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슈마허

 

''' 미하엘 슈마허의 우승 경력 '''


'''2007년~2012년 레이스 오브 챔피언스 네이션스 컵 우승팀'''
2006 - 생드니
[image] 핀란드
헤이키 코발라이넨
마르쿠스 그뢴홀름

'''2007 - 런던 ~ 2012 - 방콕
[image] 독일
미하엘 슈마허
제바스티안 페텔'''[35]
[36]
2014 - 부시 파크
[image][image] 노르
톰 크리스텐센
피터 솔베르그

'''독일의 前 F1 드라이버'''
''' 이름 '''
'''미하엘 슈마허'''
'''Michael Schumacher'''
''' 출생 '''
1969년 1월 3일 (55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쾰른 현 라인에르프트크라이스 군 휘르트[1]
''' 국적 '''
'''독일''' [image]
''' 소속 '''
선수
조던 그랑프리 (1991)
베네통 포뮬러 (1991~1995)
'''스쿠데리아 페라리''' (1996~2006)
메르세데스 GP (2010~2012)
기타
스쿠데리아 페라리 (2007 / 어드바이저)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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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횟수'''
308경기
'''월드 챔피언'''
'''7회'''[37] (1994, 1995, 2000, 2001, 2002, 2003, 2004)
'''그랑프리 우승'''
91회[38]
'''포디움'''
155회[39]
'''폴 포지션'''
68회[40]
'''첫 경기'''
1991년 벨기에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1992년 벨기에 그랑프리
'''패스티스트 랩'''
77회[41]
'''마지막 경기'''
2012년 브라질 그랑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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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중국 그랑프리

1. 개요
3. 논란
3.1. 고의 충돌 의혹
3.1.1. 이에 대한 반론
3.1.2. 반론에 대한 반박
4. 사고
5. 가족
6. 여담
6.1. 그의 사기 캐릭터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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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F1의 황제로 군림했던 독일 출신의 카레이서. 별명은 '''붉은 남작 (The Red Baron).'''[2] 현세에 실존했던 먼치킨 인물을 꼽자면 꼭 한 번씩은 들어간다. 한때 수많은 드라이버들이 아이르통 세나를 보며 드라이버의 꿈을 키웠듯이 현재 활동 중인 드라이버들은 슈마허를 보고 자란 선수들이다. 따라서 많은 드라이버들이 올 타임 레전드를 뽑으라면 세나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드라이버.[3]
단순히 차만 잘 모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이해하는 높은 스포츠 지능[4]을 가졌으며, 피드백에 굉장히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고, 관찰력도 매우 뛰어나며[5] 차량 개발에도 직접적인 관여를 하는 등 경기 외적으로도 모범 그 자체인 사람이다. 특히 사람들이 입모아 말하는 슈마허의 숨겨진 강점은 바로 팀 메이킹과 리더십. 자신을 중심으로 팀을 빌드업하는 것으로 크루들을 단결하며 사기를 높이고 결국 이것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것.[6]

2. 선수 경력


''' '''

