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2세

 

'''프란츠 2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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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
(Franz Joseph Karl)
'''출생'''
1768년 2월 12일
토스카나 공국 피렌체
'''사망'''
1835년 3월 2일 (67세)
오스트리아 제국
'''장례'''
오스트리아 제국 카푸친 교회
'''재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왕
1792년 7월 5일 ~ 1806년 8월 6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1804년 8월 11일 ~ 1835년 3월 2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의 왕, 보헤미아 왕국의 왕
1792년 3월 1일 ~ 1835년 3월 2일
롬바르디아 - 베네치아의 왕
1815년 6월 9일 ~ 1835년 3월 2일
'''배우자'''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 (1788년 결혼 / 1790년 사망)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 (1790년 결혼 / 1807년 사망)
모데나의 마리아 루도비카 베아트릭스 (1808년 결혼 / 1816년 사망)
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1816년 결혼 / 1835년 사망)
'''자녀'''
루도비카 엘리자베트,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롤리네, 카롤리네 루도비카, 마리아 레오폴디나, 클레멘티나, 요제프 프란츠, 마리아 카롤리네, 프란츠 카를[1], 마리아 안나, 요한 네포무크, 아말리에 테레지아
'''아버지'''
레오폴트 2세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루도비카
'''형제'''
마리아 테레지아, 페르디난도 3세, 카를, 알렉산더 레오폴드, 요제프, 마리아 클레멘티나, 안톤 빅터, 요한, 라이너 요제프, 루트비히, 루돌프[2]
1. 개요
2.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4. 이어지는 좌절
5. 회심의 복수
6. 가족사
6.1. 직계 조상
6.2. 아내와 자녀
6.3. 숙부숙모들
7.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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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또한 독일 연방의 초대 의장이자 헝가리 왕국의 왕, 보헤미아 왕국의 왕.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프란츠 2세'이며,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이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이유는 나폴레옹이 제위에 올라 자신과 동일한 지위에 오르자 황제 칭호를 한 개 더 추가하여 상대적 우위에 오르고자 하는 유치한 심리만은 아니었고 그 나름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1804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1806년까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은 이중 황제(독일어: Doppel Kaiser, 영어: Double Emperor)로 불린다.[3][4]

2.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레오폴트 2세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부 요제프 2세가 아들이 없기에 일찍부터 첫 아내인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타[5]와 함께 10대 초반부터 빈으로 불려와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1792년 아버지가 죽자 제위를 계승해 프랑스 혁명 문제를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해, 아버지 레오폴트 2세가 죽기 전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정부와 석방 협상을 벌이고 있던 걸 프란츠 2세가 하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당했다.
이에 다른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반프랑스 정책을 펼쳐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지원했으나 희대의 먼치킨 나폴레옹에게 줘터지는 바람에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롬바르디아와 라인 강 서안의 제국 영토를 상실했다. 그 이후로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간 사이에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수보로프와 함께 잠시 선전하기도 하지만 1799년 러시아가 이탈하고 나자 결국 굴복하고 1801년 뤼네빌 평화조약을 맺고 라인강 서안과 이탈리아 영유를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과 뤼네빌 평화조약(1801)의 대가로 기존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되는데 '''라인 강 좌안의 기존 신성 로마 제국 영토는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고''' 기존의 제후들은 라인 강 우안에서 영토적 보상을 할 것이란 합의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자신이 승인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신이 황제로 있는 제국의 서쪽에 위치한 제후들 영지를 몽땅 프랑스에게 바치고, 이 과정에서 영지를 잃어버린 제후들은 니네끼리 알아서 보상을 해주든 말든 하라 이거였다... 물론 황제 체면은 땅에 떨어졌고 주교령, 제국 기사령 등 황제가 이제껏 영향력을 행사한 제국 내 영토들은 사실상 싹 사라지고 '''영토 보상을 받은 제후들마저 몽땅 프랑스 편으로 붙어 버렸다.''' 거기다가 황제 선거권이 있는 선제후들 중에 신성 로마 제국의 라인 강변의 성직제후 마인츠, 트리어, 쾰른 선제후가 없어진 것... 거기다가 나폴레옹이 사실상 독일의 주인 행세를 하며 오스트리아 코 앞의 제국 도시 레겐스부르크에서 '독일 제국 대표자 회의'를 열어서 기존 없어진 선제후[6] 4개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꼬붕들(?)이자 위성국가들을 멋대로 선제후로 삼아버렸다.
구체적으로 오스트리아 몫은 프란츠의 동생 페르디난트가 다스리던 토스카나 대공국이 프랑스에 합병당하면서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을 선제후 겸 대공국으로 승격시켜 토스카나를 잃어버린 페르디난트에게 대토보상으로 주는데 그치고 나머지 5개 선제후들은 바덴[7]은 대공국으로 승격. 뷔르템베르크, 레겐스부르크, 헤센-카셀 역시 프랑스의 위성국... 바이에른과 작센[8]은 역시 프랑스에 줄을 서 선제후 자리 중 과반수가 프랑스의 위성국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기댈만 한 프로이센 역시 영국이 동군연합 중이던 하노버를 집어삼킨 후 쭉 중립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직 황제인 프란츠의 손을 들어줄 선제후는 프란츠 본인이 들고 있는 보헤미아 국왕과 동생이 얻은 잘츠부르크 대공, 달랑 2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직 승계는 이미 물건너 갔다.

