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 베어스 항명파동

 


1. 개요
2. 사건의 구체적 내용
2.1. 원인
2.2. 사건의 시작
2.3. 수습&사회적 반향
3. 사건 이후
4. 변화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1994년 9월 4일, KBO 리그 팀 OB 베어스 선수 17명이 시즌 도중 윤동균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반발하여 팀에서 집단 이탈한 사건이다.

2. 사건의 구체적 내용



2.1. 원인


1992 시즌 OB 베어스 정식 감독에 취임한 윤동균 감독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993 시즌 돌풍을 일으키며 준PO에 진출, 제법 성공적인 출발을 보였다. 문제는 이 젊은 감독(당시 만 45세)이 우승에 도전하겠다던 1994 시즌에는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원인을 찾자면 1993 시즌에는 선발진과 김경원이라는 특급 마무리의 투수진은 굉장했으나 1994 시즌에는 팀 전력의 핵심인 김경원의 부상과 계투진의 붕괴, 선발진의 약화 등 믿었던 투수진마저 무너졌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95 시즌에 13년 만의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데에는 투수진이 정상화되고 거기에다 타선까지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감독이 교체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겠지만.
1994 시즌은 구단 순위에 그야말로 지각변동이 일어난 시즌이었다. 만년 하위권이던 쌍방울 레이더스야 늘 그랬듯이 망했지만(...) 같은 잠실 야구장을 쓰던 '''LG 트윈스는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내면서 인기 몰이 중'''이었고, '''과거 동네북 신세였던 태평양 돌핀스까지 정말 잘 나가자''' 윤동균 감독은 초조함에 자주 무리수를 연발했다. 거기에다 원년 멤버이자 팀 프랜차이즈 스타이던 윤동균 감독은 '대선배 출신 감독 - 후배 선수들' 이라는 위계질서 강조로 인해 선수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처럼 본인의 출신에 기반한 권위주의적 사고를 가졌던 윤 감독과 자율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던 고참 선수들간의 갈등은 심했다. 그렇다고 중견&신인급 선수들과는 잘 지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당시 신인급 주전 선수 가운데 항명 파동 당시 자리에 남은 선수는 윤동균 감독이 직접 데려온 김민호장원진 정도였으니...
그러나 두산그룹의 고위층과 친밀했던 윤동균 감독은 1992년과 1993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었고, 여기에 고무된 윤동균 감독은 더욱 더 선수단을 강하게 휘어잡으려고 하였다. 함께 가기 어려웠던 고참 선수들은 대규모로 트레이드 처리 또는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을 구상이었고 이런 분위기는 선수들도 슬슬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구상을 했으면 무언가 특별한 방법으로라도 선수들의 신뢰를 얻거나 공감대를 형성했어야 하는데,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원년의 군기 잡기를 고수했다는 점. 그렇다고 소통 방면에서도 딱히 잘 한 것은 없었다. 대표적으로 슬럼프였던 김형석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두고 중단시킬까 말까를 두고 은근한 압력을 넣었던 것이 좋은 사례다. 김형석은 선발 출장명단에서 뺐다가 9회 대수비로 넣는 경우가 많았다.