3. 논란


다른 레이서들과 배틀이 붙을 때 굉장히 공격적이고, 고의적인 충돌 의혹이 있어 90년대까지는 실력은 있으나 인성면에서는 농담으로도 좋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영국에서는 현재 진행형)
최전성기에는 팀 동료인 루벤스 바리첼로를 팀오더로 지나치게 희생시켜 가며 혼자 독식했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팀오더는 포뮬러 1에서 많이 사용되는 전략의 수단이며 페라리는 특히 팀오더를 많이 내리는 편이긴 하나, 이 시기의 페라리는 도가 너무 지나쳤다는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팀 오더 때문에 '바리첼로로부터' 슈마허가 득을 본 경기는 2001년, 2002년 오스트리아 GP 뿐이다. 하지만 두 해 모두 페라리 차량이 타 팀을 압도했기 때문에, 두 경기 모두 챔피언십 타이틀 경쟁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시즌 중반에 팀오더를 내렸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한 경기라도 빨리 챔피언 타이틀 획득을 확정지으려는 페라리의 절박함 때문이라 보는게 맞다(00년대 초반 페라리-슈마허의 르네상스를 생각하면 잘 와닿지 않겠지만, 79년 조디 쉑터 이후 페라리는 21년 동안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드라이버 챔피언 배출에 대한 열망이 굉장히 강했었다). 오히려 바리첼로보다는 96~99년의 팀 메이트였던 에디 어바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득을 얻은 경우가 더 많은데, 대표적인 경기가 97년 일본 GP와 98년 오스트리아 GP이다. 97년 일본 GP에서는, 이미 프랙티스 기간에 당해 경기 포인트를 얻을 수 없다는 처분을 받은 빌르너브가 폴 포지션을 차지한 것을 기회로 경기 초반에 의도적으로 스피드를 낮췄는데, 연료를 적게 넣은 어바인이 선두를 꿰차면서 한동안 경기를 리드하다 슈마허에게 선두 자리를 넘겨줬었다. 98년 오스트리아 GP에서는, 슈마허가 선두인 하키넨과 선두 다툼을 하다 마지막 코너에서 실수로 그래블 트랩에 빠지면서 프론트 윙을 날려먹었고, 하필 프론트 윙을 날려먹은 지점이 피트 들어가는 지점을 넘어선 곳이라 1바퀴를 프론트 윙 없이 달려야만 해서 순위가 엄청 하락했는데, 경기 막판에 4위까지 올라가자 3위로 달리던 어바인이 의도적으로 속도를 낮추어 슈마허에게 3위 자리를 넘겨주었다. 팀 내 넘버 1 드라이버였던 슈마허에게 진짜로 바리첼로가 피해를 입었다고 하려면 이 정도로 대놓고 순위를 양보한 사례가 있어야 하는데, 페라리 르네상스 시절인 00~04년을 보면, 01년에는 오히려 시즌 후반에 바리첼로에게 1경기라도 우승을 시켜주려고 대놓고 밀어주기도 했었으며, 02~04년에는 바리첼로의 스타일도 고려하여 머신을 만들면서 간간히 바리첼로도 폴을 따내고 우승도 했었고, '순위 양보 사례'는 위에 언급한 오스트리아 GP밖에 없다. 이런 것을 감안할 때, 팀 오더에 대해 불평을 크게 토로하지 않는 어바인에 비하면 바리첼로의 불만 표시는 조금 크지 않을수 없다.

3.1. 고의 충돌 의혹


슈마허의 고의 충돌 의혹은 총 2번 생겼는데, 첫 번째는 1994년 최종전 애들레이드 시가지 서킷에서 열린 호주 GP의 당시 챔피언십 경쟁자였던 데이먼 힐과의 충돌이다.

영상 11초 부터.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슈마허는 컨트롤을 잃으며 코스아웃 했고, 슈마허와 차이가 갑자기 줄어든 힐은 다음 코너에서 추월을 시도하였으나, 코스아웃에서 복귀한 슈마허가 실속한 차로 블록, 제동 공간이 충분치 않아 충돌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슈마허는 힐보다 1포인트를 앞서는 상황이었고, 둘 다 리타이어를 한다면 슈마허가 챔피언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슈마허가 고의로 충돌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일었다. 특히 힐이 피트인 후 시트에서 내려 리타이어했을 때 만세를 부르던 슈마허의 반응은 안티들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본인의 첫번째 월드 챔피언이 확정되는 순간이라 기쁜건 당연하겠지만 본인의 무리한 블록으로 충돌하여 리타이어한 상대에 대한 반응으로써는... 물론 슈마허의 팬들은 베네통 포드 B194[7]로 94시즌에서 가장 빠른 차인 윌리엄스 르노 FW16을 상대하기 위해서 공격적인 드라이빙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월드 챔피언이 된 순간 기뻐서 나온 반응이 뭐가 문제냐고 옹호한다. 이로 인해 F1의 유명한 잡지인 Autocourse[8] 1994년판에선 이 충돌사고 때문에 슈마허를 그 해 넘버 2 드라이버로 평가하기도 했다.
두 번째 고의 충돌 의혹은 1997년 최종전 헤레스 서킷 스페인 GP에서 벌어진 자크 빌르너브와의 충돌사건인데 이 건은 고의충돌로 인정되어, 슈마허는 시즌 포인트를 몰수 당하며 챔피언십 2위 자격도 박탈당한다.[9]

영상 41초부터.

'''안 통하죠! 안 통했어, 미하엘 인마! 아쉽게도 잘못 박았네.'''

That didn't work. That didn't work, Michael. You hit the wrong part of him, my friend.

