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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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전 프로야구 선수.
2. 선수 시절
신일고 - 중앙대를 졸업하고 1985년 OB 베어스에 입단하였으며 1998년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하여 그 해 말 은퇴했다.
185cm의 훤칠한 키에 이국적인 외모, 호쾌한 스윙 폼으로 두산 베어스의 원조 미남이자 1990년대까지 미스터 OB로 불리우던 선수. 2할 8~9푼 사이의 타격에 매년 평균 1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암흑기 OB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상대 팀을 위협하는 타자였다. 1987년에 승리 타점 1위[1] , 1993년에 최다 안타 1위(147개)를 차지했으며 1995년에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중장거리 타자로 통산 1300안타를 2번째로 달성한 선수이다.[2] 119홈런을 기록했으며 긴 팔다리를 쭉 뻗어 힘차게 휘두르는 스윙 폼은 1984년 LA 올림픽에 갔을 때 미국 국가대표팀에 참가했던 마크 맥과이어도 칭찬했을 정도.[3] 포지션은 우익수와 1루수였으며 우익수 시절엔 대표적인 강견으로 해태의 김종모, MBC의 신언호와 함께 멋진 송구로 진기명기에 자주 나오기도 했다.
1986년 9월 시즌 최종전에서 9회 말 최동원을 상대로 때린 동점 투런홈런은 이른바 ''''운명의 한 방''''으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회자된다. 이 홈런 한방으로 두 팀과 두 선수의 한 시즌 농사가 바뀌었는데, 이날의 역전승으로 OB는 그날 광주에서 해태를 상대로 먼저 승리를 거둔 MBC 청룡을 반 게임 차이로 제치고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4] , 김형석에게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된 최동원은 프로야구 최초의 '''3년 연속 20승'''을 눈 앞에서 놓쳤고(아직까지도 3년 연속 20승을 기록한 국내 선수는 없다), 이날 OB의 선발 투수인 최일언이 패전을 면하면서 승률왕 타이틀을 차지함에 따라 승률에서 뒤진 해태의 선동열이 자신의 '''프로 첫 트리플 크라운'''이 될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었다.[5]
전성기는 1989년~1993년 사이로 이후에는 점차 하락세를 보였으며, 1997년 외환 위기 때 야구단의 긴축 경영으로 방출당했다.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역으로 프런트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선수시절 OB의 간판이었음에도 다시는 구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전성기 시절의 622경기 연속 출장은 당시 연속 출장으로 신기록이었는데 이 기록 역시 위의 항명파동 사건으로 안타깝게 멈추고 말았다.[6]
3. 은퇴 이후
은퇴 뒤에는 홍익대 감독, 구리인창고와 상무의 코치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며 야구계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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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후 텍사스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다가 2012년 2월 친정 팀 두산 베어스의 스프링캠프 장소에 등장하며 오랜만에 야구계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구리인창고와 상무 코치 시절 제자들인 윤석민, 김태영, 이종욱을 모두 만나 위의 사진처럼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2017년, OB 시절 팀 선배였던 김진욱 감독이 kt wiz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함에 따라 그의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귀국해 kt 2군 타격코치를 맡으며 오랜만에 야구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1시즌 만에 재계약에 실패하며 다시 야인이 되었다.
4. 기타
- 암흑기의 OB를 지킨 버팀목과 같은 선수였음에도 최근의 젊은 두산 베어스 팬들에게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비운의 선수.[7] 아무리 좋게 헤어지지 못했다지만 이 정도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선수를 시구 한 번 불러주지 않는 두산 베어스 구단의 옹졸함이란... 그래도 1990년대 OB 프랜차이즈 선수였던 박철순과 김상호가 시구했으니 기대는 해 볼 만하다.[8]
- 여담으로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김세진 감독의 전 부인인 구나연 씨 사이를 이어줘 1999년에 결혼까지 하게 도와줬다. 그러나 결국 2004년에 이 둘은 합의이혼을 했다.
5. 연도별 성적
[1] 결승타. 결승타라는 것이 아무래도 일반적인 타점보다도 훨씬 운에 좌지우지하는 스탯이다보니 1989년을 끝으로 승리타점 타이틀은 폐지. 1990년부터 최다 안타 부문을 시상하기 시작했다.[2] 첫번째는 김성한[3] 1984년 LA 올림픽에 한국 대표팀과 미국 대표팀으로 각각 출전했다. 당시 야구는 정식 종목이 아니라 시범 종목이었다. 그 때 국가대표로 갔던 선수들이 강기웅, 류중일, 선동열, 이순철 등이 있다.[4] 정확히 말하면 해태 타이거즈와 동률이었지만 후기리그 1위결정전을 통해 우승을 차지[5] 당시엔 탈삼진 타이틀은 따로 시상하지 않았으며 다승, 승률, 방어율 타이틀을 트리플 크라운의 기준으로 삼았다.[6] 훗날 연속 경기 출장은 최태원이 2002년 9월 8일 1014경기로 신기록을 세웠다.[7] 두산은 김경문 감독 체제 이전 마지막 OB 베어스 시대 이후의 팬이 적고 특히 베이징 올림픽 이후 신규 유입된 젊은 팬들의 비중이 높아서 OB 베어스 시절을 모르는 젊은 팬들 사이의 심리적인 괴리가 큰 팀이다. 사실 94년 신바람 LG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 92년 등 리즈 시절을 기억하고픈 몇몇팀 외에는 꽤 오래 전 시대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다만 두산도 OB 베어스 김인식 감독 시절의 주축 선수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김경문 감독의 묵인 하에 의도적인 구 프랜차이저 지우기+세대교체도 한 몫 했다. 김상진을 모르고 그저 SK 코치라고 욕을 했던 시기가 있었을 정도. 1994년 항명 파동에 참가했던 선수들은 결국 두산에서 모두 쫓겨났고, 대부분 팬들에게도 잊혀졌다. 사실 90년대에도 좋은 기억이 충분히 있는 팀인데도 십수년에 걸쳐 이들을 견제하고 팀에서 밀어내면서 조금씩 흔적을 지워간 두산 프런트의 집요함이란...[8] 심지어 이 선수들은 항명 파동 때 주동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