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clearfix]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
2020년 현재는 '''한국야구위원회 경기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선수시절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출신 스타 내야수, 가장 최근인 운영위원 전까지는 前 SK 와이번스의 감독이었다. 김응용, 김성근, 백인천, 김재박 등의 감독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서 그렇지 그 또한 한국프로야구의 초창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슈퍼스타이자 감독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줬다. 적어도 1995년까지는.... 구단의 대우를 떠나 선동열 이전 원조 588을 찍은 감독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1998년도 중도 해임되어 김명성 감독이 유지를 이어받았다. 어찌됐건 롯데는 1996년 5위-1997년 8위-그리고 1998년 8위를 기록하여 롯데 자이언츠는 쌍방울 레이더스 이후 사상 두번째로 2년연속 8위(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하단에도 나오겠지만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대내외적으로 잡음이라는 것이 잘 나오지 않은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강헌주 기자의 기사와 김은식 작가의 칼럼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현역 시절 별명은 '미스터 롯데'.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롯데 선수 출신으로 롯데 감독에 오른 첫 인물. 그 전임 감독들은 모두 프로야구 출범 이전 세대였다.
경남고 시절부터 이미 주목받았던 촉망받던 인재였다. 1973년 경남고의 청룡기 우승을 이끌면서 타격과 타점 부분 1위, 그리고 MVP에 선정될 정도로 이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고려대에 진학한 무렵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프로에 진출하기 전까지 계속 국가대표로 활약한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주로 3루수였고, 가끔 유격수를 봤다. 키가 190cm로 당시로서도, 그리고 지금으로서도 상당히 큰 키였지만 괜찮은 수비력과 타격 실력을 자랑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포항제철 야구단의 창단 멤버로 입단해서 주전 4번타자 자리를 꿰찼었고, 이후 1982년 롯데 자이언츠가 데려갈때까지 포항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특히 한국프로야구의 원형이 된 야구대제전[4] 에서 모교인 경남고 소속으로 나와 후배 최동원과 함께 팀을 이끌면서 우승을 안기고, 그 자신은 최다안타상과 타격상, 대회 MVP에 오른다.
그리고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에서 주전 3루수로 출전하기 시작, 그 대회에서 일본 전 '''역전 적시타'''를 쳐내면서 대한민국의 준우승에 큰 기여를 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치면서 대회 베스트 9에 선정된다. 참고로 그에게 밀려서 대회 베스트 9에서 빠지게 된 일본의 3루수가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다.
2.2. 프로 선수 시절
[image]
최동원, 유두열과 구덕야구장에서.[5]
1982년 프로 출범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묶이지 않은 것에 대해 최동원, 심재원 등이 대표로 뽑히면서 프로 입단이 1년 늦어져 전력에 타격을 입은 롯데에 대한 배려라는 말과 이미 당시에 대표로 뛰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김용희의 몸 상태는 당시 디스크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6]
그럼에도 1982년 초대 KBO 올스타전 MVP로 선정된다. 당시 3차전까지 열린 올스타전에서 2차전까지 3홈런을 치며 맹활약한 김용철을 제치고 선정된 이유는 그가 3차전에서 날린 '''역전 만루홈런'''의 힘이 컸다. 그리고 1984년에도 4타수 4안타를 치면서 다시금 올스타전 MVP의 영광을 안는다. 부상으로 받은 차만 두 대. 미스터 올스타로 뽑힌 후 동, 서군 선수와 코칭스태프 전원에게 한턱을 쏘고, '''남는 차 한 대는 후배가 달라고 졸라서 그냥 줬다'''는 대인배스러운 일화를 남겼다. 결국 상으로 받은 차는 그냥 자기 돈으로 산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고(...). 아울러 실업야구 시절은 1980년에도 실업야구 올스타전 MVP를 받았다니, 올스타전과 인연이 깊은 선수라고 하겠다. 당시 실업야구 올스타전 부상은 전축이었다고.
