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러리 솔라나스
밸러리 진 솔라나스(Valerie Jean Solanas)
(1936년 4월 9일 ~ 1988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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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이자, 앤디 워홀에게 총격을 가한 살인미수범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친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으며, 솔라나스가 그녀의 의붓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자 그녀는 조부모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알코올 의존증자였던 할아버지에게 주기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매춘을 시작했다. 그녀는 가출해 결국 떠돌이가 되었다가,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심리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언급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SCUM 선언문이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풍자와 패러디일 뿐이므로, 진지하게 남성 학살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책이 올림피아 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퍼블리셔 Maurice Girodias는 '그냥 농담'으로 생각하였다.[5] 그러나 정작 솔라나스 본인은 이 글을 '정말 진지하게(dead serious)'[6] 쓴 것이며, 풍자나 패러디의 의미는 없다고 밝혔다. 영어 위키백과 그리고 후술할 사건으로 그것은 풍자나 패러디가 아닌 진심이었음이 확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앤디 워홀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 그의 영화 촬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어느 시점에서, 그녀는 워홀에게 'Up Your Ass'라는 제목의 연극 대본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앤디 워홀이 그 작품을 공연해 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지나치게 외설적이었기 때문에, 워홀은 그것이 경찰의 함정수사라고 생각했다.[7] 워홀은 그 대본을 방치했고 30년이 지나서 겨우 발견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되었다. 이 무렵 솔라나스는 극심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워홀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워홀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1968년 6월 3일, 솔라나스는 워홀의 작업실 '팩토리'에서 워홀에게 총을 쏘았다. 그녀는 워홀 옆에 있던 미술 평론가 마리오 아마야도 쏘았으며, 워홀의 매니저도 쏘려고 했으나, 탄환이 걸려 포기하고 작업실을 떠난다. 그녀는 그 날 바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했다.
아마야는 경상으로 당일 퇴원했지만, 워홀은 이 총격으로 인해 흉부를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평생 의료용보호대를 차고 살아야 하는 장애를 겪게 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되었다. 반면 솔라나스는 살인미수죄로 기소되었으나, 그녀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처벌은 3년간 정신병원에서 치료 받는 정도로 끝나게 되었다.
워홀을 쏜 뒤로 정신이상자로서 3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낸 그녀는 1971년 석방 이후에도 워홀을 죽인다고 말하다가 정신병원에 다시 갇혔다.
정신병원에서 풀려난 이후, 그녀는 워홀을 미행하다가 다시 체포된다. 이렇게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던 끝에 사회로부터 미친 여자로 무시 당했다. 페미니스트 예술가 울트라 바이올렛[8] 은 늘그막의 그녀를 만났는데, 솔라나스는 집도 없이 자서전과 여러 책을 낸 수익금으로 여전히 여러 호텔을 오가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워홀이 죽고 나서 솔라나스와 만난 바이올렛의 회고에 의하면 솔라나스는 여전히 워홀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고, 이에 바이올렛이 워홀은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자 못 믿어 했다고 한다.
결국, 1988년 4월 25일,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텐덜로앵의 한 허름한 호텔에서 돌보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갑자기 폐렴으로 죽는다. 솔라나스는 죽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워홀을 어찌 죽일까 소리만 했다.
수많은 저명한 페미니스트들이 솔라나스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전미여성기구(NOW)에서는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석방하라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전미여성협회 대표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그녀를 "여성운동계 최초의 챔피언"[9] 이라고 평가하였다. 솔라나스의 변호사 플로린스 케네디는 솔라나스가 "여성운동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변인"이라고 평가했다. 정작 NOW의 수장인 베티 프리댄은 밸러리 솔라나스를 거부했으나 이후 페미니스트들에게 '''백래시적 인물로 평가받게 됐다.'''
베티 프리댄과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대립한 대표적 사례가 티그레이스 앳킨슨이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원래 베티 프리댄에 동조해서 NOW에 활동했으나 프리댄이 거절해서 NOW를 나간 인물인데, 그런데 그 프리댄이 티그레이스 앳킨슨을 거절한 이유는 티그레이스 앳킨슨이 '''앤디 워홀을 총격으로 테러한 밸러리 솔라나스를 미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밸러리 솔라리스에 대해 '''"여성 권위의 첫 번째 탁월한 챔피언", "페미니스트 운동의 주인공"'''이라고 발언했다. #, #
1996년에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되었다.[10] 제법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영화제에서 상도 여럿 받았다.
