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참봉

 

능참봉(陵參奉)
1. 개요
2. 권력
3. 능참봉의 고생과 그에 얽힌 민담
4. 현대의 능참봉
5. 관련 기사


1. 개요


조선 왕조의 벼슬자리 가운데 하나.
능참봉이라는 관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종9품 최하위 문반직 '참봉' 중에서 선왕과 선후의 왕릉을 관리하는 참봉을 따로 능참봉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능참봉을 제외한 다른 참봉직이 대부분 혁파되면서 능참봉이 곧 참봉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1]
조선왕조에서는 고려, 신라 등 전왕조의 주요 왕릉에도 관리인을 붙여준 기록이 등장하지만 그 실태에 관한 기록은 부족하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주로 조선시대에 조선의 선왕들의 무덤을 관리하는 능참봉을 다루고 있다.
물론 보통은 능참봉이 양반 벼슬아치 체면에 손수 벌초 같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랫사람으로 능에 소속된 수복이나 수호군[2]이 있어서, 이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능에서 제사를 지낼 때 그 준비를 하는 일도 맡는데, 대략 한 달 전에 한양에 올라가서 축향(祝香)을 받아와야 했다. 왕이 능행을 오면 마중도 나가야 한다. 왕릉의 수리 공사를 할 때 관리 감독도 맡았다.
당시 재위 중인 임금의 조상인 선왕들의 무덤이니만큼, 잘못 관리하면 목이 달아난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손상시키면 3년간 유배, 두 그루를 손상시키면 천 리 밖으로 귀양 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따라서 능 수호군을 시켜서 벌목을 막는 것도 능참봉의 일이다.
녹봉은 매달 열 말에 닷 말.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빚을 지기도 했다. 그래서 개중에 사비로 충당이 가능한 재력이 있는 토호나 유지 등이 우선시되었다. 비록 미관말직이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는 지역의 명사와 같은 연륜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었고, 장래 경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초야에서 이름을 떨치던 남명 조식이 처음으로 받은 벼슬이다. 물론 죽어서 추증받은 벼슬은 영의정.
능보다 격이 낮은 원(園)에는 역시 종9품인 수봉관(守奉官)이 지킨다.

2. 권력


조정에서는 쳐주지도 않을 만큼 매우 낮은 미관말직이지만, 이것도 벼슬은 벼슬이며, 왕릉을 관리한다는 특성상 지역 사회에서는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뻐길 수 있게 되는 벼슬이다. 일단 벼슬자리에 있는 만큼 동네 양반들인 진사, 생원과는 격이 다르다.[3][4]
일단 사후에는 자기 신위에 "학생 부군 신위"에서 "학생" 대신에 "능참봉"이 붙는다.
일단 왕릉 주변에서는 '''완장질'''이 가능하다. 왕릉 근처에서 사냥이나 나무 베기 같은 짓을 하다가 걸리면 그 자리에서 그냥 '''치도곤(!!!)'''을 때릴 수 있었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선왕을 모신 능에서 뭐 하는 짓거리냐! (내가 다음에 임금님 왔을 때 일러바쳐 줄까?)"'''라고 버럭! 하면 어지간한 인간은 오금이 저려서 벌벌 떨 것이다.
옛날 시골 순경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파출소에 혼자 근무하는 한직중의 한직이지만, 인근에선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공권력이다 보니 마을 내에선 어깨 주름 좀 잡고 다닐 수 있었다.
능참봉은 짭짤한 재미가 적지 않았다. 왕릉에는 효행 사찰이라 하여 왕릉에 묻힌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비는 이 딸려 있으며, 절에서 제사에 소요되는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 토지도 딸려 있다. 이런 땅은 문전 옥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감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야 하는데, 이렇게 관리를 담당하는 효행 사찰의 추수관을 임명할 권한이 능참봉에게 있다. 이 추수관이 되면 소작인들의 대접, 선물, 그리고 은근슬쩍 떼어먹는 걸 할 수 있는 등, 아무튼 여러 가지로 해쳐먹을 게 많다. 그렇다 보니 능참봉에게 아부를 하는 사람이 수없이 쌓이고, 추수관이 떼어먹은 것의 일부는 능참봉에게 돌아오게 된다.
위에서 말한 이유들과 연배와 명망 있는 인물이 맡는 직책이라는 점 등이 어울려, 고을 수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지역 유지였다. 아무리 가장 낮은 9품에 불과하다지만 지방에 품계 받아본 인물이 흔할 리도 없거니와, 최고 권력인 왕실과 바로 직통 라인이 연결되어 있는데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좋은 일만 있다면 다음과 같은 민담들이 나올 리가 없다.