[image]
엄청난 기럭지! 190이라는 키는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 초반 한국인들의 기준에서는 더더욱 어마어마한 장신이었다. 그야말로 팀 이름(자이언츠)에 아주 잘 어울리는 선수. 단순히 190cm이라고만 하면 어느정도인지 감이 안잡힐 수 있는데 김용희가 활약하던 80년대 초반 한국 농구 국가대표 주전 센터 신선우가 188cm 였다. 지금 국대 센터들 키가 200~207cm 인걸 생각하면 저 당시 김용희의 키는 지금 205cm 수준이다.
골든글러브를 세 번 받았을 정도로 활약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허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 무대에서는 아마시절처럼 슈퍼스타로 군림한 것은 아니다. 일곱 시즌 동안 뛰었지만 3할을 넘긴 시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풀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고, 20개 이상 홈런을 친 적도 없다. 하지만 최초로 롯데를 상징하는 선수였고 롯데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후덕한 인품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구단 고위층부터 팀 동료와 후배까지 믿음을 산 선수였다. 축구로 따지면 FIFA 발롱도르 초대 수상자인 스탠리 매튜스와 비슷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최동원, 유두열 등 당시 잘나가던 팀 동료들과 함께 모기업인 롯데제과의 빼빼로 광고에 나왔다.
2.3.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경력
4. KBO 경기운영위원
감독 재계약 실패로 물러난 후에는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7]
2018년 4월 6일 잠실야구장에 열릴 예정이던 두산-NC전을 미세먼지로 취소 결정하면서, KBO 리그 37년 역사상 최초의 미세먼지 취소 결정을 하는 업적을 남겼다. 당시에는 미세먼지 수치가 300㎍/m³이 넘어서 취소시켰고, 팬들에게 나름 팬들과 선수들의 건강을 생각해주는 취지로 칭찬을 받았다.[8]
하지만 2018년 4월 14일 오후 3시 12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KIA-롯데의 시즌 2차전을 우천취소했다. 김용희 위원장은 경기장에 도착한 지 10분 남짓 만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경기가 열리기 거의 2시간 전인 이른 시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천 취소 시점에서 비가 거의 잦아들고 있었고, 일기 예보상으로 비가 그칠 것으로 예보되었다. 실제로 당일 김용희 위원장이 우산을 쓰지 않고 그라운드 상태를 살피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으며, 3시 30분경 광주에서는 비가 완전히 그쳤다. 최근에 지어진 광주 챔피언스필드는 뛰어난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경기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날 챔피언스 필드에는 대형 방수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성급한 우천취소 결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타구장들도 이날 모두 광주와 비슷한 날씨였으나, 나머지 네 개 구장에서는 모두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날 3연전은 MBC SPORTS+였으며 MBC SPORTS+에서 경기 종료이후 갑자기 급편성을 하여 팩트체크를 하였다. 즉 한명재 캐스터 - 허구연 해설위원이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지 베테랑PD인 이석재PD가 직접 그라운드에 내려와서 리포트를 하면서 다시 한번 김용희 위원장의 언급을 통해를 이야기가 왜 그런지 위에 서술한 대로 체크를 하였고 즉 이해가 가지 않은 우천취소라며 아쉬운 멘트를 남겼다.
