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 3대 의안

 


1. 개요
2. 공통적인 원인
3. 정격안(梃擊案)
4. 홍환안(紅丸案)
5. 이궁안(移宮案)
6. 3대 의안의 영향
7. 같이보기


1. 개요


숭정제에게 망국의 군주라고 무지막지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태창(?)[1]

·천계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

'''강희제'''

明末三大疑案 / 晩明三大疑案
명나라 말기인 17세기 초반에 있었던 의심스러운 3개의 사건인 정격안(梃擊案), 홍환안(紅丸案), 이궁안(移宮案)을 한데 부르는 말로서 중국에서는 '''만명3대의안'''(晩明三大疑案)이라 한다. 줄여서 삼의안(三疑案), 삼대안(三大案), 삼안(三案)이라고도 한다. 명 멸망의 주요 원인중 하나였던 사건이다.

2. 공통적인 원인


이들 사건이 나타난 직접적인 배경은 모두 만력제 때 벌어진 막장 황위계승분쟁 때문이다.
황후 왕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던 만력제는 정귀비를 총애하여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 복왕 주상순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조정관료들은 정실소생의 아들이 있으면 적장자를 세우고, 없으면 장자를 세워야 하는 종법의 원칙에 따라 장자 주상락을 황태자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를 '국본의 쟁(國本之爭)' 또는 '쟁국본(爭國本)'이라고 하는데, 황태자 책봉을 둘러싼 정쟁은 1586년부터 16년 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1601년 만력제는 20살이 된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더 미루지 못하고 받아들였지만, 주상락을 냉대하여 황태자의 지위를 계속해서 불안하게 하였고, 이후의 모든 사건에 영향을 끼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를 알아보고 싶다면 만력제 항목을 참조하도록 하자. 어쨌든 이게 다 만력제 때문이다.

3. 정격안(梃擊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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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가 '''무위의 도'''로 '''요순시대'''를 재현한 '''태평스런''' 시절의 1615년 5월, 장차(張差)라는 남자가 몽둥이를 들고 황태자 주상락이 거주하던 자경궁에 난입하여 수문태감에게 각목 테러를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정격안이라고 한다.
장차는 문을 지키던 이감이라는 태감을 때려눕히고, 자경궁으로 뛰어들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보이는 대로 사람을 때렸다. 황태자를 보위하던 한본용이 다른 태감들과 함께 그를 사로잡아 동화문을 지키던 지휘 주웅에게 넘겼다. 장차의 심문은 도찰원 도어사 유정원이 맡았는데, 장차는 이름만을 밝히고 미친놈 마냥 횡설수설하였다. 형부로 넘겨진 뒤에도 미친 척하여, 형부 낭중 호사상과 악준성은 단순히 광증에서 비롯된 우연한 사건으로 장차의 처형으로 마무리지으려 하였는데...
그러나 형부에서 죄인들의 취조를 담당하던 제뇌주사 왕지채는 '''굶겨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장차에게서 정귀비의 측근인 환관 방보와 유성의 사주를 받아 자경궁에 난입하였다는 진술을 받았다. 장차는 계주에서 벌목과 사냥 등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방보와 유성에게 자경궁에서 한 태자를 죽이면 크게 보상하겠다는 말을 듣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왕지채가 이러한 사실을 상주하면서 조정은 정쟁에 휩싸였다. 동림당 관리들은 기회는 이때다 하며 정귀비가 자신의 아들인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주상락을 해치려 하였다며 정귀비와 그의 아버지 정국태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철저히 밝히지 않고 덮으려 했던 재상 방종철과 어사 유정원 등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비동림파 관리들은 왕지채가 공을 세우기 위해 사실을 날조한 것이라며, 사건은 단순히 장차의 광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격안을 놓고 당쟁이 격화되자 만력제는 장차, 방보, 유성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고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태자는 나라의 국본. 태자를 모해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발언까지 하였다. 정귀비와 그의 일가는 처벌은 면했지만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만력제는 정격안으로 복왕 주상순을 황태자로 삼으려는 계획을 포기하였고, 불안했던 주상락의 황태자 지위는 굳어졌다.
정격안에 대해서는 정귀비가 사주하여 벌어진 사건이라는 해석과 황태자 주상락이 자작나무를 태운 사건이라는 해석이 대립되어 나타난다. 황태자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해석은 몽둥이 하나를 들고 자경궁에 난입한 장차의 행동이 실제로 황태자에게 상해를 입히기에는 너무 무모했다는 점과 이 사건으로 가장 커다란 이익을 얻은 것이 황태자 주상락 자신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사실 이전의 주상락의 위상을 보더라도 이런 자작극을 해서라도 자신의 입지를 지킬 수 밖에 없다는게 아이러니.

