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토바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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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만토바와 사비오네타

'''국가·위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8년
'''등재기준'''

1. 개요
2. 역사
2.1. 중세
2.1.1. 롬바르디아 동맹
2.1.2. 전성기
2.1.2.1. 만토바 공국
2.1.3. 만토바 계승전쟁
2.2.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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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tua

1. 개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도시. 가르다 호에서 발원하여 포 강의 하류로 흘러드는 민치오 강의 만곡부에 형성된 반도 지형에 세워진 도시이다. 삼면의 강물이 호수처럼 모여있어 천혜의 해자가 되어주는 요새 지형이며, 따라서 포강 하류의 평야를 통제할 군사 기지로 종종 이용되었다. 베로나에서 남쪽으로 25km, 모데나에서 북쪽으로 35km, 크레모나에서 동쪽으로 40km, 파르마에서는 동북쪽으로 40km 떨어져 있다. 밀라노에서는 동쪽으로 130km 떨어져 있고, 현재 만토바의 인구는 4만 9천명이다.
만토바, 또는 만투아는 로마 시대의 작가 베르길리우스의 탄생지이자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리골레토'''의 배경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16세기부터 도시는 만토바 공국이 세워져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하며 동시에 이탈리아 북부의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치러진 만토바 계승전쟁 (1628 ~ 1631년)에서 곤차가 가문이 몰락하며 쇠퇴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 이탈리아 경영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리소르지멘토의 중심으로 바뀌어 통일에 기여하였다.
그 외에도 성당이 있으며, 이름은 바로 만토바 대성당이 가장 유명하다. 해당 장소는 스타 펫 트래블 in ITALY에서도 소개되었던 내력이 있다.

2. 역사


만토바는 기원전 6세기에 에트루리아 인의 도시로 처음 형성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에트루리아의 신인 만투스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갈리아 인이 거주하던 도시는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편입되었다. 한세기 반이 지난 후인 기원전 70년에 만토바에서는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때에 만토로 불리던 도시는 병사들의 은퇴 도시로 개조되었다.

2.1. 중세


로마와 서로마, 그리고 동로마 시대를 거친 도시는 601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점령되었다. 774년에 프랑크 제국에 점령된 후인 804년에 만토바에는 가톨릭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이후 제국이 해체되며 843년부터 중프랑크 왕국, 855년부터 이탈리아 왕국을 거친 북부 이탈리아는 962년에 독일의 왕 오토 1세에게 정복된 후, 그가 황제가 됨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10세기 경부터 예수 핏자국 유적 때문에 순례객이 방문하기 시작, 도시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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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7년부터 만토바는 카노사 가문에 속하게 되었는데, 가문의 보니파시오 3세가 1027년에 토스카나 백작[1]이 되며 토스카나 백국에 포함되었다. 이후 보니파시오의 딸이자 카노사의 굴욕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마틸다 백작의 시대에 만토바에는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예배당인 로톤다 디 산 로렌초가 지어졌다. 1090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에게 점령된 만토바는, 1113년애 토스카나 백작 마틸다의 군대에 의해 회복되었고, 1115년에 그녀가 죽자 자유도시, 즉 코뮌이 되었다. 1150년경부터 만토바는 자체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2.1.1. 롬바르디아 동맹


1167년, 만토바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라드리히 1세에 맞서기 위해 동맹에 가입하였다. 1198년에는 포데스타 (시장) 알베르토 피텐티노의 지시로 육지와 연결된 면에 운하를 파서 시가지를 섬으로 만들어 외세의 침공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다만 19세기 경에 시가지가 확대되며 일부는 메워졌으며 현재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1215년부터 강경 구엘프 (교황파)의 람베르티노 부발렐리가 집권하였는데, 이후 기벨린과의 전쟁과 함께 만토바는 혼란에 휩싸였다.

