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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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Douglas Wilson'''
1942년 6월 20일 (81세) ~
1. 개요
2. 윌슨 가문
3. 생애
3.1. 어린 시절
3.3. 솔로
4. 정신병력
5. 영향받은 뮤지션들
5.1. 비틀즈와의 관계
6. 기타


1. 개요


'''로큰롤모차르트 (Mozart of Rock and Roll)'''#

브라이언 윌슨은 '''시대를 앞섰던 비운의 뮤지션 그리고 대중 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영미 팝 음악계의 스튜디오형 뮤지션의 시초격인 가수. 팝, 록 등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중 하나이자 혁신자로 평가 받는다.
브라이언 윌슨은 미국의 음악가이자 음반 프로듀서로, 록밴드 비치 보이스의 창립 멤버이자 음악적 리더이다. 데니스 윌슨, 칼 윌슨의 형이며, 밴드 내에서는 주로 베이스 기타 혹은 피아노, 오르간과 같은 건반 악기를 담당했다. 사촌 마이크 러브와 함께 비치 보이스 노래의 거의 대부분을 작곡했다.

2. 윌슨 가문


  • 머레이 윌슨(1917 ~ 1973) / 오드리 윌슨(1917 ~ 1997)
    • 브라이언 윌슨(1942년생) / (1947년생, 이혼) / 멜린다 레드벨
      • 카니 윌슨(1968년생)
      • 웬디 윌슨(1969년생)
    • 데니스 윌슨 (1944 ~ 1983) / (이혼) / (이혼) / (2번 이혼) / 숀 마리 러브
      • 제니퍼 윌슨
      • 스콧 윌슨
      • 마이클 윌슨
      • 칼 윌슨
    • 칼 윌슨(1946 ~ 1998) / (이혼) / 지나 마틴(1956년생, 재혼)
      • 조나 윌슨(1969년생)
      • 저스틴 윌슨(1971년생)

3. 생애



3.1. 어린 시절


1942년 6월 20일, 잉글우드에서 솜씨 있는 음악 프로듀서 머리 윌슨(Murry Wilson)과 아내 오드리 윌슨(Audrey Wilson)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할머니의 집에서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들은 뒤였다고.[1]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워 음악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아버지에게 나무 판자로 머리를 얻어맞는 등 폭력에 기반한 교육을 받아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2] 본인 또한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해서 두 동생과 부모님에게 하모니를 가르쳐 함께 부르기도 했다. 원래 피아노와 오르간만을 다룰줄 알았으나, 동생 칼에게 기타와 베이스를 배워 밴드를 하게 된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음대에 진학하지만, 원하는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없어 중퇴하게 된다.

