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 바리첼로

 

'''브라질의 前 F1 드라이버'''
''' 이름 '''
'''후벵스 바히셸루'''[1]
'''Rubens Barrichello'''
''' 본명 '''
후벵스 곤사우베스 "후비뉴" 바히셸루
Rubens Gonçalves "Rubinho" Barrichello[2]
''' 출생 '''
1972년 5월 23일 (52세)
브라질 상파울루 주 상파울루
''' 국적 '''
'''브라질''' [image]
''' 신체 '''
키 172 cm
''' 소속 '''
선수
조던 그랑프리 (1993~1996)
스튜어트 그랑프리 (1997~1999)
스쿠데리아 페라리 (2000~2005)
혼다 레이싱 (2006~2008)
브런 GP (2009)
윌리엄스 레이싱 (2010~2011)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출전 횟수'''
326경기[12]
'''월드 챔피언'''
0회
'''그랑프리 우승'''
11회
'''포디움'''
68회
'''폴 포지션'''
14회
'''첫 경기'''
1993년 남아공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2000년 독일 그랑프리
'''패스티스트 랩'''
17회
'''마지막 경기'''
2009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000000,#e5e5e5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2009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1. 개요
2. 선수 경력
3. 여담

[clearfix]

1. 개요


브라질 출신의 전직 포뮬러 1 드라이버.
현재까지 아일톤 세나도, 알랭 프로스트도, 미하엘 슈마허 조차도 달성하지 못한 '''그랑프리 326회 연속 출장'''이라는 역대 2위의 기록[3]을 가지고 있는 F1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삼엽충같은 사나이. 또한 그와 팀 메이트였던 사람들도 미하엘 슈마허, 젠슨 버튼등의 월드 챔피언들과 같은 팀에서 지냈었다. 어찌보면 F1계의 콩라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4]

2. 선수 경력


1993년 조던 그랑프리[5]에서 데뷔하여 2011년까지 윌리엄스 레이싱에 있을동안 수 많은 사건을 목격했고, 당시 현장의 주인공이기도 했었는데, 그 중 가장 잊을 수 없을 사건을 꼽자면 단연 아일톤 세나의 사고였다. 이몰라에서 열린 산마리노 그랑프리 연습주행 당시 바리첼로는 방호벽과 충돌하여 큰 부상을 당했는데[6] 그리고 다음날 예선에서 오스트리아의 롤란트 라첸베르거가 사고로 사망하고 본선 레이스에는 아일톤 세나가 사고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7]
어쨌든 그해 7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조던의 에이스로 맹 활약하지만, 팀 수장인 에디 조던과의 갈등으로 1997년 스튜어트 팀[8]으로 이적하지만 이적 첫 해 머신 트러블로 단 3번의 그랑프리만 완주하고만다.[9] 다행히 다음해 차량이 안정화되어 8위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고, 경쟁력이 많이 떨어지는 차로 몇번의 포디엄 피니시를 하는것이 눈에 띄었는지 2000년 명문중의 명문 페라리로 이적하게 되었고, 여기서부터 그의 콩라인전설이 시작된다.....
페라리로 이적한 건 좋았으나, 페라리의 그 당시의 퍼스트 드라이버는 바리첼로가 아닌 F1 계의 먼치킨 중의 먼치킨으로 등극하게 될 미하엘 슈마허였고, 페라리에서 바리첼로는 무려 6시즌 동안 슈마허 옆에서 철저한 2인자 역할을 맡는 안습한 면을 보여 주었다. 특히 2002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는 우승을 몇 미터 앞두고 팀오더로 우승을 슈마허에게 넘기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도 연출하기도 했다. 이때 포디움에서 슈마허가 1위 자리와 우승 트로피를 바리첼로에게 양보하다 벌금을 먹기도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결국 슈마허가 페라리의 적극적인 밀어주기를 통해 바리첼로와 팀메이트를 함께한 기간 동안 2005시즌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서 챔피언을 먹는 데 반해 바리첼로는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되었다. 철저한 2인자 바리첼로는 페라리 시트를 동향 후배 펠리페 마싸에게 넘기고 2006년에 혼다로 이적했는데, 버튼한테도 영 상대가 안 되는 안습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2008년 혼다가 철수하기 전 마지막 해에는 버튼 3점, 바리첼로 11점으로 이기긴 했다.) 하지만 드라이버 생활에서 두번 다시 없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2009년에 혼다가 브런GP로 바뀐 후 브런GP의 레이스카의 우월한 성능을 바탕으로 챔피언을 노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하필이면 버튼과 레드불이 대오각성하는 바람에(...) 챔피언십 2등도 아니고 3위를 기록했다.
사실 이 때 바리첼로는 F1 최연장자로 94년에 데뷔해 이미 경력은 10년이 아득히 넘었고 은퇴를 하네마네하는 상황에서 브런 GP에서 위닝카를 얻은 것이다. 때문에 2009년 그의 성적은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시즌 중후반까진 버튼과 '''챔피언 경쟁'''을 했기 때문. 분명 페라리 시절보단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했다. 때문에 그도 이 브런 GP 시절에 매우 행복했던 것 같다. 이후 윌리엄스로 이적하며 드디어 퍼스트 드라이버 지위를 얻었으나 이번엔 윌리엄스 레이스카의 퍼포먼스가 마티니 때만큼 좋지 않았을 때라서.... 결국 2011 시즌 본인의 홈 그랑프리였던 브라질 GP를 마지막으로 한 많았던 포뮬러 1 드라이버 생활을 끝내고 인디카로 옮겨가 활동하게 되었다.