해설위원 마틴 브런들[10]

, '''슈마허가 빌르너브와 충돌한 직후'''

예선에서 2위였던 슈마허는 스타트에서 빌르너브를 앞지르며 시종일관 선두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피트 스톱 직후 빌르너브가 슬립스트림을 이용해 인을 선점하며 브레이킹 포인트에서 레이트 브레이킹으로 추월을 시도하니, 슈마허는 빌르너브를 막기 위해 인으로 진입하다 '''자신을 이미 추월한 빌르너브를 측후방에서 충돌'''했다.[11] 그러나 슈마허의 차는 튕겨져 나오며 리타이어했고, 빌르너브는 3위로 골인하면서 그 해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한다. 94년과 마찬가지로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윌리엄스 르노 FW19를 페라리 F310B로 상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격적인 드라이빙을 하다가 이렇게 됐다고 옹호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사고만큼은 분명 슈마허의 잘못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고의성으로 인해 94년의 사고도 고의로 유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12]

3.1.1. 이에 대한 반론


하지만, 슈마허가 타 드라이버들에 비해서 너무 과한 비난을 받은 측면도 크다. 1990년 일본 GP에서도, 당시 챔피언십 선두이던 아이르통 세나가 챔피언 타이틀 확정을 위해 오프닝 랩에서 프로스트를 고의로 들이받아 동반 리타이어 했으나, 슈마허처럼 큰 비난을 받진 않았다. 세나는 자신을 추월했던 프로스트를 고의로 들이받았고, 첫 코너 진입속도가 시속 200 km 정도 되는 상황에서 들이받은거라 저속에서 들이받은 슈마허의 사고보다 훨씬 위험했기 때문에 슈마허보다 더 크게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 옳아보인다.

3.1.2. 반론에 대한 반박


다만 세나의 경우와 차이도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세나의 죽음 이후 F1 전반의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세나의 죽음은 F1 카의 안전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각종 안전 장치가 차량에 상당히 장착되었으며, 사고에 대한 인식도 과거에 비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변했다. 또한 '세나의 팬들에 의하면', 세나가 상대적으로 적게 비난받은 것은, 폴 포지션의 그리드 위치가 레코드 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드 라인 변경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FIA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아 세나가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 피해를 봤고, 1989년 일본 GP에서 프로스트가 세나에게 고의성 짙은 추돌을 유발한거에 대한 복수행위라는 참작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먼저, 폴 포지션은 레이스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여야 하고 당연히 레코드 라인에 가깝게 위치해야 하므로 오히려 2번째 그리드가 유리한 상황에서 그리드 변경을 요구한 세나의 주장은 진상이 아니라고 세나 팬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세나 팬으로써 세나에 대한 과도한 애정으로 인한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저런 생각을 한 자는 1990년 당시의 F1 경기를 안 본 것이 분명하다. 당장 유튜브에 올라온 1990년 경기들의 스타트 장면을 보라. 대부분 폴 포지션 그리드는 레코드라인과 반대라인에 위치해있다. 당장 1990년 영국 GP에서도 예선 2위였던 세나는 레코드라인에서 출발하여 폴 시터였던 만셀을 스타트에서 바로 추월했다. 그리고 그 해 스페인 GP에서는 레코드라인이 아닌 폴 포지션 그리드에서 출발했어도 2위인 프로스트를 스타트에서 잘 방어했다. 정말로 폴 포지션의 위치가 레코드라인에 위치해 있지 않음으로 인해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한 것에 대한 어드밴티지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면, 이를 진작에 주장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프로스트와 동반 리타이어하면 바로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야 그 문제를 주장한 것은, 1랩에서 프로스트와 의도적으로 충돌하여 바로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기 위한 더러운 책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술수일 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걸 도외시하고 단지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한 것에 대한 어드밴티지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유독 당시 일본 GP에서만 그러한 어드밴티지가 없었다고 보고 세나의 징징거림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한, 누가 자신에게 부당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그 상대방에게 이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 현대 문명사회에서 용인되는 것이 타당한가. 특정 경기에서 누가 자기를 들이받은 드라이버를 다음 경기에서 똑같이 들이받는다면 이걸 잘했다고 평가해주는게 타당한가. 특히 89년 일본 GP에서 프로스트와 세나의 충돌이 프로스트의 고의에 의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누가 봐도 세나가 고의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프로스트를 첫 코너에서 의도적으로 들이받은 것을 단순히 전년도의 사고에 대한 복수니 정당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언행이 유독 세나 팬들에게서 많이 나오는데, 슈마허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넘어 세나의 잘못조차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여 세나가 슈마허보다 더 나은 드라이버로 평가받게 만들기 위한 억지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4. 사고


