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귀족(중국)

 

1. 개요
2. 주요 문벌귀족
2.1. 군성(郡姓)
2.2. 노성(虜姓)
2.3. 교성(僑姓)
2.4. 오성(吳姓)
2.5. 기타


1. 개요


門閥貴族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이후 형성된 중국의 지배 계층
이전부터 지방과 중앙에서 세력을 갖춘 호족들이 구품관인법으로 관직을 먹으면서 형성되었다. 다른 기득권집단과의 차이는 '''왕조는 망해도 세력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벌귀족 중에서 역사가 오래된 집안은 한나라부터 고위관료직에 오른 기록이 있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자신들의 최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당나라 시기조차도 '''황제도 벼락출세한 한미한 가문'''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문벌귀족의 격을 따지는 씨족지를 편성할 때마다 항상 당 황제들은 '''아니 왜 황실이 최고 등급 가문이 아닌 건데?''' 하고 따지고 들면서 억지를 부려야만 최고 가문 자리로 끼워넣어 줄 정도.
문벌귀족이 가장 세가 강했던 시기는 위진남북조시대이며 과거제가 시행된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도 위세가 계속되었으나, 당 말기 오대십국의 혼란으로 중앙 귀족들의 기반이 날아가면서 일단은 쇠퇴하게 된다. 다만 쇠퇴하면서도 과거제도에 적응한 집안은 옛 권리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송 시대 심지어는 명나라 시대까지도 관료가문으로 살아남아 통치층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런 집안들은 관료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주류를 형성하였다. 북송사마광서진의 황족이었던 하내 사마씨이고, 명나라 때의 왕양명은 낭야 왕씨이다.
사실상 중국 중세 역사의 대표 집단들. 구품관인법에 청담사상까지 곁들어진 조합을 지닌 문벌귀족들은 위진남북조, 수당 내내 중국의 통치계급으로 군림했다.[1]

2. 주요 문벌귀족


위진남북조시대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가격(家格)이 일정하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연고지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까지 모든 귀족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고 아래와 같다.

2.1. 군성(郡姓)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도 강북에 남아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귀족이다. 군성이라 부르는 까닭은 자기가 사는 군에서 확실하게 살기 때문이다. 북위부터 강북 귀족의 핵심이다. 산동귀족이나 하북귀족이 이들이다. 가장 순수한 한족 문화 전통을 대표한다고 자처하였다. 북위에서 귀족의 가격을 정하면서 6등급을 매겼는데 3대 이상 삼공을 지냈으면 고량(膏梁), 상서령이나 상서복야를 지냈으면 화유(華腴), 상서나 영군이나 호군 이상의 벼슬을 한 집안을 갑성(甲姓), 구경이나 방백을 지냈으면 을성(乙姓), 산기상시나 태중대부를 맡았으면 병성(丙姓), 이부낭관을 맡았으면 정성(丁姓)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450년, 최호의 국사 필화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근본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귀족들이었으므로, 이민족 귀족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최호의 예에서처럼 정계에서 축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격이 높은 집안은 당나라를 기준으로 농서이씨(隴西李氏) 돈황선공파(敦煌宣公派)[2], 태원왕씨(太原王氏) 장군공파(將軍公派)[3], 형양정씨(滎陽鄭氏) 첨사공파(詹事公派)[4], 범양노씨(范陽盧氏) 고안혜후파(固安惠侯派)[5]·별가공파(別駕公派)[6]·사군파(使君派)[7], 청하최씨(淸河崔氏) 부군파(府君派)[8]·탁지랑공파(度支郞公派)[9], 박릉최씨(博陵崔氏) 합하파(閤下派)[10], 조군이씨(趙郡李氏) 시어사공파(侍御史公派)[11]이며 이들은 칠성십가(七姓十家)라 하여 조정에서 지정한 최고 귀족이다. 이씨, 최씨, 노씨, 범씨, 왕씨 5개 성과 농서, 조군, 청하, 박릉, 범양, 형양, 태원 7개의 본관을 오성칠망(五姓七望)이라 부르기도 한다이들은 자기들끼리만 결혼했고 외부 귀족가문과 결혼할 때는 막대한 '빙재(聘財)' 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명망은 최고 수준이고 배타성도 높아서 '''당나라 황실도 이들보다 격이 낮은 벼락 출세자 가문으로 여겼다.'''[12] 이들은 5대 10국 시절까지도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으나, 후손들의 유학 실력이 형편없음이 드러나면서 그 후광도 빛이 바랐고, 과거제가 확대 실시되면서 서서히 묻혀갔다. 하지만 위에서 기술했듯이 이들 중에서 물려받은 가산을 후손들의 교육에 투자해서 과거제도에 적응한 집안들은 관료 가문으로서 생존해서 명문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2.2. 노성(虜姓)


