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국
1. 개요
'''롯데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 중 한명 이자 1990년대를 대표한 외야수'''
선수 시절에는 주로 좌익수로 뛰었고, 말년에는 지명타자로 활약했다. 때때로 주전 1루수였던 김민호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체력 안배 차원에서 선발 출장 하지 않으면 1루수를 보기도했었다.[3] 맞히는 재주, 선구안, 주루, 수비 모두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으며 이따금 홈런도 터뜨린, 1994년 이종범의 압도적인 활약이 없었다면 타격왕도 가능했을 인물. 롯데 최강의 소총 타선이였던 남두오성의 일원이다.
롯데의 전성기와 추락을 모두 경험한 프랜차이즈 선수이다. 교타자로 1번을 맡기에는 당시 KBO 역사상 최고의 리드오프 중 한 명인 전준호가 있었기에 주로 3번에 포진했다. 타격에서 장담할 수 있으며 수비와 주루 모두 준수했던 선수. 덕분에 90년대에는 전체 야수 중 WAR '''7위'''를 기록한다. 김응국보다 위에 있는 선수들은 홍현우, 김기태, 장종훈, 양준혁, 이종범, 김동수 등 하나같이 실력이 월등한 선수들이다.
자이언츠 전성기의 디딤돌, 김응국
2. 선수 경력
원래 프로 입단시에는 투수로 입단했으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도 프로에서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입단 첫해 시범경기에서 호투한뒤 개막 3연전 삼성전에는 선발투수로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몇경기 부진하자 더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이후에는 1군과2군을 들락거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 당시 2군은 선수가 부족해서 투수도 타자로 나설 때가 많았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선배와 홈런을 누가 많이 치는지 연습배팅 때 내기를 했는데 10개 중 3개를 당장 밖으로 날렸다. 이러한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였고 그 이후로 2군 경기에서 종종 안타를 쳤고 한번은 투수로 나선 경기에서는 만루홈런을 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이 때 타자 전향을 권한 장본인이 이성득이다. 결국 2년차 시즌인 1989년 말미 롯데는 김응국을 1군으로 불려올렸다.
1990년부터 주전으로 기용되며, 매년 3할 타율-20도루를 달성하고, 삼진보다 많은 사사구를 얻어내는 롯데의 확실한 외야수로 자리잡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까지 롯데의 클린업 트리오의 한 축으로 활약하였다. 1991년엔 올스타전 MVP가 되었고, 1996년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하였다.[4]
이후 1997년과 1998년 연달아 부진하면서 하락세를 타나 싶었지만 박정태, 펠릭스 호세, 마해영이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로 활약했던 1999년에는 1번타자 겸 지명타자로 타격에만 집중하며 .293의 타율에 8홈런 60타점으로 쏠쏠하게 활약하면서 롯데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즌 때려낸 141안타는 자신의 한시즌 최다기록인 1996년의 143안타에 이어 본인 통산 2위의 안타수.
2002년엔 역사의 남을 역전승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4월 10일 당시 롯데는 9회 1:5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투아웃까지 간 상황에서 1,2루를 채운 롯데는 박현승의 적시타로 1점을 따라갔고 김대익이 볼넷을 얻어 만루를 채웠다. 그리고 김응국이 마무리 김진웅을 상대로 역전 끝내기 만루포를 터트려 6-5로 승리를 거뒀다. 이는 '''역대 9회 2사 후 최다 점수 차 역전승''' 기록이며, 김응국 본인은 이동수와 함께 '''3점차 뒤집기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한 몇 안되는 선수로 남게 되었다.
통산 3루타 61개를 기록해 전준호에 이어 2위에 랭크되어 있었다.[5] 심지어 '''3개'''의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하기도 해서 역대 1위에 랭크돼있다. 이쯤 되면 '''기록의 사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 탓에 별명은 '호랑나비'(...) 가수 김흥국의 히트곡 이름이다.
통산 15시즌 동안 타율 0.293, 홈런 86, 타점 667, 도루 207, OPS 0.788을 기록했다. 전성기 시절은 90~99시즌까지라 볼 수 있는데, 항상 3할이 넘는 타율과 8할이 넘는 OPS 기록한 중거리형 타자. 도루도 해마다 20개 이상씩 기록하는 호타준족의 타자였다.
1990년대 롯데를 빛낸 몇 안되는 프랜차이즈 외야수라고 할 수 있으나[6] 전준호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지라 현대로 전준호가 이적한 뒤로도 끝없는 전준호 사랑에 2인자 취급을 받은 불운의 선수이다. 그래도 롯데라는 한 팀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덕분에 구단 내 개인 통산 스탯으로는 한동안 다양한 부문에서[7] 1위를 차지했다. 다만 이마저도 이대호와 손아섭 등 출중한 실력을 갖춘 후배들이 등장하면서 그의 기록도 후배들의 뒤로 물러서게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롯데 타자 중 개인 통산 스탯 1위를 차지하는 항목이 있다. 통산 61개의 3루타로 독보적 1위다.