은퇴한 뒤 가족들과 스위스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2013년 12월 30일 (현지시각 29일 밤) 프랑스알프스에서 가족들과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13] 헬멧을 쓴 채로 바위에 부딪혔는데, 사고 직후에는 의식이 있었고 헬리콥터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으나 그런대로 멀쩡한 줄 알았는데 결국 중태에 빠져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검사 결과 두개골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이 있어 바로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수 개월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14]
이후 슈마허는 3월 11일에 겨우 산소호흡기를 떼고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고 후 약 6개월 만인 6월 16일[15] #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목소리와 접촉 등에 반응을 보인다는 자비네 켐 슈마허 매니저의 공식성명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회복되진 않은 모양. 향후 재활치료에 전념하겠지만 평생 휠체어를 타고 일상생활에 항상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때 중태에까지 빠졌고 자칫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던 상황에 비하면 많이 호전된듯 하다.
의식이 깨어난 후 자택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주치의에 따르면 언어장애나 기억장애 등이 올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반응. 2015년 1월 소식에 따르면 가족의 목소리에 눈으로 반응을 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나 치료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듯 한데, 불행히도 점점 안 좋은 소식들만 들리고 있다. 2016년 11월 로스 브런에 따르면 어떤 상태인지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긍정적인 상태라고 전했다. 기사#
2018년 8월 파리마치의 보도에 따르면 확실히 예전보다 호전된 모습을 보인다. 이제는 물 속에서는 조금씩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러나 아직 혼자 걷거나 서지는 못하며, 간혹 휠체어에 태워 병실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면 울기도 하였다는, 팬들 입장에서는 마음 아픈 소식 역시 전해졌다.#
2019년 1월에 50세 생일을 맞아 가족 측이 또다시 입장 발표를 했는데, 여전히 별다른 긍정적인 소식은 없다.
2019년 7월 30일, 아직은 말이 어눌하지만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예전 페라리 크루들과 함께 집에서 독일 GP를 관람했다고.[16]
현재까지 사고 이후 근황사진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5. 가족


  • 2003년 이몰라 서킷의 산마리노 그랑프리를 앞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당시 슈마허 형제는 그랑프리 출전을 두고 고심을 했지만 결국 이몰라 그랑프리에 출전 우승을 했다. 레이스가 끝나고 파크 파르메에 차를 세우고 조용히 흐느끼는 슈미의 모습은 모든 F1팬들을 울렸었다.
  •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동생 랄프 슈마허 가 있다. 형과의 비교만 아니면 제법 우수한 레이서였지만 형이 너무 넘사벽이어서...
  • 1995년 부인 콜린느와 결혼해 딸 마리아와 아들 믹을 낳았다.
  • 최근 아들 이 독일 F4[17]에 데뷔, 데뷔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헬멧 디자인이 아빠의 것과 색깔과 스폰서 로고 몇가지를 제외하면 똑같다. 붉은색이 주를 이루며 페라리 소속 계열이므로 페라리 로고가 붙어 있는 것까지 쏙 빼닮았다. 차이점이라면 믹의 헬멧에는 라임색이 일부 들어간다.[18] 그리고 F4 시리즈 챔피언을 차지했다. 기특하게 잘 해내고 있다. 2017년부터 유로피언 F3에 출전한 믹은 결국 F3 참가 2년 만에 2018년 F3 유럽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9년부터는 F2에 진출하여 그럭저럭 해내고 있다[19] 아버지의 뒤를 잇는 레이서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0년 12월 1일, 믹이 하스 팀과 계약하여 2021년 부터 F1에 참가한다!
  • 2020년 12월 6일, 믹은 2020년 F2 챔피언이 되었다. F3, F2 모두 첫 해에는 부진하였지만 둘다 이듬해에 챔피언을 달성하였다는 점이 인상적.

