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레이우치
1. 개요
無礼討ち.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에게 허용되었던 특권[1] 의 하나.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 きりすてごめん, 베어도 면죄)이라고도 한다.
무사가 하층민에게서 참기 힘든 굴욕을 당했을 경우, 상대방을 칼로 베어 죽이더라도 처벌받지 않는 권리를 의미한다. 후세의 매체에서는 츠지기리와 혼동되거나 무사계급이 하층민을 멋대로 죽이고선 무죄방면으로 풀려나기 위한 구실로 사용하는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2] . 시대극 전문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역사대로의 부레이우치를 묘사하면 스토리가 진행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즉, 시대극의 경우엔 제작진이나 배우들도 원래의 부레이우치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보통 부레이우치를 악용하는 캐릭터들은 악역이고, 악역은 선역에게 멋지게 퇴치되어야 하는데 법 어겼다고 사형되면 주인공이 나설 필요가 없어지니(...).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매체에서는 원래의 취지를 잘 모르고 묘사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실제로 모 방송에서 진짜 부레이우치가 어떤 방식인지 설명이 나오자 다른 패널이나 방청객들은 "그게 그런 거였어?"라며 놀라는데 패널 중 시대극 전문 배우만 부연설명을 하면서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 권리가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결합되어서 매우 특이한 제도로 여기기 쉬운데, 실제로는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는 형식만 다르지 비슷한 문화가 세계 각지에 있었다. 피지배층인 사람이 정당화할 만한 이유도 없이 지배 계층 인사에게 모욕을 가하면 그 자리에서 지배계층이 직접, 혹은 아랫사람을 시켜서 보복으로 폭행하거나 살해해도 그 책임을 경감하거나 아예 처벌하지 않는 관습이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의 신분제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2. 상세
일본의 무사계급은 체면을 중시하였고, 굴욕을 당하고 그냥 물러나는 것을 무사로서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무사의 주변의 평가나 관직에도 영향을 미쳤고, 때에 따라서는 해당자가 사도불각오(士道不覚悟), 즉 무사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할복을 명령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무사에게 체면을 지키는 것은 사활의 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무사가 자신을 모욕한 하층민에게 칼을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정당방위에 가까운 행위로 여겨졌으며, 실제 사례에서도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죽는다면 별 수 없겠지만 가능하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분제가 없어진 현대에서 보기에는 사무라이가 무자비하게 무례한 농민을 베어넘길 것 같지만[3] 사실 부레이우치는 '''결투'''형식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하층민에게 지기라도 하면 할복, 할복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매장되며, 결투를 하지 않아도 처벌의 구실이 되었다. 애초에 계층 간 영양 상태나 신체 상태가 몸에서 확 드러나는 전근대 사회에서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만에 하나 이런 식으로 와키자시 하나 툭 던져 줬더니 오히려 사무라이가 지거나 죽으면 상대 평민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사무라이와 그 가족은 사회적으로 매장. 상대가 결투를 회피하면 그냥 공격해도 되지만, 응하는데 무기가 없다면 자신이 와키자시를 빌려줘야 했다. 후대에는 무사의 이미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개념이지만 당시엔 거의 행사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엄연히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존재해서 평민이 사무라이를 모욕하는 것은 처음부터 죽음이나 다름 없었다. 더욱이 사무라이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평민이라면 결투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영주를 모독한 죄로 참수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사무라이 마음대로 평민들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평민은 농민으로서 영지의 경제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중요한 인력이였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휘관이 휘하 병사를 함부로 엄벌하지 않듯이 대놓고 개기지 않는 이상 자기 영지의 알고 지내는 이를 칼로 벤다는게 쉽지 않을 뿐더러 이걸 남발한다는건 통치능력과도 관계된 문제라 더 조심해야했다. 더욱이 자기 영지 소속의 농민이 아니라면 더욱 조심해야 했는데 이유는 당연히 해당 농민의 영주와 시비가 붙기 때문이다. 그게 정당한 결투인지는 둘째치고 자기 영지의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데 가만히 있을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어찌저찌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해당 농민의 영주가 납득하지 못할 이유라면 최소 농민을 죽인 것에 대해 배상을 해줘야 하고 심하면 영주 간의 결투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자기 가신의 영지라면 예외로 오히려 해당 가신이 관리소홀이라는 이유로 문책을 받을 수가 있다.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무사를 평민과 구별하는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평민이 죽는다는 것은 곧 노동력의 상실과 세금 수입의 저하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영주 등 높은 지위의 통치자들은 하급 무사들의 방종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레이우치가 실제로 행해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무사라고 해도 하층민에게 굴욕을 당할 정도라면 비교적 신분이 낮은 무사인 경우가 많았으며 함부로 부레이우치를 남용하다가는 해당지역을 다스리는 막부나 다이묘의 눈 밖에 날 우려가 있었다. 또한 부레이우치를 실행했다는 것 자체가 해당 무사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해 하층민에게서 그러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창작물에서처럼 이를 악용하여 힘없고 나약한 평민을 마구 죽이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 일은 아니었다.
