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1. 소개
'''"알긋나? 오늘은 무조건 이기야된다. 안그라몬 내가 다 지기삔다!"'''
전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 선수(내야수). 현재는 KBO 선수 육성 위원. 등번호는 14번 - 16번. 프로통산 14년동안 1,16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96 / 1141안타 / 85홈런 / 638타점 / 531득점을 기록했다.앞으로 열 번쯤 연속으로 우승한다 하더라도 팬들의 성원에 다 값하지 못할 롯데 자이언츠가 '''부산 야구 팬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아마도 박정태가 아닐까. 박정태는 단순히 독특한 타격 자세를 가진 선수가 아니며, 그저 야구를 잘 했던 선수도 아니다. 그는 '''자이언츠, 아니 부산 야구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사나이다.
ㅡ 김은식, '야구의 추억' 中
동래고등학교와 경성대학교를 졸업한 후 1991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여 1990년대 최고의 2루수로 활약했다. 현역 선수시절, 꾸준한 타격 실력과 근성으로 상징되는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로 롯데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1991년부터 2004년까지 오직 롯데 한 팀에서만 활약했고 코치생활까지 롯데에서만 했던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도자로 부임한 후, 특히 2012년 롯데 1군 타격코치 시절 방임에 가까운 최악의 지도력을 보여주는 바람에[3] 일부 롯데팬들로부터는 다시는 팀에서 보지 말고 그냥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기억되길 바랄 정도로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롯데 타격코치를 사임한 후 2013년 WBC 대표팀 코치를 거쳐 KBO 육성위원으로 위촉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보호처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야구 봉사단체인 '레인보우 희망재단' 이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2019년 음주운전 관련 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또 다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많은 팬들이 박정태가 롯데 감독으로 오기를 바라고 있지만, 해당 사건으로 인해 아무래도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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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선수시절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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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2005년 3월부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 싱글 A팀인 밴쿠버 캐내디언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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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코치시절
2005년 1년 간은 롯데 구단이 연수 비용을 부담했고, 남은 기간은 자비로 머물면서 공부했다. 그 곳에서 자율 야구를 습득했다고. 해당기사
2006 시즌 종료 후 롯데에 복귀해 정영기 전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밑에서 타격코치로 지내다 2009 시즌 종료 후 양상문 2군 감독이 1군 투수코치로 선임되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해당기사
2011년 시즌 종료 후 김무관 타격코치가 LG 트윈스로 이적함에 따라 공석인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에 정식 임명되었다.해당기사
2012년 시즌 초반에 롯데 자이언츠경기가 우천 취소되었을때 나온 '''롯데 자이언츠의 혼 박정태'''라는 다큐가 나온 적이 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은 동남 방언이 섞여 있어 매우 호응받는 중.bgm 조심
하지만 2012 시즌 들어 양승호 감독 다음으로 무능하다고 까이는 코치가 되었다. 4월에는 성적이 좋아 티가 안 났지만, 5월 들어 롯데 타선이 심하게 부진해지자 까이기 시작한 것.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던 (특히 바깥쪽) 변화구 공략의 어려움을 전혀 극복해 주지 못하고 있고, 컨택 위주로 짧게 밀어치는 타법을 주문하기는 했는데 장타는 고사하고 컨택조차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는 선구안의 실종. 타선 전체가 다 그렇지만, 특히 필요할 때 해 줘야 하는 클린업 트리오(전준우, 홍성흔, 강민호)의 부진이 너무 두드러져서 팬들의 걱정이 늘어만 가고 있다. 1군 타격코치가 된 이후로 그의 능력을 혹독하게 시험받는 중. 심지어는 아무리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고는 하지만 덕아웃에서 기도만 하고 있다는 이유[4] 로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주님태'''라는 별명으로 까이고 있다. 선수시절에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근성의 이미지로 사랑받은 선수였으나 타격코치로는 무능함으로 인해 명성이 희석된 인물.(공필성의 예도 있다.) 9월 들어서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퇴출 릴레이 글까지 나오고 있다.