6. 여담


  • 일반적으로 운전 잘하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예컨대 불가항력적 교통사고 영상에서 "이건 슈마허도 못 피한다" 라고 한다던지...
  • 드라이빙 스타일 자체는 매우 스무스하다. 하지만 1990년대에 배틀할 당시 고의충돌 등에 의하여 거칠다고 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고의충돌 의혹이 있는 몇 가지 빼고는 대체적으로 부드럽다. 스티어링을 자주 조작하면 타임로스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의 주행.
  • 집중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특히 재급유 시대 (1994~2006년)에 전성기를 보낸 만큼 연료 적재량이 많이 소모된 상황에서 급격히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하위 드라이버와의 격차를 벌리거나 상위 드라이버를 따라잡는 일이 많았다. 특히 앞서가는 드라이버보다 핏스탑을 한 번 더 하는 대신 가벼운 차량으로 패스티스트 랩을 경신하며 핏스탑 작전으로 추월하거나 (대표적으로 1994년 프랑스-유럽 GP, 1995년 퍼시픽 GP, 1998년 헝가리 GP, 1999년 산마리노 GP, 2004년 프랑스 GP), 핏스탑 횟수는 동일하게 가져가되 핏스탑 즈음해서 페이스를 끌어올려 순위를 역전시키는 경우(슈마허의 우승 경기 중 절반 정도가 이에 해당할 정도인데 대표적인 예로 00년 산 마리노 GP, 06년 중국 GP 등이 있다)가 꽤 많았다. 다만 타이어의 마모가 타 드라이버들보다 약간 심한 편인데, 슈마허의 장점은 바로 그러한 부분까지도 자신의 실력으로 커버한다는 점이다. 08년에 타이어 마모가 심한 편인 루이스 해밀턴이 슈마허의 이런 스타일을 몇 번 따라하여 핏스탑을 한 번 더 가져가는 방식을 종종 취했으나 이 방식으로 우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재급유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드라이버는 슈마허 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은퇴 후 복귀한 10~12년 동안엔 재급유 금지, 폭이 좁아진 프론트 타이어에 대한 적응 부족, 무엇보다 나이로 인한 실력 감퇴로 인해 자신의 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 했다. 특히 경기가 진행될수록 랩 타임이 계속 떨어져 노화로 인한 집중력 부족이 상당히 심해진 것으로 보였다.[20]
  • 일본의 에니메이션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의 등장인물인 나이트 슈마허가 바로 이 슈마허에서 이름을 따왔다.[21] 물론 혼자 포뮬러 1의 각종 기록들을 갈아치운 실제 슈마허가 더 사기 캐릭터 레벨.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자료 수집차 서킷을 방문한 제작진들이 그 날 인상적인 주행을 보여준 F3 드라이버를 보고 인상에 깊게 남아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미하엘 슈마허였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사이버 포뮬러 TV & 더블원이 나온 1991~1992년 즈음에 미하엘 슈마허는 F3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여 F1으로 승격해 시즌 12위와 3위를 차지한 매우 유망한 신인 정도의 취급이었는데, 사실 TV판의 슈마허도 강자로 취급되긴 했지만 '어? 저 고글 쓴 드라이버 누구지? → 님 좀 짱인듯' 정도의 취급이라 이러한 묘사도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제작진들도 슈마허의 F1 데뷔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진 것에는 놀랐다고 전해진다. 만화보다 더 만화같은 일을 해냈다.
  • 전설적인 F1 레이서 아이르통 세나를 제외하면 분야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WEC 르망24시 내구레이스 9회 챔피언 톰 크리스텐센[22]WRC를 9년 연속(2004~2012)으로 제패한 세바스티앙 로브[23]가 간접적인 비교대상으로나 가능할 정도.
  • 이렇게 먼치킨이라서 생긴 문제점이 있는데, 많은 경기의 우승을 독점하고 나서 사람들로부터 F1 경기가 너무 재미가 없어졌다는 평을 듣게 됐다는 점이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2위부터 꼴찌까지만 우왕좌왕 하는 것 때문에 개최주가 5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은 것이다. 항상 같은 인물이 1등만 하니까 오히려 개최하는 입장에서는 독이 된 셈이다.
  • 농담으로 넘어가기 힘든게 실제로 슈마허 개인의 인기에 의존하던 F1은 슈마허가 은퇴하면서 굉장히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팬들을 되찾기 위해 각종 규정을 변경하면서 차의 출력을 올려 인기는 회복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차의 개발비 또한 올라갔기 때문에 많은 F1 팀들이 이 시기에 F1을 떠나야 했다.
  • 탑기어에서 2대 스티그의 등장 후 일부에서 스티그의 정체를 알아내겠다며 사립탐정을 고용하는등 여러가지 루머가 많았는데, 시즌13 1회에서 스티그의 정체를 까발리겠다며 합리적인 가격의 차 코너에 게스트로 초대하여 헬멧을 벗긴적이 있었는데,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건...

[image]
무려 미하엘 슈마허였다. 충공깽(...). 체격이 기존의 Stig보다 더 큰 것도 그렇고, 스케줄상 도저히 출연이 불가능한 것도 그렇고, Stig의 정체 루머에 BBC가 나름 센스있게 대처한듯하다. 그렇다 쳐도 슈마허를 섭외하는 탑기어의 위력은... 사실이건 아니건 과연 탑기어.[24]
  • 활동 내내 상당한 패션 테러리스트로 유명했다.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와 미국 서부극 스타일의 팬이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영 본인과 잘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는 평이다. 베네통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사실.
  • 2010년에 제바스티안 페텔과 함께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던 적도 있다.