하지만 브렌 파스 교수는 '솔라나스는 '자신들에게 지지의사를 보내준' 이들의 운동에 동참하고자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전미여성기구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의 운동을 분열시키려고 했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파스는 솔라나스의 삶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의 모순'''도 주장한다. 레즈비언이면서 남성을 상대로 매춘을 했고, 나중에는 혼동 끝에 스스로 무성애자라고 주장했고, 퀴어 문화를 거부했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면서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애초에 솔라나스가 주장한 본인의 '불행한 과거'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솔라나스의 사촌은 그녀가 20대 말에서 30대까지는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매춘은 하지 않았다고 하며, 그녀의 친구였던 제프리 라기어는 그녀가 멋진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한다.
(1936년 4월 9일 ~ 1988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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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이자, 앤디 워홀에게 총격을 가한 살인미수범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친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으며, 솔라나스가 그녀의 의붓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자 그녀는 조부모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알코올 의존증자였던 할아버지에게 주기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매춘을 시작했다. 그녀는 가출해 결국 떠돌이가 되었다가,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심리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언급이 있다.
2. SCUM 선언문
1968년, 그녀는 SCUM[4] 선언문을 썼다. 이 선언문에서, 그녀는 남성과 여성은 태생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오직 폭력적 혁명으로만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 기술을 이용해, 남성 없이도 인류를 생산할 수단을 확보한 후에 전세계의 모든 남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남성의 존재는 생물학적 실패이며, 남성은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여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우생학적 주장을 했다.이 사회에서의 삶은, 최상의 경우에도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사회의 모든 측면은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시민의식이 있으며, 책임감 있고, 모험을 원하는 여성에게 남은 길은 정부를 전복하고, 화폐 체계를 무너뜨리고, 산업의 완전 자동화[1]
를 이루고 모든 남성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중략)...
남성의 존재는 생물학적 실패이다. 남성 유전자 Y는 여성 유전자 X의 불완전한 형태이며 이는 남성이 유전적으로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남성은 불완전한 여성이며,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실패한, 걸어다니는 실패작이다. 남성은 결핍이며, 정서적 결함이다. 남성성은 결함있는 질병이며, 남자들은 정서적인 불구이다.[2]
[3]- SCUM 선언문
어떤 사람들은 SCUM 선언문이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풍자와 패러디일 뿐이므로, 진지하게 남성 학살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책이 올림피아 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퍼블리셔 Maurice Girodias는 '그냥 농담'으로 생각하였다.[5] 그러나 정작 솔라나스 본인은 이 글을 '정말 진지하게(dead serious)'[6] 쓴 것이며, 풍자나 패러디의 의미는 없다고 밝혔다. 영어 위키백과 그리고 후술할 사건으로 그것은 풍자나 패러디가 아닌 진심이었음이 확실히 드러난다.
3. 앤디 워홀 총격 사건
그녀는 앤디 워홀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 그의 영화 촬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어느 시점에서, 그녀는 워홀에게 'Up Your Ass'라는 제목의 연극 대본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앤디 워홀이 그 작품을 공연해 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지나치게 외설적이었기 때문에, 워홀은 그것이 경찰의 함정수사라고 생각했다.[7] 워홀은 그 대본을 방치했고 30년이 지나서 겨우 발견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되었다. 이 무렵 솔라나스는 극심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워홀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워홀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1968년 6월 3일, 솔라나스는 워홀의 작업실 '팩토리'에서 워홀에게 총을 쏘았다. 그녀는 워홀 옆에 있던 미술 평론가 마리오 아마야도 쏘았으며, 워홀의 매니저도 쏘려고 했으나, 탄환이 걸려 포기하고 작업실을 떠난다. 그녀는 그 날 바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했다.
아마야는 경상으로 당일 퇴원했지만, 워홀은 이 총격으로 인해 흉부를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평생 의료용보호대를 차고 살아야 하는 장애를 겪게 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되었다. 반면 솔라나스는 살인미수죄로 기소되었으나, 그녀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처벌은 3년간 정신병원에서 치료 받는 정도로 끝나게 되었다.
4. 이후의 삶
워홀을 쏜 뒤로 정신이상자로서 3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낸 그녀는 1971년 석방 이후에도 워홀을 죽인다고 말하다가 정신병원에 다시 갇혔다.
정신병원에서 풀려난 이후, 그녀는 워홀을 미행하다가 다시 체포된다. 이렇게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던 끝에 사회로부터 미친 여자로 무시 당했다. 페미니스트 예술가 울트라 바이올렛[8] 은 늘그막의 그녀를 만났는데, 솔라나스는 집도 없이 자서전과 여러 책을 낸 수익금으로 여전히 여러 호텔을 오가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워홀이 죽고 나서 솔라나스와 만난 바이올렛의 회고에 의하면 솔라나스는 여전히 워홀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고, 이에 바이올렛이 워홀은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자 못 믿어 했다고 한다.