2018년 4월 15일 중계 전 김용희 위원장과의 통화를 하였으며 다시 한번 어제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3차전 KIA-롯데전을 관전하기 위해 만원 관중이 들어찬 광주 경기를 미세먼지를 이유로 뒤늦게 취소시켰다. 경기 시작 시간 29분 후까지 취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만원 관중들이 미세먼지를 마시고 앉아 있도록 방치한 후에 뒤늦게 취소를 발표했다. 일찌감치 광주에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 상황에서 미리 경기를 취소해서 관중들이 미세먼지를 마시지 않도록 조치했어야 했으나, 경기 시작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뒤늦게 경기를 취소시키면서 관중들이 미세먼지를 마시도록 방치한 것에 대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미세먼지가 비처럼 금방 잦아드는 것도 아닌데도 굳이 29분이 넘도록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다. 경기 시작 시간이 지난 후라도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어야 할 우천취소는 경기가 시작되기 2시간전에 10분만에 졸속으로 취소 결정내리더니, 신속하게 결정해야 할 미세먼지 취소 결정은 경기가 시작되고서도 30분이나 지연해서 결정을 내리면서 관중들은 미세먼지 마실 거 다 마시고 귀가하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징계위원회에서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팬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다. 이는 2년 전 김재박보다 더 심각한 수준으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5. 감독으로서의 평가
김용희 감독의 상징이자 모토는 자율야구, 시스템 야구다. SK에 부임하기 전 롯데[9] , 삼성 감독 시절에는 자율야구를 주창했었고, SK 감독으로 부임하면서는 시스템 야구를 주창하였다. 자율야구와 시스템야구는 그 본질은 같았고, 시대가 흐르면서 자율야구 철학을 더욱 업그레이드한 것이 시스템 야구라 할 수 있다. 시스템 야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것이 알아서 돌아가는 야구다. 이 야구철학은 트레이 힐만 후임 감독이 특타 금지, 자율훈련 증가 등 더 자율적인 방향으로 계승했으나, 염경엽 감독 취임 이후 이 자율야구가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시스템 야구는 現 SK 와이번스의 팀 사정에는 맞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사실 롯데 감독 시절에도 비슷한 평가를 들었다.[10]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고척을 연고로 하는 옆 구단과는 다르게 SK 와이번스에는 2군 유망주의 풀이 넓지 않다는 점이다.[11] 실제로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는 '모든 선수가 1군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야구' 를 모토로 한 것인데[12] , 2015년 부임 시기까지 SK 와이번스는 주전과 비주전의 기량차가 굉장히 심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팀이었다.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를 구사하기엔 현 SK 와이번스의 2군 팜이 그만큼 녹록치 않다는 이야기이며, 현 SK 와이번스의 팀 사정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만화에서나 나올 수 있을 법한 야구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13] 그래서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트레이드를 활발히 하는 편이다.
그리고 2군에서는 크게 대두되지 않던 선수 기용이 1군에서는 큰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정우람을 마무리로 내리고 윤길현을 다시 주먹구구식으로 그 자리에 넣은 것은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에는 분명히 어긋나는 형태의 선수 기용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갓 군에서 제대한 서진용을 필승조로 무리하게 쓰다가 결국 팔꿈치가 나가게 된 것,[14] 현재 구위가 불안정하면서 과부하의 조짐이 보이는 문광은을 계속 필승조로 쓰고 있는 것은 김용희 감독의 선수 기용의 문제가 맞다.[15] 진해수가 다시 1군에 등록된 이상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현재 SK 와이번스 팬들 사이에서 김용희 감독의 선수 기용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좋지 않다. [16][17]
따라서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가 SK 와이번스에서 확실하게 정착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며 길게는 5시즌 이상까지도 걸린다는 이야기인데, 성급하게 시스템 야구를 도입하려고 한 것은 김용희 감독이 2군 감독과 육성총괄 시절 때와는 다르게 1군 감독으로는 SK 와이번스의 1군 팀 사정을 폭 넓게 보지 못한 것이 크다는 것이다. 15년의 공백이 여기에서 굉장히 크게 작용한 것. 역으로 보면 감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필승조를 아끼는 등 나름 전략적인 운용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9월부터 의외로 선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SK는 분명 2015시즌 최상위 전력을 보유하고 시작했으며 삼성과 함께 2강을 달릴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안정되지 못한 운용으로 1위와의 승차를 20 가까이 벌려버린 기대이하의 감독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팀 안팎에서 모두 동의하는 그의 최대 단점으로는 경기를 너무 쉽게 던져 버리는 듯한 운영을 한다는 것.[18] 본인 나름대로는 길게 보고 당장의 한 경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생각인 것 같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영 맥이 빠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상위권 전력을 가지고 시작해서 상위권을 달리다 4위와의 승차가 8, 1위와의 승차가 17이 되도록 하며 프런트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감독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시즌 초기 서진용의 조기 아웃과 관련해 혹사 논란에 시스템 야구의 무용론 얘기가 나왔던 상황까지 갔음에도 김용희 감독이 자랑하던 혹사없는 시스템 야구는 결국 후반기 5위 경쟁에서 그 진가를 드러냈고, 결국 5위를 차지하면서 오랜만에 팬들에게 포스트시즌 경기를 선사해 준 업적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19] 경기 종료 후에도 '''"팬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 라는 언급을 하면서 전임 감독과는 다른 인성을 보여준 것도 어찌보면 팬들 입장에선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의 가장 큰 요인.