6.1. 그의 사기 캐릭터 전설


  • 첫 우승한 레이스는 1992년 12번째 레이스였던 벨기에 GP. 1년 전 F1 데뷔전을 치렀던 스파 서킷에서 슈마허는 감격적인 첫 우승을 기록한다. 비가 내리던 상황에서 30랩 째에서 트랙을 벗어나 타이어가 더러워져 그립이 떨어지자 레인 타이어에서 슬릭 타이어로 타이어를 교환했는데, 마침 비가 그쳐 선두 자리를 꿰차며 여유있는 우승을 차지한다.
  • 너무나 유명한 1994년 스페인 그랑프리. 경기가 절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5단 기어 외에는 모든 기어가 작동이 안 되는 치명적인 변속기 트러블이 발생하였다.[25] 그런데 이 상태로 30랩 이상을 달려서 2등으로 골인해서 포디움에 섰다. 5단만으로도 피트인은 물론, 저속코너에서 재가속까지 하는데 시동 한 번 안꺼트리고 탑스피드로 돌았다는 이야기. 정말 인간인가?[26][27]
  • 슈마허는 전성기 동안 수많은 명경기를 연출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1998년 헝가리 GP다. 당시 맥라렌의 MP4-13은 제바스티안 페텔이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 독재하던 시절의 레드불, 루이스 해밀턴이 4번째 챔피언을 달성하던 시기의 메르세데스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성능을 보여줬고, 페라리의 F300은 간신히 맥라렌 뒤 꽁무니를 쫓아가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당시 예선을 보면 맥라렌 듀오가 1-2위를 차지하고 슈마허가 3위를 기록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이 경기도 마찬가지였고, 레이스 중반까지 슈마허는 3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킷 특성상 추월이 잘 안 나오는 상황에서 당시 페라리의 감독이였던 로스 브라운은 그 유명한 '3 stop 작전'을 만들었다. 일부러 두 번째 피트스탑을 짧게 가져가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차량으로 페이스를 확 끌어올리며 순위를 올린다음 다시 피트인 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슈마허는 2번째 피트스탑 직후 18랩동안 맥라렌 듀오보다 25초나 더 빨리 달리면서(슈마허가 피트스탑을 하자 맥라렌도 곧바로 전략을 바꿔서 당시 2위로 달리던 쿨사드를 피트로 불러들였으나 슈마허에게 2위 자리를 뺏겼다) 선두 자리를 꿰찼다.[28] 마지막 피트스탑을 하고도 미카 해키넨과 쿨사드를 유유히 앞서면서 '재급유 시대'의 기념비적인 경기를 우승으로 장식했다. 로스 브런의 탁월한 작전과 슈마허의 놀라운 작전 수행능력이 빛을 발했던 경기다.[29]
  • 2002년 시즌에는 총 17번의 GP가 있었는데 슈마허는 17번 모두 포디움에 섰다. 당연히 모든 레이스 완주.[30] 그 중 우승이 11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이라고 불린다.
  • 2004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선 멀쩡한 사람은 절대 안 쓸 4스탑 전략을 사용하고 우승했다. [31]
  • 2003년 오스트리아 GP 경기에서는 피트스톱 주유 중에 차에 불이 붙었다. 불길이 순식간에 터져서 놀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슈마허는 가만히 있고 소화기로 불 끄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바로 출발(…). 이 소동으로 인하여 약 15-20초 정도의 타임로스가 있었지만, 그날 결과는 우승. [32]
  • 2003년 캐나다 GP에서는 브레이크 고장으로 경기 대부분을 오로지 브레이크 없이 '기어 조작'만으로 우승을 했다. 몬트리올 서킷 자체가 브레이크를 많이 써야 하는 곳임을 생각하면 굉장히 놀라운 결과.
  • 2006년 브라질 그랑프리. 은퇴를 선언하고 마지막 레이스였기 때문에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대회. 위에도 적혀있듯이 근성의 레이스. 선두 페르난도 알론소와는 포인트 10점 차로 슈마허가 우승, 알론소가 리타이어해야만 동점이 되고 우승 횟수에서 앞서는 슈마허가 챔피언이 되는 산술적인 상황. 허나 전날 예선 Q3에서 기어박스 트러블로 예선 10위 알론소는 2위…사실상 챔피언은 물 건너간 셈. 그러나 황제는 10위에서 스타트해서 레이스 초반 많은 추월을 하는데 턴1 세나S 커브에서 피지켈라의 프런트윙과 접촉 펑쳐가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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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거리는 타이어로 리타이어를 해야 정상일 상태에서 억지로 피트인을 하고는 꼴찌로 내려앉았는데 거기서부터 형 왔다 쇼 시작. 레이스 중반부 투스탑을 하고 나와서[33]는 바로 다음랩에 패스티스트랩을 찍었다.[34] 레이스 종료 직후 멈춰선 슈마허의 차량을 카메라가 잡아주었는데, 걸레를 넘어서 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봐도 좋았을 정도. 많은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었었다. 리타이어해야 할 차량을 이끌고도 최종 결과로는 4위를 기록했다.