3. 능참봉의 고생과 그에 얽힌 민담


단적으로, 왕이 효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고생하는 벼슬이다.
이런 걸 빗댄 말로 "(모처럼) (여든에,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까 거둥이 한 달에 (열아홉, 스물아홉) 번이라."는 속담이 있다. 늙은 나이에 마침내 능참봉 벼슬이나 해서 드디어 벼슬자리에 올랐는데, 왕이 한 달에 스무 번도 넘게 능행을 했으니 일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는가? 이처럼 실속 없이 고생만 하는 일을 빗댄 말이다. 군대식으로 말하면, 외진 곳에 와서 높으신 분들 눈치 볼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더니, 갑자기 별들이 자꾸 부대를 방문하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말은 정조사도세자의 무덤을 자주 찾아 수원 지역에 나돌게 된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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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수원 능참봉은 한 끼에 닭 한 마리"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5] 그래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돌보던 능참봉에 관한 민담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이러하다. 왕씨 성을 가진 능참봉이 지나가던 점쟁이에게 관상을 보았는데 며칠 뒤에 죽을 상이라 하여 그 대책이라 내놓은 이야기대로, 또는 밤중에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사도세자능을 껴안고 있으라는 말을 들어서, 비 오는 가운데 묘지를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궁궐에 있던 정조는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문득 '''"내 아버지는 비 오는데 추운 무덤 안에 누워 계시는데, 능참봉이라는 놈은 따뜻한 방 안에 편히 누워 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선전관을 보내 '''"능참봉이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죽여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선전관이 와서 보니, 능참봉이 기특하게 비를 맞아 가며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를 하였고, 정조는 무척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은 이렇다. 박경인이라는 능참봉은 낮에 묘역을 시찰하다가 한 거렁뱅이 사내를 만났는데, 참봉 나리는 오늘 안에 목이 날아갈 상이니 단단히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돌아와 일찍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선친이 나타나 지금 이렇게 배 깔고 잘 시간이 없다. 얼른 일어나라고 타이름과 동시에 잠이 깼는데 밖에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그리고 불현듯 무언가 떠올라 사도세자 능에 나가 보니, 억수 비에 뗏장이 벗겨져 흙이 패여나가는 중이었다. 사람을 모을 틈도 없이 미친놈처럼 밤새도록 능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마침 폭우에 아버지 무덤이 걱정된 정조가 선전관을 보냈다나 뭐래나. 자초지종을 들은 선전관이 일을 수습한 후 그 증거로 박참봉의 의관을 들고 가자, 폭우에도 자기 몸 안 사리고 관리하는 것에 감동한 정조가 수원 능참봉만 특례로 종6품으로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왕이 최고 지존이라지만 조선은 나름 법치가 확립된 나라라, 군주가 신하를, 혹은 양반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성과 잦은 능행이 만들어낸 전승 중 하나. 여담이지만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7대 조부 성만종이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무덤) 능참봉이었다.
여기까지 봤으면 알겠지만, 이런 아들을 둔 사도 세자는 죽어서나마 호강했지만, 그 능참봉의 고생길이 훤했을 거란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조 역시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을 능으로 승격시키고자 했지만, 아버지 숙종이 후궁을 왕비로 추증하는 것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유명을 내렸기 때문에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야사가 있다. 영조가 백성들과 대면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나무꾼을 만났다. 나무를 어디서 베었냐고 하자, '''"소령"릉"이 있는 곳 근처에서 베어 왔습니다요."'''라고 말하였다. 나무꾼이 일자무식해서 원과 릉을 구분하지 못했고, 임금의 어머니 묘이니 릉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자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존대해줬다고 크게 기뻐하며 그 나무꾼에게 상금과 소령원 수봉관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6] 다른 판본에선 약간 더 극적인 내용을 추가한다. 평복 차림으로 암행을 나간 영조가 저 대화를 나눈 뒤, '''"그 나무를 모두 사줄 테니 나를 따라 내 집으로 오게."'''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무꾼이 영조를 따라가다 보니 그 집이 바로 창덕궁이었고, 그제서야 영조의 정체를 안 나무꾼이 냉큼 엎드린다는 내용.[7][8]

