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스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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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스타 스튜디오에서의 젊은 시절
2009년 5월 29일 최종 선고 당시
1. 개요
2. 생애
2.1. 사생활 및 살인 사건
2.2. 수감 및 사망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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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hil Spector[1]
(1939.12.26 ~ 2021.1.17)
월 오브 사운드를 창시한 미국의 음반 프로듀서이자 송라이터. '''천재 프로듀서'''와 '''살인마'''라는 양면적인 면을 가진 인물이다.

2. 생애


1939년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10살 때 아버지의 자살 이후 LA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대 말 고등학교를 다니던 도중 테디 베이즈라는 그룹을 결성해 음악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테디 베어즈는 필 스펙터가 작곡한 싱글 'To Know Him is to Love Him'[2][3] 을 히트시킨 뒤 해체되었고, 필 스펙터는 프로듀서/작곡가로 전업했다.
1960년 초반, 여러 뮤지션들의 프로듀서/작곡가로 작업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한 그는 녹음 방식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창시하게 된다. '월 오브 사운드'는 다양한 소리들을 쌓아 풍성한 하나의 소리로 창출하는 음향 기법을 말하는데, 그는 이를 통해 기존의 단순한 팝과는 다른 소리를 창출해냈다. 이 방식은 후일 60년대 록 명반들을 비롯해 지금의 음향 기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방식을 자신의 레코드사인 필리 레코드에 소속된 뮤지션들에게 써먹어 큰 히트를 기록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로네츠[4]다. 로네츠를 비롯하여 다수의 걸그룹들과 뮤지션들을 프로듀싱하며 무수한 히트곡을 내놓았으며, 그 중 다수는 필 스펙터가 직접 작곡하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직전, 미국에서 잠깐이지만 걸그룹 붐이 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60년대 중반이 되면서 그의 방식은 점점 구식으로 취급받게 되고, 결국 1966년 그는 결혼과 더불어 일시적으로 은퇴하게 된다.
1969년 복귀한 그는 예전 명성 때문에 비틀즈 쪽에 관여하게 되는데, 그가 처음으로 손 댄 비틀즈 계열 음반인 Let It Be폴 매카트니의 반발을 샀지만 존 레논조지 해리슨의 호감을 사게 된다. 비틀즈 해체 이후 그는 그들의 솔로 앨범 프로듀싱을 담당했다. 다만 존 레논 솔로 작업들은 이게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인가, 싶을 정도로 거칠고 날 것의 사운드를 들려줬다. 그 외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등 쟁쟁한 뮤지션들의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전의 카리스마적 행보 보다는 못해도 이렇게 1970년대도 그럭저럭 자기 경력을 이어가나 싶었지만, 1973년 존 레논의 'Rock 'n' Roll' 제작 도중 레논과 마찰이 생겨 퇴출당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이혼과 교통사고까지 겹치게 되자 일시적인 휴지 기간을 가지게 된다. 다시 복귀한 1977년 레너드 코헨과 1980년 라몬즈의 앨범 프로듀서로 초빙되었다. 또한 이 시절 오노 요코의 앨범에도 참여했다.
특히 라몬즈의 음악 활동에 관여하면서 라몬즈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고, 필 스펙터가 작곡/프로듀싱한 걸그룹들의 두왑 곡들을 커버하는 등 (Baby, I Love You) 넓어진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에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으나 현재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라몬즈 역시 인터뷰에서 스펙터와의 불화를 폭로하는 등 [5] 쉽지 않았던 작업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이렇다 할 별다른 재기를 하지 못하고, 잠수 상태에 있다가 2003년 스타세일러의 Silence is Easy 작업에 참여했으나, 실제로 밴드와 함께한 곡은 겨우 두 곡에 불과했다. 히트치기는 했지만.

2.1. 사생활 및 살인 사건


위에서도 언급되긴 하지만, 사생활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었다. 우선 두번째 부인인 베로니카 베넷과는 간통으로 시작했으며 [6],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 심지어 베넷은 보다못해 어머니 도움으로 집에서 도망쳤고, 이혼 소송 도중 스펙터는 베넷을 살인청부업자에게 의뢰해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했다. 결국 베넷은 수입과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다. 그 뒤로 결혼은 하지 않았다가, 26살 여성과 세번째 결혼했다가 2016년 이혼했다.
친자식 이외에도 입양아 (아들)도 있었는데, 쓰레기같은 짓을 저지른 막장부모였다. 학대뿐만이 아니라, 스펙터의 여자친구랑 섹스를 해야했다고 양자들이 폭로하기도 했다. 인성과 관련이 없지만 친자식 중 외아들은 9살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2003년 스타세일러 작업과 동시에 터진 라나 클락슨 살해 사건은 필 스펙터를 영원히 매장당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미국판 조형기 사건. 라나 클락슨[7]이라는 여배우하고 자신의 집에서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그녀를 살해했는데, 문제는 그 뒤 자살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는 바람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8] 사실 그 전부터 음악계에서 성격이 사이코[9]같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기정사실화되었다. 결국 타살 혐의가 밝혀지면서 그는 체포되었다.
2009년 종신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2025년 이후 가석방이 가능하지만 나이를 생각해보면 살아서 나올리는 만무하다. 대중 음악계 최대의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게 생겼다.
로만 폴란스키의 아동 강간과 더불어, 훌륭한 예술가가 반드시 훌륭한 인격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사람의 말년이 이렇게 추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씁쓸한 사례다. 사실 예전에 스펙터의 전성기인 60년대 초에 그에게 아이디어 절도범이라고 비난을 할 정도로 경쟁 관계에 있던 조 믹(Joe Meek)[10]도 비슷한 정신병을 앓았으며, 1967년에 자기가 세를 들던 집주인을 총으로 사살하고 자살을 했다.

