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1896)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청해(靑海).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남편은 독립유공자 김성업이다.
2. 생애
1896년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장별동(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서문동)에서 아버지 박정규(朴貞圭)와 어머니 최광명(崔光明) 사이의 8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5세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정진소학교와 평양 숭의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의고등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3년 김경희·황애덕(黃愛德) 등이 주도·조직한 비밀결사 송죽형제회(松竹兄弟會)에 가입하여 항일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지사 가족들에 대한 후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녀는 졸업 후 전주 기전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교내에 송죽결사대 지부를 조직하고 황애덕에 이어 제3대 회장에 선임되어 송죽형제회를 이끌었으며, 기전여학교에서 과외수업으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등 구국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평양 남산현교회 유사(有司)로서 평양 부내의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소위 보안법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19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기각되고 그해 9월 29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신병으로 인해 이후 집행유예로 출옥하였다.
그해 11월에는 기독교 감리파와 장로파의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통합하여 확대·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평양감리파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재무부·교통부·적십자부의 부서를 갖추고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역의 부인회 조직을 그 지회로 흡수하였으며 본부는 지회의 연합체적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이후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와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써 2천 백여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전개하던 중 그녀는 1920년 12월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송부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5월 28일 가출옥하였다.
그후 박현숙은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1927년에 결성된 근우회(槿友會)에 가입하여 1928년 7월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9년 7월 평양지회 정기대회에서 조신성 등과 함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무부와 검사부의 분과를 맡아 항일독립운동 및 여성의 지위향상 등에 전력했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 반전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6년 대한여자국민당 총무부장을 지냈으며,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자 1952년 감찰위원회 감찰위원#, 무임소장관을 지냈다. 1953년 대한애국부인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숭의여자중학교·숭의여자고등학교를 재건하여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여성운동 및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강원도 화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통령표창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 뒤에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 3.1 여성동지회 회장, 전국여성단체 최고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으며, 그해 12월 31일 별세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