4. 현대의 능참봉


현대엔 당연히 없어졌지만,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조선 왕릉 이외에도 백제, 신라, 가야, 고려 등 역대 왕가들의 왕릉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문중에서 능참봉이라 불러준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의 벼슬은 공직, 즉 현대의 공무원에 해당하므로, 사실 업무와 지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옛날 능참봉은 왕의 행차가 문제였다면, 현대의 능참봉은 일반인들의 민원이 문제라는 점이다.
태릉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모아 명예 능참봉으로 임명하여 문화재를 관리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관련기사
윤종신이 버라이어티 야행성에서 발라드 계의 능참봉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관련기사
검사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고향을 관할하는 검사를 능참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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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능묘를 관리하는 참봉 외에도 궁중에 쓰던 음식 재료와 식기를 담당하던 사옹원, 왕실의 병원 내의원, 궁중 내 연회나 대신들 식사를 주관하던 예빈시, 병기를 연구, 개발하던 군기시, 군수품을 책임지던 군자감, 초제를 지내던 소격서 참봉이 있었다.[2] 능 주변 마을에서 차출하며 수십에서 수백 명이 있다.[3] 지금으로 치자면 고시 1차 합격 후 임용대기자 (진사, 생원)와 지방에 파견 나온 중앙 공무원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4] 진사, 생원 또한 관직에 나가고자 하면 능참봉과 동일한 종9품의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5] 사실 사도세자는 '''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 무덤은 능이 아니었고 묘, 또는 원으로 불렸으므로, 능참봉이 아니라 수봉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백성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으니, 능참봉이라 불렀을 수 있다.[6] 살이 좀 더 붙은 이야기에서는, 영조가 자기 어머니 무덤을 능이라 불러줬다고 속으로 좋아했지만 그 티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소령'''원'''이라 하는데 어째서 소령'''릉'''이라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나무꾼이 "아니 나라님 어머니 묘소면 능이지 어째서 원이라는 거요?"라며 외려 영조를 무식쟁이 취급했다나(...) 여기에 영조는 얼씨구나 하고 신하들에게 "일개 나무꾼도 (왕 어머니 무덤은 능이란 것을) 아는데 니들은 왜 모르니?"라고 갈궜다는 내용도 있다. [7] 살을 더 붙인 뒷이야기로는 영조가 나무꾼을 기특하게 여겨 능참봉 자리에 앉혀주었다고 나온다.[8] 이런 민담은 정조도 있다. 여기서는 초야에 묻혀 사는 한 가난한 선비가 미행 나온 정조 앞에서 여기(융릉)는 현 주상전하의 아버님이신 뒤주대왕의 능이다 라고 밝히며 비명에 돌아간 아버지를 대왕 대우를 해주자 정조가 감격한다. 정조는 이 일을 주제 삼아 과거 시험 문제를 냈고, 이 선비는 보란 듯이 합격해 정조를 뵙고 그대로 데꿀멍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