2.2. 사건의 시작


이렇듯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이어지던 윤동균 감독과 선수들과의 불안한 관계는 1994년 9월 4일, 군산 월명 야구장에서 열린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미팅 과정에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발단은 당시 투타의 리더격이던 박철순김형석이 음주를 하고 들어온 모습이 윤동균 감독에게 적발된 것이었다. 경기에 패한데다 분위기도 좋지 않은 상황에 고참이 술을 먹고 들어오자 윤동균 감독은 분노했다. 급기야 미팅 자리에서 배트를 들고 '''"오늘은 매를 들어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선참부터 차례로 나와서 선수 전원이 빠따를 맞는 소위 '''줄빠따'''를 맞을 것을 요구했다.[1] 그러자 당시 주장인 김상호가 '''"저희도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감독님의 지도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맞으면서는 야구 못 합니다"''' 라며 항변했고, 윤 감독이 '''"그럼 나와 야구하고 싶지 않은 놈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자 김상호를 비롯하여 박철순, 장호연 등 거의 20명 가까이 되는 선수들이 나왔다.
뚜껑이 열린 윤 감독은 옆에 있던 수석 코치 최주억에게 '''"최코치! 이 새X들 명단 적고 저녁 먹여서 서울로 올려 보내시오.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이런 새X들 하고는 더 이상 같이 야구 못해!"''' 라고 말하고는 방망이를 들고 김상호에게 다가가려다 코치들이 뜯어 말리는 통에 뒤돌아서서 씩씩거리며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총 17명은 숙소를 나와 선수단을 이탈해 버렸는데, 이 17명과는 별개로 이명수의 경우 처음엔 항명에 동조했으나 결국 이탈한 17명과 동행하지는 않았다.
전주에서 빠져나와 흩어진 선수들은 대전역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이 와중에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이탈 인원 전원이 최선참인 박철순의 뜻에 따르겠다는 압박 아닌 압박을 가했는데, 심사숙고한 박철순은 결국 대표로 짐을 떠맡게 된다. 다음 열차를 타고 자정 즈음에 서울에 도착하여 잠실 야구장에 주차해 놓은 승용차를 빼고, 9월 5일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플라자 콘도에 집결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6일 기자들에게 자신들이 이탈했음을 통보하고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연다. 리더격인 박철순은 자신의 선수 생활을 여기서 마감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윤 감독이 옷을 벗으면, 나도 같이 벗겠다"'''고 선언, 프로 원년 동료 선수로 함께 야구한 형님같은 사이인 윤동균 감독이 떠나면 자신도 야구를 할 수 없으니 깔끔하게 둘이 책임지자고 말했다.
사실 OB 베어스의 프런트는 그들의 이탈을 당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유부단하게 미적거리다가 사태를 키우고 말았던 것. 이에 대해서는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윤동균 감독을 퇴진시키기 위해 고의로 방관했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을 제기한 사람이 스포츠서울이종남 기자. 이 가설이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OB 프런트가 다소 수수방관하고 어정쩡하게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선수들을 대규모로 방출 또는 임의탈퇴 시키든지 해서 강하게 수습하든지, 아니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빨리 이끌든지 했어야 했는데 모든 문제가 결정이 된 것은 항명 이후 열흘이 지난 9월 14일이었다. 그 사이 경창호 사장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가 반려되고, 윤동균 감독의 신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2.3. 수습&사회적 반향