요약하자면 세세한 경기 운영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감독으로써 나름대로의 역할은 하고 있다는 것이 총평이다. SK에서 이렇게까지 무너진 가장 큰 요인은 이전 소속팀 감독 시절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2군 감독 시절이나 육성총괄 시절의 명성에 비해 1군 감독으로는 한계가 굉장히 뚜렷하게 드러난 것.
결론적으로 2015년 와이번스 팬들의 총평은 대체로 기대에는 못 미치는 감독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지도 않은 감독. 실제 2015시즌 종료 이후 비판이 많았지만 대부분 임기를 지켜줄 것을 주장했고, 구단도 받아들였다. 다만 2016년에는 재계약으로 인한 조급증 때문인지 서서히 문제가 생겨났다.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성적이 하락하는데에 대한 대처가 부족하고 타선은 뻥야구 일변도가 되면서 부침이 심해지고 투수진도 롤러코스터에 혹사는 그나마 적던 감독이 시즌 중반부터 채병용을 필두로 조짐을 보이고...어느 정도 한계가 뚜렷한 감독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상술한 SK 시절의 경력 이전의 롯데나 삼성 시절을 되돌아보더라도 이 시스템이란 것을 꽤나 강조했는데, 그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리대로 돌아가는 야구'이다. 시즌 초에 구상된 전력을 토대로 플랜이 짜지면 그에 따라 시즌을 소화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세세하게 채운다, 변칙없이 순리대로 간다는 식의 행동원리인데, 이것이 잘 구현된 경우가 1995년 롯데 자이언츠의 경우이다. 이 해 롯데는 승률 .560을 마크하며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었는데 이는 김용희 감독의 플랜대로 부상 등으로 인한 선수 이탈이 없으면서 박정태가 재기에 성공하는 등 굉장히 순탄하게 시즌을 소화할 수 있었다. 즉, 플랜을 구성하고 변수가 없다면 나름 괜찮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러한 계획, 플랜 A가 잘 돌아가면 괜찮은데 각종 변수로 인해 그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대처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었단 점에 있다. 흔히 말하는 '플랜 B'에 대한 준비가 미흡하다는 뜻인데 그 이후의 롯데 성적이 688이라는 것이 이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96년만 봐도 전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인 만큼 시즌 초 전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한 선수 이탈 및 부진과 그로 인한 운용 미스 등으로 인해 타자들이나 투수들의 세부 스탯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5할 승률에 미달되었고, 1997년이나 1998년 역시 부진을 거듭한 결과 2년연속 최하위라는 참담한 성적을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1998년은 시즌 도중 경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뭔가 계획이 틀어질 때 '아직은 순리대로 간다'라고 거듭 인내하다가 도저히 계획이 정상대로 돌아오기 힘든 지경이 되어서야 무언가 해 보려고 하는데, 그 시점은 이미 늦어버려서 시즌 전체를 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시스템 야구를 표방하지만 그 시스템의 모든 것이 정상이라 전제된 플랜 A만 있을 뿐, 부진이나 부상처럼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가 굉장히 미흡했다는 문제는 이미 과거부터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롯데 시절 내내 부상이나 선수의 부침이 잦았다는 것도 되돌아 볼 문제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혹사가 많은 감독은 아니지만 선수 관리 측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삼성 시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김응용 부임 이전까지의 땜빵 성격이 강한 부임이긴 했지만 적어도 시즌내내는 순리대로 풀어나갔고 임창용은 선수 생활 최초로 심하지 않은 기용으로 그나마 관리받았다. 