2.2. 수감 및 사망


수감 이후 감옥 안에서 잘 지낸다고 알려졌다. 매년마다 찍는 머그샷 사진이 하나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나왔던 추측. 다만 머리가 풍성했던 위 사진과는 달리 머리가 죄다 빠졌다. 내심 2025년 이후부터 가능할 가석방을 노릴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건강 상태는 수감 생활로 나빠졌는지 2013년부터 교도소 의료 시설에 수감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더니 2014년 후두유두종으로 (왜곡된 의미가 아닌) 실어증에 걸렸다고 알려졌다.
2020년 12월 코로나19에 걸렸다고 밝혀졌으며, 결국 현지 시각으로 2021년 1월 17일 사망했다. 향년 81세. 부검 결과 사인 자체는 자연사나, 스펙터의 딸은 코로나19 합병증이 원인이었을거라고 추측했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타계 당시 음악계 반응은 재능은 안타깝지만 애도는 안/못 하겠다로 요약할 수 있다. 배철수조차 타계 이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은 잘 했지만 삶이 쓰레기라서 추모는 못하겠다"라고 디스했을 정도. 그레이엄 콕슨은 트위터에 추도 트윗으로 스펙터의 사진을 올렸다가 격한 반발을 받고 본인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삭제했다. 스펙터가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3. 평가


범죄나 성격과는 별개로 그의 월 오브 사운드는 수많은 음향 기술자들과 후배 뮤지션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특히 비치 보이스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 지금의 팝 음악 역시 월 오브 사운드의 후계자들이라 해도 무방하다.[11] '스튜디오를 실험실 삼아 악곡에 보다 풍성한 소리를 담아내는' 음악가 (혹은 프로듀서)의 시초이며, 이후 비치 보이스나 비틀즈가 그것을 이어받았다고 보면 좋다.
비록 프로듀서로서 뿐만이 아니라 'Da Doo Ron Ron[12]', 'Be My Baby', 'You've Lost That Lovin' Feelin'[13]', 'River Deep, Mountain High' 등의 명곡을 작곡한 송라이터로서도 재능을 발휘한, 여러모로 대중 음악계의 살아있던 전설이다. '''10대들의 타이쿤'''이라는 칭호까지 있었을 정도.
사실 전통적인 뮤지션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14], 그 천재적인 프로듀싱/송라이팅 감각으로 록 음악사에 이름을 올린 조금 독특한 케이스다.

[1] 본명은 하비 필립 스펙터(Harvey Philip Spector).[2] 이후 낸시 시나트라도 커버하게 되는 곡이다.[3] 비틀즈도 이 곡을 커버했는데, 제목과 가사를 Her로 바꿔 불렀다.[4] 심지어 해체 이후 스펙터는 로네츠 리더와 결혼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게 누가봐도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아래에 두려는 꼼수가 보이는 행위였으며, 정확히는 믹 재거가 로네츠의 리더 베로니카 베넷에게 너무 추근거려서 필 스펙터가 허겁지겁 결혼을 서두른 결과였다. 베로니카 베넷에 따르면 필 스펙터가 꾸준히 시민 케인을 보여주며 "나 없인 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압박했다고 한다.[5] 강박적으로 리테이크를 내서 멤버들을 지치게 만든데다, 디디와 조니는 스펙터가 총 들고 협박했다고 밝혔다. 마키는 이들에 비해 견딜만 했는지 (본인은 같은 뉴욕 출신이라 이해했다고 코멘트.) 협박 건에 대해 정반대의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작업 스타일이 너무 달랐다는건 인정했다.[6] 첫번째 부인 아네트 메라도 걸그룹 멤버였는데, 스펙터의 레이블 명의도 이 사람에게서 따왔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명이지만 1968년 베넷과 재혼한걸 보면 이혼한건 확실하다.[7] 스카페이스에서 혀를 낼름낼름거리는 매니의 뺨을 친 여자(...), 리치몬드 대소동의 미세스 바르가스랑, 소드 앤 소서리 장르 영화에서 좀 알려져 있었다. 그외에는 TV와 B급 영화에서 활동했던 배우. 스펙터하고는 일하고 있던 라이브하우스에서 만났다고 알려졌는데, 실제로 30대부터 배우 커리어가 잘 안 풀려서 사망 당시 라이브하우스에서 투잡을 뛰었다고 한다.[8] 총을 들고 집을 나서면서 "세상에... 내가 그녈 쏘다니..."라면서 나갔다고 가정부와 운전사가 증언했다. 한마디로 안하느니 만도 못한 거짓말을 한 셈. 총에 스펙터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119 신고 당시 녹음 증거랑 이전부터 총 들고 여자들에게 협박했다는 증언이 겹쳐서 확정되었다. 여기다 스펙터가 변론으로 내세운 반박 주장도 '''클락슨이 자살했다'''이라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9] 실제로도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10] 영국 최초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인 Telstar(뮤즈의 앨범 Black Holes and Revelations의 Knights Of Cydonia 내용 참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락계의 괴인 스크리밍 로드 서치의 대표곡 잭 더 리퍼도 그가 프로듀싱한 곡이다.[11] 비치 보이즈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뮤지션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바로 필 스펙터와 폴 매카트니다.[12] 걸그룹 크리스탈스 (The Crystals)의 곡[13] 'Unchained Melody' 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라이쳐스 브라더스 (The Righteous Brothers)의 곡[14] 한마디로 '''자신만의 솔로 작업/앨범'''이 없다. 그의 디스코그래피 크레딧 대부분은 철저히 프로듀서/작곡자로 채워져 있다.