봉건제 사회에서 하층민이 결코 편한 건 아니지만, 극한 전시상황에서 '''자기 영지의 주민''' 목숨을 파리 취급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었기 때문에 난세인 전국시대에도 그렇게 막장스런 상황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자세력의 성 근처라면 치안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3. 에도 시대 이후
그러던 것이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자' 내지는 '전사' 로서의 무사가 아닌, '귀족' 내지는 '관료'로서의 무사도가 요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사들은 자신들의 품격유지와 귀족으로서 지니는 군자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부레이우치를 점점 자제했고, 벌한다 하더라도 칼등으로 상처만 내고 죽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부레이우치를 남용해 평민을 죽이면 같은 무사사회 내에서도 소인배라고 멸시받았고, 해당 무사가 모시는 주군의 체면 또한 손상시키는 일로 인식되었다. 덤으로 사무라이의 반역을 막기 위해 일본도의 크기도 법적으로 제한하였고, 개인적인 사유로 결투#s-4.4를 하는 것을 엄중처벌하게 된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부레이우치가 실행된 후에 해당 무사는 신속하게 관아에 신고한 후 증거품인 칼과 증인을 제출해야했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무사는 거의 예외없이 사형을 언도받게 마련이었고, 특히나 이 경우 그나마 무사의 명예를 인정해주는 할복이 아닌 참수형이었기 때문에 가문이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다만 이렇게 되면 보통 해당 무사가 참수형이 언도되기 전에 알아서 할복을 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막부측에서도 해당 사건은 그 무사 선에서 끝내고 무사의 가문에는 죄를 묻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정당한 부레이우치였다는 것을 증명해줄 증인이 필요해서 농민이 자신을 모욕했다는 행위의 '''목격 증인'''이 필요했다. 관에서는 증거와 증언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문제의 부레이우치가 정당한 것인지를 판가름하는데 정당한 부레이우치라는게 입증되지 않으면 그냥 살인사건이 돼서 처벌받았고, 보통 참수형을 당한 뒤 할복했다고 처리하였다. 심하면 하층민의 처형방법인 노코기리비키(鋸引き)[4] 나 아예 진짜 참수형에 처했다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무죄를 인정받더라도 무사는 3주 정도의 근신 처분을 받는게 보통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부레이우치를 행하면 정당성 여부에 상관없이 '대체 얼마나 처신을 엉망으로 했길래 평민에게 모욕을 당하냐?'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에도 성내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칼을 뽑는 것만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였고[5] , 이 때문에 아예 칼날을 대나무 조각으로 모양만 낸 것으로 대체한 물건인 타케미츠(たけみつ[6] )를 차는 경우도 많았다. 그냥 안 차고 다니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당시 사무라이의 복식문화상 남자가 칼 두자루도 안차고 다니면 조선으로 치면 선비가 갓도 안 쓰고 길에 나선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칼은 반드시 차고 다녔다.
무사는 모욕에 대해 반드시 갚아야 하는 명예를 중시하는 계층이라서 무시당하고 그냥 넘겨도 또 그것대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진퇴양난(...) 그래서 오히려 이런 제도가 '''상류층인 무사가 함부로 평민 근처에 못 가고 몸을 사리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가급적이면 무사는 평민과 얽히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부 평민들의 경우 그러한 무사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무사를 도발하여 담력을 겨루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설령 무사가 칼을 뽑아도 평민은 줄행랑을 치면 그만이기 때문. 한 편으로 그런 일을 당해서 집도 명예도 잃은 무사가 그 평민을 찾아서 일가족을 몰살한 사건도 존재했다.
이런 이유로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죠카마치(城下町, 직역하면 성 아랫마을)는 신분별 구획이 철저하게 나눠져 있다. 전적으로 상대의 악의에 의해 시비가 걸려도 본인이 억울하게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제도라는 점은 민간인들과 시비라도 붙으면 무조건 경을 치는 대한민국 국군의 장병들과도 비슷하다. 또한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들이 덴뿌라를 천한 음식이라고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얼굴 가리고 노점에 가서 먹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4. 죠이우치(上意討ち)
무례하게 군 평민을 베어버리는 것과 함께 무사는 자신의 하급자[7] 에 의해 굴욕을 당했을 경우 하급자를 벌할 권리를 지녔다. 이는 죠이우치라 하여 상급자가 하급자의 잘못을 벌할 당연한 권리로 여겼기 때문에 부레이우치에서처럼 증거품을 제출하거나 증인을 불러오는 번거로운 절차는 필요없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인재관리능력에 의심을 받아 출세에 지장을 받거나 뒤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와 반대로 자신과 동등한 신분이나 상급자에 대해 칼을 빼드는 일은 체제에 대한 반역과 동급으로 간주되는 용납받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에 해당 무사는 반드시 사형을 언도받았다. 실제로 에도시대에는 분을 못이겨 상급자를 베었다가 제정신이 들어서 할복을 했지만, 막부에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개역[8] 을 언도한 사례도 있다. 상술했듯이 대체로 에도시대에는 무사가 할복으로 사죄하면 어지간히 큰 죄가 아닌 이상은 해당 무사 선에서 끝내고 그 이상의 죄를 묻지 않는 풍조가 있었다. 할복을 하였음에도 개역을 언도하였다는 것은 이 상황을 에도막부 자체에 대한 반역에 필적하는 큰 죄로 보았다는 것이다.