다만 투수진 문제는 심각해서 정규시즌까지는 그럭저럭 풀고나가던 것이 포스트시즌에 현대를 만나서 합산 스코어 '''26:4'''로 말 그대로 처참할 정도로 당하는 동한 손도 쓰지 못했다. 적어도 정규시즌에선 이 정도까지 처참할 정도로 당하지도 않았고 그 해의 현대 유니콘스는 역대급 팀이었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대처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단지 누구나도 알고 있는 1년짜리 땜빵 감독이었기 때문에 많이 회자가 되지 않을 뿐.[20]
정리하자면, 감독 경력 내내 일관적으로 시스템과 순리를 강조하는 편이다. 심한 무리는 하지 않고 주어진 전력 구상에 공을 들이며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타입이라는 것. 하지만 이 전력 구상에서 무언가 틀어질 경우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고 그 대처 역시 심하게 떨어진다. 어떻게 보면 대처없이 아직은 순리대로 가자만 되뇌이다가 이미 늦은 시점에서 뭔가 해보려하지만 이미 틀어진 상태에서 그것이 악영향을 주기도 하는 등 단점도 굉장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이러한 점이 2군 감독으로는 큰 능력을 발휘했으나 1군 감독으로는 한계가 굉장히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난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
이외에도 타자를 잘 키운다는 장점이 있다. 롯데에서 남두오성을 만들었으며, SK에서는 핵타선을 만들기도 했다.
6. 기타
롯데 감독 시절 마산아재들이 경기 후 즉석 청문회를 연 적이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 돌아다니던 글이었는데, LG가 상위권을 찍다 처참하게 무너지던 2011년 8월 잠실 청문회 사건이 용두사미로 끝나자 이 해프닝에 비교되는 사례로 다시금 발굴되어 야구 커뮤니티를 비롯한 도처에 글이 퍼졌고, 이후 롯데의 상황을 제대로 표현한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SK 감독 취임 후 다시 회자되는 중. 향간에는 험악한 분위기였다는 설도 있었지만 그정도까지는 아니었다.[21]아재들 웃통까고 버스 나오는 길 앞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서 대기하고 있음.
다른 아재들이 버스 존나 두들기면서 "감독 나온나! 어이! 감독 나온나!"
이러니까 김용희 나옴...ㅋㅋㅋㅋㅋㅋ
김용희 "와예?" (존나 개좆밥 새끼 내가 프로야구 감독만 아니었어도 척추를 접어버렸을거라는 짜증 섞인 표정)
아재1 "마! 우예 된기고? 박정태 절마저거 살 와 저렇게 마이 찌가 게임 뛰는데???"
김용희 "살 아입니더, 다 근육입니더"
아재2 "내 어제 호프에서 박계워이 봤는데, 선수들 관리 안하는갑제?"
김용희 "아이라예...잘못보신깁니다."
아재2 "내가 봤는데?"
김용희 "따블헤다 하고 오늘 새벽에 내려왔다 아입니꺼...지금 부상선수가 쪼매 있어가 이라지 쪼매만 참고 기다려주이소"
아재3 "아따 근데 김용희 미남이네~키 메시고?"
김용희 "90입니더" (곧 끝날것을 직감하고 씩 쪼갬, 버스기사 반 시동 걸음)
아재3 "어이 아재들요, 우리 롯데 잘하라고 화이팅 함 해주입시더 으이? 자! 롯데 화이팅! 김용희 화이팅!"
아재들 일동 만세 삼창하고 젤 앞에 서 있던 아재랑 김용희랑 악수하고 김용희가 버스에서 생수 가져와서 아재한테 주니까 모세가 바다 가를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길이 쫙 생김.