9월 23일, 용덕한의 수훈 인터뷰에서 양준혁 해설위원이 코치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냐는 말에 용덕한이 특별한 지시는 없었다고 답한데다 '''선수들끼리 미팅을 가져 초구는 골라내고 치자는 의견을 서로 주고받았다'''라는 말을 하고 양준혁 해설위원이 재차 물어보자 "코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여 선수들에게마저 신뢰를 잃어 가는 모습이 은연중에 비추어졌다.
아시아시리즈 종료 후 11월 10일, 결국 구단에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박정태가 사의를 표시한 직후 김시진 감독이 마무리 훈련을 지도중이던 넥센 히어로즈 박흥식 타격코치를 바로 빼온 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5] 타 팀 팬들은 박흥식 타격코치를 넥센에서 빼낸 것과 레전드를 그냥 사퇴하게 뒀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기도 했으나 롯데 팬들은 박흥식 타격코치가 타선의 답답함을 해소해줄 것이라 생각하여 대체적으로 반기는 분위기이다. 일단 한 팀의 중심 선수였던 코치이므로 언젠가 복귀할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6]
타이중 참사의 숨은 주역으로 꼽히며 복귀는 개뿔이라는게 대체적인 시각.
롯데 코치에서 물러난 이후 KBO의 육성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사퇴 1년 뒤의 근황. 롯데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2014 시즌을 마치고 사임한 김시진 감독의 후임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롯데는 이종운을 후임으로 선임했다. 박흥식 코치 부임 2년차에 롯데 타선이 좋아지면서 그의 타코 시절은 흑역사에 가깝게 되었지만, 투수코치로 그보다 몇 배 심한 흑역사를 썼던 양상문이 LG 감독으로 성공[7] 하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본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감독 박정태를 한 번 바라는 목소리도 분명히 꽤 늘어났다. 그만큼 기술적인 면과 별도로 그의 인격과 리더십은 아직 확실하게 롯데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듯. 특히 2014년 롯데의 DTD는 객관적인 전력의 문제보다 프런트와 코치진의 갈등으로 선수단 분위기가 망가진 탓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박사 과정에 전념하고 있는 그는 '''음지'''에서 주로 활동 중이다. 리틀야구단과 다문화 어린이 야구단, 그리고 아동보육시설 야구 지도, 새터민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야구 지도, 사회인 야구 지도 등을 하고 있다. 따라서 몇 년 동안 박정태를 프로에서 보기 어려울 듯하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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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오랜만에 한 방송에 출연해 현재 진행중인 야구 봉사활동의 현황과 더불어 선수시절을 전반적으로 회고했다. 그리고 이 방송에서 향후 계획의 1순위는 '프로 무대로 돌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롯데의 감독이 교체될 때 마다 항상 새 감독 후보군에서 박정태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만큼, 본인 또한 당장은 아녀도 언젠가 한 번은 롯데 감독을 맡아보고 싶은 생각은 품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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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7일 새벽 사진에 나와 있는 대로 NC 다이노스 차기 감독으로 유력하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당연히 NC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고 현장을 떠난 지도 꽤 된 데다가 이 문서에 적혀 있는 과거 코치 시절 행적이 재조명되면서 전 야구팬에게 까였다. 거기에다 며칠 전부터 kt wiz에서 문재인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해 새 단장과 감독자리에 호남-해태출신의 김성한, 이순철을 앉힌다는 썰이 도는 바람에 박정태도 문재인 정권의 보은 인사, 낙하산 인사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많았다.[9][10] 허나 당일 오전 NC가 이동욱 수비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해당 기사는 오보가 됐고, 팬들의 비난도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마도 박정태와 이동욱은 동래고등학교, 롯데 자이언츠, 내야수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최초로 보도한 스포츠동아 기자가 NC 프런트에게 '동래고 출신 내야수'라는 힌트만 듣고 지레짐작, 상대적으로 듣보(...)였던 이동욱 대신 박정태가 감독이 될 것이라는 오보를 낸 듯 하다. 결국은 박정태 본인 입장에선 기레기에 의해 억울하게 욕만 먹었다.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정치색이 너무 짙어 구단들이 감독직을 주는 것을 꺼린다면서 이런 말을 들을바에야 차라리 감독직을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NC 감독 선임설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기사가 나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동시에 이동욱 감독이 자신보다 낫다고 하면서 NC가 훌륭한 선택을 했다는 의견을 남겼다.