결국, 1988년 4월 25일,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텐덜로앵의 한 허름한 호텔에서 돌보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갑자기 폐렴으로 죽는다. 솔라나스는 죽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워홀을 어찌 죽일까 소리만 했다.
5. 페미니즘계에서의 평가
수많은 저명한 페미니스트들이 솔라나스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전미여성기구(NOW)에서는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석방하라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전미여성협회 대표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그녀를 "여성운동계 최초의 챔피언"[9] 이라고 평가하였다. 솔라나스의 변호사 플로린스 케네디는 솔라나스가 "여성운동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변인"이라고 평가했다. 정작 NOW의 수장인 베티 프리댄은 밸러리 솔라나스를 거부했으나 이후 페미니스트들에게 '''백래시적 인물로 평가받게 됐다.'''
베티 프리댄과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대립한 대표적 사례가 티그레이스 앳킨슨이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원래 베티 프리댄에 동조해서 NOW에 활동했으나 프리댄이 거절해서 NOW를 나간 인물인데, 그런데 그 프리댄이 티그레이스 앳킨슨을 거절한 이유는 티그레이스 앳킨슨이 '''앤디 워홀을 총격으로 테러한 밸러리 솔라나스를 미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밸러리 솔라리스에 대해 '''"여성 권위의 첫 번째 탁월한 챔피언", "페미니스트 운동의 주인공"'''이라고 발언했다. #, #
1996년에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되었다.[10] 제법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영화제에서 상도 여럿 받았다.
하지만 브렌 파스 교수는 '솔라나스는 '자신들에게 지지의사를 보내준' 이들의 운동에 동참하고자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전미여성기구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의 운동을 분열시키려고 했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파스는 솔라나스의 삶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의 모순'''도 주장한다. 레즈비언이면서 남성을 상대로 매춘을 했고, 나중에는 혼동 끝에 스스로 무성애자라고 주장했고, 퀴어 문화를 거부했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면서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애초에 솔라나스가 주장한 본인의 '불행한 과거'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솔라나스의 사촌은 그녀가 20대 말에서 30대까지는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매춘은 하지 않았다고 하며, 그녀의 친구였던 제프리 라기어는 그녀가 멋진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한다.
[1] 솔라나스는 기계를 이용해 인류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2] 사실 남성혐오적 성향이 짙게 묻어나오는 일고의 고려할 가치도 없는 문장이지만, 사실은 이조차도 엄밀히 따지면 틀렸다. 실제로 여성의 경우 X 염색체 중 하나를 바소체(barr body)라는 형태로, 기능적으로 불활성화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실제로 신체 내에서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실질적인 성염색체의 경우 여성의 경우 1개 뿐이다. 반면 남성의 경우 바소체를 가지지 않고 X, Y 염색체 모두 단백질의 전사 등 생체적 관점에서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한다.[3] 만일 백 번 양보해 그녀 말대로 남성이 열등한 존재라고 해도, 그렇다는 이유에서 죽게 만드는 게 정당한가. 그렇다면 인류의 유전자 풀에서 열등 인자를 우생학적으로 제거하겠노라고 선포한 나치즘은 훌륭한 사상이란 말인가.[4] Society for Cutting Up Men(남성 거세 단체)의 약자이다. 영어에서 'scum'은 '액체 표면에 떠 있는 불순물 거품', 혹은 '남성의 정액'이라는 뜻의 욕설이기도 하다.[5] Girodias, Maurice, Publisher's Preface (N.Y.: 1968), in Solanas, Valerie, SCUM Manifesto (London: Olympia Press, 1971 (ISBN 0 700 410 30 9)), p. xi. [6] Marmorstein, Robert (June 13, 1968). "A winter memory of Valerie Solanis (sic): scum goddess". The Village Voice. New York, NY. XIII (35): 9–10, 20.[7] 실제로 워홀의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경찰에 의해 공연이 중단된 적이 있다고 한다.[8] 본명은 이사벨 듀프레인(Isabelle Dufresne)[9] Nickels, Thom (2005). Out in History: Collected Essays. STARbooks Press. ISBN 978-1-891855-58-0.[10] 참고로 이 영화의 음악감독이 앤디 워홀이 후원했던 록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전 멤버인 '존 케일'이다(...). 사실 존 케일 본인도 밴드가 앤디 워홀의 명성에 묻어가는 데에 불만이 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