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말리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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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밥 말리
BOB MARLEY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4년'''
'''후보자격 연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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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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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말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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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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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밥 말리
BOB MARLEY
'''
'''}}}#ffd700 입성 연도}}}'''
'''}}}#ffd700 2010년}}}''' 출처 참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밥 말리
BOB MARLEY
'''
'''분야'''
'''음악'''
'''입성날짜'''
'''2001년 2월 6일'''
'''위치'''
'''7080 Hollywood Blvd.'''



'''밥 말리
Bob Marley
OB[2]
'''

'''본명'''
로버트 네스타 말리 (Robert Nesta Marley)
'''국적'''
자메이카 [image]
'''출생'''
1945년 2월 6일
세인트엔 교구
'''사망'''
1981년 5월 11일 (향년 36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사회 운동가
'''장르'''
레게, 스카, 록스테디
'''활동'''
1962년~1981년
'''데뷔'''
1965년 웨일러스 1집 "The Wailing Wailers"
'''배우자'''
리타 앤더슨 (1966년 결혼)
'''자녀'''
샤론 말리 (1964년~)
세델라 말리 (1967년~)
지기 말리 (1968년~)
스티븐 말리 (1972년~)
로한 말리 (1972년~)
스테파니 말리 (1974년~)
줄리안 말리 (1975년~)
키마니 말리 (1976년~)
데미안 말리 (1978년~)
마케다 말리 (1981년~)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
2. 삶
3. 미디어매체에서
4. 기타
5. 이어폰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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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King of Reggae'''

'''Love the life you live Live the life you love'''

밥 말리는 자메이카 출신 음악가이며 '''제3세계 음악인 레게 장르를 전 세계적으로 저변 확대시킨 거장'''이자 '''역대 최고의 레게 스타'''로 불린다.[3]

2. 삶


영국군 장교[4]였던 중년의 백인 아버지 노벌 싱클레어 말리(Norval Sinclair Marley)와 10대 흑인 어머니 세델라 맬컴 부커(Cedella Malcolm Booker) 사이에서 자메이카 트렌치타운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밥 말리는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와 함께 16세에 가수로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5]. 그들은 드리프터즈, 임프레션즈, 샘 쿡, 컨트리 가수 짐 리브스와 당시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2년에 그는 Wailing Rudeboys로 알려진 Teenagers와 함께 첫번째 음반인 "Judge Not"을 발표했다. 이후, 팀명으로 웨일러스(Wailers)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평범하지 않은 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어 자메이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SKA'비트 음악을 시도했고, 그래서 "rude boy music"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에 밥 말리는 리타 앤더슨과 결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자메이카로 돌아온다.
이때에 자메이카에서 급속히 성장한 래스터패리교[6]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SKA, Rude Boy music과 더욱 발전한 형태인 "rock steady"로 그의 곡들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다. 그러나 1973년 이전까지는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가 Island Record에서 그의 첫 음반을 만들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Stir It Up"과 Peter Tosh의 "Stop That Train"이 포함된 "Catch a Fire"를 발표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처음으로 레게를 소개하게 되었다.
1974년 웨일러스 멤버와 결별하고 I-Threes(그의 아내 리타가 포함된 여성 보컬 트리오.)를 조직한 후, 발표되자마자 레게의 클래식이 돼버린 '''"No Woman, No Cry"'''와 '''"Lively Up Yourself"'''가 수록된 아주 뛰어난 명반, "Natty Dread"를 발표했다. 1974년 당시 밥 말리 곡 중의 하나인 "I Shot the Sheriff"는 에릭 클랩튼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그 곡은 팝 싱글 1위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한 Strictly Business라는 넘버가 EPMD에 의해 발표되기도 하였고, 이 노래의 가사는 나는 전설이다 2007년판 영화에서도 가끔 언급된다. 70년대 말, 밥 말리는 "Rastaman Vibrations"와 "Exodus"가 미국시장에서 약진하고 있을 때 또한 "Exodus", "Waiting in Vain", "Jamming" 그리고 "Is This Love"등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트랙을 갖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축구를 무척 즐겨 했는데 1977년 말리와 웨일러스(Marley and Wailers)의 유럽투어 때 프랑스 기자들과 함께 축구시합을 했다. 경기중에 그는 발에 부상을 입었고[7],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있던 암세포를 발견했다. 암 치료를 거부한 그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투어 했다. 뉴욕에서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하여 실황을 담은 "Babylon by Bus"를 발매했고, 뉴욕 공연은 레게 역사상 가장 파워풀한 라이브 공연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해 자메이카 킹스톤에서 평화를 위한 콘서트와 보스턴에서 흑인 자유투사를 위한 자선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무리한 투어 일정은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image]
말리는 음악 활동 후반에 노래를 통해 정치적인 메시지를 표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1978년 4월 22일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자메이카 방문 12주년 기념 콘서트로 'One Love Peace Concert'를 열었는데, 이 콘서트의 마지막에 말리는 당시 자메이카의 총리였던 마이클 맨리(국민국가당)[8]와 에드워드 시가 노동당[9] 총재와 삼자 악수를 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당시 자메이카 정계는 정치깡패들이 정적에게 거리낌없이 총을 갈겨대고 심지어 그 정도가 내전에 가까웠대던 시절인데다 말리가 공연하던 때에 자메이카 총선이 얼마 앞둔 시점이기도 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던 말리의 뜻이 공연에 그대로 표출됐던 셈.[10] 이후 1979년 "Survival"을 통해서 이전과 달리 공격적으로 그의 정치적인 색채를 표현했다.
1980년 다시 투어에 나선 그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조깅하다가 쓰러졌다. 은 그의 뇌와 폐 그리고 심장에까지 퍼져 있었고 8달 후 사망했다. 사망하기 7달 전인 1980년 11월 4일 라스타파리 운동을 버리고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대주교 Abuna Yesehaq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일생을 잘 정리한 글

