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4대 암군
1. 개요
1. 개요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최악의 황제 4명.''' 꽃보다 남자가 유행할 때, 디시인사이드의 역사 갤러리[1] 에서 이들을 '''명나라 F4'''라는 별명을 만들어 부르던 것에서 시작했다.
이들의 재위기간은 명나라 존재 기간의 절반 가까운 '''117년'''이기 때문에 그냥 '명나라 후반기'라면 거의 이들의 시대다. 다른 12명의 황제는 총합 160년. 무종 즉위년부터 멸망까지로 따지면 139년으로, 절반을 넘는다. 당연히 나라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다만 이들중 정덕제의 경우는 황권 강화 등 적어도 확실한 목적들이 있었기에 의도는 좋았다고 평가되고 천계제는 할아버지인 만력제가 아버지가 장남이긴 하나 천한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다고 싫어해 태자 책봉을 계속 늦추었기에 타 황제들에 비해 배움이 짧았던 것과[2] 사실상 위충현의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던 점을 들어 이 둘은 다른 둘에 비해선 이 사유들에 의해 실드를 쳐주기도 한다. 다른 둘이 해악이든 재임기간이든 비교도 안된다는게 문제. 특히 만력제의 경우 청나라 때 집필한 명사에서 아예 '명나라는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 망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
2. 그리고 명나라는 멸망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정덕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 문서를 참고하자.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위치한 융경제, 태창제와 숭정제 문서도 읽어보면 '''명은 어떻게 망국이 되었나''' 잘 알 수 있다.
폭군이라기엔 많이 귀여운 플레이보이 정덕제, 사이비 종교에 빠진 가정제, 무위의 도를 실천하는 만력제, 마에스트로 천계제 등 캐릭터도 참 가지각색이다. 그 사이에 낀 명말 3대 의안 같은 막장 드라마 또한 쏠쏠하다. 물론 그 밑에서 일하는 신하들은 복장터지고 당시 백성들은 말 그대로 '''헬게이트 오픈.''' 다만 만력제의 경우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원조때문에 종종 "중국입장에서나 암군이지 조선 입장에서는 도움이 된 황제이지 않느냐?"라는 옹호론이 나오거나 '암군이었지만 조선을 사랑했던 중국황제' 정도로 미화하기도 하는데, 사실 조선시대 이후 현대에 들어서까지 만력제를 칭송할 필요는 없는 것이, 임진왜란 원조에 묻혀서 그렇지 이 인간은 그저 놀고먹기만 한 황제가 아니라 재미로 궁녀, 환관들을 가죽채찍으로 때려죽이던 싸이코패스였다. 중국 입장에서나 암군이지 조선입장에서는 도움이 된 황제라는 옹호론은 종종 인도에서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유대인들 입장에서나 학살자고 인도입장에서는 인도의 원수인 영국과 싸워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옹호하는 찬드라 보스 지지자들과 다를 바 없다. 애초에 당대 조선인들도 만력제에게 도움받은것에 고마워한것과는 별개로 만력제가 막장황제인점은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3]
다만 이런 황제들이 연임하는 가운데에도 주변에 대대적으로 영향력을 떨치기도 했고 획기적인 기술적 혁신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점으로 '''명나라의 관료체계가 얼마나 고도화했나를 증명하는 예시'''로도 쓴다. 로마 제국이 '유능한 황제가 나온 덕분에 막장인 사태가 수습 가능했다'면 반대로 명나라는 '국가체제를 잘 짠 덕분에 대놓고 막장인 황제를 끌어안고도 버텨냈다'인 셈.[4] 애초에 저 막장들이 연임하는 와중에도 80년은 버틴 것도, 앞선 80년간 홍무제를 시작으로 한 명군 라인들이 나라의 초석을 엄청나게 잘 닦아놨기 때문이다. 돈으로 비유하면 선덕제까지 쌓은 적금을 정덕제 때부터 까먹다가 결국 천계제 때 다 날린 셈.그 결과 명나라는 밖으로는 청나라의 침공, 안으로는 농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다.
명나라의 이름을 떨친 홍무제~선덕제로 이어지는 명 초반 명군라인이 쌓은 위엄을 단 80년만에 까먹었단 점에서 다른 의미로 대단한 수준인데 아이러니한건 이후 중국의 대세가 된 청나라도 누르하치~건륭제로 이어지는 명군라인으로 기반을 닦았다가 마찬가지로 도광제를 시작으로 한 암군의 연임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것. 물론 청나라는 내외적인 상황상 답이 없는 명 4대 암군보단 실드쳐줄 사유가 많다.[5]
[1] 당연히 현재 처럼 일뽕에 물들기 이전 시절의 역갤이다.[2] 문맹 수준이었다. '''일국의 황제가!'''[3] "이 무렵 황제는 이미 정무를 살피지 않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하였으므로, 군용(軍用)이 계속되지 못한 데다가 제군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전하자, 유 도독은 스스로 목매어 죽은 터였다(時皇帝已倦勤, 閹豎用事, 軍興不繼, 又諸軍輕進失利, 都督自縊死)."- 조증(詔贈) 요동백(遼東伯) 김 장군(金將軍) 묘비(廟碑)[4] 물론 이 두나라는 시대가 천 년 이상 차이나는데다가 주변의 상황이나 멸망의 이유 등도 달라서 직접적으로 비교하긴 힘들다.[5] 정확히는 청 몰락의 시작은 건륭제 때였는데 이것도 건륭제 말기에 '''너무 오랜 재임기간'''이란 점이 터지면서 여러 문제가 연달아 터진 것에 가깝고 니오후루 허션이 엄청나게 해먹은 것도 한 몫 한다. 거기에 이 시기 청나라는 서양의 접근으로 외부적으로 풍랑을 맞던 시기인 데다가 도광제는 무능할지언정 황제치곤 상당히 검소하게 살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동치제, 광서제는 천계제처럼 서태후의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고 함풍제도 여러 악재가 겹쳐 결과가 최악으로만 나와서 그렇지 나름대로 노력하려는 면은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청나라는 만주족, 몽골족,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등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등이 묶여있는 사실상의 동군연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명나라의 황제들과 통치 난이도부터 엄청난 차이가 난다. 오죽하면 역사학자들이 명나라의 명군들이 청나라에 오면 평범한 축에 들어가는 황제라고 할 정도. 즉위할 당시에 본인의 나이가 너무 어렸을 뿐더러 자신의 섭정을 맡은 아버지 순친왕과 양어머니 융유태후에게 서태후만큼의 강력한 권력과 카리스마가 없었고 청나라 자체도 사실상 멸망 직전에 가까웠던 선통제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