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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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탈리아 왕국은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855년 프륌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된 왕국이다. 이후 962년에 건국된 신성 로마 제국에 통합된다.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된 후에도 이탈리아 왕국은 제국의 하위 왕국으로 존속된다. 프랑스 혁명 전쟁 후 1801년 뤼네빌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한다.
2. 역사
774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한 이래로 이탈리아 반도의 중·북부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에서 중프랑크 왕국이 분리되어 로타리우스 1세가 물려받았고,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하자 프륌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에서 다시 이탈리아 왕국이 분리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크족 군주들의 왕위 쟁탈전으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교황과 교황령의 존재 때문에 이탈리아 왕국은 곧 신성 로마 제위의 상징이 되었고, 외세건 내세건 상관없이 모두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위를 노렸다. 결국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면서 962년부터 이탈리아 왕국은 오토 1세의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왕국령으로서 계속 존속된다.
2.1.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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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로타리우스 1세는 중프랑크 왕국을 물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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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년 중프랑크 왕국의 로타리우스 1세가 죽자 같은 해에 프륌 조약이 체결되어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리우스 1세의 아들들에게 분할된다. 장남 루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위를,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프로방스의 샤를은 부르군트 왕국을 물려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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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년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은 로타르 2세가 죽고, 같은 해 부르군트 왕국을 물려받은 프로방스의 샤를도 죽게 된다. 로타르 2세의 삼촌들인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와 서프랑크 국왕 샤를 2세는 870년 메르센에서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나눠 가지고, 프로방스의 샤를의 영지 부르군트 왕국은 루도비코 2세가 차지했다가 샤를 2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메르센 조약은 중세 유럽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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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왕 루도비코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루트비히 2세의 장남 카를만이 이탈리아 왕국을 물려받았으나 샤를 2세가 이탈리아를 정복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간의 분쟁이 가시화되고 형인 루트비히 2세가 죽자 샤를 2세는 황제라는 명분으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을 노골적으로 탐내었다. 루트비히 2세의 차남 루트비히 3세는 이를 저지하였고 샤를 2세는 병사한다. 샤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가 신성 로마 제위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이탈리아로 가기를 망설였고 카를만은 상속을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차지했으나 교황이 황제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둘은 비슷한 시기에 죽게 되었다. 카를만은 동프랑크의 영지들과 이탈리아, 제위를 동생 카를 3세에게 물려준다. 그런 다음 카를 3세는 서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한 샤를 3세가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국왕직을 대리하게 되므로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합하였으나 1년 만에 사망하면서 다시 분열된다.
2.2. 베렝가리오 1세와 귀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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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년 카를 3세가 죽은 후 리베몽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된다.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가 새 국왕이 되는데, 경쟁자인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 때문에 왕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서프랑크 왕위 획득에 실패한 귀도 3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군사를 모아 신성 로마 제위를 노린다. 귀도 3세는 전투를 벌여 베렝가리오 1세를 물리치고 889년 이탈리아의 단독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891년 교황 스테파노 5세는 귀도 3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한다.
2.3. 귀도 3세와 아르눌프
스테파노 5세가 죽은 뒤 포르모소가 교황으로 새로 즉위하였고, 귀도 3세는 포르모소에게 자기 아들 람베르토를 공동 황제로 임명시킨다. 포르모소는 귀도 3세를 불신하여 그에 대항할 세력을 찾았고,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에게 귀도 3세를 타도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라고 제안한다. 아르눌프는 베렝가리오 1세에게 군사들을 보내고, 아르눌프와 베렝가리오 1세의 연합군은 베르가모에서 귀도 3세를 물리친다. 894년 아르눌프는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고, 베렝가리오 1세는 아르눌프의 봉신이 된다.
부대에 전염병이 돌고 귀도 3세도 갑자기 죽자 아르눌프는 더 이상의 이탈리아 진군을 멈춘다. 한편 람베르토는 교황 포르모소에게 신성 로마 제위를 인정받기 위해 자기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로마를 방문하는데, 이미 아르눌프의 편에 선 포르모소는 당연히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이에 람베르토는 포르모소를 투옥한다. 이런 일이 생기자 교황 대사가 아르눌프에게 교황 구출 지원을 간청하였고 아르눌프는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한다. 이탈리아에 있던 군주들과 귀족들은 람베르토에게 등을 뒤돌았고 아르눌프를 지지하였고, 아르눌프는 갇혀있던 교황 포르모소를 구출한다.
896년 교황 포르모소는 아르눌프에게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한다. 아르눌프는 아젤트루데를 쫓으려다 병에 걸리고, 서자 라톨도를 이탈리아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를 대신 통치하게 한 뒤 동프랑크로 돌아간다.
