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부투 세세 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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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1930년 10월 14일 ~ 1997년 9월 7일)
1. 개요
콩고민주공화국의 독재자. 아프리카의 독재자 치고는 평범한 수준으로 학살이나 내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가 비판받는 주된 이유는 반대파 세력 탄압과 상상 이상이었던 그의 착복 규모에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930년 벨기에 식민지 였던 콩고의 리살라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조제프 데지레 모부투(Joseph-Désiré Mobutu)이다. 불어에 유창했고 벨기에 교육을 받아 식민지 군에서 복무했다. 벨기에 유학 이후 잠시 군을 그만두고 기자 생활을 하다가 콩고 독립 운동을 하던 파트리스 루뭄바와 친해저 그의 보좌관이 되었다.
콩고가 벨기에에서 독립한 뒤 군으로 복귀했고 이후 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콩고 독립의 3인방인 조제프 카사부부는 대통령이 되고 파트리스 루뭄바는 총리가 됐으며 모이스 촘베는 카탕가주 주지사가 된다. 허나 이 세명의 갈등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콩고 내전이 발발하자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모부투 세세 세코는 정치적 야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1년 1차 쿠데타를 일으켜 은인이자 친구였던 파트리스 루뭄바를 체포해 촘베에게 보내 처형하게 만든다. 이후 카사부부와 촘베와의 전쟁이 계속되자 유엔 평화유지군과 함께 1963년 촘베를 제압한다. 그러나 동년에 루뭄바의 측근이었던 피에르 물렐레가 서남부에서 크윌루 반란을 일으켜 그 반란이 동부의 심바 반란으로 확대되어, 내전이 지속되고 1964년 연립정권이 극심한 혼란속에 빠지자 망명했던 촘베가 다시 돌아와 총리가 된다. 촘베와 카사부부는 서로 정치투쟁에 빠저 콩고는 혼란이 계속 됐다.
2.2. 쿠데타
결국 모부투는 서방의 지원을 업고 1965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과 촘베를 모두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동년에 심바 반란을 제압하여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모부투는 자신의 정권안정을 위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모부투는 촘베를 지지하던 1967년 카탕가 반군과 콩고군에 편입된 백인용병의 반란으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해 카탕가 주의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반군 지도자들은 앙골라로 망명했다. 촘베는 망명지인 스페인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에 납치되어 알제리에 감금되었다가 사망했고 피에르 물렐레도 사면을 약속해서 유인한뒤 붙잡아 처형해버렸다.
1967년 모부투는 총리직을 폐지하고 다당제 역시 금지하여 1당 1인 독재 권력을 완성했다. 파트리스 루뭄바와 피에르 물렐레를 따르던 로랑 데지레 카빌라는 동부 산악지대 키부에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인민혁명당(People's Revolutionary Party, PRP)을 창당하고 구 심바 반군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웠다. 또 금광채굴과 상아무역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한편, 모부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카탕가의 구리광산 등 기업과 산업을 국유화하고, 자신의 당인 혁명대중운동(Mouvement Populaire de la Révolution, MPR)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했다. 반체제 세력과 반군들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모부투는 1970년 대선에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3. 독재와 부정부패
1971년 10월 모부투는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자이르(Zaire)로 변경하고, 수도 등 각 나라의 지명과 도시명들도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대표적으로, 이전까지는 레오폴드빌이었던 수도 이름을 킨샤사로 바꿨다. 하지만 모부투 축출 후 국명이 다시 원래 이름인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돌아갔던 것과는 달리 이 쪽은 다시 레오폴드빌로 되돌아가지 않고 현재까지 킨샤사로 쓰이고 있는 중. 뭐 그가 저질렀던 대학살을 보면 그놈의 이름을 지우는 것도 이해가 간다. 1972년 1월에는 자신의 이름도 조제프데지레 모부투에서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는데 이 뜻은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불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이 무렵 카탕가 주도 샤바 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부투는 1977년 대선에서도 단독 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해 앙골라의 지원을 받은 카탕가 반군이 샤바 주를 공격해오자 모부투는 프랑스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카탕가 반군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서방 진영은 냉전 기간에 모부투를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보루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재자 모부투는 국고와 천연자원을 착복해서 수십억 달러를 축재하면서 국가경제를 거덜나게 하는 등 도둑정치를 일삼았다. 확인된 횡령 금액은 40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킨 것으로 확인되며 이 금액은 콩고민주공화국 총외채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모부투는 개인 금광을 비롯하여 자이르에만 11개나 되는 궁전과 호화 요트, 서방세계에 별장 구입 등 많은 재산을 축재했으며 반군이 점령한 자이르 동부지역의 모부투 개인 금광 킬로 모토 광산은 8만3천km로 금 매장량이 1백여t이나 된다. 모부투의 고향인 그비돌리테에 건축한 대리석 궁전은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궁전 주변의 광활한 정원에는 사자와 코끼리들을 사육하고 있으며 국제공항이 이 안에 있을 정도였었다.
