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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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중세 리보니아
3. 리보니아 민족주의


1. 개요


리브인이라고도 불리는 리보니아인은 우랄어족 발트-핀어파에 해당하는 리보니아어를 사용하는 라트비아에스토니아의 원주민 겸 소수민족이다. 리가에 정착한 독일인 선교사들과 제일 먼저 교류한 부족이 바로 리가 만 일대에 거주하던 리브인이었기 때문에 중세 라트비아 독일 식민지는 리보니아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선교사들이 십자군을 불러들인 것에서 기원한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정복과 식민화 이후 독일인 및 이웃 발트어족과의 동화 과정으로 오늘날에는 라트비아 내 167~250명, 에스토니아에 22명, 러시아에 7명, 미국에 2명만이 남아있다. 핀란드어, 에스토니아어와 가까운 리보니아어 역시 리보니아인 인구 감소의 결과 소멸 위기이다. 1852년 인구조사에서는 2,324명, 1935년에는 944명 수준으로 계속 감소하는 추세이다. 리보니아어를 모어로 사용했던 마지막 사용자도 2013년부로 작고했다고 하며, 리보니아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2010년 기준 10명에 불과하다. 오늘날 리보니아인들도 리보니아어를 취미 삼아 배우는 수준이다.

2. 중세 리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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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인들은 자신들을 해안 거주자라는 뜻의 란달리스트(rāndalist)라고 불렀으며, 주로 어업과 농업, 목축업을 병행하며 살아가는 민족이었다. 바이킹들이 이들을 정기적으로 침략하면서 많은 리보니아인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독일 기사단에 리보니아가 식민지화되기 이전 리보니아인들은 폴로츠크 공국에 조공을 바치며 대신 리가 만에서 러시아로 흐르는 다우가바 강(서드비나 강)을 이용하며 키예프 공국과 무역을 행했다. 당시 리브인 인구는 2만 안팎이었다 한다.
12세기 말 독일인 선교사들이 리가 만 일대에 정착했다. 이들이 처음 짚은 타겟은 바로 이웃 발트어족 세미갈리아인의 공격에 시달리던 리보니아인이었다. 리보니아인들은 이웃 발트 부족들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이었으나 독일인들이 리가 만에서 초창기 주로 조우했던 원주민이 리브인이었기 때문에 중세 동안 라트비아 일대는 리보니아로 불렸다. 1189년 독일인 선교사들은 리보니아인 추장들을 개종시킨 것으로 시작해서, 리보니아인 영토에 독일인 거주지를 세웠다. 리보니아인 추장이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성과는 지지부진하다는 핑계로 하노버의 베르톨드가 이끄는 소수의 북방 십자군이 1198년 리보니아의 독일인 거주지로 파견되었다. 베르톨드가 이끄는 십자군이 도착한 지 얼마 안되 리보니아인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전멸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리보니아의 십자군을 증원할 것을 명령했고, 1199년 알브레히트 주교가 이끄는 북방 십자군이 리보니아에 들어왔다. 알브레히트가 이끄는 '''독일인들은 1201년 리가 주교구를 세웠으며, 1202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창설한다.''' 이후 서유럽식 봉건제도가 도입되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에 기사단령과 주교령이 세워젔다. 독일인 상인들이 대거 정착한 것은 덤. 농노가 된 리보니아인들은 일주일에 4~6일은 독일인 영주나 주교의 땅을 경작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소득의 25% 가까이를 갖가지 명목의 세금으로 뜯겼다.
독일인의 식민지가 된 당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는 독일인들은 도시 상공업자 및 지주, 원주민은 농노로 직급이 철저하기 나뉘어져 있었다. 기독교를 선교하겠다는 목적으로 들어온 리보니아 기사단은 성경을 원주민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는 게을렀던 것이다. 15세기부터 17세기에는 농노의 법적 권리가 점점 제한됨과 동시에 라트비아를 일대로 스웨덴러시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전쟁을 벌이고 기근이 닥치며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다. 이렇게 원주민 문화와 자주성이 철저히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리보니아인들은 자신의 고유 전통 문화를 서서히 상실하고 수백여년에 걸쳐 라트비아인에 서서히 동화되고 말았다.
리보니아인 중 라트비아인들과 제일 늦게 동화되었던 사람들은 어촌 지역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청어, 대구(어류), 가자미등을 잡고 해초를 비료로 쓰는 농법으로 다른 지역 주민들에 비해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어려운 와중에도 전통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감자와 생선을 먹었다 한다. 이 외에도 리가 인근에 거주하던 리보니아 농민들은 양봉을 해서 리가 시로 꿀을 공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 리보니아 민족주의


리보니아 민족주의는 1차 대전 와중에 라트비아가 독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리보니아어로 성경의 일부인 마태복음이 번역된 시점이 1863년이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시점에서야 리보니아어로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던 셈이다.''' 리보니아 민족주의는 리보니아인 인구가 많이 감소한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대신 리보니아인이 사멸하기 이전에 언어와 문화를 일부나마 보존,기록하는데는 성공했다. 일부 리보니아인들이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이나 핀란드의 헬싱키 대학 등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리보니아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구전 문학을 수집하고 시를 출간하기 시작했다. 특히 리보니아인 인구가 남아있던 어촌들을 중심으로 리보니아인 교사와 성직자들이 임명되는 경우도 생겼다. 이 과정에서 리보니아인들은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31년에는 리보니아어 잡지도 출간되었으나 라트비아 공화국 정부의 압력으로 얼마 안가 폐간되었다. 오늘날의 라트비아인은 발트어족과 여러 우랄어족 민족들이 융화되면서 생긴 민족으로서 리보니아 민족주의가 라트비아인의 애국심과 단결을 저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리보니아어로 학교 교재용 및 홈스쿨링용 교과서 5종이 출시되고 리보니아인들이 사는 어촌 마지르베에서 리보니아인의 자치권을 확대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 역시 무산되었다. 1935년 라트비아 내 리보니아인 인구는 994명 정도[1]였기 때문에 라트비아 민족주의를 위협할 가능성은 미미했지만 라트비아 정부는 완고했다.
2차 대전 이후 라트비아가 다시 소련의 영토가 되고, 소련에서 라트비아에도 콜호스를 도입하는 와중에 간신히 보존되던 리보니아인 전통 어촌 공동체도 붕괴되었다. 이후 리보니아어와 리보니아인 문화 연구는 라트비아에서는 진행되지 못하고, 당시 소련의 영토였던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에서 기록, 보존되었다. 1964년 리보니아어-라트비아어-에스페란토어 사전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32명의 사람들이 쓴 300여개에 리보니아어 시가 에스페란토어, 라트비아어로 번역되어 기록되었다. 이 사전은 1982년에야 출간되었다. [2] 2001년에도 에드거 발가마라는 저자가 "하얀 모래의 사람들"이라는 리보니아어 책을 출간하였다.
[1] 핀란드에스토니아에 있는 리보니아인까지 다 합치면 2,000여명 정도였다.[2] 출처 : 위키피디아 핀란드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