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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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 소시알리스트
Parti Socialiste | 사회당

<colcolor=#e50040> 영문명
Socialist Party
약칭
PS
슬로건
Ensemble, retournons au combat.
함께 투쟁으로 돌아가자.
창당일
1969년
이전 정당
주소
99 뤼 몰리에르, 94200 이브히 쉬흐 센 파리
(제13구역, 사회당 당사)
창립자
알랭 사바히 / 5선 (2~3·5~7대)
프랑수아 미테랑 / 8선 (1~3[1]·2~6대)
제1비서
올리비에 포르 / 재선 (14~15대)
전국위원장
코린 나하시귕 / 초선 (14대)
상원 원내대표
패트리크 카너 / 초선 (10대)
하원 원내대표
발레리 라볼 / 재선 (14~15대)
상원
71석 / 378석 (18.7%)
국민의회
24석 / 577석 (4.2%)
유럽의회
6석 / 74석 (8.1%)
시주지사
5석 / 17석 (29.4%)
데파르드망
25석 / 101석 (24.6%)
당색
분홍색 (#E50040)
이념
사회민주주의
생태주의[2]

분파 :
사회자유주의
민주사회주의
기독교 좌파
스펙트럼
중도좌파
국제조직


유럽정당
사회민주진보동맹
청년조직
젊은 사회당 (Jeunes socialistes)
LGBT 조직
사회주의와 호모섹슈얼 (Homosexualités et Socialisme)
당원수
42,300명
홈페이지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19세기에서 2차대전까지
3.2. 제4공화국
3.3. 제5공화국에서 사회당 창당까지
3.4. 사회당, 미테랑 집권
3.5. 올랑드 집권, 이후 지지율 하락
3.6. 암흑기 극복과 재도약의 시작
4. 출신 인물
4.1. 과거 소속 인물
5. 역대 선거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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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

2. 상세


프랑스의 가장 큰 좌익 정당으로 프랑스에선 중도좌파 스탠스로 인식된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수아 올랑드라는 두 명의 전임 프랑스 대통령을 배출한 프랑스 진보, 좌파 진영의 대표 정당이 다.
표방이념은 사회민주주의이며, 전신은 1905년에 창당한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이다.[3] 가입되어있는 국제조직은 진보동맹,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유럽 사회당이며, 상위 유럽의회 정당은 사회민주진보동맹에 소속되어 있다.

3. 역사


프랑스하면 좌파 운동 이미지가 강한 편임에도 의외로 집권 기간이 생각만큼 길진 않다. 19세기야 사회주의 자체가 유럽에서 겨우 이름을 들이밀때라 지지층들은 오히려 리버럴 정당에 묻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고, 20세기 초에도 그렇게 묻어가다 사회당의 전신인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가 창당되고 좌-우 이념이 확립될 쯤엔 당 내분으로 1920년 공산당이 창당되어 진영내 팀킬을 해서 지지층을 분열시켰기 때문. 덕분에 제5공화국 이전엔 사회당이 집권할 때도 연립내각으로 집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집권했을 땐 뭐 좀 해볼려고 하긴 했는데, 이때도 뜬금없이 나치가 쳐들어오질 않나[4] 겨우 물리치고 전후 복구 좀 하려 했더니 이젠 제국주의 시절이 저물며 식민지 독립 운동이 전개되질 않나 그렇게 바쁜 일상을 거닐던 중 제5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는 68운동의 여파 속에서 오히려 구좌파로 몰려 근 20여년간 정권을 찾지 못하다 1969년 지금의 사회당으로 재창당하고 1980년대 미테랑 시대를 맞으면서 오늘날의 좌우 정권 교체 틀을 잡게 된다.

3.1. 19세기에서 2차대전까지


사회당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여파로 프랑스 좌파는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자잘한 정당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중산층은 급진당[5]을 지지했고, 노동자계급과 좌익세력은 정부참여, 중도 리버럴 세력과의 연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열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05년 쯤 되어서야 SFIO(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의 단일정당으로 힘을 합치게 되는데, 이 정당이 사실상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의 모체다.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SFIO는 제2인터내셔널에 프랑스 노동계급-좌익세력의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 기간 동안 SFIO는 주로 리버럴 정당과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리버럴이 정권을 잡아도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쉽게 말해 중도좌파 진영의 콩라인이 이 시절 사회당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SFIO는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좌-우파로 분열된다. 결국 1920년대 당내 좌파는 프랑스 공산당으로 떨어져 나가고, 반쪽이 된 SFIO는 기타 중도좌파 정당들을 흡수합병하면서 세력을 키우다가 1936년 급진당, 공산당 등과 함께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당선된 레옹 블룸이 프랑스 최초의 정통 좌파 총리.[6][7] 하지만 다양한 정당들의 연립은 오래 유지되긴 힘들었고 중도파와 좌파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여차저차하는 사이 나치의 프랑스 침공으로 제3공화국은 1940년 멸망했다.