해당글은 국내 야구 갤러리의 나이 많은 고정닉 유저가 처음 작성했으나 원 출처는 표기가 안 되고 글만 돌아다니고 있다. 카더라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이태일 NC 사장이 기자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증언도 한 만큼 실제로 벌어졌다는 건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SBS 야구본색에서 이 사건에 대한 김용희 감독과 당시 롯데 버스 운전 기사의 인터뷰도 했다. 엠팍의 한 댓글에 따르면 1995 시즌 하반기에 롯데가 연패에 빠져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22]
엄청난 주량을 자량한다. 고대 신입생 시절 3시간 만에 소주 24병을 마셨다는 얘기가 있다.
노안에다가 한국프로야구 초기부터 코칭스탭을 해서 나이가 굉장히 많은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1955년 생으로 2018년 현재 대한민국 나이로 64세밖에 안 되었다. 롯데 감독 맡았을 때가 만 40살이다.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부임한 후 흠잡힐 곳 없는 인터뷰 스킬과 무난한 행보로 인해 용감 등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팬들의 마음을 훔치겠다는 발언 때문에 루동님, 도동님 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190cm가 넘는 장신때문인지 최훈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얼굴이 길쭉하고 안경 쓴 비룡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에피소드 상 쌍댕이가 안경을 쓰고 비룡 옆 에서 형님 형님 거리는 묘사가 많다.
박철순과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가족들과도 왕래가 빈번하고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23]
[1] 현재의 부산광일초등학교. 1998년, 남일초교와 동광초교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2] 행정학과 74학번.[3]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4] 실업과 대학을 망라해 모든 선수들이 모교의 유니폼을 입고 벌이는 대회. 프로야구의 원형 격이고, 이 대회를 주도한 이용일, 이호헌은 뒷날 KBO의 초대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이 된다.[5] 안타깝게도 저 둘은 선배인 김용희보다 먼저 하늘의 별이 되고 만다.[6] 이 디스크 통증은 프로 선수 생활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인 1994년엔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결국 전반기 종료 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올스타전은 각 팀의 감독들이 코치로 출전하게 되지만 이 디스크 수술탓에 김용희는 불참하고 대신 권두조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올스타전에 참가했다.[7] 2018 시즌 경기운영위원장이 따로 있었으나, 위원장으로 칭하는 기사도 나오고 있어 혼선이 있었고, 결국 위원장직에 오른 것이 확정되었다.[8] 이 때 잠실야구장으로 향하던 팬들은 일제히 황당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2호선, 9호선에서 방향을 틀어 돌아갔는데, 경남권에서 온 NC 팬들은 휴가 하루를 다른 곳에서 보내야 했다.[9] LG 이광환, 태평양 정동진 감독과 함께 자율야구와 혹사 없는 야구를 지향했다.[10] 과도기 감독이었던 삼성 시절에는 이렇다 할 평도 없었다.[11] 실제로 SK 스카우트진은 김용희 감독이 2013년 SK에 코칭스태프로 있었던 때 2014년 드래프트에서 '''유격수''' 김하성을 거르고 이건욱, 박규민, 유서준을 뽑아온 행적으로 인하여 넥센 스카우트진에 비해 일을 심각하게 못 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결과 유격수 자리에 무혈입성한 김성현이 그 반대급부로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었다. 그나마 박민호, 이승진, 정영일이 활약하면서 나중에 투수진 향상에 공헌했고, 이후 야수진에서도 2016년 드래프트에서 뽑아온 안상현이 2019년부터 긴급 콜업되어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12] 두산의 선수육성 정책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선수를 포지션 상관없이 뽑아서 웬만하면 장기적으로 키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지명순위 상관 없이 모두에게 기회가 공평하게 가는 편이다.[13]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김용희 감독이 추구하는 시스템 야구를 가장 잘 구사하고 있는 구단은 바로 저 고척을 연고로 하는 옆 구단이라는 것이다. 4월 서건창의 부상 이후 김지수, 서동욱 등의 선수가 재등장했으며 송성문이라는 유망주까지 등장한 상태다. 그리고 최근 이택근의 부상이라던가 혹은 기존 주전 외야수의 휴식시 누가 그 자리를 훌륭하게 메웠는지 생각해 봐라. 