7. 영화화


50세 생일을 맞아 그의 전기 영화인 슈마허가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제작 과정에서 개봉이 연기되었다.
[1] 쾰른으로부터 남서쪽으로 6 km 정도 떨어져있는 마을이다.[2] 전성기 시절을 페라리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슈마허의 상징을 페라리의 레이스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링크된 별명의 본래 주인인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역시 독일 출신이다.[3] 슈미를 넘버원으로 치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동향 후배'''인 제바스티안 페텔. [4]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 당시 전략 책임자인 로스 브런이 내놓은 작전 중 많은 것이 모 아니면 도인 경우가 많았다. (남들보다 1~2회 정도 더 피트 스탑을 한다던지.) 물론 브런 역시 슈마허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겠지만.[5] 한 경기에서 서킷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흠 잡을 데 없는 기록을 보였지만 마지막 섹터에서 팀메이트인 어바인보다 느린 기록이 나오자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혼자 머리를 싸매며 끙끙거렸다고 한다. 결국 어느샌가 어바인의 주행을 정확히 카피해 완벽한 주행을 선보였다고 한다.[6]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F1은 매 순간 순간마다의 업데이트가 시즌 전체의 성패를 가른다. 그런데 팀이 군기 없이 흐트러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런 면이 자칫 독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다가 자신을 위주로 팀을 돌아가다보니 팀메이트들은 이래저래 고생을 많이 한다. 사실 고생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슈마허를 우승시키기 위해 희생당하는 것을 당연시할 정도.[7] 논란거리가 많은 차량인데, 규정 상 장착해서는 안되는 TCS과 런치 컨트롤이 장착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었고, 런치 컨트롤이 발견됐지만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유야무야됐다. 추후에 경매에 붙여진 B194의 판매자는 트랙션 컨트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피트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연료 밸브 필터를 빼버리려서 화재까지 일어났고, 그라운드 이펙트를 위한 스키드 패드의 사용이 발각되어 슈마허는 벨기에 그랑프리 우승이 취소당하고 2경기 출장 정지를 당한다. 이 때 베네통 포뮬러의 감독은 플라비오 브리아토레2008년 르노 F1 승부조작 사건을 일으키는 등, 승리를 위해서는 비열한 방법도 가리지 않던 작자다.[8] 해마다 Top 10 Drivers 리스트를 발표하는데, 충돌 사고를 일으킨 드라이버의 순위를 항상 한 계단씩 깎는다. 같은 이유로 90년판에선 세나가 2위로 내려가고 프로스트가 1위로 평가됐다.[9] 포인트, 우승, 폴 포지션 등의 기록은 유지됐다.[10] 아이르통 세나의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90년대의 모터스포츠 황금기를 같이 보낸 한 가닥 하던 드라이버였다. 슈마허가 데뷔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현역으로 뛰었기 때문에 My friend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보인다.[11] 이 때도 94년과 동일하게 슈마허가 빌르너브를 1포인트 앞서는 상황이었다.[12] 94년의 경우 슈마허가 사고 직전에 실수를 하긴 했지만 힐보다 앞서 있었으므로 코너 진입 과정에서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고, 2010년 벨기에 GP를 앞두고 사건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인 데이먼 힐이 슈마허에게 고의성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사고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 제3자는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많은 팬들도 이 사고에 대해서는 슈마허의 고의성보다는 힐에게 다소 안타까운 사고였다고 생각한다.[13] 사고 당시 14살이였던 아들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14] 영국 옥스퍼드대의 신경외과 교수 티푸 아지즈는 이후 의식을 회복하더라도 완치가 힘들 것이란 소견을 밝혔다.[15] 마침 그 날은 2014년 월드컵 독일전 첫 경기였다. 