3.2. 제4공화국


알고보면 사회당의 진짜 황금기.
프랑스 해방 이후 세워진 프랑스 제4공화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복지국가의 기틀을 잡은 시기이다. 제3공화국의 주도세력이었던 중도파의 세가 급속히 쇠락하였고, 드골파와 공산당의 세가 크게 신장되었지만 1946년에 드골파가 정권탈퇴 선언을 하고 공산당이 집권에서 배제되면서, 프랑스 정치는 이른바 '삼당주의(Tripartisme)'라고 불리는 일종의 새로운 대연정이 주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 삼당주의의 삼당은 SFIO, 급진공화당[8], 대중공화운동(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9]으로 어느 당도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하자[10] 이런 대연정을 통해 집권을 꾀한 것이다. 그래도 이 삼당주의는 꽤 효과를 봐서 제4공화국 기간 동안 이들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고, SFIO 역시 내각에 참여해 사회보장제도를 창설하는 등 복지국가 프랑스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을 쏟게 된다.
다만 넓은 스펙트럼의 대연정 성격상 내각 교체가 잦았고, 특히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이어지는 독립 전쟁, 점점 심화되는 냉전의 위기 등으로 인해 제4공화국은 위기를 맞게 된다. 결정타는 1958년 5월 알제리 독립에 결사 반대하며 드골 장군 옹립을 주장하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으로 내전을 우려한 연립내각은 반란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드골이 임시 총리로 취임하고, 결국 헌법도 바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제5공화국이 세워진다.

3.3. 제5공화국에서 사회당 창당까지


제5공화국 초기 SFIO는 왼쪽의 공산당, 오른쪽의 드골주의에 치여 한동안 갈피를 못잡는다. 드골주의에 찬성하는건지, 반대하는건지 모를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젊은 층의 마음은 떠나버렸고 결국 몇번의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한다. 결과를 보자.
1956년 총선: 제1당 공산당 (150석; 25.36%); 제3당 SFIO (95석; 14.93%)
1958년 총선: 제1당 프랑스인민연합[11] (189석; 17.6%)[12]; 제4당 SFIO (40석; 15.5%)
1958년 대선: 샤를 드골 당선 (78.51%); SFIO 후보 없음.
1962년 총선: 제1당 프랑스인민연합 (206석; 31.94%); 제2당 SFIO (65석; 12.54%).
1965년 대선: 샤를 드골 당선 (55.2%); SFIO 후보 없음.[13]
그래도 제5공화국 출범 7년만인 1965년 대선에선 드골의 단독 과반득표가 예상되던 추측을 깨고 결선까지 진출하여 44.8%를 득표하며 나름대로 선전했고, 1967년 총선에선 SFIO가 동거정부 설립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의석수를 65석에서 117석으로 늘리고 우파 정당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다시 부활의 조짐도 보였다.
허나 68운동 와중에 치러진 1968년 총선에선 좌파정당들의 사분오열과 우파의 대결집으로 인해 당초 좌파가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참패해버렸고, 드골 사임 직후 1969년 대선에서는 5.21%(...)를 얻는 기염을 토했다.[14] 게다가 2차 선거에서 1차 선거 결과에 실망한 상당수 좌파 지지자들이 투표에 불참하면서 드골파였던 조르주 퐁피두가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연장했다.
그리고 SFIO는 멸망했다. 식민지 독립 문제와 기타 사회문제에 있어 이도저도 아닌 모습을 보여주던 당시 SFIO는 학생운동을 통해 등장한 소위 "신좌파"들이 보기엔 드골과 마찬가지로 몰아내야 하는 "구좌파"에 불과했다. 그렇게 결국 SFIO는 1969년 사회당(Parti Socialiste)으로 재창당하게 된다.