3.2. 비치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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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서프 록 뮤지션 시절의 풋풋한 브라이언 윌슨
아버지 머리 윌슨을 매니저로 하고 자신의 동생들과 사촌 마이크 러브, 그리고 친구 데이비드 마크스[3]를 멤버로 하여 캘리포니아 호손에서 비치 보이스가 정식 출범된다. 베이시스트이자 건반 악기 연주자, 그리고 밴드의 리더로서[4] 마이크 러브와 함께 비치 보이스의 수많은 명곡[5]을 쓰며 밴드를 이끌었다.[6]
머리 윌슨은 아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아들을 갈구었다. 마음 속에 그런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과 음악적 성장에의 열망이 양립하는 아래 브라이언은 좋은 앨범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의 서핑, 여자, 자동차 이야기에 브라이언 윌슨은 점점 질려가기 시작하며 종교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비틀즈Rubber Soul 앨범을 들은 브라이언 윌슨은 그 놀라운 음악성에 감탄하며 자기도 위대한 앨범을 만들겠다는 창작혼을 불태우게 된다.[7] 그러던 차에 브라이언 윌슨은 스튜디오에 처박히게 되고, 대타로 브루스 존스턴을 베이스 담당으로 해 비치 보이스는 투어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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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Sounds 레코딩 당시의 브라이언 윌슨
투어에서 돌아온 멤버들의 목소리를 입혀 완성된 '''Pet Sounds'''는 음악적으로 엄청난 걸작으로 평가받았고, 영국과 유럽 등지에서 찬사를 들었지만, 정작 그들의 고향인 미국에서는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그 때까지 그들이 발매한 앨범 중 가장 적게 팔린 앨범이 되고 만다. 때문에 밴드 내부와 소속사로부터 불평을 받게 됐고, 브라이언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다만 폴 매카트니는 수록곡 '''God Only Knows'''를 자신이 그때까지 들어본 음악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밝히며 경의를 표했고, Pet Sounds는 비틀즈의 차기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한편 비틀즈의 러버소울 바로 다음 앨범인 Revolver를 듣고 또 한번 감탄한 브라이언 윌슨은 다시금 창작욕과 경쟁심에 불타올라서 비틀즈와 자신의 전작 펫 사운즈마저 확실히 능가하는 걸작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 하에 SMiLE 앨범 제작에 돌입하지만...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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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E 레코딩 시절
반복된 그의 완벽주의는 음악적 성장의 성취를 이뤄냄과 동시에 그의 삶을 점차 파탄으로 이끌게 된다.[8] The Beach Boys Today! 앨범을 즈음하여 점점 브라이언은 스튜디오에 처박혀 새롭고 신비로운 사운드를 만드는 데에 열중했고 이러한 그의 집착은 점차 멤버들과의 불화로 이어진다. 특히 마이크 러브와의 불화가 가장 심했으며, 알 자딘은 내색하지 않았을 뿐 일련의 과정들을 좋지만은 않게 보았다. 다만 친동생들(특히 데니스)은 형의 음악적 발전을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따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쌓여갔던 여러가지 악재는 결국 SMiLE 앨범을 제작하던 중에 비극적인 형태로 증폭되었고, 피로감과 정신병, 상심 등으로 인해 녹초가 되어버린 브라이언은 술과 마약에 빠져 약 2년간을 폐인처럼 보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내 마릴린에게 이혼당하며 딸 카니 윌슨, 웬디 윌슨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된다.
이후 마릴린 본인이 밝히길 그때도 브라이언을 매우 사랑했지만 당시 브라이언의 상황이 말이 아니였기에[9] 자라날 아이들을 위해 이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브라이언 본인도 잘 알고 있어서 이혼에 동의했고 이혼 뒤에도 둘은 우호적인 관계로 남게 된다. 마릴린은 브라이언을 정신적으로 아픈 천재[10]였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브라이언의 두 딸들 또한 자신들의 아버지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회상하였다. 항상 친절하고 유쾌함이 넘치는 아버지였지만, 가끔 한 곡에 꽂혀서는 반나절동안이나 피아노로 똑같은 부분을 친다거나 하는 등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고...딸들과 헤어진 브라이언은 하루종일 필 스펙터Be My Baby를 듣거나, 피아노로 연주하며 멍하게 보냈다고 한다.
다만 정신이 혼미하던 이 시절에도 대외적 활동은 줄였으나 밴드에 곡은 지속적으로 제공했으며, 이 시절 브라이언의 집 안에 꾸며진 스튜디오에서 동생 데니스 등과 함께 피아노나 오르간 정도만을 사용해 녹음한 여러 곡들이 일명 'The Bedroom Tapes'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City Blues나 Still I Dream of It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 곡들은 이후 스튜디오에서 브라이언 본인에 의해 제대로 편곡되어 솔로 앨범에 실리거나, 컴필레이션 앨범들에 조금씩 수록되거나, 아니면 부틀렉 형식으로 조금씩 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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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브라이언 윌슨(左), 유진 랜디(右). 이 시절의 브라이언은 몸무게가 120kg에 달했다.
브라이언은 밴드에서 이탈한 이후 담당 주치의 유진 랜디(Eugene Landy)와 만나게 되는데, 유진 랜디는 치료라는 명목 하에 브라이언을 심하게 압박하고 구속하였으며 심지어 '''브라이언과 비치 보이스의 음악적 활동에까지 관여한 몹쓸 인간'''이었다.[11] 스튜디오에 매일같이 찾아가 브라이언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윽박지르고 위협하는 식이라, 브라이언이 겁에 질려 도망다닌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12]
비치 보이스의 다른 멤버들은 브라이언을 다시 데려와 "Brian's Back" 슬로건을 내걸고 밴드 전면에 내세우지만, 이미 브라이언은 정신적으로 망가진 상태였으며 유진 랜디의 감시 속에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15 Big Ones와 M.I.U Album, L.A (Light Album)같은 앨범 이 유진 랜디의 영향 하에 있는 앨범이며, 이 시절의 앨범 제작 과정은 너무나 정신이 없었기에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고 후일 브라이언은 회고했다.
유진 랜디의 감시 아래 살아가던 브라이언은 자동차 딜러인 멜린다 레드베터(Melinda Ledbetter)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정말 아름다운 여자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던 브라이언은 멜린다의 친절함에 반해 그녀와 계속 만남을 가지게 되며, 이후 멜린다와 브라이언이 점점 깊은 관계가 되어가자 유진 랜디는 둘의 만남을 훼방 놓기 시작한다.
이후 주치의의 수상함을 눈치 챈 멜린다와 동생 칼 윌슨에 의해 브라이언은 마침내 유진 랜디로부터 해방된다. 이후 유진 랜디가 마음대로 집어넣은 작곡 크레딧은 모두 지워졌으며, 더불어 브라이언에의 접근도 금지되었다.
멜린다는 브라이언과 결혼해 현재 그의 매니저 역할 또한 맡고 있다.