4. 독특한 타격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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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성과 함께 박정태 하면 생각나는 것은 바로 그만의 독특한 타격폼. 역대 KBO 리그뿐만 아니라 일본프로야구나 메이저리그에서도 박정태와 비슷한 타격폼을 가진 선수조차 없을만큼 정말 특이하다. 보기에도 어지럽게 배트를 이리저리 돌리고, 왼손은 타격 직전까지 배트에 데었다 뗐다 한다. 박정태 스스로는 배트스피드를 늘리기 위해 고안한 동작으로 철저히 순서를 지키는 동작이며, 하다못해 매일 거울을 보며 한시간씩 연습하기까지 했다고 한다.[11] 은퇴한 지금 이벤트 매치같은 경기에서 본인조차도 재연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타격폼인건 확실하다.(...)
박정태가 인기를 끌 당시에는 부산, 경남 지역의 초등학생들이 전부 배트를 들고 박정태 흉내를 내는 바람에 초등학교 야구 팀 감독들이 제발 폼 그렇게 하지 말라고 박정태에게 부탁하기도 했다고... 이것 때문에 박정태는 언론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자기 폼을 따라하는 건 좋은 게 아니라고 했지만, 애들이 말을 들을 리가 있나. 사실 본인도 왜 그렇게 극단적인 자세를 취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고 그저 자신에게 맞는 폼을 계속 연구하면서 3년 정도 시행하다 보니까 어느 사이에 그런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커리어 초반과 이후 영상을 비교해 보면 의외로 정상적인 폼이었다가 해가 갈수록 폼이 독특하게 변해갔음을 알 수 있다. 박정태 본인은 자연스러운 무게중심 이동을 통해서 타구에 힘을 더 실을 수 있는, 자신의 작은 체구를 극복하게 해준 폼이 아니였나 추측한다.
2009년, 정수근이 음주폭행 사건 이후 복귀하고 몇경기 지나 이 폼과 유사한 폼으로(정수근은 좌타라 우타인 박정태와 반대의 폼으로) 결승타를 쳤는데, 언론서 타법이 이 사람처럼 변했다고(본인은 부인했다) 기사에서 띄워진 적이 있으나, (위에 언급한 팬서비스와는 당연히 다르다.) 그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혹자는 이에 대해 '박정태 말고 다른 사람이 저런 타법을 쓰면 저주가 걸린다'라는 것을 제시했다. [12]
한일 슈퍼게임 당시 출전했던 박정태의 타격 폼을 보고 당시 일본 올스타 팀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깜짝 놀랬다는 일화도 있다. 이날 경기 성적은 3타수 2안타.[13]
1999년에 열린 아시아 야구선수권 당시에도 중국인 선수가 자신의 타격폼을 보고 비웃자 만루홈런을 날려주셨다.
5. 사건사고/논란
5.1. 음주운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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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프로야구 선수 박정태 음주운전에 버스 운전방해 입건
2019년 1월 18일 박정태는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입구에서 음주를 한 상태였는데 정차조차 금지되는 횡단보도 위에 차를 세워두고 대리운전기사를 기다리다가, 1002번 심야버스 기사가 차를 치우라며[14] 경적을 울리자 차량에 다시 탑승해 자신의 차량을 주차한 후 버스 기사와 언쟁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분을 참지 못하고 경적을 울렸던 시내버스에까지 올라탄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버스 기사가 출입문을 닫고 출발을 해버리자 박정태는 운전석 옆에서 기사에게 폭언을 하고 헤드락을 거는 시늉까지 했으며 버스 운전대까지 두 차례나 잡고 강제로 인도 방향으로 버스를 트는 난동을 부렸다. 당시 버스에 타고있던 승객 4∼5명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결국 승객들의 만류로 사태가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결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면허 취소 수치인 혈중알코올농도 0.131% 상태로 자신의 카니발 차량을 10∼20m 운전한 혐의도 받고 있다.