결국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윤동균 감독의 사임과 항명 선수들의 복귀. 단, 항명을 이끈 선수들 중 5명의 고참인 박철순, 장호연, 강영수, 김형석, 김상호의 경우 원래 방침은 방출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부임한 김인식 감독이 김형석, 김상호의 잔류를 강력히 요청했기 때문에 이 둘은 잔류하게 되었다.[2] 당시 관련 영상
또한 박철순의 경우, 인간 승리의 살아있는 전설로 등판할 때마다 공 하나에 OB 팬들이 울고 웃는, 팬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던 존재였고, '''OB의 박철순'''이 아닌 '''박철순의 OB'''라는 표현이 맞는 그야말로 프랜차이즈를 넘어 '''OB 그 자체'''였다.[3] 이런 박철순을 방출시킬 경우, OB는 스포츠 구단의 존재의의 그 자체인 팬들의 대거 이탈로 구단 운영이 아예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로,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잔류시켰다. 여기에는 당시 처음 등장한 하이텔 PC 통신 불사조 동호회의 장외 서명운동이 큰 역할을 했으며, '''OB 베어스의 팬 = 박철순 개인 팬'''이니 만큼, 여론은 절대 구단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또한 박철순은 '''실제로는 떠밀리듯 후배들의 짐을 떠맡아 대표자로 나설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며, 공개적으로 윤동균에게 양 쪽 모두 책임이 있으니 함께 물러나는 게 가장 좋다는 입장으로 마무리한 후 은퇴를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박철순의 대한 팬들의 존경과 지지가 구단에서 생각한 것과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라, 박철순은 은퇴하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은퇴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급기야 구단에서 박철순에게 은퇴를 철회하고 복귀를 바라는 은근한 호소마저 있었다. 단순한 팬층의 이탈이 아닌, ''''박철순을 버리면 OB를 버리겠다''''라는 여론이 너무 거대해져서 두려워진 구단이 먼저 손을 내민 것. 그 외에도 박용곤과 박철순의 관계는 구단주와 단순한 선수가 아닌, 기적 같은 재기를 이룬 과정에서 끈끈한 인간 관계가 있었기에, 프런트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다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화살은 다른 선수들에게 돌아갔는데, '''바로 장호연강영수였다.''' 강영수는 자유계약으로 OB에서 방출되자마자 곧바로 태평양 돌핀스가 영입하였다. 사실 항명 주동자 중 강영수의 혐의가 가장 가벼웠음에도 그를 방출하는 것에 대해 찜찜해 하던 OB는 태평양에서 강영수의 영입 의사를 밝히자[4] '''"아이고 어서 데려가십시오"'''라는 심정으로 강영수를 웨이버로 풀었다고 한다. 그렇게 태평양 유니폼을 입은 강영수는 이듬해인 1995년 중심 타선을 꿰차고 21개의 아치를 날리며 홈런 랭킹 4위에 오르는 활약을 보였다. 타율은 0.243으로 영 좋지 않았지만(...), 원래 타율보다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갈포 기질이 강했던 선수였던지라 이 정도면 제법 만족스러운 성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킨 장호연이 남아있었다.''' 이전에도 팀의 에이스라는 것을 배짱삼아, 구단과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 매 해 심각한 마찰을 일으킨 장호연을 구단에서 내보내기 위해 OB 프런트는 온갖 수를 썼다. 하지만 그룹 고위층에서 강영수 방출에 대해 구단을 강하게 질책하며 "장호연을 (강영수처럼)공짜로 내보낼 생각 말라"는 지시를 내려 무상 트레이드나 웨이버 공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급기야 장호연을 대만프로야구 준궈 베어스로 트레이드 시키려는 꼼수도 쓰려 했지만, 당시 대만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양 국가간 선수계약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트레이드 자체가 위법이었던 지라 OB는 여론의 뭇매만 실컷 맞았다(...).[5][6] 애초에 구단과도 감정이 좋지 않았던 장호연 또한 '''"내가 유니폼을 벗으면 벗었지 OB에서는 죽어도 못 뛴다"''' 라고 강하게 나오며 구단과 장호연의 사이는 더 악화되었다. 결국 당시 스포츠서울 야구부장 이던 이종남 기자가 장호연을 설득하고, 언론계 선배인 경창호 사장[7]과 장호연 사이를 직접 중재하면서 장호연은 다시 OB와의 인연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그 대가로 연봉 삭감 최대치인 25%를 연봉에서 삭감했지만(...).