3.3.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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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브라이언 윌슨
유진 랜디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브라이언은 비치 보이스의 앨범에 참여하다가, 이후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해 앨범 'Brian Wilson'을 발표한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난 록스타에게 언론과 뮤지션들은 찬사를 보냈다. 이 시절 발표한 싱글 '''Love and Mercy'''는 그를 대표하는 곡. 이외에 조지 거슈윈의 음악들을 현대 재즈 풍으로 리메이크한 '''Reimagines Gershwin''', SMiLE 시절의 파트너 반 다이크 파크스와 다시금 힘을 합친 '''That Lucky Old Sun'''의 평이 좋다. 2004년에는 SMiLE을 솔로 명의로 발매해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 상을 수상하는 등 극찬을 받기도 했다. 현재 가장 마지막으로 발매한 앨범은 2015년에 발표한 No Pier Pressure.
2014년 BBC 뮤직에서 리메이드한 God Only Knows에 참여하기도하였다.
비치 보이스 50주년 기념 라이브에 정식 멤버로서 참여하였다가, 이후 다시 탈퇴해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활발하게 투어를 다니고 있다. 알 자딘이 여기에 자주 동행한다.

4. 정신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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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작업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을 이겨내기 위해, 1965년경 브라이언 윌슨은 처음으로 마약을 하게 된다. 당시 복용한 것은 LSD였으며, 이 경험에서 듣게 된 소리를 토대로 브라이언은 '''California Girls'''를 쓴다. 또한 Today! 앨범의 수록곡 상당수(대표적으로 '''Please Let Me Wonder''' 등) 또한 마약의 영향 하에 있는 곡이다.
이후에도 스트레스 해소와 아이디어 충전 등 다양한 이유로 브라이언은 마약을 계속하게 되며, 이를 기점으로 정신병이 발병하게 된다.
브라이언 윌슨이 앓은 병은 구체적으로 조울증조현병 등이다. 주변인 혹은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브라이언은 자주 침울해하거나 무력감을 나타냈으며, 환각과 환청을 자주 경험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필 스펙터가 자신을 도청한다고 주장하는 등 망상형 정신분열의 전형을 보였기에 동생들과 밴드의 다른 멤버들의 종용으로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13]
유진 랜디와의 갈등 후 아내 멜린다 레드베터-윌슨의 극진한 간호와 보살핌, 검증된 곳에서의 정상적인 치료를 통하여 현재 브라이언은 상당히 호전된 상태이다. 다만 환청 등은 요즘도 드물지만 경험한다는 듯.