박정태는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인정하며 "애초 버스 기사에게 술을 마셔 운전을 못 한다고 말했지만, 기사가 못 들었을 수는 있다."며 "순간적으로 흥분해 잘못한 부문이 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운전을 방해할 목적으로 버스 운전대를 틀지는 않았고 다만 버스 출입문 개폐 스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운전대에 손이 닿았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경찰은 박정태의 해명이 블랙박스 영상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고 정확한 정황을 조사 중이며, 이번 사건을 조사한 경찰 관계자는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박정태의 진술과 달리 범행의 고의성이 상당 부문 보인다."며 "추가 조사 후 구속영장 신청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2019년 2월 19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및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검찰에 송치되었다. 혐의를 시인하고 반성하는 점, 피해자인 버스기사와 합의한 점, 이미 CCTV 등의 증거가 확보되었고 KBO 육성위원 및 레인보우재단 이사장이라는 신분상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불구속 기소처분을 받았다. 초범이고 범행 당시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피해자와 합의도 한 만큼, 벌금형 내지는 집행유예 처분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향후 롯데의 차기감독이나 여러면에서는 요새 음주운전과 주폭 등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이전보다 엄격해진 탓에 이미지 타격이 클 것이고, 현장 복귀 이야기는 더 이상 힘들어질듯 싶다. 많은 야구팬들이나 롯데 팬들도 '안타깝다. 술이 사람을 바꾸듯이 외조카 추신수에 이어 외삼촌까지 이러니 다만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라며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이어 2019년 4월 17일 검찰은 이날 부산지법 형사 17단독 김용중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서 박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변호사도 이번 계기로 반성하면서 차를 팔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며 선처를 호소했고, 박정태 본인도 "이번 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로 인해 지난 날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정말 죄송하다. 앞으로 술도 마시지 않고 운전도 하지 않겠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선고 공판은 오는 2019년 5월 15일 오전 10시에 열릴 예정이다.
검찰, '음주·버스운전 방해' 박정태에 징역 1년6월 구형
1심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20년 6월 국제신문과 가졌던 영상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사건 이후로 트라우마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을 못하고 있다고 하며, 당시 피해자였던 버스기사와는 형-동생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6. 기타
- 현역 시절 유난히 초구를 안 치기로 유명한 선수였다. 하일성이 롯데 경기를 중계하다가 박정태를 일컬어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초구를 안 치네요'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 본인은 이에 대해 그만큼 공을 오래 보겠다는 의지였고 실제로 삼진을 잘 안당하고 배트스피드도 자신이 있었던지라 언제든지 좋은 타구를 날릴 수 있었기 때문에 초구는 치지 않고 지켜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 1993년에 당한 발목 부상이 선수 생활 동안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예전과 같은 주루 플레이는 고사하고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수시로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선수시절 왼쪽 발목에 늘 보호대를 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발목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차고 있는 것이다. 부상 당시 수 차례의 수술로도 발목 부상이 회복되지 않고 골수염으로까지 전이되어 재기는 커녕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펜글씨 학원, 컴퓨터 학원 등을 전전하며 강사 자격증을 따려고까지 했었다고.
- 중장거리형 타자라 통산 홈런은 많지 않지만, 의외로 만루홈런을 많이 쳤다. 역대 통산 4번의 만루홈런을 쳤는데, 1998년 한 차례, 1999년에 2차례, 2002년에 한 차례 각각 기록했다. 99년 9월 7일, 02년 4월 9일.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300번째 만루홈런을 박정태가 기록했다.