슈마허는 축빠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독일 국대 루카스 포돌스키가 '''"슈마허를 위해 우승하겠다"'''는 소감을 밝힌 날이었기에 축구 보려고 깨어났다는 개드립이 작렬했다. 그리고 독일은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포르투갈을 만나 4:0으로 완파했고, 4강 경기에서 '''브라질을 1:7로 압승''', 결국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6] 이날 경기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몸 담았던 메르세데스는 영 좋지 못했지만 (해밀턴 9위, 보타스 DNF) 자신의 멘티이자 후계자 제바스티안 페텔이 페라리로 엄청 선전하면서 P20부터 P2까지 끌어올리며 아주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했다.[17] F1을 지망하는 어린 선수들을 위한 레이스 카테고리이다. 이 시리즈에는 후견인 제도가 있어서 멘토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올해 독일 시리즈에는 슈마허의 멘티였던 제바스티안 페텔이 지정되어 있다. 페텔은 이와 관련한 인터뷰를 하며 믹과 미하엘을 언급했다고 한다. [18] 하지만 믹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한 시선이 워낙 부담스러웠는지, 자신의 레이싱 커리어 초반엔 어머니의 성인 Bestch를 쓴 적이 있다.[19] F2에서의 소속팀은 프레마 레이싱. 중요한 건 프레마 레이싱은 페라리 소속 팀이다. [20] 실제로 노화로 인한 집중력 저하는 노장 드라이버들에게 꽤나 흔한일이다. 최근의 사례로는 키미 래이쾨넨이 페라리 2기때 가장 지적받았던 부분으로 롱런 페이스에서 팀메이트 제바스티안 페텔에게 현저히 밀린다는 점이 있었을정도.[21] 나이트 슈마허는 Knight Shoemach로 표기해서 실제 미하엘 슈마허와는 스펠링이 약간 다르다.[22] 르망24시에서 6년연속으로 우승한 전력이 있다.[23] 로브는 9년 연속으로 우승하다가 이젠 의욕이 떨어졌는지 2013년부턴 스팟 참전했다. 우승횟수로나 연속 우승 기록으로나 슈마허 그 이상. 슈마허가 서킷의 제왕이라면 이쪽은 서킷을 제외한 모든 도로의 제왕이라고 불릴 정도.[24] 2대 스티그의 정체는 전직 포뮬러 3 드라이버였던 벤 콜린스로 판명되었다.[25]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5단 기어가 고장났다고 알려져있는데 5단 기어가 고장난 게 아니라 5단 기어만 사용 가능한 상황이었다.[26] 참고로 1991년 브라질 그랑프리 당시 아일톤 세나는 6단 기어만 되고 나머지는 다 안 되던 상황에서 순전히 6단 기어만으로 남은 구간을 완수했다. 그나마 당시 세나는 6~7바퀴 남았으니 망정이지, 슈마허는 진짜 최악이었다![27] 당시 슈마허는 개막전인 브라질 GP의 우승을 시작으로 파죽의 4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만약에 스페인 GP에서 기어 트러블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슈마허는 F1 역사상 전무후무한 개막전부터의 7연승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뒤이은 캐나다, 프랑스 GP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28] F1에서 랩당 1초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것은 거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만큼이나 절망스러운 간격이다.[29] 이런 패턴으로 슈마허가 우승한 경기는 베네통 시절부터 있었는데 94년 프랑스 GP-유럽 GP, 95년 패시픽 GP, 99년 산 마리노 GP 등이 있다. 과거 재급유가 허용되던 시절에 루이스 해밀턴이 이를 따라한 적이 있었으나 한번도 우승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오로지 슈마허만이 가능했던 일이다. 가히 '재급유 시대'의 황제라 부를만 하다.[30] 그는 완주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드라이버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F1에서는 완주라는 것이 쉽지 않다.[31] 2~3회 피트 스톱이 정상. 피트 스톱이 잦으면 당연히 그만큼 시간을 더 잡아먹고, 감속을 해야 하기 때문에 브레이크에도 그리 좋지 않다. 이걸 제안한 사람은 로스 브런 전 페라리, 메르세데스 AMG 페트로나스 F1 감독이라고 한다.[32] 퀄리파잉에서는 탑3 팀의 기록이 1초 내로 모인다. 15초 차이면 이미 레이스는 터졌다고 봐도 무방한데… 시간을 씹어먹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33] 경기 끝까지 달릴 수 있을 연료 주입[34] 참고로 연료통을 가득 채운 상태에선 패스티스트랩을 찍기 어렵다. 연료의 무게가 차량의 하중 밸런스를 깨트리고 무게도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