2.4. 베렝가리오 1세와 람베르토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서 떠나고 교황 포르모소도 죽자 람베르토는 다시 이탈리아에 실권을 잡기 시작하고, 베렝가리오 1세 역시 아르눌프의 그늘에서 벗어나 권력을 잡는다. 람베르토와 베렝가리오 1세는 아르눌프가 임명한 관리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부왕 라톨도는 동프랑크로 도망친다. 새 교황으로 즉위한 스테파노 6세는 처음에 아르눌프를 지지했지만 결국 람베르토를 지원하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에는 이 둘이 군림하게 된다. 베렝가리오 1세는 아다강과 포강 사이 일대를, 람베르토는 나머지를 가지기로 하고 베르가모는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람베르토는 또한 베렝가리오 1세의 딸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하여 정략결혼 동맹을 맺기를 시도한다.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젤트루데와 함께 다시 로마를 방문한다.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는 자신들에 대항했던 포르모소에게 보복을 가하고자 하였고 이는 교회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판으로 이어진다. 람베르토의 후원으로 교황 자리에 오른 스테파노 6세는 람베르토의 복수극을 실행해줘야 했는데, 포르모소의 시신은 무덤에서 꺼내져 피고석에 앉혀졌고 그가 행한 모든 사제 서품은 무효로 만들었으며 그가 교황이 되기 전 치죄받은 모든 죄목이 재차 유죄로 판결되었다. 판결에 따라 포르모소의 시체에서 교황의 법복을 벗겼고 오른손 손가락 세 개가 베어진 후 테베레강에 버려진다. 그러나 시체 시노드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평민이 스테파노 6세와 람베르토가 교황의 시신을 모욕했다며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스테파노 6세는 이 반란으로 퇴위당한다.
람베르토는 라벤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자기를 적법한 신성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를 무효로 해달라 하였다. 새로 즉위한 교황 요한 9세는 의회에서 람베르토의 뜻에 거슬러 포르모소의 신원을 회복시키며 시체 시노드의 판결을 뒤집는다. 의회의 성직자들은 스테파노 6세의 재판과 성직자 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교령들을 파기하고, 스테파노 6세에게 폐위당한 성직자들을 복권시킨다.
람베르토는 정책과 제도 제정에 힘썼다. 람베르토는 아버지 귀도 3세의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Francorum)'이라는 정책과 선대 프랑크 국왕들의 법령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람베르토는 로타리우스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도 부활시켰는데, 교황 요한 9세는 로마 헌장을 다시 승인하여 교황 선출 때 황제의 사절을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확정하였다. 람베르토는 아버지 귀도 3세의 정책을 명문화한 '우티넨시스 로마법(Lex Romana Utinensis)'을 제정하였다.
한편, 베렝가리오 1세는 협정을 깨고 수도 파비아를 점거하지만 람베르토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다. 그러던 중 람베르토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죽자 베렝가리오 1세는 파비아를 확보하고 이탈리아의 단독 국왕이 된다.
2.5. 베렝가리오 1세와 루이 3세
당시 서유럽은 마자르족이 대거 이주하던 시대였다. 마자르족이 이탈리아를 침략하자 베렝가리오 1세는 군사들을 대규모로 모아 전투를 벌이는데 결국 마자르족에게 패한다. 베렝가리오 1세의 능력을 의심한 이탈리아 귀족들은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의 국왕이자 카롤루스 가문 직계인 루이 3세(프로방스의 루이)에게 베렝가리오 1세를 몰아내고 대신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 요청한다. 루이 3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베렝가리오 1세를 물리치고 900년에 이탈리아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루이 3세는 로마를 순례하고 교황 베네딕토 4세에게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받는다. 하지만 루이 3세 역시 마자르족들을 막는 데에는 무능력하였고 역시 귀족들에게 버림받는다. 루이 3세에게 등을 돌린 귀족들은 다시 베렝가리오 1세를 지원하였고, 베렝가리오 1세는 루이 3세를 물리치고 프로방스로 내쫓으며 다시는 이탈리아에 오지 말라 경고한다.
그러다가 변덕스러운 이탈리아 귀족들은 또 베렝가리오 1세의 통치에 싫증이 나자 루이 3세에게 이탈리아를 정복하라고 다시 꼬드긴다. 루이 3세는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를 침범하여 다시 베렝가리오 1세를 몰아내고 파비아와 베로나를 확보한다. 하지만 베렝가리오 1세는 루이 3세를 생포하고 약속을 어긴 대가로 그의 양 눈을 뽑아버린다. 눈알 두 개와 함께 이탈리아 왕직과 신성 로마 제위를 잃어버리고 프로방스로 돌아온 루이 3세는 '맹인왕 루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그의 섭정으로 아를 백작 위그가 취임하여 프로방스의 실권을 잡는다.