3.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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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한창 천하무적의 위세를 자랑하던 나폴레옹이 1804년에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자 프란츠의 합스부르크 가문 측에서는 대표 작위인 오스트리아가 기존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대공국으로 격하되어 유사시 듣보잡으로 여기던 독일 소국보다 낮아지고, 나폴레옹 또는 그의 하수인의 신하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대체하여 합스부르크를 대표할 만한 직위인 '오스트리아 황제'를 칭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군연합으로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테미쇼아라, 부코비나 공국 등을 합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웠다.
당연하지만 프란츠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보고 단순하게 자존심이 상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운 건 전혀 아니다. 이미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지배자들은 18세기부터 통치가 힘든[9] 신성 로마 제국 영내보다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관리가 더 쉬운 동방 영토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10] 따라서 프란츠가 이들 동방 영토를 더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틀을 마련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는 신성 로마 제국 안과 밖에 모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진 뒤 신성 로마 제국에도 속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모두 속하는 지역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본거지격인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모두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어차피 두 제국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양쪽에 속해도 문제는 없었다.
참고로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국'은 독일어로 다르게 표기했다. 전자는 Reich(라이히)라고 하는 데 반해 후자는 Kaiserthum(카이저툼, 현재의 철자법으로는 Kaisertum)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Oesterreich, 현대 철자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라는 단어에 이미 'Reich'가 들어 있기 때문에 동어 반복을 피하면서 신성로마제국과도 구분하려고 Kaiserthum이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는(elected) 황제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는 세습되는(hereditary) 황제였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둘 다 세습이었지만...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당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의 황제 칭호의 상대적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유럽의 다른 나라 왕들한테도 황제로 즉위하라고 권유했지만, 권유를 받은 왕들은 그게 별 실효성이 없는 유치한 대응법이라면서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인 18세기 말 영국 일각에서도 조지 3세에게 황제 칭호를 쓰라는 권유를 했으나 조지 3세 본인이 거절한 바 있다.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4. 이어지는 좌절


프랑스가 영국 간의 아미앵 조약이 깨지고 영국이 동맹을 제의하자 러시아와 같이 편을 먹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가입한다. 역시나 기세는 좋았지만, 울름 전투에서 주력을 허무하게 잡혀먹고 오스트리아에서도 발리고 결정적으로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해체되었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이 6월쯤 '''프랑스 황제이자 라인 동맹의 보호자 자격'''으로 프란츠에게 7월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선전포고한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 자진해서 제국 해체를 결의하게 된다. 제국을 해체한 시점에는 이미 라인 동맹은 전부 신성 로마 제국을 탈퇴해서 회원국이라곤 18세기부터 황제에 반항한 프로이센 왕국과 친척 잘츠부르크 공국[11]밖에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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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인생 최악의 순간.jpg'''[12]
영국의 비밀 지원과 대놓고 자금 지원으로 순식간에 군비를 재건하고 아우 카를 대공이 군대를 맡아 오스트리아의 1807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맞서 싸우지만, '''역시''' 대패하면서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5차 대불 동맹에서는 초기에는 나폴레옹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선전하며 2인자 장 란을 전사시키는 등 나름대로 성공이 있었으나, 결국은 바그람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물자와 장비를 나폴레옹에게 통째로 빼앗기기까지 해서 오스트리아 군대가 사실상 해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810년에는 자신의 딸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시집 보냈다. 이때 메테르니히가 매우 기뻐했다. 당분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고 국력을 키울 수 있겠다며. 이후 프랑스와 '''동등한''' 인정을 받으며[13] 사위의 동맹국이 되었고 1812년 러시아 원정 때도 프랑스 원정군의 우익을 담당하여 슈바르첸베르크를 뽑아 1개 군단을 파견하였으나 알렉산드르 1세와 이심전심(?)으로 통하여 별다른 충돌 없이 벨로루시에서 산책만 하고[14] 프랑스가 참패하는 것을 보자 귀환한다.