3.4. 사회당, 미테랑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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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회당 제2의 전성기
SFIO가 사회당으로 재창당한 후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프랑수아 미테랑의 입당이었다. 좌파 전반과 느슨한 연대를 유지하며 단일 후보로 대선에도 출마했던 미테랑이 입당하면서, 사회당은 중도파와 좌파의 맏형 비슷한 이미지를 쌓게 된다. 그가 제4공화국의 장관직을 역임했고 샤를 드 골의 등장 직후부터 드골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던 점 역시 미테랑과 사회당의 대중적 지지를 높히는데 도움을 준다.
이후 당권을 잡은 미테랑은 당의 정책을 정통적 사회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접목된 사민주의로 트는 것과 동시에, 공산당 등 기타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를 추구하므로서 집토끼와 들토끼를 둘 다 잡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73년 총선에서 선전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974년 대선에선 1차 투표에선 승리를, 2차 투표에선 석패를 거두며 사회당의 부활을 알렸으며 1977년 지방선거에서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78년 총선에서 1차 투표에서 선전했음에도 2차 투표에서의 분패로(그래도 공산당을 앞지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동거정부 수립에는 실패하고 다시금 주춤해졌다.
1981년 대선에서 결국 미테랑은 대권 도전에 성공하고, 취임 직후 치뤄진 총선에서도 사회당이 단독과반에 성공하면서 사회당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냉전이 계속되고 소련중국의 현실이 드러나면서 공산당은 지지를 잃었고[16] 다수의 좌파 유권자들이 사회당에 전략적 투표를 할 것이라는 미테랑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미테랑의 집권 초기는 "110개조 강령" 이라는 좌파 정책들을 충실히 이행한 시기였다. 하지만 집권 중반기를 지나면서 미테랑 정부는 고환율, 재정적자 등의 이유로 좀 더 우클릭한 정책들을 도입했고 공산당 등 기타 정당과 결별하게 되었다. 1986년 총선에서 과반을 내주면서 우파 자크 시라크 총리와 정권을 공유하는 "동거정부"를 구성했지만 미테랑 사회당 정부는 외교적인 성과를 기반으로 1988년 재선에 성공했다. 14년간의 재임기간을 통해 미테랑은 역대 최장 재임 프랑스 대통령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3.5. 올랑드 집권, 이후 지지율 하락