2.6. 황제 베렝가리오 1세
915년 남이탈리아에서 무슬림들이 침략해오자 베렝가리오 1세는 가릴리아노강에서 사라센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요한 10세에게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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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가리오 1세는 황후였던 스폴레토의 베르틸라가 독살당하자 '안나'라는 여자와 재혼한다. 이 '안나'는 프로방스의 루이 3세와 동로마 제국의 레온 4세의 딸 안나 공주 사이에서 나온 딸이라는 설이 있다.
베렝가리오 1세가 마자르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자, 이에 불만이 생긴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고지 부르군트의 국왕 루돌프 2세에게 이탈리아의 국왕이 되어 달라 청했다. 게다가 베렝가리오 1세의 외손자인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훗날의 베렝가리오 2세)마저 루돌프 2세 편을 들며 외할아버지 베렝가리오 1세에 반역을 일으킨다.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와 루돌프 2세는 베렝가리오 1세를 물리치고 루돌프 2세는 사실상 이탈리아의 국왕이 된다. 이후 924년 베렝가리오 1세는 암살당한다.
2.7. 위그의 재위
얼마 되지 않아 이탈리아 귀족들은 루돌프 2세에게 등을 돌렸고,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의 섭정으로 있던 아를 백작 위그가 이탈리아를 통치해주기 바랐다. 926년 루돌프 2세의 장인인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2세가 루돌프 2세를 지원하려고 갔으나, 그는 노바라 근처에서 밀라노 대주교 람베르토[1] 의 심복에게 죽임을 당한다. 루돌프 2세는 자기 신변을 지키려 고지 부르군트로 돌아가고, 같은 해 위그는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다.
프로방스 국왕 루이 3세가 죽자 위그는 프로방스의 정통 국왕이 되려고 서프랑크 국왕 라울과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지만, 이미 프로방스는 루이 3세의 아들 샤를 콩스탕틴이 실권을 잡고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문에 위그는 이탈리아의 통치에만 집중하게 된다. 위그는 자기 아들 로타리오 2세를 차기 왕으로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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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2년 위그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옛 부인을 버리고 다시 결혼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새 신부가 창부정치로 유명한 로마 귀족 마로치아였다. 마로치아의 전 남편 중에 위그의 이부형제가 있어 가톨릭 교회법상 위그와 마로치아는 인척으로 돼버려서 결혼이 금지되었다. 위그는 포기하지 않고 인척 관계를 지워버리기 위해 자기 이부형제들을 제거하려 했다. 노력 끝에 위그는 마로치아와 결혼할 수 있게 되지만 이번에는 마로치아가 초혼하고 낳은 아들인 알베리코 2세가 로마의 폭도들을 선동해 새아버지 위그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로마를 점거한다. 위그는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마로치아는 투옥되어 937년 옥사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위그는 외교 문제에 집중한다. 933년 위그는 고지 부르군트의 루돌프 2세에게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를 양도한다. 이로써 고지와 저지 부르군트가 통일되고 아를 왕국이 세워진다. 대신 루돌프 2세는 자신의 이탈리아 왕위를 포기한다. 그리고 루돌프 2세는 딸 아델라이데를 위그의 아들 로타리오 2세에게 시집보낸다. 또 위그는 로마를 점거한 알베리코 2세와 타협하고, 알베리코 2세는 위그의 딸과 결혼하기까지 한다.
위그는 자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되는대로 관직이나 토지를 갖다주는 등 온갖 특혜를 주었는데, 이탈리아 귀족들의 눈에는 이것이 아니꼽게 보였다.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의 귀족들을 등에 업고 자기 처삼촌 위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다.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독일 왕국으로 피신하여 오토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된다. 945년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오토 1세로부터 군대를 얻어 다시 이탈리아로 복귀하여 위그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위그를 아를 왕국으로 추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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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는 947년 죽을 때까지 명목상으로 이탈리아 국왕 작위를 갖고 있었고, 그의 아들 로타리오 2세도 명목상 이탈리아의 국왕이었지만, 실권은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에게 있었다.