낙양이 있는 하남군에 본관을 두었다. 위의 군성과 달리 4등급이 매겨졌는데 북위의 건국 공신 문중인 팔씨(八氏)[13]가 1등급, 북위 황실과 뿌리가 같은 십주(十胄)[14][15]가 2등급, 세력과 존비를 따져서 3등급에 36족, 4등급에 92성을 매겼다. 이주영이 하음의 변을 일으켜 이들을 살육했지만 여기서 살아남은 귀족과 무천진 군벌이 연합하여 산서귀족, 즉 관롱집단을 이루었다. 우문태에 의한 서위 건국부터 대두되었다. 특히 우문태와 동향 가문인 무천진 출신 가문들이 8주국 12대장군을 독점하면서 관롱귀족의 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서위, 북주, 수, 당의 정치적 중추 세력이었고, 특히 군권을 장악하여 무력과 정치력을 한데 아울렀지만 측천무후의 등장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배타성도 낮은 편이여서 한족 국가가 아닌 국가의 왕족, 귀족과도 통혼하고 혼혈하여 문화를 받아들이는 호한융합적 성격을 띄었다. 황실, 당 황실도 이쪽에 속한다.[16][17]

2.3. 교성(僑姓)


강남 지역의 귀족으로 오호십육국시대에 남쪽으로 내려간 피란민에서 시작된 집단. 교성이란 이름도 원래 살던 군에서 떠난 귀족이라서 붙은 거다. 그만큼 배타성은 가장 강했다. 원래는 산동사성집단이 강남귀족안에 있었으며, 남조의 실권을 움켜쥐고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양나라 말기의 후경의 난을 겪고, 통일이 수나라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대타격을 연이어 받은 탓에 정치군사적 힘은 약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개발된 강남의 부를 독점하였기에 가장 부유한 귀족 집단이였다.
대표적인 교성 귀족 가문으로는 낭야 왕씨(琅琊王氏), 진군 사씨(陳郡謝氏)[18], 진군 원씨(陳郡袁氏), 난릉 소씨(蘭陵蕭氏) 등이 있다.

2.4. 오성(吳姓)


강남의 토착 귀족이지만 진나라가 다시 서면서 강남에 유입된 교성에게 밀렸다. 다만 이들도 강남의 부를 독점하여서 부유하기는 하였다. 이들의 기원은 오의 사성 참고.

2.5. 기타


태산 양씨 참고.
위 항목에 언급된 가문 외에도 삼국지 팬들에게는 조위사마진 황위를 배출한 패국 조씨, 하내 사마씨가 유명하고, 원소원술의 집안인 여남 원씨(汝南袁氏)[19], 제갈량 3형제의 낭야 제갈씨(琅琊諸葛氏), 양표, 양수 부자의 홍농 양씨(弘農楊氏), 순욱순유를 배출한 영천 순씨(潁川荀氏) 등도 익숙할 것이다. 단, 이들 가문은 대체로 문벌귀족의 형성기인 후한~위진대에 전성기를 누린 가문들로 문벌귀족의 전성기라 할 남북조시대에는 그 위세가 위에 언급된 대가문들만은 못했다.[20] 단, 홍농 양씨 한정으로 후대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이 분.