오늘날의 사회당은 미테랑의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5공화국에서 대통령직을 역임한 사람이 미테랑과 올랑드 대통령밖에는 없어서, 사회당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전부 미테랑 밑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 좋으나 싫으나 미테랑 라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테랑으로부터 정무적 능력은 배우지 못한 모양인지 미테랑 퇴임 이후 사회당은 내내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자크 시라크니콜라 사르코지에게 연달아 대권을 내준 것도 그렇고, 대권주자로 손꼽히던 양반이 폭행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질 않나..
심지어 2002년 대선에선 후보로 내세운 리오넬 조스팽국민전선장 마리 르 펜에게 밀리면서 결선 진출에 실패하는 대참사를 맛보기도 했다. 사실 여론조사 결과만 보자면 오히려 조스팽이 시라크보다도 약간 더 앞서있었다. 그런데 지지층이 여론조사에 안심하고 투표장에 안나온 것인지 뭔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장 마리 르 펜이 2위 자리를 차지하면서 멘붕. 그래도 결선에선 시라크를 밀어줘서 압승을 거뒀으니, 나름 대인배라면 대인배다. 물론 정말로 비판적 지지긴 했다. 당시 시라크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던 모토가 "Votez Escroc, pas Fasho" (파쇼 말고 부패한 놈 뽑자) 였으니 말 다했다.
2012년 5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말 오랜만에 정권을 잡았다. 총선도 승리해서 동거정부를 꾸릴 이유도 없다는건 덤.[17] 하지만 공약과 다른 정책을 펴는데다가 계속된 경제난과 연달아 터진 큼직한 테러의 여파로 올랑드에 대한 지지도는 급속히 떨어졌다. 올랑드 대통령의 책인 '대통령이 이런 말까지 하면 안 되는데...' 에서 사회당 동료 정치인들 뒷담화를 까는 등 대책없는 경솔함을 보여서 광역 어그로와 욕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올랑드 키드'로 유명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전 경제부 장관은 사회당을 탈당해서 중도신당 앙 마르슈를 창당하고 대선 출마선언을 했으며, 올랑드와 반대노선을 걷는 브누아 아몽이 대선주자로 나서기는 했지만 올랑드는 마크롱을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올랑드 뿐만 아니라 사회당 내의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지자자들도 중도파는 마크롱으로, 좌파는 장뤽 멜랑숑[18]으로 떨어져 나가고 정작 당 후보인 아몽은 왕따 신세다. 실제 아몽은 대선 1차투표에서 집권당 후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처참한 득표율로 광탈했다. 출구조사가 끝난 직후에 바로 승복선언을 했을 정도.
마크롱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확실시되기는 하지만 의회에서 세력이 없고 인재풀도 적은데다가 기존 사회당 인사들 가운데서 발스 총리를 비롯한 상당수가 마크롱을 공개지지했기 때문에 총선에서 선거연합을 구성한 다음에[19]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연장할 방식이 커 보였다만... 그와 별개로 총선에서 앙 마르슈는 물론이고 멜랑숑이 이끄는 급진 좌파 정당 연합체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보다도 지지율이 낮아[20] 1993년 총선때와 비슷하거나 그 보다 적은 의석수를 얻을 것으로 보여서 참패는 면하기 어려울듯 보인다. 즉, 공산당이 사회당보다 의석수가 많았던 1978년 총선 이전때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 이미 사회당 현역 의원들 중 무려 90명이 앙 마르슈에 공천을 신청했고 그 중 24명이 공천을 받았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만큼 해당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대선 다음 달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무려 287석이나 줄어들었고 겨우 44석[21]까지 추락하고 공화당과의 양당구도가 깨져버리면서 대차게 망해버렸다. 2차대전 이후 프랑스 사회당은 중도좌파를 대변하면서 프랑스 정치권의 상수였는데, 중도적인 유권자들은 마크롱의 앙 마르슈로, 강성 좌파 지지자들은 뚜렷하게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지지기반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더욱이 당의 대선후보였던 브누아 아몽[22]마저 사회당을 비토하고 탈당하면서 사회당의 미래는 더더욱 암울해졌다. 그나마 혁신파를 통해 선거 때 보여준 미래로 가는 비전은 사라지고, 이 상황에서 당 제 1 총서기(당 대표)인 장 크리스토프 꺙바델리는 '사회당을 지키는 것이 좌파의 '미래다'는 공염불스런 말만 시전하고 있다. 사회당 전 당권파는 앙 마르슈에 가버리고 혁신파는 당을 깨고 탈당하는 움직임이니, 사회당의 공중분해가 머지 않았다는 조롱마저 나오고 있다.

3.6. 암흑기 극복과 재도약의 시작


총선 이후 당 제1서기(당대표)였던 장 크리스토프 꺙바델리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고, 브누아 아몽의 탈당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드디어 주요 당직자들을 물갈이했다. 지난 올랑드 정권의 노동개악에도 반대하고 현 정권에도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당내 좌파 올리비아 포르 의원이 원내대표에 취임했다. 그리고 교섭단체 명을 '신 좌파(Nouvelle gauche)'로 변경했는데, 왜 오랫동안 써오던 '사회주의(socialiste)'의 이름을 쓰지 않냐는 질문에 당의 관계자는 '유래가 없었던 정도의 적은 의석수와 급변해버린 좌파 정당들의 구도 속에서 좌파 자체의 내용을 바꾸고 새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답변했다. 다행히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도 전임 대통령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보다 더 빠르게 폭락했고 반 마크롱 전선에선 가장 큰 의석수(그래봤자 30석도 안 된다)를 가지고 있는지라, 어느 정도 상황 정리가 되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탈당했던 브누아 아몽과 그의 단체 '운동세대(Génération.s)'를 비롯해서 좌파 재편 논의가 다시 진행되면서 사회당에 대한 기대 역시 모아지고 있지만, 결국 구상이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17년 12월에 기부금과 정당 보조금 급감으로 당사까지 매각한 상태이다. 더욱이 2017년 4분기 들어 마크롱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회복되고 있어 사회당으로서는 미래가 암담한 상황이다. 노동자들도 사회당에 예전같은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2018년 10월, 내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서 지지율은 호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내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당내 좌파 세력[23]을 이끌던 에마뉘엘 모렐(Emmanuel Maurel) 유럽의회 의원과 마리-노엘 리네만(Marie-Noëlle Lienemann) 상원 의원이 650여명의 활동가들과 함께 탈당하고 장뤽 멜랑숑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와 연대하는 신당을 창당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의회 진출[24] 자체가 의심스러운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노란 조끼 운동과 함께 바닥으로 향하는 마크롱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의 지지율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마크롱 행정부의 떨어지는 지지율을 우파측에선 마린 르 펜국민연합이, 좌파측에서는 멜랑숑과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이 나눠서 먹고 사회당은 그냥 묻히는 형세.
2019년 유럽의회 총선거에서 6.19%의 득표율로 의석 5석을 얻었다. 물론 사회당 역사상 유럽의회 총선거에서 얻은 최악의 득표율이지만, 한때 의석을 얻느냐 마느냐를 논할 정도로 지지율이 폭락했던 때보단 그나마 나은 결과.
이후에도 부진을 이어갔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범유럽 확산과 이를 핑계 삼은 에마뉘엘 마크롱 행정부의 연금개편안 직권 처리 영향으로 2020년 3월 15일 열린 지방 선거 1차 투표에서 파리, 마르세유 등 주요 도시에서 녹색당과 함께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다. 대부분 주요 도시에서 범좌파(사회당-녹색당 등)가 득표율로 이미 과반을 확보한 상황이라 2차 투표에서 승리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22일로 예정되었던 2차 투표가 연기되었다.
그리고 2차 투표에서 파리 시장 직을 지키는 등 예상대로 녹색당과 같이 선전하였다. 마크롱에 실망해 이탈한 진보 성향 지지자들이 조금씩 복귀하면서 다시 지지세가 회복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대선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4. 출신 인물



