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논란 및 사건사고
1. 최동원 구타
“'''매 때리는 곳인지 야구하는 모임인지 모르겠읍니다. 기합도 어느정도지 전치 17일의 진단이 나올정도로 때린다는것이 말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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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삼촌집에서 박철순에게 폭행을 당한 최동원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한 말.
박철순 최악의 흑역사로, 연세대 재학 시절 얼차려라는 명목으로 후배인 최동원을 구타하여 병원 신세를 지게 한 적이 있다. 당시 동기 이윤상의 증언에 의하면 야구방망이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다고 한다. (정말 큰일 날뻔)그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연세대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겠다고 학교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던 최동원 측한테서 몇 달 이후로 연세대에 사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는 편인데, 최동원이 나중에 연세대로부터 오히려 사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박동희 :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쟁탈 대학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동국대에 2대 4로 진 뒤 사건이 터졌습니다.
최동원 : 그랬지. 내가 대학 3학년 때였어요. 3학년이면 중고참인데. 그날은 박철순 선배가 먼저 등판해 2실점하고, 내가 4회인가 등판해서 2점을 줘서 졌어요. 그날 경기에 지고 4학년 선배들이 집합을 지시했는데, 그때 누구보고 배트를 잡으라고 했느냐. 박 선배였어요. 물론 박 선배가 내보다 나이는 2살이 많았어요. 하지만, 난 3학년이고, 박 선배는 군대를 먼저 갔다 온 통에 2학년이었다고. 속으로 ‘이건 아닌데’싶었지.
김성한 : 그건 내가 봐도 좀 아닌 것 같다.
최동원 : 그날 박 선배도 악역을 맡은 거지. '''엉덩이를 10대 맞았는데, 뭘 잘못 맞은 건지 허리 쪽에서 피가 나오더라고. 집에 가서도 잠을 못 자고, ‘낑낑’하는데, 작은아버지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 거야. ‘혹시나’해서 이불을 드니까 팬티가 다 피범벅인 거야.''' 당시 아버지가 부산에 계셨는데, 바로 올라오셨지.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 갔는데, 2주 상해진단서를 끊어주더라고. 그걸 들고 그때 총장실로 찾아갔어요.#
2011년, 박동희 기자가 최동원과 김성한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당시 박철순의 구타로 인해 최동원은 허리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1][2] 그로 인해 전치 2주 판단을 받아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었는데, 학교 측의 음해로 인해 무단이탈이라는 기사가 나갔다고 한다. 연세대와 박철순의 흑역사인 셈.
이때만 하더라도 선배가 후배에게 기합을 주고 빠따를 치는 것은 용인하던 악습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도를 넘은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언론에도 나오고 퇴학 이야기까지 나온 것.
이 당시 구타는 드러난 것만 3차례 이상 있었는데, 언론에 보도된 것만 여기 언급된 동국대전 직후, 3월 12일 중앙대와의 연습경기, 그 전해 연고전에서 구타가 있었으며, 최동원의 말에 따르면 각각 10대씩 맞았다고 한다. #
또한 일부의 두산팬들이 주장하는 선배 지시설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박철순은 복학생이었고 오히려 4학년들 보다 나이도 많았고 학번도 빨랐다. 당시 4학년들은 57년생이고 박철순은 54년생이었다. 당시 박철순에게 지시를 할 수 있는 선배가 없었고 박철순이 구타를 주도했을 확률이 높다. 또 박철순은 후배가 건방져서 때렸을 뿐이라고 했고 지시설을 직접 부인했다. 박철순의 미국 진출도 연세대에서 뛸 수 없는 상황에 사실상 쫒겨난 것이다.
2. OB 베어스 항명파동
1994년 시즌 말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군산 원정경기가 끝난 뒤 전주 숙소에서 다혈질의 윤동균 감독이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체벌하려 하자[3] 최고참이었던 박철순과 장호연, 김형석 등이 이에 반발했다.결국 주축 선수 17명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며 숙소를 떠나 서울로 돌아온 한국프로야구 초유의 항명 파동이 일어났다. 구단 측은 본보기 차원에서 박철순을 비롯한 주축선수 5명을 트레이드하고 윤동균 감독의 연임을 시도했으나, 당시 여론은 폭력을 휘두른 윤동균 감독보다 선수들을 지지하는 쪽이 많았다.