4. 홍환안(紅丸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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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48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던 만력제가 죽자 만력제의 장자이자 황태자인 주상락이 연호를 태창으로 하여 태창제로 즉위하였다. 태창제는 즉위하자마자 후금의 침입을 막고 있던 국경의 병사들에게 100만냥의 은을 지급하고, 광세사의 파견을 중지시켜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황위에 오른 지 29일만에 도사 이가작(李可灼)이 선단이라며 바친 붉은 알약을 먹고 급사하였는데''', 이를 홍환안이라고 한다.
사실 원래부터 몸이 허약했던 태창제는 지나치게 향락을 즐긴 나머지 황위에 오르자마자 병이 들었다. 그는 황후인 곽씨 이외에도 9명의 후비와 선시를 두었는데, 정귀비는 태창제에게 8명의 미녀를 바쳐 그의 호색함을 더욱 부추겼다. 정귀비가 바친 미녀의 숫자는 <명사(明史)>에는 8명으로 되어 있지만, <명사기사본말>에는 4명으로 나타나 있다.
태창제의 병세는 사례감 병필태감 최문승이 준 약을 먹은 뒤에 더욱 심해졌는데, 하루에 34차례나 설사가 계속되어, 재상 방종철에게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하는 고명을 남길 지경에 이르렀다. 병에 시달리던 태창제는 홍려사승 이가작이 신선의 술법으로 만든 선약이라며 바친 붉은 알약을 먹고 병세가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태창제는 이가작을 충신이라고 칭찬하며 한 알을 더 먹었다. 그러나 황위에 오른 지 29일만인 다음날 새벽에 급사하였다.
태창제의 죽음을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다시 정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예부상서 손신행과 좌도어사 추원표 등의 동림당 관리들은 최문승과 이가작이 임금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인이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가작을 불러들인 방종철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공격하였다. 최문승이 정귀비의 측근이었으므로 동림당 사람들은 정귀비가 태창제를 독살하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비동림파 관리들은 황제의 죽음은 홍환과는 관계가 없다고 방종철을 옹호하였다.
방종철은 태창제가 선약을 먹고 변고를 당하면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걸로 예측해 미리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명나라 조정의 관례에 의하면 천자가 붕어하면 그 유칙의 초안을 내각보수가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방종철은 태창제가 선약과 이가작의 말을 맹신했기 때문에 붕어 했다는 내용을 유칙에 넣었다. 태창제의 장남 희종 주유교가 황위를 계승한 뒤에도 풍파가 가라앉지 않았다. 방종철은 고민 끝에 "종철이 설사 임금을 시해할 마음이 없었더라도 오히려 임금을 시해한 죄가 있사옵니다. 그가 임금을 시해했다는 소문을 피하고자 해도 실제로 시해와 관련되어 있음을 피하기 어렵사옵니다." 라는 상소문을 희종에게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고 관직을 버리고 도성을 떠나 은거하겠다는 소망을 밝혔고 희종은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방종철이 도성을 떠난 후 희종은 최문승과 이가작의 죄를 물어 결국 1622년, 최문승은 남경으로, 이가작은 변경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사건의 처리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태창제의 죽음을 둘러싼 정쟁은 1625년까지 지속되었다.