- 홈런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산 OPS가 0.8이 넘어간다. 혹자는 이 부문이야말로 박정태의 진짜 위엄을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 1999년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31경기로 중단되었는데 32경기째인 마산 두산전에서 9회말 2아웃 주자없이 마지막 타석에 박정태가 들어서 좌전 안타성 타구를 날렸으나 당시 두산 3루수 홍원기의 다이빙캐치 호수비 덕택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에도 불구하고 간발의 차로 아웃되며 기록 경신이 중단되었다. 일본프로야구 기록이 33경기 연속 안타였고 당일 경기가 이미 0-6으로 롯데의 패배가 99.9% 확정된 시점이었던지라 홍원기가 굳이 그렇게까지 억지로 잡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우 아쉬웠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후 박정태가 밝힌 기록 중단 소감이 홍원기 선수한테 너무 고맙다 였다. 홍원기가 최선을 다 해줬기 때문에 자신의 연속경기안타 기록 또한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라는 소감으로 이 당시 박정태의 대인배적 면모가 극찬을 받았다.
- 본인이 꼽은 가장 약했던 투수로는 조웅천, 자신이 가장 잘 쳤던 투수로 절친 조규제를 꼽았다. 조규제를 상대로 너무 잘 치다보니 나중에는 조규제가 아예 포기하고 박정태만 나오면 그냥 가운데로 살살 던져주고 박정태도 알아서 단타만 치고 나갔을 정도라고.
- 국대 기록은 롯데 입단 전에 참가한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과 1999년 제20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15] 2002 아시안게임 예선에 참가했다.
- 별명으론 '탱크', '악바리' 등이 있다. 그의 악바리는 유명했기 때문에 박정준, 이인구 등 롯데의 코치 ~ 2군 감독 트리를 타면서 여타 훈련을 열심히 하는 선수가 있으면 박정태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악착같이 훈련한다 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까 1년에도 몇 번씩 혀를 내두르는 일이(...).
- 롯데 자이언츠에서 데뷔한 부산 출신이자 10년 넘게 활약하면서 준수한 성적을 거둔 프랜차이즈라 영구결번으로서 적합함에도 영구결번은 주어지지 않고 있다. 구단에서 영구결번이 된 선수가 최동원 한명이고, 그마저도 팬들의 성화로 인해 구단에서 마지못해 지정한 격인데, 모기업이 같은 일본 치바 롯데 마린즈도 일본 파리그에선 유일하게 영구결번이 없는 구단임을[17] 생각하면 그냥 롯데그룹과 프런트 방침이 영구결번 자체를 잘 안 주는 성향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런 구단의 방침조차 깬 최동원이 대단한 거지 박정태 영구결번을 안 주는 구단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는 것.
- 독실한 크리스천으로[18] 발목 부상으로 재활하던 당시 6개월 동안 입원한 병원 내에 있는 교회에 꾸준히 다녔는데 이 당시에 깊은 신앙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성격도 많이 온순해지고 후배들에게 따뜻하게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코치가 된 이후에는 선수들을 다그치기보다 칭찬을 많이 하는 쪽으로 지도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 현역시절부터 가진 것에 비해 팬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 선수라고 자신을 낮추며, 선수는 무엇보다 팬들에게 잘 해야 한다고 많이 강조하던 타입. 그래서 선수생활 후반부에는 의도적으로 팬서비스에도 많이 신경을 썼고 후배들에게도 팬서비스에 대해 많이 조언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은퇴 후에는 현역시절 입었던 유니폼들조차 모두 팬들에게 줘버려 집에 남아있는 게 한 벌도 없다고 하며 (...) 은퇴식을 치를 때 받은 동료들 사인이 들어간 유니폼 액자만 소장중이고 코치와 2군 감독 시절 유니폼도 모두 팬들에게 증정하고 있다고 한다.
- 작은 체구와 달리 짱돌주먹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싸움에 일가견이 있었다. 어린시절에도 싸움을 잘했는지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 다큐멘터리에서 박정태의 누나는 박정태가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자신보다 덩치가 큰 6학년들을 혼자서 때려눕혔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19] 실제로 박종호[20] 와 벤치클리어링을 벌였는데 서로 한 대씩 갈기자 둘 다 나자빠질 정도였다고.