덧붙이자면 장호연은 팀을 이탈해 있던 기간에 모교인 충암고에서 개인 훈련을 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해 줬는데, 이 때 그에게 지도받은 투수 중 한 명이 바로 '''박명환'''이었다. 야구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후 박명환OB 베어스에 입단해 1996~2006년까지 베어스의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더불어 이 사건의 총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경창호 사장은 뚜렷한 대응을 보이지 못하고 미적대다가 이종남 기자로부터 '''"선수들 살리는 셈 치고 희생하시라"'''며 구단 사장에서 내려올 것을 권유 받았는데 경 사장은 '''"내가 사장된 지 3년 만에 당신이 처음 해주는 충고가 물러나라는 소리인가? 난 그렇게 못하겠다. 앞으로 3년은 더 해먹을거야"''' 라고 거절했지만, 그 다음 날 아침 구단 고문이던 박용민 전 사장과 함께 구단주인 박용곤 회장을 찾아가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사표를 박박 찢어버리며 "이게 뭐하는 짓이야! 허튼 생각 말고 사건이나 잘 수습하라" 고 반려해 버렸다고 한다. 이 스토리는 며칠 후 박용민이 이종남을 만난 자리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털어 놓았는데, 이종남은 '''"이거 (기사로)써야 한다. 선수들을 위해 사장이 희생한 건데 오히려 외부에 알려져야 경 사장 입장이 산다. 나중에 반려되었다고 후속 기사 내겠다"''' 라고 박용민을 설득하여 결국 다음 날 지면에 '''경창호 사장이 살신성인 했다'''는 요지로 사표 제출 건을 기사화 했다.
시즌 잔여 경기는 선수 17명이 한 번에 빠져나가 꾸려나가기 어려웠지만, 2군에서 급히 선수를 끌어다가 간신히 메웠다.[8] 한 때, '''잔여 경기 몰수패'''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것만은 막아내는데 성공.
그리고 윤동균의 후임 감독으로 김인식이 취임했는데[9], '''이 사람이 9년이나 OB-두산의 지휘봉을 잡게 될 줄은 당시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두 번의 우승까지도.''' 김인식 감독은 이 막장으로 간 팀을 다음 시즌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당시 이 사건은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 문화의 한 사례로 지목되어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윤동균 감독은 졸지에 '''프로 선수에게 매질을 한 폭력 감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사실 윤동균 감독이 종종 흥분을 못 이겨 선수의 따귀를 때리거나 한 일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당시 스포츠계의 문화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였고, 프로야구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구타나 기합 문화가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한 케이스라고 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10] 물론 그랬다고 윤동균 감독에게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도 된다'''' 같은 건 어린아이들에게나 통하는 변명이고 팀을 잘 관리했어야 하는 감독이 선수들의 일탈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윤동균을 표현하는 문장은 '강할 때 너무 강하고, 약할 때 너무 약하다' 였다. 즉, 다혈질에 불같은 성격으로 보여주기용 쇼맨십을 곁들여 너무 오버해서 치고 나가지만, 인정에 끌리거나 마음이 약해지면 안되는 상황에서 결단을 못내리고 우유부단한 면이 강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OB 베어스 창단 성골'''이라는 점도 있지만, 구단에 정치적인 스탠스로 이전부터 많은 구설수에 올랐으며, 결국 감독 자리에 낙점되었을 때도 팬들의 비아냥이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구단을 기웃거리며 코치, 프런트로 복귀를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있지 못하다.
어쨌든 이 사건이 선수들에 대한 동정론으로 흘러간 데에는 ''''체육계의 폭력 문화''''라는 매스컴의 이슈화 덕이 컸고, 애초에 비난 여론이 많던 윤동균 감독을 끝까지 감싸려던 두산 구단도 여론에 밀리면서 결국 윤동균 감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일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이후 윤동균은 2001~2002년 이광환 감독 휘하에서[11] 한화 이글스 수석 코치를 잠시 지낸 것 이외에는 현장과의 인연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다만 KBO의 운영 위원으로 재직하며 야구계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3. 사건 이후