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자 14년의 임기로 프랑스 대통령 중 최장수 집권자. 사회당을 넘어 프랑스 좌파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만하다.
2012년 집권한 전직 프랑스 대통령.
프랑스 전 총리이자 미테랑과는 일생의 동지였으나 1993년 뇌물수수 혐의를 받자 자살했다.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의외의 선전을 거두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당시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 와 같이 좌우동거정부를 구성하여 당대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토니 블레어와 더불어서 유럽을 이끄는 좌파지도자라는 평을 받았지만 2002년도 대선 때 좌파가 대분열하는 상황에서 장 마리 르 펜에게 밀려버려 1차 선거에서 탈락하는 참사를 당한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07년에 니콜라 사르코지와 2차 선거까지 대선을 치룬 경험이 있는 여성 정치인이다. 그리고 한땐 프랑수아 올랑드의 동거인(여자친구)으로 무려 3명의 자식까지 낳았었다(!). 하지만 2007년도에 대선을 치르면서 결별하였는데 올랑드가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 루아얄을 환경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올랑드 집권 당시 프랑스의 총리이다.

4.1. 과거 소속 인물


2009년 탈당. 현 앙 마르슈! 소속. 제25대 프랑스 대통령.
2008년 탈당. 현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소속.
정치를 시작하던 시절 사회당 소속이었다. 현 공화당 소속.

5. 역대 선거결과


(지방선거는 제외)
선거
결과
비고
1973년 총선
89 (18.9%)

1974년 대선
1차 43.3%
2차 49.2%

1978년 총선
104 (22.6%)
[25]
1981년 대선
1차 25.9%
2차 51.8%
프랑수아 미테랑 당선
1981년 총선
269 (36.0%)
[26]
1986년 총선
206 (31.0%)

1988년 대선
1차 34.1%
2차 54.0%
미테랑 재선
1988년 총선
260 (34.8%)

1993년 총선
53 (17.6%)
[27]
1995년 대선
1차 23.3%
2차 47.4%

1997년 총선
255 (23.5%)

2002년 대선
1차 16.2%

첫 1차 탈락[28]
2002년 총선
140 (24.1%)

2007년 대선
1차 25.9%
2차 47.0%

2007년 총선
186 (24.7%)

2012년 대선
1차 28.6%
2차 51.6%
프랑수아 올랑드 당선
2012년 총선
280 (29.4%)