- 잘 알려져 있듯이 추신수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즉, 추신수의 어머니는 박정태의 누나다. 추신수가 쓴 책을 보면 박정태는 추신수가 야구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추신수의 아버지가 "우리 신수 잘 하나?"라고 물어 보자 "야구선수 너무 힘들다면서 그걸로 성공하기도 장담못하고 솔직히 다른 걸 하게 하세요...재능이야 있습니다만. 야구나 스포츠란 게 재능이 있어도 성공할지 장담 못 합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추신수 본인이 야구가 너무 좋다고 하자 그럼 어쩔 수 없지...라며 야구에 대한 걸 가르쳐 줬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2013년 7월 28일 코리안 데이 매치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신시내티 레즈의 3차전 경기 류현진과 추신수 맞대결 경기에서 김인식과 함께 특별 해설로 초대됐다. 추신수가 롯데에 오는 걸 거부하고 메이저리그에 유망주로 도전을 한 것이 박정태의 말년에 홀대한 롯데에 실망한 추신수의 반발 심리라서 그렇다부터 그냥 메이저리그 도전이 하고 싶어서 롯데에 안 간 거다, 계약이 실망스러워서 그렇다까지 여러 추측들이 있지만, 롯데 팬덤에서는 추신수가 롯데 자이언츠에 오지 않을 걸 아쉬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박정태의 팀 후배이기도 한 이대호는 어릴 적 박정태를 외숙부로 둔 추신수가 내심 부러웠었다고 한다.
- 프로야구 30주년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 박정태뿐만 아니라 각 포지션별 최다 수상자가 모여 2011년 7월 23일 잠실 야구장에서 올스타전 식전행사로 반지 수여식을 했다.
- 개인 타이틀이 없는 것이 아쉽다. 박정태와 자주 비교되는 2루수인 김성래는 단일 시즌 홈런 1위, 정근우 는 단일시즌 득점 1위 등 개인 타이틀이 모두 하나씩은 있으나 박정태는 개인 타이틀이 없다.[21] 단일 시즌 타격 2위와 최다 안타 2위가 개인 타이틀에 가장 가까웠던 항목이었다. 다만 단일 시즌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여전히 박정태의 몫이며[22] 2년 연속 올스타전 MVP 수상은 KBO 리그 역사상 박정태가 유일하다.
- 슬하에 두 아들 박시찬&박시현 형제가 있으며, 아들들도 야구를 했다. # 아들들은 2명 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릉영동대학교에 입학해 대학 시절까지 야구를 했지만 아버지와 사촌형과 달리 프로 지명은 못 받았다.
7. 역대 기록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8. 관련 문서
[1] 음력 기준, 양력으로는 3월 15일.[2] 후술하겠지만 1993년에 경기 도중 발목 부상으로 재활하던 당시 6개월 동안 입원한 병원 내에 있는 교회에 꾸준히 다녔는데 이 당시에 깊은 신앙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역대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 중에, 몇 안되는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이는 워낙 박정태의 고향이자 롯데의 연고지인 부산광역시가 불교세가 강한 지역이기 때문. 실제로 롯데의 주축 선수들을 보면, 이대호나 손아섭, 신본기, 문규현, 전준우 등등 적잖은 선수들이 불교 신자다. 참고로 조카 추신수도 종교가 불교다.[3] 후술하겠지만 명색이 1군 타격코치라면 선수들이 슬럼프나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 부문을 적극적으로 커버해줘야 하는데, '선수들이 스스로 극복해야한다'는 식의 발언을 비롯하여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팀 타격이 쳐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1군 타격코치가 본인이 원해서 맡은 자리가 아닌, 당시 프런트 야구에 손발이 다 묶여버린 양승호 감독을 위해 본인이 총알받이를 자처하며 맡은 직책이라는 점에서 어느정도의 참작은 할 수 있어도, 이왕 자리를 맡은 이상 제대로 못 한데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다.[4] 타격코치라면 슬럼프를 해결하기 위한 조언이나 해결책을 제시해야하는데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는 바람에 더더욱 까이는중(...)