복귀한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연봉을 백지 위임하거나 장호연처럼 대폭 낮춘 액수로 계약하면서 몸을 낮추었다. 아무래도 ''''감독을 짜르고 살아남은 하극상의 주역들''''이라는 선배 야구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테니... 다만 장호연 못지 않은 막가파 스타일이었던 김상호만은 "그동안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한 만큼 이번만큼은 올려 받아야겠다. '''안 올려주면 은퇴하겠다.'''"는 폭탄 선언으로 다시 한 번 프런트의 속을 뒤집어 놨다(...). 결국 신임 감독의 '원만한 처리'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프런트는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김상호의 연봉을 조금 올려주는 선에서 재계약했다. 사실 김상호를 꼭 막무가내라고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당시 OB 구단의 연봉협상은 더 가난했던 해태 타이거즈보다도 짜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김상호가 "'''지금 받는 연봉보다 더 깎이느니 그냥 지금 벌여놓은 개인사업에 전념하는게 낫겠다."'''고 했을까.[12]
그 이듬해인 1995년, 항명 파동의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고, 1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베어스 프런트는 이 때 가담한 선수들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정말로.'''
  • 박철순: 2군 코치 시절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되어 면허정지처분을 받기도 했고, 구타로 문제가 된 선수를 옹호하다가 논란이 되어 자진 사퇴한 뒤[13] 한동안 야구계로 복귀하지 못했다. 이후 스포츠용품 사업을 하다가 건강 문제로 한동안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이후 2015년 스리랑카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었다. 그래도 아래의 다른 가담자들보다는 대우가 훨씬 나은 것이, 원년 한국시리즈의 주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박철순의 인기와 그 상징성이 어마무시 했기 때문에 은퇴식은 물론 영구결번까지 해 줬다. 박철순의 팬이었던 OB아재들이 그대로 두산팬이 되었기에 구단에서 시구 등의 각종 행사를 할 때마다 꾸준히 초청받는다.
  • 김형석: 1997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삼성으로 건너갔다. 1998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으며, 그 뒤 홍익대구리인창고 감독을 거쳐 현재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2017 시즌부터 kt wiz 2군 타격코치로 합류했으나 1시즌 만에 재계약에 실패하여 야인 신세가 됐다.
  • 장호연: 두산에서만 109승을 거둔 선수지만, 1995 시즌이 끝나고 곧바로 방출되어 은퇴식 없이 은퇴해야 했다. 순천 효천고신일고 감독을 거쳤으나 메이저 리그 진출 문제를 둘러싸고 일으킨 문제로 인해 아마야구계에서 무기한 자격정지를 당했다. 2010년 무렵 자격정지가 해제됐으나 현장과의 인연은 없는 상태.
  • 김상호: 이듬해 두산의 우승을 이끌며 MVP를 차지하지만, 노쇠해진 후 1998년 시즌 끝나고 류택현과 함께 현금 1억에 LG로 트레이드되었다. 결국 2000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은퇴했다.
  • 강영수: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한 1995년에 21홈런[14]을 치면서 화려한 시즌을 보냈지만 그걸로 끝. 1996년 부진에 빠진 후 결국 1997년 시즌 중 쌍방울로 트레이드돼 거기서 선수 생활을 끝냈다. (아래의 강영수와 달리 1965년생)
  • 김상진: 팀의 에이스로 1995년 우승의 주역이긴 하지만, 모기업인 두산이 돈이 없는지라... 3억원에 1998년 시즌 후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 되었으며 2001 시즌이 끝나고 SK로 트레이드, 그 뒤 2003년에 SK에서 은퇴했으며, 2005년부터 2016년까지 SK 와이번스 코치로 있다가 2016년 시즌 끝나고 코치직을 삼성 라이온즈로 옮겼다. 그 후 무려 22년만에 베어스 코치로 돌아왔다.
  • 권명철: 역시 1995년 팀의 선발 투수로 우승의 주역. 그러나 군 복무 이후 기량이 쇠퇴했다. 거기에 교통사고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리막을 걸었으며, 결국 1998년 시즌 후 최훈재, 이재만과 맞트레이드되어 해태로 건너갔다[15]. 그 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고향 팀인 SK에서 뛰다가 1998년 시즌 후 트레이드로 떠난 두산에 2003년부터 복귀해서 2004년 시즌 뒤 은퇴해 코치까지 지냈다가 2011 시즌에 잠시 LG에서 투코를 지냈다. 이후 다시 두산에 돌아와 코치 생활 중.
  • 이광우: 항명 파동의 주동자 중에서는 비교적 오래 남았다. 2001년까지 두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2001년 5점대 방어율을 찍고 방출. 결국 2002년 LG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고, KIA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2011년 화순고 감독을 거쳤다. 그리고 2014년부터 두산에 코치로 복귀.
  • 강길룡: 1999년까지 뛰다가 조용히 은퇴. 2013년까지 경기고 감독으로 재직.
  • 김익재: 1995 시즌을 끝으로 방출. 그래도 현대 유니콘스로 건너가서 왼손 원포인트로 1999년까지 뛰었다.
  • 임형석: 1990년대 초 OB의 주전 3루수로 전성기를 맞나 싶었으나, 91년 1차 지명 황일권이 입단했다. 황일권은 3루수를 원했고 임형석은 다시 유격수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일권과 임형석은 동반 부진하였고, 임형석이 다시 3루로, 황일권을 유격수로 돌렸지만 성적 반등은 어려웠다. 여기에 OB 베어스 항명파동에 연루까지 되었다. 항명파동사건 여파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고 1997년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현재는 유소년 야구단 코치로 재직중.
  • 박현영: 이도형의 원조 유형의 포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1997년 이정훈의 트레이드 상대로 삼성으로 건너갔다. 이 때 같이 건너간 강영수라는 선수가 있지만, 위의 강영수와는 동명이인.(1973년생) 여하튼 그리고 나서 쌍방울로 다시 가서 거기서 은퇴.
  • 김종성: 그다지 활약한 선수가 아니라 1997년 시즌 후 바로 방출.
  • 김종석: 1루수였는데, 우즈가 입단하면서 결국 1루 주전을 빼았겼다. 더군다나, 지명타자도 이도형최훈재가 있어 자리를 못잡았고. 2000년 한화로 현금 1억 원에 트레이드[16].
  • 추성건: 아마야구 최고의 강타자였지만, 프로의 나무 배트에 적응하지 못하며 밀렸다. 결국 1999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쌍방울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 팀이 다음 해 1월 해체된 뒤 그 주축 선수들을 필두로 창단된 SK로 이적했으며, 2002년에 은퇴했다.
  • 이종민 : 이듬해인 1995년 무면허 운전으로 의경을 치여 숨지게 한 교통 사고로 구속되어 2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복귀해서 2003년까지 뛰었지만, 은퇴식이나 코치는......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
  • 안경현: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기 때문에 안경현만은 다른 16인과는 다른 운명이겠지 했는데, 결국 그도 2008년 시즌 후 방출되어 2009년 SK로 이적해야 했다. 다만 안경현은 이 사건 자체와는 무관한 김경문[17]과의 불화[18]가 큰 원인이다. 현재는 SBS Sports의 야구 해설 위원으로 있다.
보면 알겠지만, 두산에서 대접 받으면서 은퇴한 선수도 거의 없고, 심지어 2000년대까지 두산에서 잠시라도 코치를 맡았던 사람은 '''박철순, 권명철 단 두 명.''' 박철순은 위의 사건을 계기로 아예 염증을 느껴 야구계를 떠났고 권명철은 한 번 두산을 떠난 적도 있었다. 두산 프런트는 '''이 때의 일을 정말 끝까지 잊지 않고, 제대로 보복했다.''' 그런데 사실 항명 파동에 가담한 선수들의 그 후 이력을 보면 다른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선수도 꽤 보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른 사고 때문에 예우를 못 받는 경우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두산 프런트들이 지금도 구단의 중역에 포진하고 있는 이상[19] 앞으로도 이들이 예우받을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4. 변화