2017년 대선
1차 6.36%

5위로 1차 탈락[29]
2017년 총선
29 (7.44%)
[30]
2017년 상원
46 (26.90%)
2위

[1] 제3공화국[2] 프랑스 사회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사회-생태 이념으로 부른다.[3] 프랑스에서 우파 정당이 명칭을 자주 바꾸는데 비해, 사회당은 1969년부터 명칭을 쭉 유지해오고 있다.[4] 사실 사회당 계열은 이전에 집권하다 내려왔고, 이땐 집권하고 있을 시기는 아니었다. [5] Parti Radicale, 프랑스 혁명 직후 창당된 정당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땐 반-왕정 스탠스로 "급진"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때쯤에 이르러선 중산층의 리버럴 정당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6] 그전까지 급진당 등 중도파가 권력을 잡은 일은 있었지만, 이념적으로 따졌을땐 사회주의 정권은 아니었다. 물론 이 좌파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보냐의 문제긴 하지만.[7] 지금 프랑스 정치는 강력한 대통령이 주도하는 모습이지만, 5공화국 수립 이전까진 의원내각제가 주였고 덕분에 총리가 실질적인 행정수반 역할이었다. 그 전통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프랑스는 지금도 흔히 대통령과 총리의 "이원집정부제"라고 묘사된다.[8] 리즈 시절이었던 제3공화국에 비해서 세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일종의 대연정이 구성된 덕택에 이 시기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9] 기독교 민주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 1967년 '민주중도'로 당이 개편되며 해체되었다.[10] 심지어 이때 좌파 제1당은 SFIO가 아닌 공산당이었다.[11] 드골의 신생정당.[12] 총 의석 576석.[13] 대신 좌파 단일 후보로 미테랑이 출마했다.[14] 참고로 이 선거에서 공산당은 21.27%를 얻었다.[15]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의 승리를 예측하는 방송사 출구조사다.[16] 이미 68운동 때부터 입으로만 혁명을 외칠뿐 정작 나서지는 않는 공산당의 행태에 많은 좌파 지지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일방적으로 옹호한게 결정타였다.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고, 그 이후로 프랑스 공산당은 계속 추락해간다.[17]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5년으로 줄면서 동거정부 형성의 가능성이 줄어들긴 했다.[18] 멜랑숑도 1974년에 사회당에 입당한 골수 사회당 당원이었지만 2009년에 사회당을 탈당해서 여타 좌파정당들과 연합해서 두어차례에 걸쳐서 대선에 출마하고 있는 중이다.[19] 프랑스는 총선에서도 결선투표제를 적용하는 데다가 대선과는 달리 결선투표 진출 요건이 득표율 12.5% 이상으로 약간 널널하기 때문에 외국처럼 단일화 부담도 크게 없다. 어차피 사회당-좌파전선-앙 마르슈 후보가 각자 나선다 해도 1위 후보를 밀면 되는 식이니...[20] 총선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앙 마르슈가 20% 중반대, 공화당과 국민전선이 10% 후반에서 20% 초반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10% 중후반대를 기록하고 있고, 사회당은 10%를 겨우 넘거나 그 보다 못한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굴복하지 않은 프랑스가 지역 조직력은 약한 덕택에 득표율은 높아도 획득 의석수는 적을것으로 보인다.[21] 사회당 자체가 얻은 의석수는 29석이지만 좌파계열 정당 2개와 연합해서 얻은 득표수가 44석.[22] 한 때는 망해가던 사회당 대선후보 지지율을 16%까지 만드는 등 시민경선으로 당선된 나름 '혁신파' 후보였으나... 당권파는 그를 버렸다. [23] 연합과 희망(L'Union et Espoir)[24] 지지율의 컷오프 기준인 5% 아래로 나오고 있다.(...)[25] 이 선거를 기점으로 공산당의 의석수를 넘어섰다. 사실 사회당 입장에서 볼때 2차 선거에서의 역전패로 그리 좋게 기억되지 않는 선거이기는 하지만.[26]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회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했다.[27] 사회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 되고 있는데 집권여당 의석수가 전체의석(577석)의 10%에도 못 미치는 엄청난 참패였다.[28] 당초에는 조스팽 총리가 나름대로 인기가 좋았기에 시라크 대통령에게 조금 우세했지만 정작 출구조사가 발표되니까 장 마리 르 펜 결선 투표 진출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가 나왔다.[29] 기존 사회당 지지층이 마크롱과 멜랑숑에게 쏠려서 1차에서 10%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며 탈락했다. 기존에 양당체제를 이루던 공화당 역시 득표율 3위를 기록하면서 탈락했다.[30] 당 대표가 1차 투표에서 낙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