[5] 일명 '런흥식 사건'으로 특히 넥센 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6] 실제로 과거에 잘려나갔던 김응국이나 윤학길, 이종운 등의 코치들도 다시 복귀한 적이 있었다.[7] 사실 롯데 감독 시절에도 8888과 77 사이에서 5위를 찍고 리빌딩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최소 평타는 쳤다고 여겨진다. [8] 이 외에도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레인보우 카운트' 야구단을 천종호판사와 같이 운영하고 있다.[9] 네이버에서는 코치 경력의 미비함 보다는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욕하는 댓글들이 대다수였다.[10] KT 위즈도 이숭용 단장과 이강철 감독 체제가 갖춰지면서 김성한이 단장이 된다는 썰도 거짓으로 판명났다. 이강철 감독도 호남-해태 출신이긴 하지만 정치성향을 딱히 드러낸 적은 없다.[11] 출처 : 이성득 해설위원의 자이언츠네이션[12] 정수근은 두산시절이던 2001년에 잠실구장서 벌어진 올스타전에서도 박정태 타격폼을 흉내낸 적이 있었다. 7월 17일에 열린 올스타전에서 6회초 1사후 타석에 들어선 정수근이 초구를 기다리면서 박정태 특유의 타격폼을 흉내낸것. 그때 덕아웃에 있던 박정태도 박장대소했던 게 TV에 잡히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후 정수근은 6구째에 갑자기 당시 LG선수였던 양준혁의 타격폼을 흉내냈다 하지만 뭔가 어쩡쩡하고 어설프게 나온지라 양준혁은 그렇게 달가워하지는 않은 태도를 보였다.당시 영상 [13] 첫 타석의 투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우에하라 코지, 두 번째 타석의 투수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사사오카 신지, 세 번째 투수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카와무라 타케오.[14] 몇몇 네티즌들은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버스기사가 괜히 시비를 걸었다며 버스기사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박정태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위치는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좁아지는 회전교차로 앞길목이었다. 그 위치에 차가 주차되어 있으면 차폭이 넓고 전장이 긴 시내버스는 진입이 어렵다. 특히 1002번을 비롯한 부산 급행버스(1000번대 및 2000번)들은 고급차량들 위주로 투입되고 있어서 전장이 더 길고 차폭도 아주 약간 더 넓다. 게다가 야간이라 주변이 제대로 보일 리도 없으니 버스 기사 입장에선 정당한 요구를 했다고 할 수 있다.[15] 중국과의 개막전에서 만루홈런을 쳤다.[16] 중간 앞부문부터 나온다. 잘 찾아보시길[17] 20년 넘게 치바 롯데 원클럽맨으로 활약한 후쿠우라 카즈야의 9번 정도는 지정할만도한데 하지 않았다.[18]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부산광역시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역대 롯데 출신 선수들 중 개신교 신자는 최동원, 전준호, 박정태, 조성환, 최대성이 전부. 이마저도 최대성이 kt wiz로 트레이드되면서 롯데 자이언츠 현역 선수 중 개신교 신자는 없었으나 2017년 1차 지명으로 뽑힌 투수 윤성빈이 입단하면서 롯데 구단에 개신교 신자가 다시 생겼다.[19] 이 때 6학년들이 '너 몇학년이냐?' 라고 물어봤는데 박정태는 '나도 6학년이다.' 라고 말했다.[20] 역시 싸움에서는 안 밀린다. 1년 선배 강병규마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다만 이때만 해도 야구부들의 똥군기가 남아있던 시절이라 박종호 또한 강병규에게 맞으면서 컸다고 증언했던 바가 있다.[21] 다만 이는 그가 OPS히터인 점에서 착안한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미국에서도 ops나 세이버메트릭스 같은 세부 지표가 자주 쓰이던 시절이 아니였던 지라 타이틀을 따기 힘들었을 것이다.[22] 31경기 연속. KBO리그의 연속 경기 안타 기록 보유자는 39경기의 박종호이지만 2시즌에 걸쳐서 이룬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