2.1.2. 전성기


1273년에 피나몬테 보나콜시가 만토바 시민들로부터 대장군 호칭을 받으며 혼란을 끝내고 집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 50여년간 도시는 보나콜시 가문이 지배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도시는 번영하였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세워졌다. 1328년 8월 16일, 관료 출신의 루이지 곤차가는 쿠데타를 일으켜 리날도 보나콜시를 내쫓고 곤차가 가문의 포데스트리아 (집권)를 시작하였다. 이후 5개의 문을 가진 새로운 성벽이 세워졌고, 2대 통치자인 루드비코 곤차가는 민중들의 장군으로 선출되었다.

루드비코 3세 곤차가 (집권 1444 ~ 1478년)
곤차가 가문은 1433년에 독일의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1만 2천 플로린 금화를 바쳐 후작의 작위를 얻었고, 1530년에 공작의 작위를 받아 만토바 공국으로 격상된다. 그 과정에서는 15세기 중반의 포데스타 루드비코 3세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친척들을 제거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였으며, 예술을 후원하여 만토바를 인문학과 르네상스의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시켰다. 1469년에는 교황 피우스 2세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결의하기 위해 만토바 공의회를 열기도 하였다.

2.1.2.1. 만토바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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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의 만토바

팔라초 테,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1530년, 페드리코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부터 공국 작위를 받았다. 이듬해에 곤차가 가문은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 서북부의 몽페라토의 작위[2]까지 얻는다. 그의 시대에 지어진 테 궁전은 공작의 거처가 되었는데, 이는 1624년에 파보리타 궁전으로 이전될 때까지 이어진다.
비첸초 1세
16세기 중반 ~ 18세기 초의 만토바는 4만 인구를 가진, 평화로운 도시로서 번영하였다.

2.1.3. 만토바 계승전쟁


1612년 9월에 만토바 & 몬페라토 공작인 프란체스코 4세는 공위 계승 후 1년도 안되어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에게는 딸 하나와 두 남동생이 있었는데, 동생들은 추기경이어서 결혼도 못하였고 계승권이 없었으나 이어서 공작이 되었다. 두번째 동생인 비첸조 2세는 병약하였고 1627년 12월 26일에 33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같은 날에 프랑스 중부 네베르의 귀족 샤를은 프란시스 4세의 유일한 혈육이자 공국의 상속녀가 된 마리아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만토바 공작위는 프랑스 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를 곱게 보고있을 합스부르크 측이 아니었다.
그리고 구아스탈라 공작인 페란테 2세는 곤차가의 후손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갖추었다. 프랑스가 먼저 움직여 1629년 초에 북부 이탈리아를 휩쓸었고, 이에 오스트리아도 그해 말에 란츠크네히트가 주력이 된 군대를 파견, 만토바를 포위하였는데, 동시에 전연병까지 겹친 도시는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한 채로 항복하였고 약탈당하였다. 비록 합스부르크 측은 승리했지만 독일에서의 전황이 안좋아지자 1631년의 레겐스부르크 조약으로 네베르의 공위 계승을 인정하였다.

2.2. 근대


하지만 곤차가-네베르 가문의 지배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는데, 그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지하였다가 1708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점령된 후, 아예 오스트리아 합병된 것이다. 몽페하토의 영토는 사보이 공국에게 할양되었다. 1779년에는 고문물 박물관이 세워졌으며, 1786년부터 1791년까지 만토바는 말라노 공국에 속하였다가 1796년 6월에 나폴레옹 군에 포위되었다. 1797년 2월, 프랑스 군에 함락된 도시는 1799년에 재차 오스트리아 령이 되었다가, 1801년에 재차 프랑스 령이 되었다가 1814년에 오스트리아가 회복하였다.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리소르지멘토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재 만토바는 주변의 비옥한 농업지대의 중심지로서 농산물의 집산, 가공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최근에는 화학공업을 비롯한 중공업도 활발해졌다.
[1] 당시에는 변경백 (마르크)[2] 1574년부터 공국, 이후 사보이아 공국에게 흡수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