5. 이궁안(移宮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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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태창제가 홍환안으로 갑자기 죽은 뒤 천계제 주유교가 16살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태창제의 총애를 받던 이선시는 건청궁에 계속 머무르며 어린 황제를 손에 쥐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려 하였는데, 이를 우려한 좌광두, 양련 등의 동림당 관리들은 이선시가 건청궁에서 떠나도록 압박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정쟁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결국 이선시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를 이궁안이라고 한다.
주유교의 생모는 태창제의 선시였다가 재인이 된 왕씨이다. 하지만 태창제는 선시 이씨를 총애하여, 주유교도 어려서부터 이선시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 1620년, 태창제가 황위에 오르자 이선시는 황제가 거주하던 건청궁으로 함께 갔고, 태창제가 급사하자 환관 위충현과 결탁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태창제가 죽은 뒤 양련 등 조정의 대신들은 건청궁으로 가서 주유교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이선시는 이를 방해하였다. 대신들은 황실의 예법에 따라 이선시에게 건청궁에서 나와 인수전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선시는 자신이 황태후가 되어 건청궁에 머무르며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이선시가 건청궁을 떠나지 않자, 좌광두, 양련 등의 동림당 관리들은 이선시가 다른 궁으로 옮겨가도록 강하게 압박하였다. 결국 이선시가 건청궁에서 나와 인수전으로 이궁하여 수렴청정을 하려던 이선시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이선시가 세란전으로 옮긴 후 며칠되지 않아서, 세란궁에 불이 나서, 겨우 이선시 모녀의 목숨을 구해내게 된다. 이궁에 반대하던 관리들은 유언비어[2]를 퍼뜨린다. 이에 천계제는 양련등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이런 소문을 반박하고 이선시와 동생은 잘 돌볼 것이며, 이것이 황부의 뜻을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을 알려 대응한다. 그리고 배후인물로 지목된 정귀비는 '''자결한다.'''
정황이 다소 복잡한데, 세란궁에 불을 질러 이선시를 태워 죽이려 하였다고 의심을 받았고, 홍환안에 대한 의심까지 겹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환안과 이궁안은 '''사실상 연속해서 일어난 사건'''이였다.
여기까지가 이궁안이다. 그러나 이선시는 이후 환관 위충현이 객씨와 득세할 때, 다시 비로 오르며 복귀하게 된다.

6. 3대 의안의 영향


안 그래도 나라가 막장이였던 상황에서 이러한 의안들이 터지면서 황실과 조정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고, 안 그래도 후금이라는 강력한 적수가 있어서 이를 전력으로 대처해도 모자랄 판에[3] 황실 내부에서 막장 드라마를 찍어댔으니 나라가 남아날 리가 없다.
더욱이 이후 이러한 난국을 대처해야 할 천계제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목수질만 하다가 얼마 후 숭정제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이래서 천계제가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숭정제의 교육에는 힘썼지만 당장 본인이 문맹이라도 나름대로 노력해서 정치를 할 수 있었음에도 그 가능성을 부정하며 놀기만 했다는 점. 적어도 제위기간 동안에 숭정제가 국가 중흥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해 주기라도 했다면 숭정제 입장에서도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숭정제의 교육 또한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7. 같이보기


[1] 태창제는 후술하듯 즉위 후 29일만에 죽었기 때문에 책임질 것도 없다. 일찍 죽은 걸 죄라고 할 수는 없다.[2] "이선시는 목을 매고, 그 딸은 우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면서 "팔공주가 우물로 뛰어 들었지만 누가 슬퍼해 줄 것인가, 미망인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내용이다.[3] 물론 누르하치 치세의 후금은 그렇게까지 강대하지는 않았다. 누르하치 본인이 변경에서 원숭환과 싸우며 산해관 공략 중 죽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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