3. 미디어매체에서


2012년 8월 2일 그의 생애를 담은 영화 '말리'가 개봉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IMDB 평점 7점 후반대로 준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20세기 폭스 애니메이션이 밥 말리 노래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아들 지기 말리가 공동으로 전기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링크

4. 기타


아들로 지기 말리, 스테판 말리[11], 데미안 말리, 줄리앙 말리, 카이마니 말리, 로한 말리[12]가 있다. 자식은 총 15명이며 그중 4명(앞에서 언급된 아들 지기, 스테판 외에 아들 아딘고 아준타바 리건(Adingo Azuntaba Regan)과 세델라)은 아내 리타와의 사이에서 낳았고 3명(샤론 말리와 스테파니 말리와 세리타 스튜어트)은 리타가 다른 남자와 낳은 아이들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머니가 다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연기획자들 중에는 아직도 밥 말리가 생존해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공연 기획할 때 밥 말리 출연 섭외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의 손자인 스킵 말리가 최근 케이티 페리의 노래인 "Chained to the Rhythm"을 피처링 했다.
여담으로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비슷한 밥 딜런과 헷갈리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

5. 이어폰 브랜드


그의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밥 말리의 이름을 딴 'The House of Marley'라는 이어폰/헤드폰을 출시했다. 수준미달의 폐급 음질과 친환경 소재(목재, 직물, 재활용 알루미늄 등)[13], 구입 시 수익금 중 일부 사회단체(1Love.org)에 환원 운동을 하는 것이 이 브랜드의 특징. 높은 인지도에 비해 음색이 빈말로도 하이파이적 성향은 아니기에[14], 이헤갤에선 뉴비용 추천이어폰 낚시 밈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목재 소재를 이용한 디자인이 예뻐서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Order of Merit(자메이카의 명예 훈장)[3] 비단 레게뿐만 아니라 제3세계 출신 가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음반 판매량은 7500만 장으로 미국과 유럽권을 제외한 가수 중 B'z와 함께 유일하게 100위권에 들어간다.[4] 밥 말리가 태어났던 때의 자메이카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이었다.[5] 밥의 이부여동생 클로데트 펄이 버니의 아버지 테디어스 리빙스턴의 딸, 즉 버니의 이복여동생이기도 하다. 또한 피터 토시는 버니의 누이 중 하나인 셜리와의 사이에서 앤드류 토시라는 아들을 두었다.[6] Rastafari Movement. 성서를 다르게 해석하여 예수를 흑인으로 보고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1892∼1975)를 재림한 그리스도로 섬기는 신앙 운동. 이름은 하일레 셀라시에의 본명인 '라스 타파리 마콘넨(Ras Tafari Makonnen)'에서 유래했다. 자메이카의 흑인들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신앙화된 것으로써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이들이 믿고 있기도 하다.[7] 단순 발목 부상인데 치료가 늦어진 이유가 바로 암 때문이었다.[8] 이름만 들으면 보수 정당같겠지만, 민주사회주의 정당이다. 참고로 말리는 이 당의 열성당원이었다.[9] 자메이카는 이쪽이 오히려 보수 성향 정당이었다.[10] 그리고 말리의 장례식에서 맨리와 시가는 다시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1] 2016년에 스컬&하하의 "Love Inside"라는 곡의 작사/피처링을 맡으신 그분이다.[12] 여담으로 로한 말리는 마이애미 대학(University of Miami)의 풋볼팀인 허리케인스에서 라인배커로 뛰었다. 그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 중에 유명한 이로 NFL 전설적인 라인배커인 레이 루이스(전 볼티모어 레이븐스)와 이후 프로레슬러·영화배우로 전향한 드웨인 존슨(더 락)이 있다. 힙합·R&B 가수인 로린 힐과는 1996년부터 사실혼 관계(라지만 본처가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살림을 차렸다고 볼 수 있음.)로 슬하에 아이 다섯이 있었으나 나중에 갈라섰다. 그리고 현재는 사업가로서 활동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별명인 'Tuff Gong'이라는 의류 브랜드를 비롯 커피 등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13] 일반적인 이어폰/헤드폰과 달리 케이블 부분이 패브릭으로 처리되어 있다.[14] 저음이 세고, 보컬이 묻힌다. 다만 이런 둥둥거리는 게 취향인 사람도 있지만, 이헤갤러들 입장에선 저음괴물, 보컬실종, 고음멸종의 밸런스로 영 좋지 못한 이어폰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그 가격대에 밸런스, 성능 더 좋은 이어폰들이 많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