2.8. 베렝가리오 2세와 오토 1세
950년 로타리오 2세가 독살당하자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는 베렝가리오 2세로서 정식으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른다. 베렝가리오 2세는 아들 아달베르토를 공동 군주로 세운다. 그리고 전임 국왕 로타리오 2세의 부인 아델라이데를 자기 아들 아달베르토와 결혼시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아델라이데는 이에 질색한다. 베렝가리오 2세는 아델라이데를 투옥하지만, 한 백작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한 아델라이데는 독일 왕국의 오토 1세에게 보호를 간청한다. 아델라이데의 요청으로 951년 오토 1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한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베렝가리오 2세에게 등을 돌려 오토 1세를 지지하였고, 오토 1세는 이탈리아 국왕 대관식을 치르고 파비아에서 아델라이데와 결혼한다. 베렝가리오 2세와 아달베르토는 오토 1세의 봉신이 되어 조공을 바쳐야 했고 프리울리 변경백국을 양도해야 했다. 오토 1세는 프리울리 변경백국을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하사하고 그 영토는 베로나 변경백국이 된다.
960년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공격하자 오토 1세는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한다. 오토 1세는 파비아를 확보하여 베렝가리오 2세를 퇴위시키고, 로마까지 가서 962년 교황 요한 12세에게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된다. 이로써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사망부터 38년 만에 신성 로마 제위는 부활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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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요한 12세는 자신이 손수 대관해준 오토 1세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요한 12세는 마자르족들과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오토 1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촉구한다. 요한 12세는 코르시카에서 아달베르토와도 협상을 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963년 오토 1세는 로마로 돌아와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 레오 8세를 선출한다. 964년 베렝가리오 2세는 오토 1세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 966년 밤베르크에서 옥사한다.
아달베르토는 오토 1세가 다시 독일 왕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린다. 오토 1세가 돌아간 뒤 아달베르토는 파비아를 점거하려 하나,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3세가 이를 저지한다. 아달베르토는 파르마 인근에서 부르하르트 3세와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한다. 이탈리아 탈환에 실패하자 아달베르토는 동로마 제국과 기나긴 협상을 하였으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부르군트로 돌아가 은퇴하여 975년에 사망한다.
3. 역대 국왕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건국하기 이전의 국왕들을 정리한다. 교황에게 직접 황제 대관을 받은 모든 신성 로마 황제는 이전에 이탈리아 국왕 대관도 받았으므로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이다.
- 루도비코 2세 (황제)
- 샤를 2세 (황제)
- 카를만
- 카를 3세 (황제)
- 베렝가리오 1세 (1차 재위)
- 귀도 3세 (황제)
- 람베르토 (1차 재위, 황제)
- 아르눌프 (황제)
- 라톨도
- 베렝가리오 1세 (2차 재위, 황제)
- 람베르토 (2차 재위, 황제)
- 루이 3세 (황제)
- 루돌프 2세 (황제)
- 위그
- 로타리오 2세
- 베렝가리오 2세
- 아달베르토
4.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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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2년 독일 국왕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합병하여 독일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합쳐짐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즉,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원년부터 제국 내에 함께 있었다. 이후 1002년 보헤미아가, 1032년 아를 왕국이 합병되어 총 4개의 왕국령이 신성 로마 제국을 이루게 되었다. 단, 보헤미아 왕국은 독일 왕국에 속해있는 제후 왕국으로 공식적으론 '''독일 왕국'''(과 그 안에 속해있는 보헤미아 왕국)'''+아를 왕국+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인 체제였다.'''
대게 신성 로마 제국의 예비 황제인 독일왕은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치른 후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신성 로마 황제 대관을 받았다. 즉, 신성 로마 황제들은 자동으로 이탈리아 국왕을 겸직하였다.
신성 로마 황제들은 로마와 로마가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가톨릭 신앙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초기의 많은 황제가 이탈리아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는 교황과의 정치적·종교적 갈등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부 중세 황제는 로마에 집착하여 지나칠 정도로 이탈리아 경영에 골몰하였다.
카를 5세를 마지막으로 후의 신성 로마 황제들은 직접 교황에게 황제 대관식을 받는 것을 그만두면서 이탈리아 국왕 대관식도 하지 않게 되었지만, 북이탈리아는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었다.
5. 소멸
프랑스 혁명 전쟁 도중 신성 로마 제국의 주도 세력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1797년 프랑스 제1공화국과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은 북이탈리아의 종주권과 봉건적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폐지되었고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은 라인 강 이서(以西) 지역을 통째로 프랑스에 내줘야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다시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1년 뤼네빌 조약을 맺어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받아들였고, 이탈리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그리고 180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국왕 대관을 치르면서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이 건국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1806년 해체되었다.
[1] 이탈리아 국왕 람베르토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