하지만 사건 당시 선수들과 갈등을 빚은 프런트들이 대부분 팀을 떠나고, 2011년 이후 각 구단들이 과거의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우대해주는 바람이 불면서 두산에서도 프로야구 창설 30주년을 맞아 2011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우승 반지가 없었던 시절인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들을 초청해 우승 반지를 수여하거나, 2011년 8월 21일 '''김상호'''를 시구자로 초청했다. 더군다나 김상호는 항명 파동 멤버 중에서도 '''가장 구단 속을 썩이던 선수'''였다.
그리고 2011년 시즌 후, 두산 베어스의 신임 김진욱 감독이 코칭스태프를 개편하면서 LG 트윈스의 코치로 뛰던 권명철을 투수 코치로 다시 영입했다. 특히 이전에도 두산 코치로 재직했었고 항명 파동에 연루된 인물이던 그를 두산이 다시 영입한다는 것은 항명 파동 멤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베어스 팬들은 반색하는 중. 이후 이광우도 2014년에 두산 코치로 복귀했다. 김상진도 2020년에 두산 코치로 무려 22년만에 복귀했다.
김형석은 2012년 2월, 두산 베어스의 전지훈련장을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하고 두산의 선전을 기원했으며, 2015 시즌 두산이 14년 만의 우승을 차지하자, 박철순김상호가 축하 인사를 남기는 등,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자.
그리고 감독직에서 사퇴한 윤동균은 사건 이후 세차장에서 박철순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날 같이 소주 한잔 기울이며 박철순이 '''"형님,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숙여 사과하자 윤동균 자신도 '''"좀 더 빨리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느냐. 나도 미안하고 내 잘못도 컸다. 더 이상 우리 얼굴 붉히지 말고 살자"''' 고 흔쾌히 받아들이며 눈물 어린 화해가 이루어졌고, 박철순의 은퇴식에도 참여하여 자리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 외 다른 사건 주동자들과도 화해하며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야구 선후배로서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산 베어스의 역대 감독 소개에서도 윤동균에 대해서 악의적인 멘트는 없고, '''"베어스 간판 선수 출신으로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던 윤동균 제 5대 감독은 부임 후 무명 선수 발굴 등 부족한 환경 속에서 팀의 경쟁력을 키워내며 베어스의 팀 재건과 상위권 토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라고 긍정적으로 기재되어 있다.[20] 두산의 역대 감독들에 대해서는 공홈에 대부분 좋은 업적을 추려 소갯말을 적었지만, 단 1명은 대놓고 깐다(...).
즉, 어떻게든 항명 파동에 관계된 인물들 대부분은 화해가 이루어진 셈이다. 사실 항명 파동의 주동자들 상당수가 베어스 프랜차이즈 영광의 순간인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의 팀 창단 이후 2번째 우승의 공신들이기도 하고, 2020년 현 시점에서 20년이 훨씬 넘게 더 지난 일인데 계속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기는 하다.
덧붙이자면, 이 사건 이후 윤동균의 현역 시절 등번호 '''10번'''의 영구결번 지정이 해제되었다.

