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키 노브고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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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노브고로드의 크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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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 위치한 도시. 모스크바로부터 531km,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는 189km 떨어져 있다.
도시 이름의 뜻은 "새로운 도시"이다. 하지만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이라 사실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물론 이건 처음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이름에 새로울 신 자 붙었지만 무려 천년이나 묵은 것과 마찬가지다. 중세의 시작점에서 러시아 북부 해안에 첫발을 내딛은 바랴크인들에게는 내륙의 관문과도 같은 이곳이 '새로운 도시'였기 때문이다.
한때는 러시아의 전신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 공국의 수도였다. 이전에는 단순히 노브고로드라고 불렸다. 하지만 현대 러시아의 대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4] 와 구별하기 위해서 1990년에 벨리키 노브고로드로 개명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속해 있는 주의 이름은 바뀌지 않아, 여전히 노브고로드 주이다.
2. 상세
8세기 또는 9세기경 류리크의 바랴크인(Варяг)[5] 이주민 무리가 이곳 인근에 터를 잡은 것이 도시의 시초라고 한다. 그 친척인 올레크가 슬라브계 토착 부족으로부터 키예프를 점령하고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그렇게 노브고로드의 바랴크인들은 수 세기 동안 현지 슬라브인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강을 따라 흑해로 진출하여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성장하면서 12세기경 노브고로드 공국을 세웠고 공국은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13세기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동맹 공국들이 분쇄되고, 연맹의 중추였던 키예프 공국마저 처참하게 무너지자 노브고로드 공화국 역시 타격을 입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몽골인의 직할영토가 된 남러시아와 달리 여기는 완전히 멸망하진 않고 지구 반대편 고려의 원 간섭기처럼 속국으로 살아남았다. 같은 무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1242년에 페이푸스 호수 전투에서 파죽지세로 동진하던 튜튼 기사단을 저지하였다.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14세기에 칸국들의 쇠퇴와 함께 부활한 북부 공국들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공국과 마주했고, 대립한 끝에 1478년에 모스크바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벨리키 노브고로드는 큰 도시였다. 하지만 1570년에 이반 4세가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적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귀순하려 했다는 의심을 품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벨리키 노브고로드 사람들은 대학살을 당했으며, 이 이후로 벨리키 노브고로드는 소도시로 남게 되었다.
또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일군에 의해서 침공을 당해 약 2,500개 정도 있던 석조 건물 중 약 40개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오래된 도시인데다 2차대전 이전의 사진 등 자료가 풍부했기 때문에 열심히 복원 작업을 하여 도시의 많은 부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벨리키 노브고로드는 노브고로드 주의 주도로서 주 인구의 1/3이 거주하는 중요한 도시이지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잇는 간선 철도와 떨어져 있으며 고속철도 삽산도 들어오지 않는다. 현대의 개발에서는 비교적 소외된 셈. 철도는 노브고로드 주 북부[6] 의 추도보를 통해 지선으로 이어진다. 레닌그라츠키 역에서 하루 1회 야간 열차(8시간)를 이용할 수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역까지는 근교 열차가 하루 3회(3시간 30분) 운행한다. 한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잇는 M10 국도와 M11 고속도로는 시가지에서 북동쪽으로 10~20km 떨어진 위치를 지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시외버스는 대략 1시간 전후의 간격으로 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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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러시아에선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다보니 유물들도 자주 발견되며, 그중엔 노브고로드 공화국 시기에 써진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목피 메모들이 유명하며 이 목피 메모들은 고대, 중세 러시아어의 변화와 키릴 문자의 기원인 글라골 문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 목피 메모중 가장 유명한 것은 13세기에 노브고로드에 살던 '''온핌(онѳиме)이란 소년의 학교숙제'''(...). 거기에다가 숙제가 워낙 지루했는지 대부분 낙서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기도 했다. 대표적인 내용이 위의 199번 목피이며 앞면엔 글라골 문자를 외울 목적으로 빼곡하게 써놓았는데 뒷면엔 불을 뿜는듯한 야수와 "나는 괴물이다"라고 써놓은 낙서인데 친구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그린건지 괴물 옆에 상자를 그려놓고 안에 '온핌이 다닐로에게'라고 써놓았으며, 그외에도 기병이 되어 적들을 무찌르는 내용이나 성경의 시편을 패러디한듯한 “주님 당신의 종 온핌을 도우소서”를 써놓는등 동심이 넘치는 낙서를 써놓아 먼 미래의 후손들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원래 여기도 그냥 노브고로드로 불렀으나 이 도시와의 구별을 위해 '저지대의 노브고로드'란 뜻의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개명하였다.[5] 동부 바이킹들의 명칭이다. 발트해 동부 연안에서부터 강을 따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가로질러 흑해에서까지 활동했으며 동로마 제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하거나 교역을 성사하기도 했다. 바랴크인 전사들의 용맹함에 감명받은 동로마 황실이 이들을 용병으로 대거 고용하여 근위대를 편성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랑인 친위대이다.[6] 주 동부의 인구밀도가 극히 낮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주의 끝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