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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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제23대 호주의 총리를 역임한 호주 노동당 소속의 정치인, 노동운동가다.
2. 상세
1929년 12월 9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보더타운에서 조합교회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인 알버트 호크는 노동당 소속으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정부 총리를 역임했다. 퍼스 모던 스쿨을 졸업하고,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시절 옥스퍼드 대학교의 로즈 장학생[2] 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에서도 학위를 취득했다. 옥스퍼드에서 PPE 과정을 공부하며 경제학에 흥미를 느낀 그는 호주로 귀국한 뒤 1956년 1월 고정임금에 관한 이론을 발표해 각광을 받았다. 1956년 호주국립대학교의 법학 박사과정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중재법을 공부하다가 1957년 호주의 중앙 직종별 노동조합 연맹체 격인 ACTU의 노동조합 전임자로 스카우트되며 박사과정을 그만두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중앙노동위원회나 노사정위원회에 해당하는 Conciliation and Arbitration Commission[3] 에서 노동조합측 위원으로 근무하였으며, 최저임금 상향 기조에 기여했다. 1969년부터 1979년까지 ACTU의 의장을 지내며 공산주의와 극단적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노동조합 간의 국제적인 연대를 추구하였고, 넬슨 만델라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운동을 지원했다. 1971년부터 현실 정치에도 참여하여 노동당의 부대표를 1973년까지 2년간 역임하였으며, 1980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83년 2월 호주 노동당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1983년 3월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호주 총리가 되었고, 1991년 12월까지 재직했다.
3. 제23대 호주 총리
총리로 당선된 직후 오일 쇼크로 침체에 허덕이던 경제를 살리는 데 성공했으며, 고정환율제를 폐지하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하였다. 콴타스 항공과 여러 은행들을 민영화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일부 흡수하였다. 동시에 강력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 빈부격차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공의료보험의 일환인 메디케어를 도입해 전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했으며, 빈곤가구를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다. 환경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해 전임 정권 시절 기획되었던 댐 건설 등의 토목사업을 백지화했고, 연방정부에 세계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1984년에는 성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직장 내에서의 성차별을 금지시켰고, 여성에게도 동등한 고용기회를 부여하도록 명문화했다. God Save the Queen 대신 호주 국가를 제정하기도 했다. 1989년 APEC 창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총리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8년을 조금 넘는 시간동안 총리로 재직하며 경제, 사회복지, 환경, 문화 전반적으로 출중한 업적을 남겨 많은 호주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 시기에 SBS가 우리나라에서 개국하자 축하메세지를 보낸 것이 회자되었다.
4. 퇴임 이후
1991년 12월 자신의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폴 키팅에게 당내 경선에서 패배해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92년 국회의원에서도 물러난 뒤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강연 등을 하며 원로로 활동했고, 2004년 대한민국을 방문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장시간 회동을 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밥 호크의 노동당 대표, 총리 시절의 업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자유당의 일당 우위 정당제를 누르고 총리가 되어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해온 경험이 있는 밥 호크는 당시만해도 한나라당계 정당의 일당 우위 정당제 속에서 집권에 성공한 노무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인상적인 롤모델이었다. 2008년에는 한국의 중견기업인 유아이에너지의 고문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2019년 5월 16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시드니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소속 정당이었던 노동당은 물론이고 정적이었던 자유당의 스콧 모리슨 총리를 비롯해 호주 전역에서 밥 호크를 애도하는 물결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