[1] 고려시대의 문벌귀족과 비교한다면 이쪽은 과거제가 있어서 문벌귀족에게 혈연이 있다면 과거 급제자들에게는 학연이 있어 인맥이 인맥을 견제하는 기묘한 기류가 흘렀는데다가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음서+과거를 베스트로 쳐서 이들은 벼슬을 시작하는건 음서로 할지언정 거기서 더 출세하려면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는데 제일 빨랐다. 더군다나 중국의 벌족이 몇백 년 간 지속된것과는 달리 이들은 무신정변으로 갈려나갔다.[2] 파조는 보(寶)다.[3] 파조(派祖)는 경(琼)이다.[4] 파조는 온(溫)이다.[5] 파조는 도세(度世)다.[6] 파조는 보(輔)다.[7] 파조는 부(溥)다. 사군은 자사 및 사절에게 쓰는 경칭. 노부는 유주자사를 지냈다.[8] 파조는 종백(宗伯)이다. 부군은 태수에게 쓰는 경칭. 최종백은 청하태수로 추증되었다.[9] 파조는 원손(元孫)이다.[10] 파조는 의(懿)다. 합하는 삼공에게 쓰는 경칭. 최의는 태위를 지냈다.[11] 파조는 해(楷)다.[12] 당나라 황실은 스스로 농서이씨라 일컬었는데도 보다시피 농서이씨가 다른 귀족의 위에 서기는커녕 오히려 씨족지에서 농서이씨는 세 번째로 나오기까지 하였다. 농서이씨 자체가 다른 가문에 비해 연원이 좀(?) 짧기도 하다. 다른 가문들은 못해도 춘추전국시대까지 기원이 추적가능한데 비해 농서이씨는 후한 말에 와서야 등장한 가문이기 때문. 예를 들면 조군이씨는 조나라 명장 이목의 후예이며, 형양 정씨는 정나라 백작의 후예이고(고대식으로 표현하자면 희성정씨(姬姓鄭氏)쯤 될 것이다), 청하 최씨와 박릉 최씨는 제나라 공족 최씨의 후예 뭐 이런 식이다. 물론 농서이씨는 서한의 명장 이광의 후손을 자처했지만 이미 당대에 별로 신빙성 없는 얘기라고 의심받았을 정도.[13] 훈신팔성(勳臣八姓)이라고 하며 보륙고(步六孤)→하남육씨(河南六氏), 하뢰(賀賴)→하남하씨(河南賀氏), 독고(獨孤)→하남유씨(河南劉氏), 하루(賀樓)→하남누씨(河南樓氏), 홀뉴우(忽忸于)→하남우씨(河南于氏), 구목릉(丘穆陵)→하남목씨(河南穆氏), 흘해(紇奚)→하남혜씨(河南嵇氏), 울지(尉遲)→하남울씨(河南尉氏)가 속한다.[14] 제실십성(帝室十姓)이라고 불리며 북위 황실과 뿌리가 같아서 혼인이 금지되었다. 발발(拔拔)→하남장손씨(河南長孫氏), 흘골(紇骨)→하남호씨(河南胡氏), 보(普)→하남주씨(河南周氏), 달해(達奚)→하남해씨(河南奚氏), 이루(伊婁)→하남누씨(河南婁氏), 구돈(丘敦)→하남구씨(河南丘氏), 후(侯)→하남해씨(河南亥氏), 을전(乙旃)→하남숙손씨(河南叔孫氏), 차혼(車焜)→하남차씨(河南車氏), 독발(禿拔)→하남원씨(河南源氏)[15] 이 중 독발씨는 북위 황실의 성씨 탁발(拓拔)과 소리가 같았다. 하남원씨는 성이 일본에서 유명한 그 성인데 우연이 아니다. 북위가 성씨를 탁발에서 원(元)으로 바꾸면서 소리가 같은 원(源)을 성으로 삼았는데 사가 천황이 이 일을 본떠서 신적강하를 해도 뿌리가 같음을 나타내려고 같은 성을 내려주었다.[16] 수나라는 홍농양씨를, 당나라는 농서이씨를 자칭하였지만 진인각(陳寅恪)이 거짓임을 밝혔다.[17] 위의 군성 6등급과 노성 4등급은 류방(柳芳)의 성계론(姓系論)이 1차 출처이고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이 2차출처이고 유수원의 우서 제9권이형상의 원파기 병서가 3차출처이다. 칠성십가의 출처, 훈신팔성의 출처, 제실십성의 출처는 하남원씨 빼고 위키문고 참고[18] 진군 양하현이 본적이라 양하(陽夏) 사씨라고도 한다.[19]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공자인 원도도(轅塗濤)가 시조이다. 다른 문벌귀족들에게 전혀 꿀릴 것이 없던 셈. 게다가 4대에 거쳐 삼공을 배출해내기까지 했다. 이를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원(袁)씨 가문의 출신 인물 중에는 참칭 황제가 둘이나 나오는데 그 둘이 바로 중(仲)의 황제를 칭했던 삼국지의 원술과 중화제국의 위안스카이(홍헌제).[20] 특히 여남 원씨 본가는 동탁에 의해 멸족 되었기에 원소와 원술을 제외하면 네임드가 전부 날라가면서 이후 원소와 원술을 제외하면 사실상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다. 물론 남북조 시대에도 남조에서 나름 고귀한 신분인 북방계 교성 귀족으로 대접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