2018년 10월 14일 NC 다이노스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공교롭게도 10월 24일에는 최일언 투수코치가 LG 트윈스로 가게 되면서 코치 간의 트레이드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2018년 11월 23일 2군 투수 코치를 맡는 것이 확정되었다. #

4. 기타


프로 입단 초기에는 노안의 이미지여서 본인에게 안습이었지만,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 미중년의 외모로 유지해 왔다.
삼성에서 몸담았을 적에 하필이면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과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을 잇는 낙동강의 교량 중 '''박석진교'''[12]가 존재한 탓인지, 박석진교의 유래가 본인의 이름으로 명명할줄 알고 삼성 팬들에 적지 않아 웃지 못할 오해가 있었다고. 하지만 박석진교는 본인과 전혀 무관하다.

5.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5
삼성
27
72⅔
4
6
0
-
0.400
4.71
85
3
26
30
44
38
1.42
1996
23
57⅔
2
2
2
-
0.500
4.68
71
6
26
26
37
30
1.5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7
삼성 /
롯데
15
42⅓
1
4
0
-
0.200
7.02
64
3
14
24
40
33
1.75
1998
롯데
18
30⅔
0
1
0
-
0.000
6.46
41
8
15
18
24
22
1.66
1999
33
148⅓
11
3
2
-
'''0.786'''
(2위)
3.58
123
14
58
101
65
59
'''1.13'''
(3위)
2000
40
94⅓
7
6
8
6
0.538
2.48
79
5
34
65
26
26
1.10
2001
47
133
4
10
'''14'''
(5위)
1
0.286
'''2.98'''
(1위)
127
6
53
81
50
44
1.21
2002
1군 기록 없음
2003
5
2⅔
0
0
0
0
-
3.38
7
0
0
2
1
1
2.6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롯데 / 삼성
48
62⅔
4
4
1
6
0.500
2.30
47
4
16
33
21
16
0.88
2005
삼성
'''70'''
(4위)
62⅓
8
0
1
'''15'''
(2위)
1.000
3.47
59
4
16
24
29
24
1.06
2006
26
22⅓
3
1
0
2
0.750
4.84
37
2
7
11
13
12
1.8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7
롯데 / LG
27
31
1
1
0
0
0.500
4.35
32
1
12
7
19
15
1.23
2008
LG
2
1
0
0
0
0
-
36.00
8
0
0
0
4
4
8.00
<color=#373a3c> '''KBO 통산'''
(13시즌)
<color=#373a3c> 381
<color=#373a3c> 761
<color=#373a3c> 45
<color=#373a3c> 38
<color=#373a3c> 28
<color=#373a3c> 30
<color=#373a3c> 0.542
<color=#373a3c> 3.83
<color=#373a3c> 780
<color=#373a3c> 56
<color=#373a3c> 277
<color=#373a3c> 422
<color=#373a3c> 373
<color=#373a3c> 324
<color=#373a3c> 1.2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9년
2완투
1완봉
<color=#373a3c> '''KBO 통산'''
<color=#373a3c> 2완투
<color=#373a3c> 1완봉
[1] 당시 트레이드의 메인은 이승엽, 김한수에게 밀려 백업이 된 이동수, 그리고 부상으로 몰락한 한때 롯데의 에이스였던 박동희였는데, 정작 이동수는 롯데에서도 실패해 쌍방울로 갔고, 박동희는 노쇠화+부상의 여파로 불만지르다가 2002년 쓸쓸히 은퇴했다.[2] 그리고 이런 네임벨류가 있는 선수들과 묶여서 이적한 박석진은 롯데의 필승조로 1999~2001년에 좋은 활약을 했고, 김종훈은 2007년까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전천후 외야수로 잘 해주었다.[3] 아이러니하게도 김종훈과 박석진은 1997년 삼성과 롯데가 맞트레이드를 단행할 때 서로 맞바뀐 선수들이다.[4] 시드니 올림픽 당시 대표팀 엔트리에 든 사이드암 투수는 박석진, 임창용, 정대현 이 세 명이었다. 이 셋은 당시 대표팀에서 일본 외 나라들과의 대결에서 생소한 투구폼의 특징 덕에 쏠쏠히 기용되었고 특히 박석진과 정대현은 선발로도 나서 역투했을 정도.[5] 여자 구기종목의 경우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배구 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최초의 올림픽 구기종목 첫 메달을 목에 걸었고, 1984 LA 올림픽에서 농구 대표팀이 은메달을, 1988 서울 올림픽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핸드볼 대표팀이 '''2연속 금메달'''을 획득했었던 반면 남자 구기종목의 경우 1988 서울 올림픽에서 핸드볼 대표팀의 은메달 이후 올림픽 메달이 하나도 없었다가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와서야 야구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냈다.[6] 네덜란드 선발 전을 빼면 순수 불펜 등판은 4경기 7⅔이닝.[7] 네덜란드전에서 선발 등판해 8이닝을 던졌다.[8] 99년 플레이오프 혈투 이후 롯데-삼성 팬들 간에 이런저런 다툼이 많았다. 박석진-임창용 외에 호세-이승엽도 주된 떡밥이었다.[9] 손인호는 이승화정수근에 밀려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10] 당시 LG는 박용택, 이대형, 안치용과 같은 젊은 외야수들이 있어 최만호는 백업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최길성도, 같은 2군 본즈박병호, 정의윤 등의 거포 유망주들이 있었던 데다가 본인이 1군만 오면 조급증이라도 있는지 부진했던지라 LG에서는 터지지 않던 유망주였다.[11] 2014년 10월 20일 NC와의 준플레이오프 때 뜻하지 않게 기상악화로 인하여 경기가 취소되었다는 것을 심판진들로부터 전달받고 선수들에게 제스쳐를 보내고 있다.[12] 교량 완공 자체는 박석진이 입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5년 중후반경. 고령군에서 달성산단이나 현풍읍으로 넘어갈 때 요긴하게 쓰이는 다리이긴 하지만, 주변에 고속도로 나들목이 없어 존재감이 적다. 낙동강 자전거길이 연결되어 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