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군

 



조선 장조의 증손[1]
흥인군
興寅君

군호
흥인군(興寅君)[2]
시호
효헌(孝憲) / 충익(忠翼) / 문충(文忠)
본관
전주(全州)
이름
최응(最應)[4]

산향(山響)

양백(良伯)
양조부
은신군
양조모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생조부
이병원[5]
생부
남연군
생모
군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부인
정경부인[A] 안동 권씨(安東 權氏)
정경부인[A]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경부인 안동 김씨(安東 金氏)
자녀
1남
생몰
기간

음력
1815년 2월 17일 ~ 1882년 6월 10일
양력
1815년 3월 27일 ~ 1882년 7월 24일
1. 소개
2. 일생
3. 기록에서
4. 미디어에서
5.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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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문신(文臣). 남연군의 네 아들 중 셋째아들로, 흥녕군,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의 형이다.

2. 일생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이채중(李采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6]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후 10개월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 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해 남연군 군호를 받고 종친으로 편입하면서 이최응 역시 왕족이 되었다. 1829년 1월 1일에 작호 흥인부정(興寅副正)을 받았으며[7] 1830년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승격했다.
동생인 흥선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쨌든 친형제라서 상당한 권력이 있었던 듯 하다. 1865년(고종 2년)에 둘째 조카인 고종이 왕좌에 올랐던 시절 동생인 흥선대원군이 주도했던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를 지냈다.
흥선대원군이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에 반대하자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을 지지하면서 동생과 대립했다. 결국 유림들의 반대로 사직했는데, 이 때부터 흥선대원군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이후 조카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친밀해졌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는데 도움을 줬다. 1873년 동생이 실권을 잃자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호위대장,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8] 고종의 국사(國事) 보좌를 맡았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의 신설로 총리 대신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에 유림들의 반대로 물러나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882년 잠시 경기도 광주부 유수로 임명받았다가 다시 영돈녕부사 직을 맡았다.
동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동생인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던 구식 군대 군인들에게 명성황후 지지자 및 문호 개방 주동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흥인군의 최후에 대해 상당히 처참하게 기록해놓았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이 집을 둘러싸자 도망가려고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그 곳이 터져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적었다. 흠좀무
슬하에 완영군 이재긍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후사 없이 25살이란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게 대가 끊길 뻔했지만 먼 방계[9]의 손자 뻘인 아이를 이재긍의 아들로 입양시켜 가계는 이어졌다. 문제는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 멤버 이지용이다.(...)

3. 기록에서


흥선대원군의 형제임에도 평가는 당시나 지금이나 영 좋지 못하다. 당장 생전부터 평이 안 좋음을 알 수 있는게,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그렇게 추종해 마지않던 흥선대원군의 형임에도 타겟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흥선대원군의 형이라는 쉴드도 안먹힐 정도로 평이 나빴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흥선대원군도 천하의 개쌍놈이였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흥선대원군은 실책만큼이나 성과도 분명하다보니 흥인군만 비교되어 안습해진다. 그래도 그냥 개인이 무능하다는 정도에서 끝나면 좀 낫겠지만, 그가 속한 민씨 정권도 평이 좋지 않고, 게다가 손자 놈역사에 길이 남을 짓을 저지른 탓에...
매천야록》에 따르면, 영의정을 지낼 때 일본과 조약을 맺을 것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일본과 화해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옳다"라고 했는데 또 누군가가 "아닙니다. 왜놈들과 싸워야 합니다"라는 의견에도 "옳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싸웠다가 지면 어쩔 건데요?"라고 반문하자 또 "옳다"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이 "싸워도 이기지 못하면 그 때 가서 화해하죠"라고 하자 또 "옳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그 회의는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끝장나고 말았는데, 이 이야기가 도성에 퍼진 이후 유유정승(唯唯政丞)[10]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물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해서 과거 시험을 볼 때 시험관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뭐가 잘 되었고 뭐가 잘못된 건지 구별을 못해서 운이 좋으면 붙었고 운 없으면 떨어졌다고 한다. 흥인군이 시험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정보가 퍼지면 응시생 중 문장 솜씨가 부족한 사람들은 야! 신난다~를 외쳤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형이 욕심만 많고 이렇게 무식했기 때문에 집권 전부터 형을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하여튼 《매천야록》에서 묘사한 흥인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다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매천야록》 기록처럼 아주 멍청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종친의 좌장격 인물로 청나라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고,[11]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가지고 조카 고종과 협력하며 흥선대원군이 실각된 후 '유유정승'이라 불린 《매천야록》 기록과는 달리 고종이 친정하는 조정의 중심 인물로서 국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하는 인물로 나온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에게 맞아죽는 최후는 같다.[12] 여기서의 묘사가 실록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흥인군은 그렇게까지 사람 자체가 우둔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서화에도 능한 교양인이었던 동생에 비해[13] 교양이 부족했던 면이 《매천야록》 등의 야사에서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흥인군 역시 철종 때에는 동생과 함께 종친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인물로 칭송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4]
이두호 화백은 만화에서 더 꼴사납게 끔살된 거로 그렸다. 병사들이 집으로 돌격할 때 보물을 가득 넣은 곳간 열쇠를 챙기려다 병사들에게 걸려 결국....

