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조지 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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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Charles George Gordon. 1833년 출생하여 1885년에 사망한 영국군인.

2. 생애


스코틀랜드계 군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포병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과 유럽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삶을 살았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기로 결심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소위로 임관한지 얼마 안 되어 크림 전쟁에 참가하였고 세바스토폴 전투에 참여하였다. 크림 전쟁이 끝난 이후 1860년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마침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영국의 개입으로 반란 평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태평천국의 난 당시 상승군을 지휘해 태평천국 군대를 깨부쉈다.
당시 상승군은 서양인 해군 출신 용병들이 주력이었던 양창대라는 이름에서 상승군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양창대 시절부터 지휘하던 1대 지휘관이자 미 해군 장교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가 자계 전투에서 전사하자 부관이자 남부연합 지지자 헨리 안드레스 버제빈이 상승군을 인수하였다. 그러나 고용주였던 상군의 이홍장 및 상하이 현성과의 계약을 착실히 잘 수행하며 태평천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워드와는 다르게 버제빈은 대놓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등의 수익성 전쟁 범죄에 몰두하던 쓰레기였다. 이때문에 이를 저지하려는 이홍장과의 불화로 인해 상하이에서 추방되었으며 후임으로 고든이 들어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진행하였다.
소주(쑤저우) 공격 당시 이홍장과 충돌한 일도 있었다. 고든은 소주를 지키던 태평천국군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신원을 보장하는 대가로 무혈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고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홍장은 당시 청나라의 불관용 원칙에 의거해서, 항복한 태평청국군을 모두 죽여버린 것. 당연히 고든은 이홍장을 죽이겠다며 크게 분노해서 한동안 이홍장과 매우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어쨋든 아편전쟁과 더불어 중국 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무력 충돌을 잠재운 업적으로 청과 영국 양쪽에서 칭찬을 받고 "차이니즈 고든"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청에서는 과등(戈登, gē dēng)이라 불렸다. 이 공로로 고든은 청나라 황제한테 상을 받고 영국군에서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고든이 청에 있을때 청나라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과 초상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동치제가 참전 장군들에게 선물을 보내자 이때 다음과 같이 소주 학살을 언급하며 선물을 거부했다.

“소장 고든은 분에 넘치는 황제 폐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주시(蘇州市) 탈환후 발생한 불미한 일로 황제 폐하의 표창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간청하옵건데 성은을 베푸시어 저로 하여금 폐하의 하사품을 받지 않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후에는 잠시 본국으로 귀국했다가 이집트 총독, 수단 지사를 거쳐 수단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수단과 접해 있었던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는 등 시원찮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에는 벨기에, 콩고 자유국, 인도 제국, 청나라 등에서 일했다.
1884년에 영국은 이집트에 압력을 넣어 수단을 손에 넣었으며 이집트군의 철수를 감독하기 위해 고든을 다시 수단 하르툼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당시 수단은 마흐디를 자처하는 무함마드 아흐마드 빈 압드 알라(1844~1885)가 이끄는 이슬람 원리주의 반란세력이 영국군을 격파하는 등 통치에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었고, 고든 역시 그들에 맞서다가 포위되었다. 그는 이상주의자로써 무슬림기독교도 사이의 우호 증진과 수단 노예제의 폐지를 기도했으나, 현실은 영국의 과도한 식민 지배로 인한 현지인들의 비협조가 기다리고 있었고, 신정 국가 건설을 원하며 영국-이집트 군과 싸우던 마흐디군에게 전사했다. 영국은 구원군을 보냈지만 고든은 구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의 부대와 함께 마흐디군에 전멸했다.
정작, 마흐디 본인은 고든을 매우 좋게 보아서 고든에게 타협의 여지를 주었다. 아예 무슬림으로 개종하라고 몇번이나 고든을 설득하게끔 대리인을 보낼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무엄하게 요구해서 기분이 상했나?" 하여 다음에는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흐디 신민들은 그대를 아주 찢어죽일 정도로 미워하니 나로서도 지켜드릴 수 없소, 칼 같이 무슬림이 되라는 게 아니오. 아니, 하다못해 적당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대충 둘러대면 나중에 영국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소. 거기서 다시 기독교인이 되던지 그건 당신 자유요." 이런 편지까지 보냈다! 이게 참 놀라운 게 마흐디는 수단에서 잡힌 기독교인에게 '너 개종할래, 안할래?' 한마디 하고 안하면 즉각 참수! 이렇게 하던 인물이다. 이렇게까지 편지로 여럿 보내면서 설득했다는건 그만큼 고든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 이에 고든은 "마흐디 당신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잠깐이라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소. 반대로 마흐디 당신이 거꾸로 되어 내가 잠깐이라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척 하라고 하면 하실 수 있으시오?" 라며 거절한다고 답변했다. 마흐디는 부하들이 결국 고든을 죽여서 목을 잘라오자 왜 죽였냐면서 애석해했다. 그리고 고든이 죽고 몇 달도 안돼 마흐디도 발진티푸스로 41세로 요절하고 만다.
그의 죽음에 빡친 영국이집트는 1898년 끝내 마흐디군을 박살내버리고 마흐디의 무덤까지 부숴버렸다. 최종 계급은 소장. 자세한 것은 파쇼다 사건 참고할 것.

3. 여담


고든은 고결한 인품과 이상주의적인 모습으로 영국 국내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독실한 성공회 기독교인임에도, 중국인, 이슬람이나 비기독교 현지인을 잘 대해주어 그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는 리더쉽마저 갖추고 있었다. 2차 아편전쟁에 참전했을때 동료들과 프랑스군의 원명원 약탈과 방화를 야만스럽다고 비판했다. 태평청국의 난 당시에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모범적인 행적을 보여주었다. 수단 총독으로 재직할 때에는 현지인들처럼 페스를 쓰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현지군 부하들처럼 입고 페스를 쓴 채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마흐디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일 당시, 부하들 7천여명이 무슬림 교도였던 이집트 및 수단인임에도 거의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그래서 이후 미국의 유명 개신교 목사인 빌리 그레이엄이 '찰스 조지 고든은 기독교 정신을 지킨 순교자'라고 칭송하자, 고든의 후손은 조상님을 무리하게 순교자로 포장하는 건 오히려 모욕하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그의 전사는 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글래드스턴 2대 내각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