5. 여담


항명 파동이 일어난 곳은 전주군산으로 원정 경기를 오는 팀들이 묵는 숙소이던 전주 코아호텔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2년 전인 1992년에 OB 선수들 사이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2년에 귀신을 목격했다고 하는 선수가 김상호와 박현영.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이들은 항명 파동에 가담한 선수들 중 하나였다. 이래서 항명 파동의 뒤에 귀신의 장난질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돌았다나...
사실 쌍방울의 1994년 시즌 최종 성적이 OB보다 더 처참해서 그렇지, 어찌 보면 OB의 그 해 시즌을 꼬이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은 쌍방울이라 할 수 있었다. OB는 당시 개막전을 잠실에서 쌍방울과 치렀는데, 1982년 개막전 이후 무려 '''12년 만에 대통령이 시구를 하고 경기를 지켜보는 개막전'''이었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윤동균 감독은 개막전을 반드시 이기기 위해 장호연, 강병규, 김익재, 홍우태 등 투수 자원을 거의 다 끌어 썼지만, 정작 연장전에서 박경완에게 결승 홈런을 얻어맞으며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이후 김경원이 손바닥 부상으로 이탈한 마당에 투수 운용이 꼬여버리자 OB의 순위는 5월 이후 곤두박질쳤고, 결국 이것은 항명 파동의 씨앗이 되었다. 더구나 항명 파동이 일어나던 당일 패배했던 경기 상대도 역시 쌍방울이었다. 여기에 위에서 언급된 전주 코아호텔의 미스터리까지 합하면... 1994년 쌍방울과 OB 사이에 뭐가 낀 게 분명하다(...).
그리고 20년 후 다른 구단에서 이를 뛰어넘는 사건이 일어난다.

6. 관련 문서


  • KBO 리그/사건사고
  • 흑역사/목록/야구
  • 김성한 구타 사건[21]