1995년 선동열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이제야 내 스윙을 하게됐다고 좋아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2년 후 롯데 자이언츠는 해태 타이거즈에게 15승을 헌납하며 해태 타이거즈 9번째 우승의 훌륭한 제물이 되고 만다...[8][9]
3. 지도자 경력
2004년 롯데의 1군 타격코치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 뒤 양상문 감독이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같이 잘렸고, 현대 유니콘스에서 2군 코치를 하며 장기영을 타자로 전향시켰으며, 2009년에 히어로즈의 코치에서 물러난 후에는 잠시 고교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2012년 11월 11일 롯데의 2군 타격코치로 선임이 되면서 7년만에 롯데에 복귀했다.
2014년에는 1군 주루 및 외야수비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8월 21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 외야수비 코치로만 남고 대신 1군 주루코치는 이종운이 담당하였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나쁜 편이다. 차라리 임재철이 3루 코치를 보는게 낫다는 팬들이 많다.
2015년 9월 2일 울산 kt전에서 강민호가 친 파울타구에 엉덩이를 맞았다.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엉덩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한다.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여 롯데를 떠나 한화 이글스와 계약했다. 보직은 2군 타격코치. 그러나 2017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1년 공백 후 부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4. 기타
- 서울특별시 출신이지만 부산 사투리를 쓴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롯데에 입단해서 17년을 부산에서 거주하며 롯데 선수와 코치로 살다보니 사투리가 입에 붙었다는 것. 쉽게 말해 환경 때문에 20세 이후 사투리를 쓰게 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10]
- 고교시절 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 때문에 본인의사와는 관계없이 마운드에 섰다가 어쩌다보니 투수로 보직이 굳어졌다. 방망이로 때리는게 재미있어 투수보다 타자를 원했고 고3 때 추운 날씨에 던지다가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이후로 계속 아픈 상태로 공을 던져야 했던 기억과 함께 투수 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고려대에 입학한 뒤에는 선동열 박노준 등 쟁쟁한 선배들이 있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198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의 2차지명을 받아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갔다. 원래는 태평양의 지명을 받을 줄 알았는데 롯데의 지명을 받아 타지에서 적응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해 관두고 모교에서 체육교사나할까 고민도 했다는 후문. 결국 타자 전향이 성공하면서 프로에서 순조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 고려대학교 시절 화투를 치다가 최남수 감독에게 걸려서 곤혹을 치른 바 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1] → 청원정보산업고등학교 → 청원여자고등학교. 2000년 12월에 야구부는 같은 재단의 남학교인 청원고등학교로 이관되었다.[2] 가수 김흥국과 이름이 비슷해서다. [3] 차기 주전 1루수인 마해영이 입단하기전인 1994년까지는 그랬었다.[4] 이 사이클링 히트는 1루타 - 2루타 - 3루타 - 홈런을 '''순서대로''' 성공시켜 만든 것으로 KBO 최초이자 2020년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5] 2020년 7월 21일 정수빈이 키움전에서 통산 62번째 3루타를 기록하면서 김응국을 넘고 통산 3루타 부문 단독 2위로 올라서게 됐다.[6] 출신이 서울이지만 한 팀에서 데뷔와 은퇴를 했다. 같은 프랜차이즈인 김대익과 이종운과 다른 점이라면 김대익과 이종운은 다른 팀으로 이적했지만 김응국은 끝까지 남았다는 정도.[7] 출장경기, 안타, 볼넷, 득점 등등[8] 롯데가 해태에게 거둔 성적은, 3승 15패. 철저한 밥이 되었다. 정작 선동열 있을때도 7승11패 정도는 하던 자이언츠였는데...[9] 하지만 1997년 롯데가 꼴찌를 했다는 것과 해태가 정규리그를 우승했다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해야한다.[10] 이런 현상은 지방의 대기업 계열사 사업장에서도 일어난다. 한 예로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는 직영은 과거 포스코에서 일하다 온 동남 방언 사용자가 많아 그 이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동남 방언을 자연히 쓰게 되고, 협력은 당진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당진 특유의 어눌한 방언은 물론이요, 동료의 출신지 방언을 그대로 구사하게 된다.[11] 한국프로야구역사상 가장 아깝게 3할에 실패한 기록이다. 2할9푼9리4모5사. 반면 1998년 강동우는 2할9푼9리5모1사로 3할타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