5. 회심의 복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돌아오자''' 초기에 관망했는데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적은 병력으로 용감하게 나폴레옹에게 상처를 입히고 영국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자 1813년 다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에 가입한다.트라헨베르크 계획을 세워서 프랑스로 돌아오는 나폴레옹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독일땅에 완전히 몰아내고 기세를 몰아 프랑스 영토에서도 승리하며 한풀이에 성공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를 지지했다.

6. 가족사



6.1. 직계 조상



6.2. 아내와 자녀


총 '''4'''명의 아내로부터 4남 9녀의 자녀를 두었고, 2남 5녀만 성년(20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아래는 성년 자녀만 서술.

6.3. 숙부숙모들


마리아 안나(1738년 10월 6일 ~ 1789년 11월 19일) - 독신.
요제프 2세(1741년 3월 13일 ~ 1790년 2월 20일) - 2녀.
마리아 크리스티나(1742년 5월 13일 ~ 1798년 6월 24일) - 1녀(사산).
마리아 엘리자베트(1743년 8월 13일 ~ 1808년 9월 28일) - 독신.
마리아 아말리아(1746년 2월 26일 ~ 1804년 6월 9일) - 3남6녀
마리아 카롤리나(1752년 8월 13일 ~ 1814년 9월 7일) - '''7남 11녀'''.[17]
페르디난트(1754년 6월 1일 ~ 1806년 12월 24일) - 5남 5녀.
'''마리 앙투아네트'''(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 - 2남 2녀.
막시밀리안 프란츠(1756년 12월 8일 ~ 1801년 7월 26일)

7. 기타


보수주의적 정치 체계를 펼쳤고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약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키우는 데 힘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했다. 이후 그의 일생과 업적을 담은 V. 비볼의 <프란츠 황제>가 1938년에 출간되었다.
상당히 가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하지만, 자주 재혼하고 딸을 원수에게 시집보냈다고 해서 가정에 무관심했다는 설도 있다. 첫 번째 아내야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도 두 번째 아내 마리아 테레사에게서는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도 곧 바로 재혼했다.
그의 외손자가 나폴레옹 2세이다. 원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딸의 아들이기도 하기에 나폴레옹 2세를 끔찍히 아꼈다고 한다. 사실 친아들들이 터무니없이 변변찮은 것도 한 몫했다. 거기다 손자가 총명한 데다 외모까지 수려하니 더더욱 끔찍이 아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처럼 아끼던 손자는 1832년, 20살을 갓 넘긴 나이로 요절하였고, 프란츠 2세도 3년 후인 1835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젊었을 때 고모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하려 하지 않고 내버려둔 죄책감 때문인지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고종사촌인 마리 테레즈 샬로트에게는 매우 잘 대해주었고, 자신의 동생 카를 대공과 결혼시키려 하였으나 마리 테레즈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외가보다는 부르봉 가로 돌아가길 택했고, 결국 사촌 앙굴렘 공작과 결혼했다.