5. 매체에서의 등장
만화 원피스의 등장인물 시류가 부레이우치를 언급한다. 정발판에서는 '참륙(斬戮) 용인'이라는 말로 의역되었다. 베어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특권이니 뜻 자체는 100% 전달한 셈. 원피스 같은 소년만화에 각주로 문화적 컨텍스트를 달아놓을 수도 없으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막이 다르게 해석되어 나온 덕택에 잘 모르지만 기동전사 건담 00의 그라함 에이커도 더블오 건담과의 결투 당시 마지막 일격을 날린답시고 기리스테고멘 이라는 대사를 날렸다.
환세취호전에서 스마슈가 무기 '나찰의 흉인'을 장비했을 때 생기는 개인공격기 절사어면은 切捨御免을 그대로 읽은 것이다. 이 기술에서 스마슈는 적에게 찌르기 공격을 가한 후 돌아서서는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린다. 좋은 기술이지만, 나찰의 흉인의 '''획득 경험치 반감''' 패널티 때문에 많이 쓰이지는 않는 편.
메탈코어 밴드 트리비움에 Shogun앨범에 있는 Kirisute Gomen이라는 곡이 이에 대해 다루고있다.
은혼 초반기 카츠라가 자주 부레이우치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않았다.
동방문화첩에서 콘파쿠 요우무의 이명으로서 뭐든 베고 보는 요우무의 성격을 나타낸다.
[1] 무사계급은 기본적으로 대도묘자(帶刀苗子)의 권리를 가졌다. 대도(帶刀, たいとう)는 칼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고, 묘자(苗子, みょうじ)는 성씨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2] 물론 자기 영지에서 그랬거나, 뒷빽이 튼튼하면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그런 일이 드물었을 뿐이다.[3] 와패니즈 영화 쇼군에서 자신에게 절을 안하고 멀뚱거리는 농민을 단칼에 쳐죽이는 장면이 대표적. 당연한 얘기지만 와패니즈는 와패니즈다.[4] 땅에 목만 남겨두고 파묻은 뒤 땅을 따라 조금씩 톱질해서 참수하는 방법. 보통 연쇄살인범 또는 주군이나 부모를 죽인 패륜아 등의 흉악범을 처벌할 때 시행되었으며 톱질을 하는 사람들은 해당 범인이 죽인 피해자의 유족들인 경우가 많았다. 형 집행 직전에는 땅 위에 사람의 머리가 튀어나온 모양이지만 형 집행 후에는 땅이 '''완전한 평지'''가 된다. 단 평화로운 시기에는 잔혹한 형벌은 지양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행사례는 전국시대에 많았지 그 이후에는 드물다. 에도 시대에는 톱질 대신 죄인을 말뚝에 묶은 후 목에 칼(계구)을 채우고, 양 어깨에 상처를 내 그 피를 대나무 톱에 묻혀 형식적으로 옆에 걸어두는 조리돌림을 이틀 간 한 후 책형에 처하는 방식으로 크게 변경되었다.[5] 이 법에 걸려서 죽은 대표적 사례가 추신구라의 주가 아사노 가문이다. 에도 성내에서 칼을 뽑은 데다 상관에게 상해까지 입힌터라 본인도 사형을 언도받고 가문도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격하하는 개역(改易, かいえき) 처분을 받아 멸망해버렸다.[6] 한자로는 죽광(竹光). 죽도의 일종을 말한다.[7] 자신이 부리는 하급 무사, 몸종 등[8] 改易, かいえき. 영지를 빼앗는 처벌. 다만 처벌수위는 조금씩 달랐는데 영지를 축소한 뒤 이동조치하는 전봉으로 끝날 때도 있었고, 하타모토로 내릴 때도 있었고, 심지어 평민으로 내려갈 때도 있었다. 단 에도시대 초기 다이묘 대숙청 이후로는 영지몰수 외의 처벌은 거의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