4. 미디어에서


  • 김상순 - 1982년 MBC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특집극 《실록 한미 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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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미국의 수교 조약을 원활하게 체결하기 위해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던 유생 홍재학(김무생 분)을 죽여야한다고 고종(길용우 분)에게 건의한다. 홍재학을 잡아다 고문할 때 바라보는 썩소가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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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잖으나 약간 싱거운 사람으로 나왔다. 임오군란 때 몸을 피하라는 김병국(민지환 분)의 조언을 무시하고 집에 있다가 찾아온 구식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죽기 전에 나름 근엄하게(...) 뒷짐지고 "썩 물러가라!"고 한 게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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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소개할 《명성황후》처럼 아주 우스꽝스럽지는 않으나 좀 실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철종(최수종 분) 시절 파락호로 지내는 흥선군(임동진 분)을 걱정하며 안동 김씨 눈 밖에 나지말고[15] 제대로 살라고 꾸중한다. 고종 즉위 이후엔 흥선대원군이 바로 종친을 등용하지 않는 것을 답답해하며 기생 초월[16](김영란 분)을 만나 앞으로 흥선대원군이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지 들은 게 있나 싶어서 떠보려하나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한다. 고종 친정 무렵부터 민씨 정권에 협력하였고 동생과는 척을 진다. 역사대로 임오군란 때 살해당하는데 한 밤 중에 집 안에서 부인 손을 잡고 도망치다가 찌질하게 혼자 살려고 부인을 마루에 패대기치고(...) 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구식 군인이 던진 창에 맞아 죽는 것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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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발언들을 생각 없이 하고 다니며, 목소리만 크고 어리숙한 인물로 등장한다.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이 드라마에서 개그 캐릭터 기믹을 맡았다. 특히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와 철인왕후 김씨(유혜영 분) 면전에서 풍양 조씨안동 김씨를 까는(...) 장면과, 동생 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대역사였던 경복궁 중건 중 화재 사건으로 전소되자 왕실이 번성하려는 듯 활활 타오른다(...)며 실없는 소리를 동생 면전에서 늘어놓는 장면은 보는 사람이 손발퇴갤할 정도. 전자에선 보다 못한 동생이 직접 "형님!"이라며 버럭하며, 그러자 오히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그랬다"고 눈물을 짠다. 후자에선 동생이 "천민들도 그따위 헛소리는 안 한다"며 형이고 뭐고 빡쳐서 "삭탈 관직하고 의금부에 가두라"고 일갈한다. 이외에도 눈치 없거나 생각 없는 언행으로 동생에게 욕 먹는 장면이나 대놓고 동생이 무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임오군란 때 흥인군이 끔살당하자, 흥선대원군이 장례도 못 치르게 하면서 형수인 흥인군 부인(엄유신 분)에게 '사람도 아닌 짐승을 묻을 수 있냐, 맘 같아선 사지를 절단내 효수하고 싶다'라며 막말까지 한다. 임오군란 때 폭동을 일으킨 군인들이 대궐로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대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갔으나, 막상 군인들이 대궐로 가기 전에 흥인군의 집부터 습격하는 바람에(...) 그 뒤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7]

5. 관련 항목



[1] 흥인군의 양할아버지 은신군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실 당대에 연령군의 후손으로 인정받았다면, 흥인군은 숙종의 5대손이기 때문에 군호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항목 참조.[2] 군호는 인천의 옛 지명인 흥녕부(興寧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군호도 마찬가지.[3] 참고로 이는 흥완군과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 + 大)'이며 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 + 丙)' 이었다가 '승응((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 + 羲)'였고 철종의 큰 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 + 月)'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 + 京)應)'으로 개명했다.[4]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3][5]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5대손.[A] A B 사후 추증. 생전에는 군부인이었다.[6] 둘째형 흥완군이 태어나고나서 음력 기준으로 정확히 1년 1일만에 태어났다.[7] 군호는 인천의 옛 지명인 흥녕부(興寧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군호도 마찬가지.[8] 왕실 종친이 영의정에 오른 것은 성종구성군 이후 매우 오랜만이었다.[9]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세종대왕의 적5남 광평대군의 가계에서 골랐다.[10] '유유(唯唯)'는 "예, 예"라고 대답하는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어다.[11] 당연하겠지만 위에처럼 멍청하기만 한 인물이면 절대 보내지 않는다!!! 저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만일 사신으로 가면 청나라에서 "조선은 왜 이런 멍청한 왕족을 사신으로 보낸거냐? 우릴 무시하냐?" 라고 반응할 수 있었다.[12] 다만 그냥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맏은듯한 모습으로 나온다.[13] 흥선군의 난은 석파란이라 하여서 훗날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석파란을 위조할 정도였다. 흥선군이 김정희의 제자였으니 더 설명이 필요한지?[14] "엎드려 원하건대, 환첩(宦妾)은 한결같이 우리 조종의 법으로 단속하여 제어하고, 종친(宗親)의 기거(起居)는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 철종 실록, 철종 3년 7월 10일. 부교리 김영수의 상소에서. 남연군과 그 아들들인 흥인군 형제는 다른 종친들에 비해 신중한 처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15] 실은 안동 김씨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파락호 행세를 하는 것이지만, 흥인군은 그런 행태가 오히려 찍히는 짓이라고 생각했다.[16] 흥선대원군이 파락호 시절 자주 찾던 기생.[17] 군인들의 흥인군 살해 장면이 코믹하면서 다소 잔혹하게 나온다. 끌려나온 흥인군이 몸을 가누지 못하며 헛주먹질과 팔을 휘저으며 목숨을 구걸하다가, 철퇴로 내리치고 쓰러진 흥인군을 여러 군인들이 달려들어 난도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