[1]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2] 일명 루돌프 대공.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제자로 유명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7번은 이 자에게 헌정 되었는데, 때문에 대공(Archduke)라는 가명으로 더욱 유명하다. 1788년 ~ 1831년.[3] 다만 청나라황제들 문서를 들어가보면 알 수 있듯이, 청나라의 황제들은 몽골 제국대칸도 겸하고 있었다. 몽골 제국/역대 대칸 항목 참조. 그리고 몽골 제국의 "대칸"은 서양에서는 "Emperor"로 번역되었으니 황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홍타이지가 몽골을 복속시킨 이후로 청나라의 황제들은 모두 이중 황제로 볼 수 있다. 물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까지. 즉, 푸이가 이중 황제인지 아닌지 논함에 있어서 굳이 만주국 황제 칭호까지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왕위 요구자/아시아 항목에서는 합의에 따라 청나라 왕위 요구자가 삭제되기 전까지 청나라 왕위 요구자가 각각 '대청국 황제' 와 '대청국 대칸' 이라는 문단명으로 두 번이나 나와서 중국과 몽골 양쪽의 왕위 요구자로 모두 분류된 바 있다.[4] 사족이지만 청나라 멸망 이후 외몽골이 독립을 시도할 때 내세운 명분은 더이상 청나라 황제가 존재하지 않으니 자신들이 중국과 한 몸으로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외몽골 지역이 청나라가 쇠퇴하면서 사실상 반 독립상태가 되어버린 지역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몽골인들이 서구로부터 민족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5] 일찍 사망해서 황후는 되지 못했다. 이후 장가를 세 번이나 더 간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오이겐 공작은 프로이센 육군 대장(...)으로 7년 전쟁바이에른 계승 전쟁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싸운다. 참고로 언니는 러시아 파벨 1세의 황후인데 그녀의 언니를 황후로 추천한 사람 역시 프리드리히 대왕과 예카테리나 2세다. 거기다 이 사람의 외가 쪽으로는 외할아버지는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손자'''고 외할머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이다. 이모들 중 하나는 심지어 숙질혼을 해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남동생인 페르디난트 왕자와 결혼하는데 이 사이의 아들이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지휘관인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자다. 거기다가 남자 형제 중 넷이 군대에서 복무했는데 오빠 셋은 '''프로이센 육군 대장'''이고 동생 하나만 오스트리아군이다.[6] 프로이센은 1795년 바젤 평화조약으로 일찍 굴복 해줬기 때문에 영국과 동군연합 중인 하노버의 점유를 허가 받았고 하노버 선제후령도 사실상 없어진다.[7] 라인 강변 서안 영토를 조공으로 바치고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된 옛 주인 오스트리아령 역외 영토들을 포함하여 라인강 우안 8배의 대토보상을 받아서 가장 출세했다.[8] 뷔르템베르크, 작센, 바이에른은 역시 나폴레옹에 줄선 대가로 나폴레옹의 강요를 받아 프란츠 2세가 왕국으로 승격하는 데 동의한다. 프로이센처럼 제국에 왕국령을 여럿 승인한 것은 사실상 제국은 끝났다는 이야기. 그 영향으로 인해, 훗날 독일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 왕국조차도 뷔르템베르크, 작센, 바이에른을 공국 이하로 격하시키거나 자국 직할령으로 완전히 편입하지 못하고 그대로 왕국으로 놔뒀다.[9] 당장 30년 전쟁으로 인해 영방국가로 분리되었으며 4명의 세속제후(팔츠, 보헤미아, 작센, 브란덴부르크)와 갈등이 이어지고 이들은 독자적 세력을 구성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 공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을 형성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결국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 즉위 이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역임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대듦으로써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에서 이탈하였다.[10] 이전까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한데 합친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여러 영지/나라들의 군주를 겸하고 있었을 뿐이다(동군연합). 비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의 세력권을 오스트리아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정확한 용법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성립 이전에는 오스트리아가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대공국(현 오스트리아 공화국 니더외스터라이히 주,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영역과 대동소이)을 가리켰기 때문이다.[11] 허울뿐인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그냥 오스트리아에 흡수시킨다. 역시 현재 오스트리아령이다.[12] 보면 알겠지만 노골적으로 프란츠는 '빛', 나폴레옹은 '어둠'에 속하는 구도를 잡아 '악(어둠)의 화신'에게 대항하는 '선(빛)의 군주' 구도를 확립하고 있다. 이런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허용될 정도로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가 극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13] 프로이센은 작센, 바이에른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14]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본대로 차출된 포병대는 프랑스 본대와 함께 동귀어진하고 마크도날의 10군단에 배속된 병력은 탈영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렇게 전투 없이 짱박혀 있다만 왔는데도 추위, 질병 등의 비전투 손실이 커서 3만 3천 명 중 2만여 명만이 돌아왔다고 한다.[15] 신성로마제국이 그때까지 존속되었다면 페르디난트 5세가 된다. [16] 자기 며느리인 조피 대공비의 언니다. 또한 다르게 보자면 자기 사위의 큰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의 처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결혼하게 된게 나폴레옹 전쟁 당시 라인 동맹에 가담한 바이에른의 왕인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두 딸을 합스부르크에 시집보내고 한 딸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이다.[17] 프란츠의 '''고모 겸 두번째 장모'''이다. 아울러 루이 필리프 1세의 장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