프랑스 리비에라(Riviera) 해안의 520만 달러짜리 빌라를 구입했을 때 그는 계약 후 대금을 달러로 지불할지 아니면 벨기에 프랑으로 지불할 지를 물었다고 하는데 이는 39배 정도로 차액의 차이가 엄청난 거였지만 모부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자이르의 모든 산업을 장악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중앙은행에 전화를 걸어 돈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긁어모은 재산을 스위스와 벨기에에 은닉했다고 훗날 재야인사들은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 스위스 레만호 부근에 8백만 스위스 프랑(SFr)의 별장을 구입했고 정기적으로 스위스를 드나들었으며 스위스에서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뒤에는 프랑스에 머무르기도 했다.
게다가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정치적 무능력, 행정의 실패로 인해 국가의 기간산업이나 농업, 교통 체계 등 국가 전체의 기반 시설이 무너졌음에도 모부투는 서방 강대국들의 지원으로 쿠데타 기도나 외부의 침입과 같은 자신의 정권에 대한 도전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임기 막판에는 모부투의 지지 기반이었던 군인들에게 봉급조차 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이는 군인들이 모부투를 배신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2.4. 몰락
냉전이 끝나자 서방 강대국들은 모부투에게 다당제와 권력배분 등을 요구하며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모부투는 1980년 대에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야당은 안 된다"'''며 그의 1당 독재를 공공연히 주장 했던 지라 계속해서 다당제 도입을 미루고 있었다. 자료 그러나 1990년 궁지에 몰린 모부투는 다당제 하의 선거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91년 모부투는 반대세력이 날로 확대되는 가운데 다당제 하의 선거를 실시하고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르완다의 종족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자이르로 유입되면서 그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모부투 정권은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패배하고 자이르로 도주하던 50만명의 투치족을 학살하면서 동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냉전 종식과 함께 서방 세계는 그에게 등을 돌렸고 모부투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전립선암까지 얻은 그는 괜히 르완다 내전에 개입했다가 투치와 후투족의 종족 분쟁 와중에서 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봉기한 폴 카가메와 함께 손 잡은 로랑 데지레 카빌라에게 패해 병든 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정확히는1996년 모부투가 스위스에서 암 치료를 받으려고 콩고에 없던 사이에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에게 콩고민주공화국의 대부분을 점령당했고, 1997년 5월 결국 반군의 정권 장악으로 축출 당했다. 그는 모로코에 머물면서 프랑스 등지로의 망명을 모색했으나 거부당한 뒤 대부분의 독재자처럼 쓸쓸하게 사망했다.
결국 그는 군병원에서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렇게 32년간 독재자로 군림하던 그는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에 쫓겨 지난 5월 모로코로 망명한 뒤 암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는데, 사망직전 그의 체중은 40kg도 되지 않았으며(모부투의 키가 187cm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하루 빨리 죽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말기암 대부분이 고통스럽지만, 전립선암은 그 중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럽다.[1]
3. 기타
- 표범 가죽 모자를 즐겨 썼으며 이로 인해 표범 가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표범가죽 모자를 쓴 걸어 다니는 은행'이었다.
- 월드컵을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자이르는 아프리카 대표로 출전했고, 유고 출신의 명장 비디니치가 팀을 맡았는데, 스코틀랜드, 유고, 브라질 등과 한 조에 속했다. 자이르가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대2로 패하고 유고와의 두 번째 경기를 앞뒀을 때 이 인간은 “유고 출신이 유고와의 경기에 감독을 맡아서는 안 된다! 현지에 단장으로 가 있는 체육부 장관이 감독을 맡도록 하라!”라면서 비디니치를 다짜고짜 짜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6개월 전 조 추첨 때 유고와의 경기가 확정된 것인데, 새삼스럽게 트집 잡은 것이다. 축구의 문외한인 장관이 벤치를 지킨 자이르는 유고에 0대9라는 희대의 스코어로 참패했다. 그러자 모부투는 장관직에서 그도 해임했는데, 이렇게 월드컵을 이용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장관을 날려버린 것이다.
- 개인 정원에서 재배한 과일로 직접 브랜디를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 모부투가 국가 권력을 이용한 국민침탈 행위를 가리켜서 도둑정치(kleptocracy)라는 영어가 생겼다.
- 아이러니한 현실이지만, 모부투가 물러난 뒤 그가 통치하던 시절과 비교를 불허하는 생지옥이 무려 3년 간이나 펼쳐지고 지금도 혼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새 통치자인 조제프 카빌라도 그 뒤를 이은 독재자에다가 무능하기까지 해서 콩고 국민들은 그나마 가난하기만 하던 모부투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한다는 거다. 물론 이후에도 내전은 계속됐지만 동부 지역에서의 공방으로 국한되었다는 점은 다르다. 다만 이건 현재가 더 최악이라 마지못해 이런 것일 뿐이지, 콩고에서도 이런 감정에 대하여 비웃는 시각도 당연히 많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5년 11월호 콩고강 관련 기사에서도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콩고 사람들에서도 어느 콩고 사람이 반론하듯 비웃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지옥이거늘, 그저 예전이 기억이 희미하니까 그때가 더 낫다고 하는 것 뿐이다.라는 말에 모부투가 낫다는 다른 콩고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반론하지 못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방한한 적이 있다. 자이르 공화국 대통령 방한.
- 모부투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콩고 사람들은 모부투의 본명도 부르지도 못하고 '모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1] 사실 말기암이 무서운 건 가망이 없어서가 아니다. 치료 가망이 없는 병은 넘쳐난다. 그보다는 죽기 직전의 삶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