3. 여담


  • 일반적인 레이서들과는 매우 다르게 F1 시절에 오른발 브레이크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은퇴한 후에야 왼발 브레이크를 익혔다는 듯.
I beat The Stig!
탑기어 시즌 15에 출연하여 스티그가 가지고 있던 기록을 깼다. 공식기록은 1분 44초 3.[11]

[1] 국내에는 영어식인 루벤스 바리첼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 발음은 '루벵스 바리셸루"에 가깝지만 브라질 포르투갈어 표기법을 따르면 '후벵스 바히셸루'가 맞다.[2] -inho 접미사의 별칭은 브라질 사람에게 흔히 붙는 별칭이다. 뜻은 작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후비뉴'는 '작은 후벵스'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호나우지뉴라는 별칭도 '작은 호나우두'라는 뜻이다.[3] 1위는 332경기의 키미 래이쾨넨.[4] 콩라인이라 부를 정도를 넘어서 콩라인이다. 커리어 최고 성적이 2위.... 거기에 페라리 시절에는 그야말로 슈마허를 위해 달리는거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으니...[5] 現 BBC F1 해설위원인 에디 조던이 만들었던 레이싱 팀. 이후 여러 팀에서 인수하면서 지금은 애스턴 마틴라는 이름을 달고 F1에 출전 중이다.[6] 어느 정도였나면 그의 SASOL 조던 차량이 방호벽에 충돌 후 몇바퀴를 굴렀고 그것으로 인해 '''혀가 말렸다(!)'''[7] 바리첼로의 데뷔를 세나가 직접적이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서포트를 많이 해줬고, 바리첼로는 그런 세나를 멘토로 여기고 있었다. 영화 세나에서도 바리첼로가 사고를 당하자 세나가 매우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찌 보면 롤란트 라첸베르거의 죽음이 있기 전에 아끼는 후배인 루벤스 바리첼로의 부상 때부터 세나의 멘탈은 심히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8] F1 3회 챔피언에 빛나는 재키 스튜어트와 그의 아들이 만든 팀. 이 팀은 훗날 재규어에 인수되어 F1에 나갔다가 레드불 레이싱으로 탈바꿈했다.[9] 그래도 모나코에서는 2위를 하면서 능력을 보여준다[10] 물론 바리첼로가 한창 전성기로 활동할 시절인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F1 차량의 페달은 일반 수동차량처럼 가속, 브레이크, 클러치 페달까지 달린 3페달 방식이었다. 현재 사용하는 스티어링에 달린 아날로그 클러치는 2006년에 처음 도입되었다. 참고로 마지막으로 3페달 수동변속기를 고집한 F1 드라이버는 데이먼 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당시 F1은 기어를 올릴 때는 클러치를 밟았으나 브레이크를 하면서 빠르게 내릴 때는 클러치를 따로 밟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왼발 브레이크가 성행했다.[11] 이후 인터뷰에서는 누군가 내 기록을 깬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1년 후 이 기록은 어린 독일놈이 1분 44초 00으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