5. 영향받은 뮤지션들


상술했듯 브라이언 윌슨에게 음악적 흥미를 처음으로 부여한 것은 Rhapsody In Blue였고, 이후 뮤지션 생활을 할 때도 조지 거슈윈의 영향을 받은 음악을 많이 만들게 된다. 또한 어린 시절 브라이언 윌슨은 라이브 공연을 보기 위해 혼자 멀리까지 가서 묵고 올 정도로 포 프레시맨(Four Freshmen)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포 프레시맨 풍의 보컬 코러스가 비치 보이스의 음악에 자주 드러나는 편이다. 브라이언 윌슨은 '''비치 보이스는 포 프레시맨의 로큰롤 밴드 버전'''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브라이언 윌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뮤지션은 '''필 스펙터'''이다. 브라이언은 로네츠의 Be My Baby를 언제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으며, 이 곡에 영향 받아 비치 보이스의 Don't Worry Baby가 만들어졌다. 자동차 안에서 Be My Baby를 라디오로 처음 듣고 놀란 브라이언 윌슨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대충격이었다고 하며, 엔지니어에게 곡의 코러스만 계속 흘러나오도록 부탁해 하루에 몇 시간째 그 구간만을 듣고 있던 일도 허다하다고 한다. 다만 필 스펙터는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생동감이 없는, 편집된 음악'이라며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것같다.
이외 척 베리, 비틀즈 등을 젊은 시절의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자주 꼽았다.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윌슨은 자기 인생의 레코드로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14]과 필 스펙터가 작곡한 로네츠의 Be My Baby, 비치 보이스의 He Come Down[15], 비틀즈의 She's Leaving Home, 포 프레시맨의 Voices in Modern, 두비 브라더즈의 What a Fool Believes로 총 6곡을 선정한 바 있다.

5.1. 비틀즈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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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라이벌 폴 매카트니와 함께 선 노년의 브라이언 윌슨[16]
1960년대브리티시 인베이전을 발판삼아 영국의 무수한 실력파 밴드들이 미국의 차트를 그야말로 '쓸어버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록밴드로서 살아남아 인기를 유지하던 것은 거의 비치 보이스가 유일하다시피 했고, 그렇기에 영국 음악계의 최강자였던 비틀즈와 미국의 비치 보이스는 대서양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주시하게 되었는데, 특히 폴 매카트니와 브라이언 윌슨이 그러했다. 미국이 로큰롤과 팝음악의 원조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브라이언 윌슨은 영국의 뮤지션들이 건너와 열풍을 일으키는 걸 처음엔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곧 음악적인 면에선 차차 매료되고 자극을 받게된다. 비치 보이스의 1965년도 앨범인 Beach Boys' Party!에서 비틀즈의 3곡[17]을 커버[18]하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는 조지 마틴으로부터 '당시 가장 아방가르드했던 뮤지션'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고 있었고, 브라이언 윌슨 또한 계속된 서핑/여자/자동차 이야기에 증오에 가까운 염증을 느끼며 신, 영혼과 같은 영적이고 신비로운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차에 비틀즈의 Rubber Soul이 발매된다. 이 앨범을 처음 들은 브라이언은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고, 곧이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앨범'''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 Pet Sounds를 들은 폴 매카트니는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고, 여기에서 받은 영향이 차기작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에 나타나게 된다.
다시말해, 브라이언 윌슨에게 있어서 폴 매카트니를 비롯한 비틀즈는 한편으론 그 큰 성공이 샘나는 존재였지만 음악적인 면에선 윌슨에게 늘 큰 영향과 자극을 줬던 존재였다. 특히 비틀즈의 Rubber Soul 앨범은 브라이언 윌슨이 인생의 레코드 중 하나로 꼽을 만큼 큰 영향을 미친 앨범이었다. 이 러버 소울의 영향으로 만든 앨범이 Pet Sounds고 이 펫 사운즈 앨범은 다시 비틀즈의 페퍼상사 앨범에 영향을 주게 된다. 즉 비치 보이즈와 비틀즈는 (더 정확히 말하면 브라이언 윌슨과 폴 매카트니는) 서로에게 창조적인 영향을 준 긍정적인 라이벌 관계의 대표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브라이언 윌슨은 최근의 인터뷰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폴 매카트니를 꼽았으며, 폴 매카트니 또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God Only Knows를 꼽은 바 있다.
대부분의 선의의 라이벌들이 그러하듯, 사적으로도 폴 매카트니와 브라이언 윌슨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브라이언의 생일 잔치에 폴이 아내 린다, 딸 스텔라를 데려와 함께 놀던 모습이 영상 자료로 남아 있으며 이후 서로의 솔로 앨범에서 함께하기도 했다. 현재도 서로 다른 대륙에 살고 있으면서도 폴 매카트니가 미국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브라이언 윌슨이 캘리포니아 자택에 초대하곤 해서 같이 어울리곤 한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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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 앤 머시에서 묘사된 브라이언 윌슨의 모습들(우측 위: 폴 다노, 우측 아래: 존 쿠삭)
2015년 6월, 그의 대표곡에서 제목을 딴 '''러브 앤 머시(Love & Mercy)'''라는 제목의 전기 영화가 개봉했다. 폴 다노가 젊은 시절의 브라이언을, 존 쿠삭이 중년의 브라이언을 연기하였으며 주로 펫 사운즈 레코딩부터 SMiLE 앨범이 엎어지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유진 랜디와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평론가들로부터 평이 굉장히 좋으며 브라이언 본인도 영화를 칭찬하였다.
브라이언의 딸인 카니 윌슨, 웬디 윌슨은 마마스 앤 파파스 멤버의 딸과 함께 여성 보컬 트리오 윌슨 필립스를 결성해 한때 인기를 끌었다.
2012년 연재되기 시작한 마블 나우 호크아이에서 브라이언 윌슨을 오마주한 윌슨 브라이슨이라는 가수가 잠시 등장했다. 형제끼리 뮤지션을 시작해 60년대에 비틀즈와 비견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점부터 몇십년 동안 발매되지 못한 미공개곡이 있다는 점까지 빼닮았다. 케이트 비숍이 브라이슨의 저택에 잠입할때 Wouldn't It Be Nice를 흥얼거리는 걸로 오마주 확정.