바로 고종욱, 박헌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군에서 제대한 홍성갑, 현재 2군에서 몸을 만드는 중인 거포 유망주 강지광도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14] 서진용은 결국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2016년 후반기에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15] 단 이는 필승조로 등판을 자주 하다보니 과부하가 걸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 현재 문광은이 먹은 이닝이나 투구수 모두 올 시즌이 커리어 통산 최다라는 점이다. 정우람이 주자를 삭제한 덕이 있었음을 감안해도 평균자책점이 한 달만에 2 가까이 수직 상승한 것은 과부하가 가장 큰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16] 단 이는 윤길현이 블론세이브는 단 2개밖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것은 현 SK 와이번스의 불펜투수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5월 윤길현이 마무리를 보던 시절 윤길현의 기록을 살펴보면 블론세이브는 딱 2개뿐이었지만, 이는 수비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 5월 당시 윤길현의 평균자책점과 WHIP 수치는 각각 2점대 후반과 1.5대의 WHIP로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최하위에 해당되는 기록이었으며, 당시까지 5개의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던 윤명준보다도 더 나쁜 기록이었다!''' 수비의 도움이 없었으면 윤명준보다 더 심하게 당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김용희 감독이 아무 생각없이 윤길현을 마무리에서 내린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느 구단의 감독이 1.5라는 높은 수치의 WHIP가 나오는 불펜투수를 마무리로 믿고 맡기겠는가? 불펜투수는 한 점도 내주지 않는, 거기에 마무리 투수라면 한 명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피칭을 해야 한다.[17] 참고로 현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정우람을 제외한 마무리 투수의 WHIP (이닝당 출루 허용율).가 가장 낮은 선수는 공교롭게도 양대극장 ...이 둘의 7월 현재 WHIP 수치는 단 1.11밖에 되지 않는다. 정우람의 WHIP는 7월 현재 0.91인데, 문제는 마무리를 그래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치인 1.20대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는 공교롭게도 이재영과 채병용 단 두 명뿐이다. 이재영은 정우람의 도움을 받아서 저 정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채병용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인데 채병용은 밴와트가 전력에서 이탈한 현재는 대체 외인 선발이 등록되기 전까지는 임시 선발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며 평시에도 롱 릴리프를 거의 유일하게 맡고 있는 상황. 쉽게 말해 정우람을 제외하고 WHIP 수치상으로 마무리를 믿고 맡길 선수가 SK에는 현재 '''단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2016시즌 그 정우람이 한화로 떠나면서 아예 한 명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박희수가 건강하게 돌아온 것이 다행이지만, 지금도 박희수까지 가는 과정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18] 물론 시즌 후반에는 당연히 그런 거 없었지만, 그때는 5강 다툼 하는 상황이라...[19] 이 때문에 SK 팬들은 막판 히 드랍 더 볼로 경기를 말아먹은 김성현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20] 이 해에는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 김용희 감독에게 동기부여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삼성 구단이 김응용 한 명을 잡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사정을 생각하면...[21] 타지방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경상도 사투리가 좀 투박하고 거친다는걸 감안하고 봐야한다.[22] 당시 롯데의 성적은 3위로 나쁘지 않았기에 청문회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회기애애했던 것. 당시에는 3~4위 승수가 4게임차 이상 차이가 나면 준플레이오프를 생략하고 3위가 플레이오프로 직행할 수 있었던 엄청난 혜택이 있었는데, 당시 롯데가 연패에 빠지면서 4위 해태와의 격차가 좁혀지면서 청문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23] [image]
본인은 감독, 박철순은 선수인 시절. 1995년 추정.
본인은 감독, 박철순은 선수인 시절. 1995년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