[1] 그러나 당시 OB 베어스 선수였던 안경현은 훗날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줄빠따는 와전된 이야기이고 윤 감독이 단순히 얼차려를 시키고 겁을 줬던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2] 김인식이 프런트에 "김상호 빼고 무슨 야구를해?" 라고 일갈했다는 후문이 있다.[3]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9회가 되자 팬들은 OB가 아닌 박철순을 계속 연호했으며, 우승이 결정된 후에도 박철순! 박철순!을 목이 터져라 연호했으니... 실로 팀 이상의 존재였다.[4] 당시 태평양 감독 정동진은 강영수의 대구상고 선배이자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사제지간이었고, 그 인연으로 태평양 프런트에 강영수 영입을 요청한 것이다.[5] 이 때 이종남 기자는 '''"OB가 이제는 악수도 모자라 꼼수까지 쓰려 든다. 만약 팀의 에이스 급 투수가 대만 구단과 결탁하여 소속을 옮기려 든다면 가만히 놔둘 셈인가?"''' 라면서 OB를 다소 몰아붙이는 투의 기사를 소속사인 스포츠 서울 지면에 올린 바 있다. 나중에 이기자는 자신의 저서 '''이중노출'''에서 기자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마치 장호연의 대리인인 양 나섰던 점은 경솔했다고 경창호 사장을 비롯한 OB 구단 측에 대하여 사과의 언급을 남겼지만...[6]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준궈 베어스와 자매 구단이었던지라 한희민을 팀에서 방출한 이후 외국인 선수로 영입하는 형태로 준궈 베어스로 트레이드 시킨 전력은 있다. 다만 항명사건 당시에는 OB 또한 베어스라는 같은 팀명을 쓰는 점에서 준궈와 자매 결연을 맺은 상태였다. 물론 한국-대만간 선수협정이 체결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7] 경창호는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복무한 뒤 1967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였다. 1974년 두산그룹 계열의 합동통신(1980년 언론통폐합연합통신에 흡수통합)으로 이적하여 연합통신 사회부 차장으로 근무하던 중 합동통신 선배인 '''박용민''' OB 베어스 단장의 제의를 받고 1983년 10월, OB 운영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야구와 연을 맺었다.[8] 이 때문에 1994년 OB는 1군에서 뛴 기록이 있는 선수가 유난히 많았다. 타자만 해도 33명이 1군 기록이 있으며 이는 다음 해인 1995년보다 10명이나 많은 수치다.[9] 처음엔 선수 장악에 있어서 강성 타입인 백인천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인화력이 있는 김인식이 낙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베어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10] 대표적으로 김응용 감독은 그의 해태 감독 시절을 기억하는 팬은 다 알 정도로 구타나 얼차려가 꽤 있었고, 김성근 감독도 쌍방울 시절까지 간혹 구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김 감독의 수제자인 외야수 심성보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사랑의 매"라고 표현하기는 했다). 또 김성한 전 감독의 경우, '''2004년'''에 선수 구타 때문에 감독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사실 지금도 '체육계 폭력 심각' 운운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11] 윤동균이광환은 OB 원년에 고참 선수와 타격코치의 관계였으며, 나이 차도 적었기에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 외에도 80년대 후반에 은퇴한 윤동균이 이광환 밑에서 타격 코치를 하기도 했었고....[12] 실제로 김상호는 은퇴한 후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외식사업에 종사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13] 이외에도 박철순은 구타관련해서 내로남불이 심한데 대학생 시절에는 후배였던 최동원을 구타하다 전치 3주의 중상해를 입히기도 했다[14] 다만 여기서도 감안해야 할 점이 있다면 홈 구장의 변화다. 강영수는 트레이드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썼다. 그러나 트레이드를 통해 당시 홈 구장이 가장 작았던 숭의야구장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숭의야구장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과 비교할 때 홈에서 좌우측 펜스까지의 거리는 9m 짧고 중월 펜스까지의 거리는 무려 15m가 짧았다. 쉽게 말해 잠실에서 펜스 근처 깊숙한 플라이 볼로 잡힐 공이 인천에서는 홈런이 되는 셈이다. 숭의야구장은 이러한 약점을 메우기 위해 기존 1.5m 펜스 위에 높은 철망을 덧대는 방식으로 펜스를 운용했다.[15] 당시 OB는 왼손 강타자와 쓸만한 좌완 원포인트 투수를 구하기 위해 최훈재와 이재만을 영입했다[16] 2004년 시즌 후 은퇴했으며 하필이면 김종석이 방출될 당시 95~2000년 시즌 중까지 베어스 재직 때 사령탑이었던 김인식 감독이 들어오면서 한화 프런트는 김종석을 포함하여 대부분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던 선수들을 대거 정리했다. (김종석-OB 베어스 항명파동에 가담. 한용덕(2004년 시즌 후 은퇴) - 빙그레 시절 비북일파 VS 북일파로 파벌이 나눠질 당시 북일파의 주요 인물 장종훈(2005년 시즌 후 은퇴) - 빙그레 시절 비북일파 VS 북일파로 파벌이 나눠질 당시 비북일파(세광고)의 주요 인물) 등등)[17] 당시 삼성 라이온즈 코치였다.[18] 전지훈련 배제는 기본이요, 공개적으로 은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안경현은 이를 거부하고 이렇게 할 바엔 차라리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구단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안경현은 SK로 이적했다. 이 덕분인지 당시 SK의 전성기를 이끌던 김성근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듯. 사실 안경현과 김성근의 아들 김정준은 친구 사이기도 하고...[19] 대표적인 인물이 김태룡 단장과 김승영 전 사장.[20] 사실 맞는 평가인 것이, 당시 윤동균 감독이 중용하기 시작했던 김민호, 김상진, 안경현, 장원진 등의 신예들은 이후 베어스의 코어로 성장해 좋은 모습을 보였다. 또한 재임 도중 박노준을 대가로 영입한 이광우는 윤 감독의 재임 기간 동안 맹활약했고, 사퇴 이후에도 투수진의 마당쇠 역할을 하며 베어스의 투수진을 지탱했다.[21] OB 베어스 항명파동과 다른 점은 이 사건은 주축 선수들이 집단항명을 일으켰고 김성한 사건은 선수들이 감독을 두둔했다는 것이다. KIA 타이거즈해태 시절의 똥군기 악습이 KIA로 간판이 바뀐 후인 2002년에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증거이다. 괜히 이듬해인 2003년 최용호가 KIA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