[1] Be My Baby와 더불어 브라이이언이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곡이라고 수시로 언급하는 곡이다.[2] 그래서 The Beach Boys Today!부터 Wild Honey까지는 모노 믹스로만 제작되어 있다.[3] 머리 윌슨과의 불화로 인해 얼마 안 가 알 자딘으로 교체된다.[4] 베이시스트로서의 실력도 꽤나 인정받는 편이다. 폴 매카트니는 Many Years from Now(비틀즈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멜로딕한 베이스 선율을 연주하던 베이시스트는 모타운의 제임스 제이머슨(모타운 소속의 세션맨 그룹 '펑크 브라더스(Funk Brothers)'의 베이시스트), 나, 그리고 브라이언 윌슨 뿐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5] 이는 서프 록 시절에도 해당된다.[6] 주로 작사는 마이크 러브가, 작곡은 브라이언 윌슨이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레논-매카트니 혹은 재거-리처드와는 차별되는 방식인데, 이런 방식이었기에 가사를 다른 방향으로 써 보려던 브라이언과 마이크 러브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7] 이 때 음악 창작에 대한 강박증이 심화되었다.[8] 음악적 성과에의 강박은 사실 데뷔 초부터 여실히 드러나기는 했다. 일례로 어느 잡지에서 막 데뷔한 비치 보이스 멤버들을 상대로 이상형, 취미 등을 설문한 적이 있는데 다른 멤버들이 구구절절히 자신의 취향을 서술할 때 오직 브라이언만은 '이상형 : 여자 만날 시간 없음, 취미 : 곡 쓰기, 악기 연습하기'라고 했다.[9] 후술할 멜린다 레드베터 역시 브라이언의 정신 상태와 유진 랜디의 깽판에 힘들어하다가 브라이언을 한 번 떠났을 정도였다. 하물며 한창 성장중인 딸들을 키우고 있던 마릴린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압박였을 것이다.[10] 마릴린 본인도 뮤지션이였고 비치 보이스 앨범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브라이언의 재능을 알아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11] 브라이언의 솔로 곡 몇 개에 그의 이름이 작곡가로 올라 있기도 했으나, 이후 지워졌다.[12] 브라이언 윌슨의 전기 영화 러브 앤 머시의 감독 빌 폴래드는 유진 랜디에 대해 '너무 동기가 단순했기에 오히려 묘사하기 힘들었다'고 표했다. 그야말로 '''돈과 명성'''만을 노리고 브라이언에게 접근했던 것.[13] 다만 SMiLE 앨범의 완성 포기를 선언한 것은 스스로의 정신 상태와 주변의 악재를 견디지 못한 브라이언 윌슨 본인이다.[14] 이 곡은 한 장르에 로큰롤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곡으로써 역사성을 인정받으며, 당시로서는 거친 느낌의 곡이어서 폭주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15] '''Carl and the Passions - So Tough''' 앨범 수록곡.[16] 참고로 둘은 1942년생으로 동갑이며 생일도 겨우 3일 차이난다. 게다가 밴드 내 포지션도 베이시스트. [17] 'Tell Me Why',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 'I Should Have Known Better'. 그리고 Ticket to Ride도 녹음했으나 앨범에 수록되진 않았다.[18] 콩글리쉬로는 리메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