결국 박철순이 경창호 구단 사장에게 "나도 은퇴할 테니 윤 감독도 같이 물러나게 해라"고 배수의 진을 친 끝에, 윤동균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김인식 감독을 영입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사실 박철순이 주동자가 아니라 후배들과 윤동균 감독 사이에 불화가 커질까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자들이 요상하게 해석을 해서 박철순이 주범이라는 기사를 쓴 것이다. 그러나 신임 김인식 감독의 선처 요구와 팬들의 성화로 박철순과 김형석, 김상호 등은 연봉이 삭감되는 선에서 팀에 계속 남았고, 강영수는 방출당했지만, 바로 강타자를 원하던 태평양에서 데려갔으니 퇴진한 윤동균 감독만 책임진 꼴. 그래도 다음 해의 기적적인 우승으로 결과적으로는 감독 교체가 잘 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흑역사로 남았다. 또한 이 당시 스포츠 서울의 이종남 기자가 칼럼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선수들의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박철순은 그렇다 쳐도, 거의 팀에 남을 가능성이 없었던(실제로 대만프로야구 트레이드설이 들렸던) 장호연과 구단 측을 직접 중재해서 OB에 잔류시킨 것도 이종남 기자 본인. 이종남 기자는 원래 인천 토박이로 특별히 OB 팬은 아니었으며, 이 때 선수들 편에 선 것도 OB 구단 수뇌부의 좀스러운 운영에 예전부터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5 KS 우승 이후 OB는 1996년 1월에 기다렸다는 듯이 장호연을 방출했다.[4]
3. 소상영 후배 구타 옹호 사건
그가 OB를 떠난 이유도 구타와 간접적 관련이 있었다. 2군 투수코치로 일하던 1998년 OB 2군의 주장인 소상영 선수가 자신의 심부름을 하지 않은 후배를 구타했고, 구단이 소상영을 방출하려 하자 "선배가 후배를 좀 혼낼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면서 반발,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팀을 떠났다. 자신이 선배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부당하고, 내가 폭력을 당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 지도자로서는 실격감[5] 이다. 결국 박철순이라는 보호자가 사라진 소상영은 시즌 끝나고 방출되었다. 기합...구타...'프로야구 괴담'
4. 음주 운전
OB 코치 재임 시절이던 1997년,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되어 면허정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적발된 시기가 정규 시즌이 진행되던 7월이라 더 말들이 많았다.
[1] 보통 얼차려를 하더라도 엉덩이를 때리지 허리를 때리진 않는다. 아니, 조선 시대에도 허리를 치는 것은 사람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태형 시에는 엉덩이를 때렸고, 허리를 때린다는 것은 태형을 빙자하여 누구를 죽이려고 들 때나 하는 짓이었다.[2] 이 허리 부상은 최동원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혔다. 구타가 없었으면 최동원은 더 오랫동안 선수 생활 하면서 더 나은 성적을 찍었을 것이다.[3]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전에도 선수나 코치의 뺨을 때리는 등의 폭력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체육계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박철순 본인도 최동원을 패버렸으니..[4] 박동희 기자가 라디오에서 감독 이기는 선수는 없다고 했는데, 이 양반은 감독을 사실상 이긴 셈.[5] 이 사건으로 인해 박철순은 본인의 한국의 스포츠계 구타에 대한 문제의식은 본인이 연세대에 재학 중에 최동원을 체벌하던 시절로부터 달라진게 없음을 본인 스스로가 입증한 셈이다. 프로의 세계일지라도 고참선수에게는 후배선수들을 체벌할 자유가 있으며 실력에 관계없이 고참들은 감독 및 코치들에게 구타나 집합 등에서에서의 예외가 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일 뿐 구타사실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의식은 전혀 없다는 뜻 말고는 상기 행위들에 담긴 그의 생각을 해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